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서품식 즈음에 새 사제에게 ‘착한 목자’ 되시라며 축복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사제를 ‘목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신자를 양 떼에 빗대어, 신자를 이끌고 보살피는 성직자를 일컫는 말’이라고 어떤 사전에서 정의하고 있기도 하고, 신학적으로나 보편적인 인식에서나 필자의 의견은 부족하고 편협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을 미리 고백한다.

 

 

사제는 목자인가?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1)라는 성경 구절이 있다. 이 성경 구절을 두고 보면 목자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주님, 그러니까 하느님뿐이다. 인간 가운데 하느님과 삼위일체를 이루는 존재는 아들 예수가 유일하다는 것이 성경과 교리를 통해 알려진 상식이다. 게다가 예수는 목자이면서도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어 자신을 스스로 하느님 제단에 봉헌하지 않았나. 예수마저도 하느님 앞에서는 ‘어린양’이 되었다는 말인데, 인간일 뿐인 사제를 목자라고 부르는 것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부 · 성자 · 성령의 삼위일체에 도전하는 것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결국 사제도 그저 한 마리 양일 뿐이니 목자라는 말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친 호칭이 되고 만다. 사제에 대한 존경으로, 좀 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면 양 떼 가운데 우두머리 양 정도라고 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어느 사제의 강론에서 이런 논조의 얘기를 듣고 깊게 공감했다. 그 사제도 사제를 목자라고 부르는 관행이 지나치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라 믿고 싶다.)

 

사제는 하느님의 어린양인 예수를 닮고 따르겠다고 하느님 앞에 선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세상 모든 사제는 그래서 예수의 어느 한 부분만을 닮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예수의 전 존재를 닮은 사람이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일이고, 한 명의 사제가 예수의 어떤 점 한 가지라도 닮는다면 그것이 진정 은총이라고 했던 것 같다.

 

누군가는 인간을 측은히 여기며 사랑하는 마음을 닮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기꺼이 세례자 요한에게 무릎을 꿇어 세례를 청하는 겸양과 용기를 닮았을 것이다.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시국미사에 함께하는 사제들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옆을 지켜주는 의리, 그들과 친구 되려는 노력을 닮기도 했을 테고, 정 닮은 것이 없으면 예수를 그린 여러 그림에 보이는 긴 머리칼, 멋진 수염이라도 닮았을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내 주변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흔하게 술자리 안주가 되는 ‘달걀과 닭’ 논란이 있다. 사제의 ‘권위주의’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가 어떤 신부는 이러저러하더라 하는 이야기를 꺼내면, 다른 이가 교회에서 힘 좀 쓴다는, 권위 좀 부리는 신자들이 신부들을 어떻게 대하더라, 또 여러 가지 편리를 제공해 사제들을 길들이기도 하는 것 같다는 얘기로 맞받아치며 다양한 일화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성당에서 신자로 활동하며 겪었던 어려움을 토로하곤 한다.

 

사실 사제의 권위가 교회를 지탱하는 기본 골격인 셈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가톨릭 신자는 거의 없다. 그래서 아들을 낳고 그 아이를 ‘교회에 봉헌’하겠다면서 신학교로 보내고 싶어 하는 부모들이 끊이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성당 사무실에서 일하다 보면, 사제의 부모님들에 대해 ‘자기들이 신부인 줄 아나봐’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알게 모르게 권위를 부리고 다닌다는 뒷이야기도 쉽게 듣게 된다. 또 사제들의 권위에 무임승차하곤 하는, 사제들과 무척 가까운 측근들의 활약(?)에 대한 이런저런 수다도 오가기 마련이다.

 

사제가 되려는 사람이 없고, 수도자도 부족하다는 가톨릭교회의 위기론이 만연한 요즈음은 본당에서 ‘신학생’이 나오기만 하면 잔치 분위기를 내기도 한다. 대신학교(서울대교구의 경우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 들어간 신학생들을 ‘학사님’이라고 불러주면서 그 신학생과 부모에게 온갖 축하와 격려가 넘친다.

 

‘학사(學司)’가 무슨 뜻인가? 대학 졸업하면 받는 학사(學士) 학위를 받을 사람이라 학사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지만, ‘신부〔司〕 공부〔學〕하는 사람’이란 뜻이 맞는다는 주장도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는 대신학교에 입학하면 ‘구마품’을 받고 성직에 입적하게 되어 있었고, 신부는 아니지만 성직에 입적하는 것으로 인정해 흔히 ‘학사님’이라는 존칭을 썼다고 한다. 현재는 ‘신학생’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되어 있지만, 여전히 ‘학사’라는 호칭이 애용되고 있다.

 

20대 초중반부터 강사로 생계를 유지해오다 유명세를 얻은 사람 한 명를 알고 지냈다. 워낙 젊을 때부터 ‘○○○ 선생님’이란 호칭을 들어오던 그이의 경력이 10년가량 되었을 어느 때쯤, 누군가가 ‘○○○ 씨’라고 불렀을 때 “저 사람은 뭔데 나를 ○○○ 씨라고 부르는 거야” 하며 화가 났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잠시 멍했던 기억이 있다. 권위의식이 사람을 잡아먹는 건 순식간이라고 생각했다. 교회에서 활동하고, 교회 노동자로 일하면서 그이의 권위의식이 수시로 떠오른다.

 

그래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생겼나 보다. 나이로 선후배 따지는 ‘나이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는 나도 가끔은, 본당 주임신부가 자기보다 훨씬 높은 연배의 신자나 직원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볼 때, 기가 막혀 말을 잃는다. 신자들이 신학생과 사제에게 지나친 존중을 표하면서 결국 이러저러한 경우에서 보듯 사제들에게 권위의식을 심어주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된다. 그들도 처음엔 신자들의 과한 존칭과 대우가 어색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랑비에 옷 젖듯’ 스스로 신자들의 대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 ‘공손’과 ‘격식’이 부족하다며 화를 내거나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일이 잦아진다면, 그는 이미 권위주의에 적응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권위의식, 권위주의는 다른 존재들에 대한 존중이나 공감이라는, 성직자의 의무에 해당하는 가치들을 배반하는 행동을 거침없이 하게 만든다. 사제에게 ‘성인사제(聖人司祭)’가 되라고 말만 하지 말고, 제발 부디, 우리 이제 사제들에 대한 조건 없는 ‘예우와 존경’을 철회할 수는 없을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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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9 19:10 2014/02/09 19:10

지난 10월 31일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 최종범 씨가 자결했다. 12월에 돌을 맞는 딸과 아내를 남겨두고 죽을 수밖에 없던 그의 생존을 위협한 것은 무엇일까. 이제 서른셋, 얼마 전까지도 형에게 업어달라고 응석 부리던 막냇동생. 그가 노동조합을 통해서 눈뜬 현실, 그리고 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이 가족의 생활을 어렵게 만들던 회사. 어떤 가치를 지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점점 책임질 수 없을 것만 같았을 가족.

 

삼성 본사와 서비스센터의 ‘바지사장’들에게 농락당하던 자신들의 권리를 찾겠다고 노조를 만들었더니, 이제 삼성의 부속품이 아닌 노동자로, 참 인간으로 살게 되었다는 삼성노조 노동자들의 대화를 보노라면, 고(故) 최종범 씨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 * 전국금속노동조합 삼성전자서비스지회 페이스북 페이지의 게시물을 허가를 받아 사용합니다.
 

