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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우편적.. 자끄 데리다에 대해서.. (031)

그러나 우리들은, 데리다에 관해서 또 다른 물음, '어째서 데리다는 그런 기묘한 텍스트를 썼는가'라는 의문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전술한 것과 같이 후기의 그는, 중층적인 지구(地口)와 암연의 인용으로 가득 찬, 소위 '間 텍스트성'을 문자 그대로 실천한 것과 같은 텍스트를 많이 쓰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가라타니가 인용했던 '음성과 현상'적인 철학 비판, 즉 전기의 형식적인 작업 후에 출현하고 있다. 우리들은 여기에 주목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주의해 둔다. 이미 얘기한 것처럼 그 변화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데리다는 형식화의 끝에서 ‘텍스트의 장난’을 보았다고, 그리고 철학의 초월론적 프로그램을 해체해서 그것을 ‘실천’으로 해소시켜 버렸다고 생각되고 있다. 괴델적 결정불가능성의 폭로 이후에, ‘철학’에는 이제 텍스트 공간을 헤엄쳐 나가는 것 밖에는 남아있지 않다. 만약 이 이해가 올바르다고 하면, 우리들은 더 이상 데리다를 읽을 필요는 없다. 보다 정확하게는 읽어야할만한 것이 없다. 텍스트 공간 그 자체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間 텍스트성’이나 ‘저자성(著者性)의 탈구축’이라고 하는 술어에 따른 그 신비화는, 현실적으로는, 이런저런 세속적 욕망이나 이데올로기를 감추는 것으로써밖에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데리다의 텍스트는 그런 역할과 무관하지는 않았다. 70년대에 시작한 그의 ‘기묘한’ 텍스트 실천은, 이미 앞 장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한편으로는 많은 독자가 꺼리도록 만들었고, 다른 편으로는 데리다 특유의 스타일과 어휘에 매료된 연구자집단, 소위 ‘데리다 파’를 강력히 조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데리다 파의 제도적 영야(領野)에 있어서 ‘탈구축적인’ 작업 자체는 대량으로 생산되지만, 어떤 텍스트를 탈구축하고 어떤 텍스트를 탈구축하지 않는, 그 선택에 깃든 욕망을 문제로 삼는 일은 거의 없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들은, 데리다가 유럽의 전통적 텍스트만을 읽는 것은 어째서인가, 라고 굳이 소박하게 물었던 사이드가 완전히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책이 이하에서 읽으려고 시도하는 데리다는, 그런 데리다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또 그것은, 가라타니가 읽었던 데리다와도 다르다. 앞 장의 말미에서 우리들은 2가지의 의문을 제시했다. 되풀이 해보면 그것은, (i) 데리다가 제기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독특한 고유명론, 즉 ‘유령’론이라는 함은 어떤 것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그리고 (ii) 그 고유명을 파악하는 방법은 데리다 자신의 텍스트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가, 라는 두 가지의 물음이었다. 본 장에서는 후기 데리다의 작업을 형식적으로 조절하는 것으로써, 그 물음들에 답하기 위한 이론적 지형을 정리한다. 다시 한 번 확인해두지만, 여기서 ‘기묘함’이라고 불리는 데리다의 특징은, 결코 그 개인의 철학적 자질이나 시대적 배경(텔 켈 파의 영향 등)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오히려, 거기서 문제로 되고 있는 것은 매우 이론적인 차이라고 생각한다. 후기의 데리다는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괴델=가라타니적인 ‘형식화’에 의해서는 파악되지 않는 또 다른 구조, 70년대의 그가 때때로 ‘긴밀 구조 structure’라고 부르는 것들을 다루고 있다.(2) 그리고 그가 생산했던 텍스트의 성질은, 그 구조로부터 역시 이론적으로 요청된다고 추측된다. 우리들은 이후 다시 가라타니를 다루게 될 것이다. 형식화의 제 문제가 가라타니에게 ‘전회(轉回)’를 강요했다고 한다면, 데리다에게는 무엇을 강요한 것인가 --- 본 장의 문제를 극히 단순히 그렇게 정식화한다고 해도, 그렇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2) cf. ex. La vérité en peinture, Flammarion (collection ⟪Champs⟫), 1978, p.388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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