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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대리운전에 짧은 보고서

 

대리운전에 짧은 보고서

- 대구지방법원 2008. 5. 9. 2007가단108286 채무부존재확인 -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영국 경험론의 ‘본좌’다. 그의 유명한 한 마디. ‘푸딩을 증명하는 방법은 푸딩을 먹어보는 것이다’. 이번 사건, ‘대리운전기사’의 근로자성과 관련된 것인데. 이 참에 ‘르뽀형’ 판례평석을 시도했다. 우선 현장으로 직접 출동. 대리운전 불러서 아현동에서 부천까지 가봤다. 요금은 2만원. 약 45분가량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하여 차문을 열고 내리는 순간, 결론도 내려졌다. 역시나 푸딩의 맛은 달지 않았다.


사건의 얼개

이 사건은 대리운전회사에서 대리운전기사로 ‘일해 온’ 사람의 퇴직금과 관련된 것이다. 근데 소송을 제기한 측은 회사다. 퇴직금을 지급해달라는 대리운전기사에 대해 되려 회사는 자신에게 퇴직금 채무가 없다는 소송을 제기했다. 회사측 승소. 퇴직금 안줘도 됨. 허나 뒤끝이 남았다. 확인차, 현장 투입. 시동걸고 출발.


대리운전, 실태는 이렇다

대리운전, 신종업종이라지만 나름 족보 있다. 대리운전의 원로급들은 최초로 대리운전이 등장하게 된 시기를 1980년대로 본다. 당시 서울 강남의 고급유흥업소들이 고객관리차원에서 대리운전을 시작했단다. 부유층 양주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자동차 보급이 늘어나고 음주단속이 강화되면서 1998년 기점으로 부흥의 쓰나미가 몰아치기 시작한다. 택시의 빈틈을 비집고 ‘신종사업’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후 시장규모도 점점 커져 현재까지 대리운전 업계의 ‘보이지 않는 손’이 주무르고 있는 돈은 약 3조원정도, 그 종사자는 대략 1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이 중 전업 대리운전기사는 53%정도이고, 나머지는 부업으로 핸들을 잡고 있다. 주 연령은 약 43%가 30-40대. 여기까지 인터넷에서 모셔온 글.

다음은 업계 종사자의 목소리. 대리운전의 주된 고객은 만취고객. 허나 장애우나 환자들의 이송을 위한 대리운전도 필요하다는 지적은 신선했다. 그러나 여전히 대리운전, 대중적으로 애호하기는 불편한 부분이 있다. 최근 ‘혜진이․예슬이 사건’의 범인이 대리운전기사라고 밝혀져 주변의 시선, 곱지는 않단다. 여하간 패스. 대리운전의 특징은 야간근무에, 주말이나 휴일이 대목이라는 점. 여기서부터는 스피드 일문일답.

하루에 몇 건? 보통 3건. 콜수수료? 20%. 보험? 비싸고 가입해도 혜택 못 받는다. 사고처리? 다 내 책임. 노조? 못 만든다. 야간수당? 장난치나. 집에는? 지하철이나 택시 탄다. 산재는? 되면 고맙지. 휴일? 두 번 쉰다. 월수입? 150만원 안되고, 지난달 110만원. 퇴직금? 없다. 불합리한 점은? 보증금. 또? 회사 나갈 때 제때 보증금을 안준다. 투잡인가? 전업이다. 기름값이 오르는데? 우린 기름 안든다(아, 맞다!).


근로자성 판단, 무엇이 문제인가

특수한 형태로 근로를 제공하고 있는 일군의 종사자들(‘특수고용직 종사자’)에 대한 ‘근로자성’ 여부가 바로 이 사건의 쟁점이다. 근로자성과 관련된 판례들은 수북하다. 근데 도움, 안된다. 노동시장은 계속 변모하고 있지만, 그에 대응한 법원의 근로자성 판단기준은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 판결문에도 언급되어 있는, 근로자를 판단하는 기준(대략 큰 카테고리로 10개 정도), 법원에게는 금과옥조다. 자판기처럼 저마다 똑같은 판결을 뱉어나고 있나니. 사실 법원의 기준이 넌센스인 경우도 있다. 가령 사회보험의 가입여부가 기준이 되는 것이 그렇다. 산재법이나 고용보험법이 당연히 근로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인데, 애시당초 대리운전 기사에게는 적용될 여지는 ‘없음’이다.