▲ * 전국금속노동조합 삼성전자서비스지회 페이스북 페이지의 게시물을 허가를 받아 사용합니다.

 

 

다른 듯 비슷한 삼성과 천주교

 

이게 사는 건가 싶었던 최종범 씨의 상황에 대해 ‘삼성이니까 뭐~’ 이러면서 우리 교회가 안도할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이 못내 아쉬운 것은, 삼성과 한국 가톨릭교회의 거리가 의외의 지점에서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우선은 ‘썩 괜찮은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삼성 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가족’, 천주교 하면 떠오르는 여러 가지 경건하고 거룩한 종교다운 이미지를 견주어 보면 될 것이다. 나날이 늘어가는 신자 수와 천주교에 대한 호감도, 최근 장안의 화제가 된 전주교구 정의구현사제단의 대통령 사퇴 촉구 시국미사, 그로 인한 종북몰이, 천주교에 대한 환상과 일반화…….

 

또 다른 하나는 ‘노조 없음 혹은 인정 안 함’, 즉 무노조 신화다. 2005년 5월 ‘경영상 어려움’을 이유로 식당 외주화 방침을 세우고 27명의 영양과 직원들에게 정리해고를 통보했던 성모자애병원이 있었다. 보건의료노조 성모자애병원지부 관계자의 말로는 인천 지역 성당에 다니는 조합원들이 줄줄이 ‘더는 노조 활동하기가 어렵다’면서 탈퇴서를 제출했다는 거다. “딸이 인천 지역 모 성당에서 일하고 있는데 어떻게 아버지가 노조에 가입할 수 있느냐”는 말을 듣고 탈퇴서를 제출하기도 하고, 성당에서 도움을 받고 있는 이모를 통해 노조 탈퇴 압력을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천주교 인천교구를 통해 노조 탈퇴 종용이 이뤄졌다고 했다. (* <매일노동뉴스> 2007년 3월 6일 기사 ‘'성당' 마저 노조 탈퇴 요구하나’ 참고 )

 

어느 병원의 원장 수녀가 노조와 협상을 거부하며 “예수님도 사탄과 협상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는 얘기는 씁쓸하게 회자되고 있다. 2002년부터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CMC 해고자 5명의 상황도 그렇다. 그나마 병원은 노조라도 있지만, 일반 교구청별로 노동조합은 1990년대 초반 이후로 전혀 없는 상태다.

 

마지막으로 ‘본사와 하청, 혹은 지사 간의 노동조건 차이’ 문제다. 이건 딱 들어맞는 비유는 아닐 수도 있지만, 천주교의 각 교구청을 본사에 대입하고, 본당을 하청회사 또는 지사에 대입할 경우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노동절 유급휴가, 성탄과 부활 후의 휴무, 연차 사용의 쉬움, 즉 주로 휴가 · 휴직 사용의 문제에서 교구청과 본당 사이의 차이가 꽤 나는 편이다. 즉 본당에서 일하는 직원은 교구청에 속해 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대기업 직원이지만 실제로는 5인 이하 사업장 직원의 처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연차나 육아휴직 등을 신청할 때 곤란을 겪는 일이 꽤 많은데, 한 사람이 휴가를 쓰면 다른 사람은 자신의 휴무일을 반납하고 출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근무자가 한 명인 성당도 많아서, 이런 조정조차 어려운 경우도 꽤 있다.

 

 

부서지기 전에 지킬 수 있다면

 

사제 인사이동이 있으면 사제와 동반하는 사무장이나 식복사(사제관 주방 근무자) 때문에 본당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맥없이 일터를 잃어야만 하는 일이 쉽게 일어나던 때가 있었다. 최근 와서 그런 일은 거의 없어지고 있는 추세다. 이런 일을 최소화하기 위해 서울대교구는 본당 직원들을 교구청 직원으로 등록하고 있다고도 한다. 물론 기꺼이 한 일이라기보다는 노동 관계 부서의 권고 때문일 가능성이 더 높다.

 

성당 직원, 그러니까 교회 시설에서 일하는 노동자인 나는, 무노조 신화를 이어가는 천주교와, 쌍용차 해고 노동자를 응원하는 200일이 넘는 대한문 미사 사이의 거리감이 참 부끄럽고 어색하다. 게다가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에게 따스하게 대하는 많은 사제와 수도자, 신자들의 시선도 낯설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나와 내 동료의 노동을 그런 눈빛으로 봐준 사람이 있었나. ‘아, 저 시선을 받으려면 교회 내 노동자들도 목숨을 걸고 노조를 만들고, 온갖 생존의 위협을 감수하는 고된 싸움을 해야만 하겠구나’ 싶었다.

 

대한문 미사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아무도 모르게, 여전히 다양하고도 사소한 이유로 일터에서 내몰리는 교회 내 노동자들에 대한 소문이 들려왔다. 그 사정을 모른 척 외면하듯이 지켜보아야만 하는 처지라는 게 참 어렵고 힘들다.

 

지옥 같은 돈 중심의 사회에서 가족들과 살고 아이를 키우려면,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면, 다른 성당에서 일을 계속해야 하니까,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일자리를 잃어도 말도 못 꺼내고 넘어가려는 그들에게 왜 당신의 권리를 버리느냐고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지금 잠시 자존심이 상해도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 우리 모두 사람이라서 그렇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3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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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9 18:50 2014/02/09 18:50

아이를 키우면서 하는 각오가 있다. 내가 저 아이의 인생을 살아 줄 수 없다는 것이 하나, ‘친구 같은 엄마’가 아니라 ‘친구’가 되고 싶다는 것이 또 하나다.

 

아이의 인생을 살아 줄 수 없으니 너는 이렇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참견과 간섭은 안 할 것이며, 친구가 되겠다는 것은 ‘친구 같은 엄마’란 말 속에 있는 엄마의 성격, 지위, 권위마저도 놓겠다는 뜻이다. 친구처럼 지내는 건 좋지만, 엄마로서 딸에게 해줄 것은 해줘야 한다는 사회의 관습에 대해서도 저항하고 싶다는 간곡한 바람의 표시이기도 하다.

 

이런 마음을 각오라고 부르는 건 부모, 자식의 관계가 평등할 수 없다는 사회적인 합의가 은근히 강력한 탓이다. 특히 엄마와 자식의 관계는 엄마의 몸을 통해 이루어진 관계이다 보니 ‘소유’의 관계―‘헌신’이라는 말로 포장되곤 하는―를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도 같다.

 

얼마 전 한 청소년 활동가들의 모임에 갔다가 ‘모태 전교조’라는 말을 들었다. 엄마가 전교조 조합원인 선생님이었고, 아이가 자라는 동안 자연스럽게 전교조 활동을 하는 엄마와 함께하게 되었다. 그 아이도 자라면서 청소년 활동가가 되었는데 부모의 영향을 꽤 받았을 테지만, 부모와는 또 다른 가치관을 갖고 활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활동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모태 신앙’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모태 신앙이나 모태 전교조나 아이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부모의 가치관과 신앙에 대해 아이가 비판 의식을 가질 틈도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현상들을 증언해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의 신앙심이 깊고 영성의 깊이가 깊어 생활 그 자체에 가식이 없고, 가난한 이들의 참된 친구였던 예수의 제자마저 될 만한 풍모를 지닌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대부분 부모의 신앙생활과 현실생활 사이의 괴리감, 그 배신의 거리에 절망하고 심지어 부모를 조롱하기까지 한다.

