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폴 벤젤의 「머나먼 아공당주」를 원작으로 한 <남아있는 나날들>을 보고 극장을 나오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온통 마지막 장면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지금 여기, 함께 살기, 존중과 이해, 나이 든다는 것, 정신의 유지, 육체의 노화, 이렇게 서로 연관 없는 것만 같은 말들이 이리저리 휘젓고 다녔던 것이다.

 

젊은 시절 아공당주라는 도시에서 금속노동자로 살던 이들 부부는 은퇴 후 한적한 시골로 이사를 온다. 그러나 이웃들과의 교류도 없는 이들에게는 전자제품 외판원마저 반가운 손님이다. 남편 조르주는 아직 혈기왕성한 자신을 은퇴시키고 퇴물 취급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를 잘 조절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에만 머무르며 아내와 이야기도 잘 나누지 않다가 뜬금없이 잠자리를 요구하고는 마리가 거절하자 혼자 토라진다. 그들의 딸은 부모에게 자주 찾아오지도 않고 연락도 뜸하여 부부는 종종 서운한 속내를 비친다. 결국, 연극에서 부인 마리는 죽어서야 남편의 따스한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다른 인생을 살던 누군가와 한 집에서 함께 산다는 것이 때론 고독하고 외로운 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존중하고 ‘함께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혹은 상대방의 처지에서 그를 배려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도 힘든 일인가를.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어쩌면 그 상대가 죽어서야 이루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 사람들이 죽고 또 죽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혼자 살다가 혼자 죽어가는 노인들은 물론이고 생활고에 시달리던 가수나 작가, 영화인들이, 불이 난 집에서 움직이지 못한 장애인들이, 직장에서 해고된 사람들이, 오갈 데 없어 항거하는 철거민들이 지난 몇 해 사이에 줄줄이 죽어가는 데도 그것을 제대로 보도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려 애쓰는 언론도, 진심으로 깊이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도 드물다. 그들의 삶과 죽음이 우리의 일이 아니라 여기기 때문이거나, 아름답지 못한 현실 사회의 일면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리라.

 

게다가 요즘은 오래되고 낡은 것은 허물어 없애고 깨끗하고 번듯한 것으로 갈아치우는 시대가 아닌가. 이제는 누구도 오래된 가전제품을 고쳐 쓰지 않을뿐더러 구멍 난 양말도 깁지 않는다. 그냥 버리고 새로 사면 그만이니까. 문제는 이런 소비사회에서 소외되는 것이 오래된 물건이나 낡은 구조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에 있다. 조르주와 마리가 시골에서 보내는 일상에서 발견되는 소외, 그 때문에 두 부부가 느낀 슬픔과 아픔을 관객들에게 전하려는 연출과 배우의 노력이 충분히 느껴졌다.

 

나는 예전부터 공포영화나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영화들을 잘 보지 못한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데 왜 그렇게 힘든 것을 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아름답고 예쁜 이야기를 보고 듣고 기쁨을 누리는 것이 궁극적으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목적이 될 수도 있지만, 인간의 삶이나 역사 속에 아름다움만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많은 음악과 영화, 문학에서 수없이 다루며 아름다움으로 포장한 사랑이라는 것도 사실은 얼마간의 아름다움과 대부분의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라 성장하면서 갖가지 고통과 실패를 경험하고 밑바닥까지 내몰렸다가 이를 극복하고 이겨내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끝없이 반복하며 사람으로 완성되어 간다는 것 역시 우리가 모두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가 더욱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름다운 이야기,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라 거칠고 투박하고 불편한 것들, 힘없고 볼품없고 보잘것없는 사람들, 실패와 상처로 얼룩진 과거의 경험들이 아닌가 싶다.

 

성공 가도를 내달리며 더 많은 돈과 권력을 좇아 다른 존재들을 밀치고 무시하고 짓밟으라고 가르치는 세상에서, 아이를 기르는 엄마로서 실패할 수도 있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어떻게 가르치고 실패할 기회를 줄 수 있나 고민하는 중인데, 이런 시선을 담은 연극을 만나고 주렁주렁 심사숙고할 기회를 잡으니 정말 기쁘다. 
 


* 이 글의 제목은 2013년 1월 28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정규직노동자 윤주형씨가 작성한 어느 게시글에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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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9 11:15 2014/02/09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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