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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의 개념화

...(기존의 반성폭력 운동은) 성폭력을 법 담론 안의 범죄로 입증해야 했고 성폭력 사건을 '폭력행위', '사실'로 가시화시키는 데 역점을 두면서 여성의 특수한 맥락과 경험을 소홀히 하게 된다. 피해 여성의 다양한 목소리의 의미를 해석하기보다 다음 단계인 치유와 회복, 법적절차에서의 한계와 싸우는데 주력한다. 주관적인 피해자의 관점이라서 성폭력을 주장하는 여성을 신뢰할 수 없다는 남성 중심적 지배담론에 대한 부담 때문에 반성폭력운동 측은 본의 아니게 지배담론의 흐름을 비판하면서도 '폭력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를 가시화시키는데 주력한 것이다. 또한 성폭력 고소에 대한 지배권력 측의 명예훼손, 역고소 등의 반격은 반성폭력운동단체로 하여금 더더욱 성폭력이 성관계가 아닌 '강간/성폭력'임을 입증하게 만들었다. 왜 그것이 여성에게 성폭력일수밖에 없는가를 분석하여 성폭력이 구성된다는 것을 보이기보다, 그 사실(fact)의 존재함을 강조(증명)해야만 했다.

....특히 강간을 성관계로 만들 수 있는 남성권력 앞에서 폭력으로서의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주체를 '투명하게' 만들수밖에 없었다. 남성의 공격으로서의 폭력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폭력의 대상을 무력하게 만들수록 그 효과는 커진다.....따라서 반성폭력 운동이 전제한 여성은 동질적인 피해자 여성이었다.

 

...모든 여성이 잠재적 피해자로 구성된다. 그래서 성적 쾌락을 추구한 여성은 피해자일수 없으며 피해여성은 성적주체일수 없는 이분화된 논리속에 여성들은 갇히게 된다.

 

...성적자기결정권을 주장하는 자유주의 이론에서의 강간에 대한 설명은..여성을 개인으로 간주하여 그녀의 성관계 안할 권리를 부정했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성별권력을 인정하지 않으며 개별적인 인간으로서의 남녀는 자연적인 성 역할을 부여받은 자율적인 존재라고 가정하는 지배담론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법 담론은 강간과 성관계의 구분을 '동의'의 문제로 놓고 몸의 결정권에 의미를 부여하는 듯 하나 여성과 남성의 관계, 특히 섹슈얼리티와 성별 권력의 문제를 간과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동의의 문제로만 판단할 수 없는, 여성의 특수한 맥락적인 요소를 전혀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성폭력/강간은 몰성적인 개인간의 권리 침해의 문제로 환원된다.

 

....여성의 삶의 맥락에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특별히 거부할 필요가 없는 상대방의 성적 요구에 대해 셔성들은 다양한 의미로서 그 행위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다른 계기로 인해 그 관계의 변화가 생겼을 때 그동안 참았던 여러 행위에 성폭력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관계안의 고통을 언어화하는 순간이다. 이처럼 여성들이 성폭력을 말하는 경우는 여성의 맥락에 따라 다르다. 또한 그 의미도 다를 수 있다.

 

....여성들이 성폭력을 문제화하는 것은 자율적이며 관계적인 여성됨, 성적인 통합성, 자존감의 침해를 언어화하는 것이다. 성별화된 관습에 의한 불편한/소통되지 않는/대상화된 느낌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자존감 침해는 없어진 것을 발견할 때의 느낌처럼 즉각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여성에게 부착된/여성이 소유한 섹슈얼리티를 도둑질한 것, 그 결과가 성폭력의 피해가 아니다. 피해란 성별, 나이, 경제적인 요소 등과 어린 시절의 성교육, 성규범, 여성에 대한 가치 등으로 구성되는 주체가 그 행위의 지속여부, 그 남자와의 관계, 그 행위로 인한 수혜여부 등의 현재의 조건을 협상해서 구성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성폭력이 여성들에게 큰 피해/트라우마를 가져준다는 전제는 그렇지 않은 여성들에게 자신의 경험이 성폭력인가 아닌가의 질문을 가져오게 한다. 그것과는 다른 경험을 하는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면서 모든 성폭력 경험자는 피해자화된다...이것은 결국 성폭력의 이미지를 고정시키고 심각한 죽음과 같은 고통과 피해를 강조하면서, 여성의 입장에서 고통의 피해가 없거나 쾌락이 존재하거나 아직도 상대방을 사랑하거나 등등 '성관계 같아 보이는' 성폭력은 성폭력으로 문제화하기에 어렵게 했다....그러나 성폭력을 말하는 여성들은 이렇게 단일한 피해자가 아니며 고통받는 피해자로서만 살아가지 않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떤 행위성(자율성, 선택, 권력, 공모, 협상, 저항 등)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기보다 오히려 성적 위계의 맥락에 다양한 여성의 행위성을 새롭게 위치시키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 여성의 제한된 위치와 조건 안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 자유롭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위치가 어떤 선택도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그렇게 한계적이거나 제한적이지는 않다. 물론 여성 행위성의 인정이나 다양한 맥락의 제시가 여성의 고통을 드러내는데 역효과라고 말할 수 있다. 고통이 적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인정되지 않는, 다양한 방식으로 말해지는 여성의 고통과 그 고통에 대한 그 관계 내의 여성의 저항방식인 공모, 협상 때로는 무시 등의 행위성은 역의 개념이 아니다.

 

...인식주체로서의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며 여성이 그렇게 해석하는 판단의 기준을 드러낼 때, 남성에 의해 재현되는 하나의 여성성이 아닌 여성 주체성의 다양한 고통들이 드러날 것이며 이는 성폭력 개념을 다시 구성할 수 있게 한다.

 

....이 지점에 성폭력 피해 개념의 어려움이 있다. 여성들이 남성들의 요구에 투명하게, 행위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위치하고 있다면 반성폭력 운동은 정말로 쉬울 것이다.

 

 

 변혜정(2004), "성폭력 개념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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