 

그러한 배신감과 조롱은 ‘모태 전교조’만이 아니라 진보적이라고 하는 어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 386 부모를 둔 한 청년도 자신의 부모가 “나도 옛날에 다 해봤는데…” 어쩌고 하면서 정작 세상 속의 성공에 무신경한 자신을 설득하거나 윽박지를 때마다 씁쓸하다고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부모에게 마음과 행동의 완벽한 일치를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 마음이 신앙이든 사상이든, 어떤 가치관이든 간에 사실 살아간다는 것은 적당히 내가 포기하지 않아도 될 만큼만 신앙심을 갖거나 양심적이면 된다는 마음들이 ‘원칙’, ‘도리’ 같은 것과 벌이는 사투쯤 되지 않을까?

 

모태 신앙이 성당 다니는 사람들에게 큰 의미 부여가 되는 이유는 아마도 ‘성가정’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그 성가정의 고단한 사연들은 외면하고, 그저 예수가 태어난 가정이라는 성스럽고 따스하고 멋진 이미지만 취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 말이다.

 

성가정의 아버지 요셉은 누구 자식인지도 알지 못하는 애를 임신하고 돌아온 약혼녀를 받아들인 고독하지만, 의리 넘치는 사내가 아닌가. 한국 남자들이라면 절대 하지 못할 용기를 내준 사람이니 성가정의 일원이 될 만하다. 마리아는 어떤가? 남편인 요셉에게 설명할 수 없는 임신을 했고, 아이를 한겨울 허름한 마구간에서 낳은 것도 모자라 그 아이 때문에 여기저기 떠도는 삶을 살아야 했다. 결국 그 녀석을 장가도 못 보내고 욕된 십자가에서 죽는 꼴을 목격한 어머니였다. 아들 예수야 말할 것도 없고….

 

어찌 보면 성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요셉, 마리아와 예수가 감당하고 받아들였던 것들, 그 모든 어려움과 곤란을 감수했던 성가정의 고난의 시간을 끝없이 우리도 함께하겠다는 각오의 말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한국 가톨릭교회 신자들에게 온화한 표정의 세 사람을 그리고 조각한 성가정상이라는 이미지만 남긴 채 소비되면서 그저 신자만 되어 달라고, 신자가 되었으니 혼인성사는 꼭 성당에서 하자고 남편과 아내, 아이들을 다그치는 이상한 힘이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이상야릇한 힘 때문에 사람들은 자녀에게 유아세례도 해주고, 1년 가까운 시간을 투자해 첫영성체 교리도 함께 버티고, 어떤 집 아들은 사제로 봉헌한다면서 신학교에 보내고, 하다못해 자녀들을 성당에서 혼배미사로 출가시키고 싶다는 소망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에게도 신앙을 선택할 자유, 삶의 가치관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다. 나도 유아세례를 받았고, 오랜 냉담 끝에 성당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그것을 ‘유아세례의 은총’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지만, 내 아이의 신앙 문제를 생각해보니 아이에게 질문마저 하지 않는 유아세례란 얼마나 폭력적인 일인가 싶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지만, 성당 직원이기 때문에 ‘네 딸에게 유아세례 안 시키느냐, 둘째는 안 갖느냐’는 온갖 간섭과 오지랖에 시달려야 했다. 성가정을 꾸리고 말고는 나와 우리 가족들의 의사일 텐데, 성가정에 대한 강박감이 내 자식이나 내 주변 사람들 모두, 그리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성당 직원들도 그래야 한다는 간섭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모태 신앙이나 유아세례만큼 고민하게 되는 것이 혼인성사다. 어떻게든 성당에서 결혼을 시키고 싶은데 바쁘다면서 시간 내지 않는 자녀들을 위해 부모들은 정말 절실하게 사무실에 와서 묻고 또 물으신다. 자기 자녀가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자녀의 배우자가 될 사람을 압박하는 일마저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나보다 먼저 결혼한 여동생이 결혼을 준비 중일 때의 일이다. 동생의 시어머니인 사돈어른이 얼마 전에 세례를 받으셨다며,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여동생은 오랫동안 성당을 나가지 않고 있는 소위 ‘냉담 신자’였고, 나도 다시 성당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시어머니의 요구에 난감해하는 동생을 위해 내가 다니던 성당의 청년 담당 사제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의견을 구했더니, “부모님이 결혼하는 게 아니니까 본인들이 혼인성사를 원하는지에 따라 결정하는 게 가장 좋다”는 해답을 주었고, 이 사제의 한마디로 동생은 곤란한 입장을 벗어나 자유롭게 결혼 준비를 하게 되었다. 사돈어른은 사제의 말이라니 아쉽긴 해도 토 달지 못했고, 동생은 은근한 혼인성사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거다.

 

이 일을 겪은 덕분에 성당 사무실에서 근무하면서 자녀들의 혼인성사에 관해 고민스러워하는 부모들과 얘기할 때마다 “부모님들이 아니라 자녀들의 일이니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세요”라고 자신 있게 얘기하곤 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강요하는지 묻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특히, 교회에서 묘하게 급진적인 질문이라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가족 구성원 안에서도 다양한 요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 삶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으려는 진정한 배려가 필요하지 않을까.

 

가장 가깝게 지내는 가족일수록 적당한 거리감이 필요하다. 어떤 관계든 밀착되어 있을수록 생길 수 있는 피로감을 없앨 수 있는 시공간적인 거리가 필요하니 말이다. 단지 함께 신자이기를 강요하기보다 어떤 내용의 삶을 살 것인지 먼저 공감하고 살아가다 보면 주변 사람들은 그 삶의 모양새를 보고 강요하지 않아도 어떤 길이든 선택하기 마련임을 믿어주는 것. 그것을 성가정의 출발점으로 삼아도 좋겠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3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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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9 18:48 2014/02/09 18:48

대학 때 꽤 많은 집회와 시위 현장에 참여했지만, 잘 뛰지 못하는 나는 대열에서 떨어질까 혹시나 잡혀갈까 엄청나게 떨었고, 눈치껏 바짝 쫓아다니곤 했다. 학교를 한두 해 더 다닐수록 그런 두려움의 마음을 드러내기 어려웠고, 가끔은 너무 두려워서 그게 두려움이라는 걸 잊은 줄 알았다.

 

그렇게 두려움을 잊은 듯 살아오던 2009년이던가. 명동에서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의 4대강 관련 미사와 행진이 있었다. 미사까지는 뭐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미사가 끝나고 행진이 시작되면서 몇 걸음 떼지 않았을 때, 그 자리에 혼자 참가했던 난 그 순간 왠지 간 덩어리가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이 자유분방한 행진 대열에서 혹 잡혀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 탓이다. 그날 그 행사가 끝나고 동생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부끄럽기까지 한 그 두려움에 대해 한참이나 횡설수설 어설픈 수다를 떨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내 두려움을 인정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꽤 오랫동안 난 내가 아주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가진 존재라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건 단지 강해 보이고 싶었을 뿐 실제의 난 별로 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지 몇 년 안 되었다.