외형적으로 사용자와 근로자의 ‘종속관계’가 흐릿하다고 해서, 근로자다 아니다라고 명암을 가르는 것은 타당치 않다. 게다가 근로자를 옭아맨 목줄과 밥줄이 걸린 마당에 법원의 판단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이 사건도 마찬가지. 대리운전기사에게는 근로자성을 인정하지 않으나 대리운전과 비슷한 근로형태인 ‘퀵서비스 근로자’에게는 다른 하급심에서 근로자성을 인정한 바 있다(서울행법 2007.10.23. 2006구단10552.).

더군다나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하는 것은 법원의 주특기 아닌가. 그러나 제대로 종합이 안되거나 어떤 부분이 고려되고 있지 않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회사의 임원’을 근로자라고 판단하는데는 주저함이 없으면서(대판 2005.5.27. 2005두524), 특수고용직의 경우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건, 다시 생각해 볼 부분이다. 학계에서도 판례의 태도를 지지하는 견해는 거의 없다. 이는 현재의 판단기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퀵서비스 판결의 시사점

앞서 소개한 ‘퀵서비스 판결’에서 주목할 점은 이 사건과 사실관계면에서 유사한 측면이 많다는 데 있다. 이 사건 법원에서는 자신의 비용으로 교통사고 보험에 가입하는 점, 출퇴근이 자유롭다는 점, 수수료가 자동으로 출금되는 방법으로 수익을 배분한 점, 취업규칙 등이 적용되지 않아 징계처분을 할 수 없다는 점 등을 기초로 근로자성을 부정하였다. 한 편 퀵서비스 판결에서는 근무시간과 근무일이 특별히 정해져있지 않은 점, 직접적인 보수를 지급받지 않은 점,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다는 점, 오토바이가 근로자의 소유이지만 배송지시를 따르지 않아도 정해진 제재가 없다는 점, 4대 보험가입이 되어 있지 않은 점 등을 인정하면서도 근로자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결국 ‘종속적 관계’에서 노무를 제공하였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판단을 내린 이유는 ‘노동관계법에 의해 보호를 받을 필요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법에 의한 보호 필요성이라는 것이 구체적인 기준은 아니다. 그러나 이건 노동법을 적용하고 해석하는데 따른 기본 포지션이다. 분명 특수고용직 종사자들에게 노동법을 적용한다면 기업들의 볼멘소리, 쌍메아리로 들린다. 왜, 여지껏 싸고 수월케 써왔으니깐. 그러나 한 산업의 균형적이고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서라면 이제는 쌍팔년도식은 안된다. 일방의 희생을 강요한다면, 양초공장 불티난다. 행여 규제완화, 이런 말 마시라. 당연히 보호할 대상을 보호하는 것은 규제가 아니라 ‘사회적 정의’다. 대안은 널려있다. 주워 담기만 하면 된다. 아니 주워 담을 생각부터 하자.


너 아니어도 쓸 사람 많아

근로자들이 쉽게 이직을 생각한다면 그 직종의 사회적 지위는 낮다. 앞서 대리운전기사도 기회가 되면 언제든 다른 일을 고려중이라고 했다. 질 낮은 직장으로 전락되면 될수록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받기도 힘들다. 이러한 사정 아래서 근로자성을 인정하라고, 노조를 설립하겠다고 하면, 사용자들은 ‘너 아니어도 쓸 사람 많아’라고 되받아칠 것이다. 그렇다. 신규인력은 계속 빈자리를 대체하고 있으니깐 말이다. 하지만 좋은 근로조건이 보장된 직장은 그만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고, 그것은 곧 기업의 이익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해보라. 법원 또한 근로자라고 인정하는 일에 경영계 눈치보며 쫄지 마시라. 오히려 근로자들이 늘어나면 국가차원에서 이롭다. 왜? 세원(稅源), 노출되고 소비가 늘어나니깐. 그럼에도 현실은 근로자로서 살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근로자가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답답하다. CEO라고 행세하시는 이 땅의 최고지도자께서 국민들을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직원으로 여기시면서도 정작 ‘근로자성’은 어지간히도 인정되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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