 

내 안의 두려움을 알게 되고부터 나는 거리에서 싸우는 사람들, 철탑을 올라가는 사람들, 희망버스에 오르는 사람들, 비혼을 주장하는 사람들, 탈핵을 말하는 사람들을 전보다 더 많이 존경한다. 이렇게 맞서 싸우기 어려운 권위적인 체제와 문화, 질서에 대항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들만의 두려움이 존재할 것으로 생각해서다.

 

지난 기고에 대한 반응 몇 가지를 보면서 오랜만에 간이 쪼그라들었다. 몇 달 전, 우연히 만났던 CMC(가톨릭 중앙 의료원) 해고자 몇 분이 가톨릭교회의 놀라운 정보력에 관해 얘기한 적이 있다. 해고자 중에 누구를 회유하면 효과적일 것인지까지 파악한 것처럼 느껴지더란다. ‘그들이 나를 찾아왔다’고 했는지 ‘골랐다’고 했는지, 그분들의 정확한 표현도 잊은 것 같다.

 

비록 해고자 몇 분의 직감이라 하더라도 참 무서웠다. 필명으로 글을 쓰는데도 내가 누군지 알아낼 사람이 곧 나타날 수도 있겠구나. 아니면 혹시 정보기관 같은 곳에서 남편에게 ‘네 마누라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고 있느냐’라며 전화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자본론을 강의하는 시간강사도 고발당하는 토끼몰이 분위기까지 더해져 생기는 공포심 같은 것, 그런 이유로 혹여 해고되는 것도 싫지만, 나와는 차원이 다른 ‘권력’에 파악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정말 소름이 끼친다. 그것이 교회든 국가든 말이다.

 

사실 한국 천주교회에 적을 둔 평신도가 ‘본당에서 마주친 교회’라는 칼럼의 성격에 맞게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글을 쓰기는 쉽지 않다. 물론 우리는 ‘내가 교회’라고 교리를 통해 배우기도 하지만, 교회와 관련된 영역에서 조금 활동을 해보면 ‘정말 내가 교회일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기도 한다. 어찌 보면 ‘너도 교회인데 왜 다른 존재의 부족함을 들추려 하느냐’는 비난도 감수해야 하는 코너다. 나도 다른 필진의 글을 읽을 때 이 칼럼이 좀 더 불편하고 읽기 힘들었으니 말이다.

 

또, 너는 얼마나 깔끔하고 성실한 직원이었느냐 물으면 도망치고 싶어질 지경이다. 요즘 흔하게 유행하는 ‘갑을관계’라는 말로 치면 여러모로 ‘을’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할 사람들, 우리 사회에서 99%쯤 될 거라고 얘기하는 ‘을’이 교회 안에 있다면 당연히 교회 직원이다. 그 입장에서 하는 얘기는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나도 이곳에서 일하기 전엔 그랬으니까.

 

성직자 중심의 위계를 갖는 교회의 피라미드에서 가장 하위 층을 차지하는 무리가 교회 내 ‘노동자’이고, 거기에 속한 내가 교회를 바라보며 갖게 된 여러 생각을 거칠면 거친 대로 나누고자 용기를 내었으니 못마땅하다는 소리를 피하진 못할 거라 각오도 했다. 그랬으니까 나는 충분히 편향적이고 치우친 글을 썼을 테고 앞으로도 가능하면 더욱더 그렇게 쓰고 싶다.

 

불행하게도(?) 이 칼럼에 기고를 시작할 즈음 천주교회는 국정원 해체를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하면서 우직하고 역사적인 행보로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긋고 있다. 160일에 다가가는 쌍용자동차 미사도 그렇고 강정에서, 밀양에서 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이 활동 중이다.

 

정말 따뜻하고 신심 깊고, 게다가 약자와 소수자에 관심을 기울이는 성직자, 수도자가 적당히 많아서 가톨릭교회가 존경받아 마땅함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칼럼의 취지는 그런 구성원들이 존재하고 많은 문제의식을 느낀 평신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교회는 여전히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 문제에서 벗어날 길을 함께 찾자는 것으로 생각한다. 일단 모르던 처지에 있는 이의 말을 들어주겠다는 마음으로 이 코너를 대해주면 좋겠다.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얘기가 시작되고 길도 찾을 것 아닌가.

 

세 살 된 딸아이를 키우는데 그 아이는 자기 나름의 하고 싶은 게 있고, 나에게 요구하는 게 있어도 어른보다 말이 미숙하고 힘도 약하다 보니 자기주장을 하려면 떼쓰며 귀가 떨어져 나가라 울어 대곤 한다. 아이에게는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금 더 크고 말이 늘면 말싸움이라도 하겠지만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차별로 해를 입는 자와 차별로 덕 보는 자, 힘센 자와 약한 자의 힘의 크기가 딱 엄마 앞의 아기처럼 느껴진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애처럼 울고 떼쓰지 않으면 흘깃 쳐다보지도 않을 것 같은 ‘을’의 입장을 ‘을’끼리라도 다독이며 나누어야 할 텐데, 그것도 만만치 않은 게 요즘 우리 사는 세상이다.

 

기성세대 혹은 기득권층은 언제나 아동, 청소년이나 소수자들에게만 조용히 하라고, 고분고분 말하라고, 말 잘 들어야 착하다고, 항의하려면 절차대로 하라고 말한다. 우리도 다 아이였으니 난 그런 말 안 들어봤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처럼 이렇게 이름도 못 밝히고 글을 쓰면, 이러지 말고 절차를 통해서 항의하라고 하거나 그냥 참고 국으로 있으란다.

 

그런데 양보나 협상은 더 많이 가진 사람이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하고 싶은 얘기의 순서는 내가 정해야 하는 것 같은데 참 알 수가 없다. 상대편이 100을 가지고도 다섯을 내놓기 꺼리는데 내가 가진 10을 내놓으라는 협상은 이미 불평등하고 편향적이라고 판단하는 게 상식인 듯한데 말이다.

 

공손한 말투로 차분히 얘기하라는 말을 어떤 대상에게 하는지 잘 살펴보자는 거다. 그 말을 하는 나는, 또 당신은 어른인가 아이인가? 우는 아이들에게, 좌충우돌 10대에게, 부하 직원에게, 거리로 내몰린 노동자들이나 밀양에서 삶의 터전을 지키려 몸부림치는 할매들에게 하고 있지는 않나? 왜 그들만, 또는 우리만 착하고 공손해야 하는지 정말 알 수가 없다. 그 알 수 없는 것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이 참 두렵고 두렵지만, 두려워도 계속 하는 게 용기라니 다시 용기를 내볼까 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3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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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9 18:46 2014/02/09 18:46

새로 지은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와 산 지 2년이 되었다. 얼마 전 재계약을 마치고 얼마나 감개무량했는지 그 감격이 아직 생생하다.

 

남편이 독립해서 살던 살림살이 대부분을 그냥 갖고 들어오는 이사였다. 새로 마련한 살림은 에어컨, 안방의 붙박이 장롱과 원목 평상 침대, 작은방 책장, 그리고 3인용 좌식 소파였다. 소파와 책장은 인터넷 최저가를 검색하고 나날이 바뀌는 쇼핑몰 가격을 따라서 주문했다가 취소하기를 반복해서 각각 15만 원 정도 선으로 경매 낙찰 받은 기분으로 고생 끝에 주문했고, 장롱도 역시 150여만 원 하는 걸 어느 쇼핑몰 할인 행사 쿠폰 덕에 백만 원도 안 주고 살 수 있었다. 에어컨이나 원목 침대도 한 번 주문할 때 좋은 거 해서 오래 쓰겠다며 큰 맘 먹고 결정했던 것이었다.

 

결혼해서 집안 살림 마련하고 이사 몇 번 다녀본 사람들은 다 안다. 얼리 어답터 기질이 있던 사람도 가족을 이뤄 살다 보면, 그 기질이란 게 얼마나 허망하고 거추장스러우며 호사스러운 취미인지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되기 마련이다.

 

이쯤 해서 “얘는 뭐 하는 앤데, 지 살림 얘기를 쓰면서 ‘본당에서 마주친 교회’라는 칼럼에 기고한 거냐” 할 만한 독자들을 위해 사족을 좀 달아드리겠다. 필자는 몇 년간 성당 직원으로 일했다. 그러다 보니 몰랐으면 좋았을 일을 많이 알게 된다. 솔직히 수두룩하게 얘기할 거리가 많기도 하다. 그래도 이렇게 공개된 지면에 써도 될지 걱정스러운 얘기도 많아 은근한 자기 검열을 벗어나기 힘들었다는 점을 미리 고백하고 싶다.

 

어떤 얘기가 좋을까 고민을 좀 했지만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수레바퀴의 하나를 맡은 사람으로서, 또 벗어날 수 없고 가끔 사랑스럽기까지 한 자본주의에 사는 사람답게 일단 살림에 관한 돈 얘기부터 해볼까 하고 내 살림 얘기를 꺼낸 것이다. 불편할 수도 있고, 모르면 더 좋았을 교회 안의 경제 관념 말이다. (좋은 얘기 쓸 것도 아니므로 존칭은 생각하기로 한다. 이이, 그이 등의 표현에 맘 상하지 않으시길.)

 

개신교 성직자들에 대해서 어떤 인식이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흔히 가톨릭 성직자 · 수도자는 ‘순결(독신), 순명, 청빈’의 서약을 한다고 알려졌다. 장벽을 치고 살면 모를까, 사제 · 수도자도 나약한 인간이니, 세상 살아가며 지키기 어려운 세 가지는 서약이라도 해서 스스로 다짐하고 실천하라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사실 한국 교회에서 사제 · 수도자들에 대한 교우들의 기대는 상상 이상으로 높아서 옆에서 보기에 아찔할 지경이지만, 그 양반들도 하느님의 어린 양인 실수투성이 인간인 것을….

 

아무튼, 청빈에 관해 짚고 갈 한 가지. 수도회에 들어간 수도자와 수도회 소속 사제들에게는 세 가지 서약이 유효하지만, 교구 사제들에게 있어서는 청빈의 서약이 빠져 있다고도 한다. 일단 청빈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청빈(淸貧, poverty, paupertas) : 복음적 권고의 하나. 스스로 선택한 단순 소박한 가난을 뜻한다. 자발적 가난은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 물질적 소유욕에서 해방된 자유를 뜻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 출처 : 미디어 종사자를 위한 천주교 용어 자료집,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편찬, 2011,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어느 성당이나 때가 되면 사제도 바뀌고 수도자도 바뀐다. 교사들이 몇 년마다 전근 다니듯 사제, 수도자도 각자의 지위에 따라 근무하는 기간이 다르지만, 교구 · 수도회별로 한 해에 한두 번의 인사 이동이 있다.

 

그때가 되면 본당 신자들과 직원들은 분주해진다. 대개 먼저 살던 이가 사는 집에 당신들 짐을 그냥 얹어두고 사는 이들이 많지만 가끔은 이중 삼중의 공사를 하기도 하고, 혼자 사는 양반들 특유의 까칠한 주문들이 봇물이 터지듯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먼저 살던 이가 이사 올 이를 위해 집 정비를 해주었는데 새로 온 이의 입맛에 맞지 않았는지, 따로 생각한 구조가 있었는지 말단 직원은 모를 어떤 이유로 내부 공사가 다시 시작된 일도 있었다. (사제가 새로 부임하면 내외부 공사를 못 하도록 하는 지침이 있었다고 들었지만, 큰 힘을 발휘 못 했던 것 같다.)

 

우리 집에도 하고 싶었던 실크 포인트 벽지 도배, 나도 좋아하는 향긋한 에스프레소를 뽑아주는 고급 캡슐 커피 머신, 가끔 드라마에서 상반신 노출하며 샤워하던 남자 배우들의 머리 위에서 한두 번 봤던 해바라기 샤워기, 고급 가구, 심지어 본당 주변의 지역 유선방송 상품마저 대기업 IPTV로 교체하라던 이도 있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이사 다니고 애 키우는 살림꾼으로서 그런 주문을 받을 때마다 흥분하곤 했다. 나는 뭐 저런 거 집에 놓고 살면 좋은지 몰라서 구질구질한 살림살이들을 끌어안고 이사하는 줄 아시나. 차곡차곡 통장에 돈 쌓이는 재미도 잠시, 애 키우고 전세 재계약할 때마다 올라가는 보증금 따라잡으려면 우리는 언제 그런 뽀송뽀송한 살림들을 수시로 바꿔가며 살 수 있을지, 둘이 벌어봐야 뻔한 살림 사는 입장에서 정말 억장이 무너지고 무너졌다.

 

“자발적 가난은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 물질적 소유욕에서 해방된 자유를 뜻”한다고 사전에도 나와 있다. 진정한 가난을 말하자면 집 걱정도 하고, 차비 걱정도 하고 한겨울에 보일러를 자꾸 끄면 연료비가 더 나온다는 생활상식 공부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거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이 아니고, 예수님도 아닌 약하고 못난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결핍과 욕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 나는 사제고 수도자니까 뭔가 초월했다는 위선도 버리면 좋겠다. 부족분을 메우려고 타인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거 어렵지만, 그 어려운 일 하면서 다들 살아간다. 아쉬운 소리 하기 부끄럽고 치사하니까 쓸 거 안 쓰고 아껴가며 사는 거다.

 

대부분 사람은 그렇게 세상을 살면서 소비 욕망을 다스려가며 자기 지갑 살펴가며 살아가는데 그게 안 되는 사람, 안 해도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다. 왜 이렇게 평등하지 못한 건지 앞으로 계속 고민해볼 테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3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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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9 18:44 2014/02/09 18:44

수많은 이상과 정치적 선언과 야망과 절체절명의 목표가 넘쳐나 누구나 뭔가 이상향을 꿈꾸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던 시대를 지나자, 성공이나 대박, 1등이 아니면 거들떠보지 않는 무한경쟁시대에 도달했다. 나날이 강퍅해지는 세상을 살아온 나란 여자도 40대 초반의 괴팍한 아줌마가 되어가면서 말이다. 어쩌면 아줌마가 된 나의 얘기를 무대 위에서 깊어진 배우를 통해 듣고 싶다는 기대가 있었나 보다. 좀처럼 1인극을 보지 않던 내가 이 연극을 선택한 이유를 찾자면 말이다. 외모만 보면 그냥 아줌마일 뿐인, 40대 중반의 배우에게서 뭔가 은밀하고 좀 솔직한 얘기가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기대.

 

특별한 일이라고는 일어나지 않는 동네 슈퍼의 주인 수현. 그가 지내는 일상에 파문을 일으킨 한 남자 '디스플러스'와 그의 여자친구 '한국무용', 그들과 얽히고설킨 사건과 그 사건을 풀어내는 수현의 수다가 이 공연의 핵심이다. 이게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싶을 지경으로 정신없이 떠들다 보면 밉던 시어머니도 한번 참아주고, 고집스러운 남편도 이해가 되면서 내 속이 잠잠해지던 경험처럼 수현도 그렇게 수다를 떠들어댔다.

 

공연에 사용된 영상 속 배우 남미정은 그가 연기하는 무대의 수현보다 세련되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런데 수현이 더 사랑스러웠다. 마치 작품마다 멋쟁이 훈남 역할만 하던 이가 어느 날 어딘가 멍하고 볼품없는 캐릭터로 등장해 소위 '망가지는' 역할을 멋지게 해내는 것을 볼 때처럼 말이다. 그것은 사랑보다 안심일지도 모른다. 그 배우의 찌질함이 우스워서가 아니라 내 찌질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새어나오는 안도의 한숨이다. 그리고 마치 연기를 하는 게 아니고 그 배우가 그냥 자신의 생활을 드러내는 것만 같아서, “저건 연기가 아니야 그냥 원래 지 모습이지!” 할 때의 반가움이다.

어쩌면 나이 들어가며 늘어가는 주름은 예술가인 배우에게 훈장일 것이다. 그런 연륜이 없는 어린 배우들을 위해서 연기는 가면을 쓰는 것이라며 가르치는 연기론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자기만의 경험과 이야기가 많은 배우와 그런 인생을 살아보지 않았던 배우의 차이는 책이나 영화를 통해도 채워지지 않을 무수한 여백, 혹은 거리감일 것이다. 경험이란 것은 내가 겪은 어떤 사건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사건을 둘러싼 촘촘한 감정의 그물, 사건 전후의 상황과 맥락, 사건 속의 인간관계, 내 기억 속의 어떤 조작까지 다 아우른 것이니 말이다.

 

패기 만발하여 나만 잘난 줄 알았던 때, 내게 필요한 건 판타지와 드라마였다. 뭔가 평범하지 않고 반짝반짝 개성 넘치는 모든 것을 그렇게 불러주고 싶었는데 요즘 이 두 단어가 참 흔해져 아쉽다. 아무튼, 특별하다고 주목 받는 모든 것에는 백조의 발헤엄 같은 어둡고 힘든 고난의 길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런 것쯤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이가 하나둘 많아지는 게 딱히 슬프지 않고, 가끔은 흐뭇하다고 여기고 살다 보니, 반짝반짝하지 않고 특별하지도 않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하루하루가 참 소중하게 여겨진다. 게다가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이라는 말을 어느 소설에선가 만나고 나서 마음에 일던 파문을 잊을 수 없다. 그 잔잔한 흔들림은 “더는 나중으로 나의 행복을 미루지 말자”거나, “너무 멋지게 잘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적당히 살려네” 하며 나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는 노력으로 변하여 그냥 평범하게 사는 것 자체가 인생의 목표가 된 여러 사람의 존재를 향한 관심으로 자리를 옮겨가고 있다.

 

그대…. 혹시 지금의 하루하루가 별 볼일 없고 허접해서 슬프다면 슬며시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을 바라보라. 당신처럼 평범하게 친구를 만나고 영화 보러 자유로이 쏘다니고 싶은 '장애인'들, 당신처럼 주변 눈치 안 보고 애인과 손잡고 걷고 싶은 노인, 청소년, 성소수자들, 당신처럼 가족과 저녁 식사를 하며 따스한 담소를 나누고 싶은 해고노동자들을 바라보라.

 

우리의 안락한 일상은 다른 이들과 함께 누릴 것을 슬쩍 가져온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스스로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가 비록 남루하여도 소중히 여겨야 하지 않을까? 그 하루가 완벽하지 않아도 충만하기만을 바라고 살 수 있다면 더 훌륭할 테고.

 

연극인|2013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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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9 18:39 2014/02/09 18:39

<슬라이딩 도어즈>라는 기네스 펠트로가 나온 영화와 “그래 결심했어!”를 유행시킨 코미디 코너 '이휘재의 인생극장'이 떠올랐다. 누구나 각자의 인생에서 선택하지 않았던 길에 대해 가끔 안타깝게 상상해보곤 한다. 가령 내가 대학을 안 갔더라면, 다시 성당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뭐 이런 따위 가정법 놀이 말이다.

 

중간 휴식을 포함해 2시간 40분이나 되는 긴 공연을 보면서 젊은 연극인들이 느끼는 무기력과 쓸쓸함이 마구 다가왔다. 우리는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어디로 갈지 몰라 좌표를 잃고 방황하며, 무수한 우연 위에 흩어진 외로운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연극은 어느 정도 유쾌했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많은 선택을 강요하는지….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1963, 미국의 시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말하지 않더라도 우린 반드시 둘 중 하나의 길만을 선택하게 되어있기에 포기한 길에 대한 아쉬움이 생기기도 쉬운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지나버린 선택을 5년 뒤, 10년 뒤 계속 아쉬워한다는 것은 너무 청승맞아 보인다.

 

신자유주의가 만개한 지구에서 사람들은 나날이 더 오래 일하고, '고객님' 대접을 받으며 소비의 유혹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해야 하고, 더 잘 나야 하고, 더 빠르게 달려야 하고, 더 젊고 아름답고 건강해야 한다. 심지어 노는 시간마저도 계획적으로 효율적인 여가를 보내지 않으면 바보가 될 것만 같은 시대가 아닌가.

 

그런 어떤 때의 한물간 인문사회과학 계간지 [시대비평] 사무실 사람들이 보내는 절망스러운 일상을 그린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 이 연극을 보면서 90년대에 대학을 입학하고 졸업한 나와 지금 2~30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슬쩍 견주어 본다.

 

캠퍼스의 낭만이라는 실종된 말을 누린 마지막 세대일 수도 있는 나는 실패와 도전, 좌절과 재기의 기회마저 차단당한 20대들에게 막연한 죄의식마저 느낀다. 학생이니까 치기 어린 실수를 하고도 큰 책임을 질 필요도 없고, 물정 모르고 덤비다 폭삭 무너지는 느낌 속을 허우적거리며 술에 빠져 지낼 수도 있었던 나의 20대에 비하면 삭막하기만 한 오늘을 버텨야 하는 그들이 느낄 압박감은 얼마나 클까? 그 답답함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시대비평]을 지켜온 김남건 같은 선배들의 투덜거림을 보자면 참 한심스러울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과연 우리에게 타인의 일상에 대해, 타인의 삶에 대해 섣부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나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다. 쓸데없는 일, 소용없는 일 하면서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이 어이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세상 어떤 일이 쓸데없고 소용없는 일인가?

 

필요한 자료를 찾아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늘 감탄하고 만다. 요즘이야 광고성 게시물이 더 많지만, 몇 년 전만 해도 한 가지 단어만 검색해도 관련된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보석 같은 정보들을 찾기가 훨씬 쉬웠다. 자료를 정리해 놓은 그들의 잉여짓, 허튼짓, 쓸데없는 짓으로 나는 필요한 지식을 여러 책 읽지 않아도 가뿐히 수렴할 수 있었다. 어쩌면 사회를 서서히 변화시키는 힘이란 것도 비슷하지 않나 싶다. 당장 돈이 되는 일도 아니고, 자기의 명예를 높이는 일도 아닌데 희망버스를 타고, 대한문 분향소에서 시민 상주단을 자처하며, 소외와 차별이 자행되는 현장 곳곳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돈 벌어야 하고 성공해야 하는 세상에서 모두 함께 느리게 살자고 말하기는 참 어렵고 또 부질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내가 살아보지 않은 지난 선택지를 후회하고 안타까워하며 사는 것보다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을 사랑할 수는 없는 걸까. 당장 돈도 안 되고 밥도 안 되는, 남들 눈에 쓸데없어 보이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이 순간의 행복을 만끽하는 것도 썩 괜찮은 인생살이 방법인데 말이다. 그리 살다 보면 내가 선택한 인생의 순간순간이 소중하고 애틋한 만큼 타인의 인생, 타인의 일상에 대한 넓은 오지랖과 판단도 조금은 덜 수 있을 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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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9 11:25 2014/02/09 11:25

연극 <일곱집매>를 보러가는 길. 대학 3학년 가을, 문화인류학 수업의 한 강의시간이 떠올랐다. 몇몇 사람과 조를 짜서 나름 열심히 준비하여 발표했는데, 사창과 공창, 매춘에 관한 주제였을 것이다. 의외로 흥미진진했던 발표, 호기심 어린 동료학생들의 눈빛, 독선적인 남학생들과 논쟁했던 이미지가 떠올랐다. 사창이라는 제도가 없었다면 모든 여자는 성치 않을 것이라는 협박성 발언을 하나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반론했던 복학생 남자들에게 나도 만만치 않게 대거리를 했었다. 나 역시 페미니즘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으면서 페미니즘을 폄하하고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었으니 좋은 토론은 분명 불가능했다. 누구의 얘기도 제대로 들을 줄 몰랐던 ― <일곱집매>의 중심인물인 고하나의 말을 빌리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 스물 몇 살의 나는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 많았을까? 나라가 포주를 자처했던 역사를 다룬 이 연극을 보러가는 길에 그 수업을 떠올리고 문득 부끄러웠다.

 

역사는 이전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우리는 그 기록을 통해 지나간 과거를 기억하고 지금, 여기의 길을 찾는다. 그런데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지배계급 중심의 기록이다. 그 역사에는 힘없고 소외당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없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사람들, 누군가의 기억에서 지워지는 사람들, 아니 아예 자신의 존재 자체마저 부정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측면에서 최근에 ‘구술생애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많아지는 것 같아 반갑고 존경스러운 마음이다. 이 작품도 이양구 작가가 오랜 시간 기지촌 할머니들의 삶을 취재하고 자료조사를 하는 중에 만난 연구자들에게서 동기부여를 받아 구상이 시작되었고, 그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구술생애 기록물이 어우러져 탄생했다고 한다. (실제로 공연의 3막에서 하나와 순영의 대화는 연구자들의 기록물에 적힌 할머니들의 증언이 많이 활용되었다고 한다.)

 

연극 <일곱집매>는 기지촌에서 살아온 여인들의 삶이 그 이전 역사인 종군위안부와 오늘의 여성 이주 노동자에 끊임없이 연결되고 있음을 떠올리게 하면서 우리 근현대사에서 점차 지워져가고 있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준다.

 

처음, 고하나는 솔직하게 그들의 상처를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어쩌면 자신의 상처를 골똘히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일 테다. 타인을 통해, 그의 상처와 아픔을 통해 나의 아픔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얼마나 행운인지……. 가슴으로 대화할 용기를 낸 하나에게, 역시 마음을 닫아걸고 남에게 곁을 주지 않던 순영언니가 용기를 내어 “내 이름을 실명으로 써줘요”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가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순간 기지촌 여인들이 겪었던 아픔과 이야기들이, 그저 추상적이기만 하던 그들의 상처가 내게 살아서 다가왔다. 꽉 막히고 독단적이라 남에게 제 말 한마디 더 보태기에만 기를 쓰던 내게도 두루두루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것은 내가 살아온 날들과 여러 경험, 기억들이 만들어낸 좋은 결실일 것이다. 옛날에 아팠다는 흐느낌, 지금 고통스럽다는 절규, 자기 존재를 드러낼 수 없어서 상실감에 휩싸인 뒷모습. ,밀려나고 배제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과 거친 울음소리를 쉽게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나도 그 사람들과 별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도대체 다른 사람과 다른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들의 기호는 시시각각 변하고,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기준도 시대별로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예전에는 왼손으로 글씨를 쓰거나 밥을 먹으면 기를 쓰고 고쳐주는 어른들이 많았다. 그저’재수 없다, 복 나간다’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이유도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누구도 왼손으로 글씨를 쓰든 밥을 먹든 뭐라 하지 않는다.

 

10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청년 성소수자 육우당(술, 담배, 수면제, 파운데이션, 녹차, 묵주 여섯가지와 친구 삼았다는 뜻이라 한다) 추모기도회가 열리던 곳에 여전히 자신들을 드러내지 못해 사진촬영도 금지해야하는 성소수자들이 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힘센 세력들은 동성애를 처벌하는 법안까지 마련하여 세상을 더 시끄럽게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은 묵묵부답, 무심하게 흘러흘러 이 사건들을 떠나보내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나는 계속 찾아들어보려고 한다. 그런 아우성을 찾아가서 그냥 듣고 오는 일이라도 해보려고 한다. 그래서 그 모든 증거들을 마음에 담을 수 있는 데까지 담아 간직하고 기회가 올 때마다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는 것이다. 그것이 아파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살아있는 증거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기도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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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9 11:21 2014/02/09 11:21

장 폴 벤젤의 「머나먼 아공당주」를 원작으로 한 <남아있는 나날들>을 보고 극장을 나오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온통 마지막 장면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지금 여기, 함께 살기, 존중과 이해, 나이 든다는 것, 정신의 유지, 육체의 노화, 이렇게 서로 연관 없는 것만 같은 말들이 이리저리 휘젓고 다녔던 것이다.

 

젊은 시절 아공당주라는 도시에서 금속노동자로 살던 이들 부부는 은퇴 후 한적한 시골로 이사를 온다. 그러나 이웃들과의 교류도 없는 이들에게는 전자제품 외판원마저 반가운 손님이다. 남편 조르주는 아직 혈기왕성한 자신을 은퇴시키고 퇴물 취급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를 잘 조절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에만 머무르며 아내와 이야기도 잘 나누지 않다가 뜬금없이 잠자리를 요구하고는 마리가 거절하자 혼자 토라진다. 그들의 딸은 부모에게 자주 찾아오지도 않고 연락도 뜸하여 부부는 종종 서운한 속내를 비친다. 결국, 연극에서 부인 마리는 죽어서야 남편의 따스한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다른 인생을 살던 누군가와 한 집에서 함께 산다는 것이 때론 고독하고 외로운 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존중하고 ‘함께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혹은 상대방의 처지에서 그를 배려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도 힘든 일인가를.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어쩌면 그 상대가 죽어서야 이루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 사람들이 죽고 또 죽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혼자 살다가 혼자 죽어가는 노인들은 물론이고 생활고에 시달리던 가수나 작가, 영화인들이, 불이 난 집에서 움직이지 못한 장애인들이, 직장에서 해고된 사람들이, 오갈 데 없어 항거하는 철거민들이 지난 몇 해 사이에 줄줄이 죽어가는 데도 그것을 제대로 보도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려 애쓰는 언론도, 진심으로 깊이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도 드물다. 그들의 삶과 죽음이 우리의 일이 아니라 여기기 때문이거나, 아름답지 못한 현실 사회의 일면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리라.

 

게다가 요즘은 오래되고 낡은 것은 허물어 없애고 깨끗하고 번듯한 것으로 갈아치우는 시대가 아닌가. 이제는 누구도 오래된 가전제품을 고쳐 쓰지 않을뿐더러 구멍 난 양말도 깁지 않는다. 그냥 버리고 새로 사면 그만이니까. 문제는 이런 소비사회에서 소외되는 것이 오래된 물건이나 낡은 구조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에 있다. 조르주와 마리가 시골에서 보내는 일상에서 발견되는 소외, 그 때문에 두 부부가 느낀 슬픔과 아픔을 관객들에게 전하려는 연출과 배우의 노력이 충분히 느껴졌다.

 

나는 예전부터 공포영화나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영화들을 잘 보지 못한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데 왜 그렇게 힘든 것을 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아름답고 예쁜 이야기를 보고 듣고 기쁨을 누리는 것이 궁극적으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목적이 될 수도 있지만, 인간의 삶이나 역사 속에 아름다움만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많은 음악과 영화, 문학에서 수없이 다루며 아름다움으로 포장한 사랑이라는 것도 사실은 얼마간의 아름다움과 대부분의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라 성장하면서 갖가지 고통과 실패를 경험하고 밑바닥까지 내몰렸다가 이를 극복하고 이겨내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끝없이 반복하며 사람으로 완성되어 간다는 것 역시 우리가 모두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가 더욱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름다운 이야기,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라 거칠고 투박하고 불편한 것들, 힘없고 볼품없고 보잘것없는 사람들, 실패와 상처로 얼룩진 과거의 경험들이 아닌가 싶다.

 

성공 가도를 내달리며 더 많은 돈과 권력을 좇아 다른 존재들을 밀치고 무시하고 짓밟으라고 가르치는 세상에서, 아이를 기르는 엄마로서 실패할 수도 있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어떻게 가르치고 실패할 기회를 줄 수 있나 고민하는 중인데, 이런 시선을 담은 연극을 만나고 주렁주렁 심사숙고할 기회를 잡으니 정말 기쁘다. 
 


* 이 글의 제목은 2013년 1월 28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정규직노동자 윤주형씨가 작성한 어느 게시글에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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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9 11:15 2014/02/09 11:15

1등과 최고만을 기억하는 세상. 극적인 성공만을 추앙하는 광기어린 요즘 세상이다. 누구라도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사람들이라면 - 김기덕 감독이거나 싸이거나, 김연아 거나 - 국격을 한껏 높여준 인물로 추앙해마지않으며, 그들에 대해 열광하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해져버리는 묘한 집단 무의식에 빠진 사회. 이 시대를 살아갈 힘을 얻으려고 우리들은 따스했던, 지나온 어느 시절을 추억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 추억을 헤집어 펼쳐내는 작품들이 근래 음악이나 드라마, 영화와 공연으로 끊임없이 창작되는 근간일지도 모르고.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교실을 뛰어다니며 서로의 가슴을 건드리며 까르륵 거리고, 까칠하게 구는 선생님들에 대한 헛소문을 지껄이며 낄낄대던 학창 시절을 기억 할 것이다. 어떤 아이들은 우정 이상의 사랑을 나누고 어떤 아이들은 자기 혼자 고매한 세상 속에서 사는 냥 도도 했었지. 대부분의 평범한 아이들은 음악과 대중가수와 라디오에 열중하고 무리지어 다니며 어른들이 못하게 했던 것들을 시도하려 하곤 했었지.

 

잔잔한 연극 <정물화>는 이런 여학생들의 학창시절을 그린다. 공연이 진행될수록 어떻게 남자 연출가가 이토록 섬세하게 여자아이들의 감성을 표현해 낼 수 있는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유미리의 감성과 성기웅 연출이 꽤 괜찮은 조화를 이루면서 관객을 추억으로 이끌었고, 치하루와 카오리는 지금 고등학교 교실에서 데려온 것처럼 여고생다운 모습 그대로를 연기해 우리를 웃게 해주었다. 우울해 보이는 두 소녀 후유미와 나나코, 소년 같은 모습의 나츠코, 수녀 두 명까지 연기자들의 연기도 훌륭했다. 묵주를 목에 건 수녀 의상이 좀 거슬렸을 뿐, 깔끔한 조명과 무대도 소녀시절의 학교를 떠올리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해주었다.

 

공연이 따스했던 만큼 생각나는 일들이 많았다. 첫사랑과 이루지 못해 맘 아팠던 몇몇 짝사랑들, 그 때 읽던 시, 소설, 나를 열광케 했던 음악들, 친구들과 나누던 편지, 공부한다며 큰 잔에 커피를 타 놓고 라디오에 귀 기울이인 채 쉴 새 없이 끄적이며 지새웠던 밤들… - 그때 서울의 밤하늘이 붉다는 것을 처음 알고 놀라워했던 기억이 난다. 또 얼마나 많은 말들을 의미도 모른 채 내뱉고 살아왔는지……. ‘운명의 장난’이라거나 ‘고독’이라거나 혹은 ‘민주주의’며 ‘혁명’이라는 말까지. 더욱이 다 자란 나를 아이 취급하는 세상에 대해선 또 얼마나 불만이 많았던가. 하지만 내가 늘 모자라고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는 또 얼마나 부끄러웠는지도 기억하고 있으며, 내가 되뇌던 말들이 엄청난 무게를 지녔음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그런 말들은 이제 차마 입에 올리지도 못하고 있다.<

 

열 살부터 스물세 살까지의 시기는 건너뛰었으면 좋겠다는 연극 <정물화>의 대사처럼 나도 다시 새로운 생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해도 스무 살 언저리로는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마무리 지으려는 마음에 결정했던 늦은 나이의 결혼과 출산, 육아는 나에게 현실적인 어려움을 주고 지치게 하지만, 인생에서의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가족들과의 하루하루를 쌓아가며 이루어가는 것임을 알게 해 주었다.&

 

여전히 나는 꿈꾸는 존재다. 백 살까지나 늘어나 버린 인간의 시간이 가끔 무섭고 두렵기는 하지만 그만큼 길어진 인생을 어떻게 행복한 시간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 두려워하면서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학창시절에는 내 인생도 거창할 것 같았고 꿈도 원대했으나 내 생각 혹은 계획대로 인생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좌절하기도 여러 번. 이제는 평범하게 별 일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기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때,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 알았더라면 덜 불안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늘 불안하면서도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때가 바로 10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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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9 11:09 2014/02/09 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