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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윤리학'과 마주하는 책 읽는 시간
붉은몫소리 2013.6.17
여기 한 권의 책이 있다. [하늘을 덮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진실] - 잊고 싶은,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 1639일 생존과 지지의 기록(아래 [하늘을 덮다], 메이데이출판사). 기록紀錄이다. 그대로 적은 것이다. 생존자는 다큐멘터리라고 말했다. 생존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을 지켜줄 ‘진실’이라는 칼 하나만 가지고單刀 무서운 ‘세상’ 속으로 뛰어들었다直入. 이제 우리들이 답해야 할 때다.
기억하자는 것이다. 오래전 머릿속에 지워져버렸더라도 다시금 떠올리자는 것이다. <하늘을 덮다>는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핵심 당사자 조직인 민주노총과 전교조의 공식적인 백서가 아닌 까닭에 발간되는 순간 논쟁에 휩싸일 운명을 타고났다. 그런데 이상하다. 출간된 지 보름이 지나가는데 너무 조용하다. 증오보다 더 무서운 건 무관심이라고 하던가. 책에 대한 반응이 없다. 몇몇 일간지와 웹진에 단신으로 소개되는 게 고작이다. 왜 그럴까? 문제제기도 지지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다. 반론도 좋고 격려 글도 좋으니 뭐라도 나와 주면 좋겠다는 게 글쓴이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나의 바람이다.
책을 읽어본 어느 누구라도 오늘을 1654일로 또는 1639일+a일로 한번 바라봐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생존자의 처지가 되어보고 조직의 입장이 되어보고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한번 대입해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공감까지 바라지 않고 사실이라고 인정해주기를 바랄 뿐”이라는 생존자의 목소리를 그냥 들어주기만 하면 된다.
삶은 타자를 통해 완성된다. ‘타자의 윤리학’으로 알려진 레비나스는 <시간과 타자>라는 책에서 “시간은 실로 주체와 타자의 관계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인간이란 나 아닌 타인을 만났을 때 진짜 나가 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누구든 타인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타인은 나의 전제다.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만나며 타자와 관계 맺게 되는가? 우리는 어떻게 생존자와 만나야 하며 생존자와 관계 맺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조직 공동체와 만나야 하며 조직 공동체와 관계 맺어야 하는가? <하늘을 덮다>는 ‘타자의 윤리학’에 대해 진지하게 음미하게 한다. 1639일이라는 생존자의 시간에서 나는 몇 시간을 사건 또는 그녀와 대면했을까 자문하게 만든다.
거의 대부분의 성폭력은 공동체 내 성폭력이다. 이른바 길거리 ‘묻지마 성폭력’이 아닌 경우 가족 내에서, 학교 안에서, 직장 안에서, 군대 안에서, 감옥 안에서, 그리고 운동사회 내부에서 성폭력은 일어난다. 아버지인, 스승인, 상사인, 동료인 남성들은 자신의 성별 권력에 기대어 여성을 성적으로 학대한다. 인간의 존엄은 설 자리를 잃는다. 남는 것은 오로지 가해와 피해 구도뿐이다. 사회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성폭력을 벗어날 길도 없어 보인다.
‘운동사회 성폭력’이라면 일반사회의 그것과는 달리 잘 풀리지 않았을까를 생각하게도 된다. 그러나 기대는 배반된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된 것은 없었다. ≪하늘을 덮다≫는 성폭력 피해를 가중시키는 방치와 묵살의 공모 연장선을 ‘가부장적 폭력’이라 이름 붙이며, 조직적 은폐, 절차적 지연, 책임 떠넘기기, 고의적 소문 유포 등으로 조직이 생존자를 어떻게 파멸해갔는지를 내밀히 보여준다. 이것은 곧 조직 스스로 자기 조직을 파괴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들은 놀라우리만치 태연하게 웃고 떠들었다…” 전교조가 그랬고 민주노총이 그랬다. 운동이나 진보가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사회변혁의 기치를 내세우는 운동이나 진보라면 더더욱 성적인 감수성을 갖고 평등 속의 차이를 실현해나가야 한다.
‘성적 차이의 철학’적 관점에서 ‘성별화된 권리’를 강조한 이리가레는 2000년 유럽헌법 제정 작업에 참여하면서 ‘시민권의 성별화된 정의’를 제안했다. 여성과 남성 두 주체 사이에 ‘인정의 변증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둘 사이에서 시작된다’는 지극히 단순한 말은 남성 중심의 하나라는 보편만이 유일한 것인 양 작동되는 노동자조직과 운동사회를 내려치는 죽비소리 같다. 새로운 사회는 여성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한 사회라는 소리다. 정신이 번쩍 들지 않는가?
성차별주의와 가부장적 남성 중심의 문화적 동일성을 추구하는 경향은 조직 문화와 관행, 그리고 제도들을 합리화한다. 민주노조 활동가들의 실천 논리는 평등주의, 공동체적 연대정신, 보편적 인간해방과 깊은 관련이 있을 터. 가부장적 문화에 대한 인식론적 장애를 극복하고 성차별주의에 기대어있는 가부장제적 통치체제와 대면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2000년 100인위의 토양 위에서 반성폭력운동을 펼쳐온 노동조합과 운동사회는 지금 어디쯤 와있는가? 중간점검을 할 때이다. 반성폭력 규약과 성폭력 사건 처리가 일반화되는 등 조직 공동체에 ‘여성주의 규범’이 자리 잡았다 하더라도 성차별과 성폭력을 재생산하는 구조가 만연하다면 문제를 다른 축에서 볼 필요가 있다. 공동체에서 구조적이고 일상적이고 극단적인 폭력이 난무하는 이상 여성의 육체에 대한 자기 소유가 온전히 여성 자신에게 속해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별화된 권리’로서 여성의 권리를 인지하지 못하는 공동체 자체가 성폭력을 재생산하는 구조다.
민주노조운동과 운동사회는 가부장제적 통치체제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실천 의지를 천명해야 한다. 가부장제적 통치체제를 자본주의-가부장제-인종주의적 사회구성체에 대한 계급투쟁의 한 형태로 인식하고 자본주의-가부장제-인종주의적 사회관계를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 장치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다. 성차별과 성폭력은 노동자조직과 운동조직에 내재한 평등에 기초한 열린 민주주의 원리를 근저부터 훼손한다. 노동자문화의 일부인 성차별과 성폭력을 정면에서 대면해야 한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가 노동자조직의 공동체 문화를 이끌어온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 할지라도 어느 한 성의 억압과 배제를 전제로 한 노동자주의가 더는 지탱될 수 없음을 성찰해야 한다. 새로운 노동자형상의 인식과 소통에 인지적 장애를 초래하는 가부장제적 통치체제가 역사적 자본주의에서 생물학적 차이에 기초한 특정한 차별의 유형-여성과 인종-으로서 자본의 형상일 수 있다는 접근이 요구된다. 가부장제적 통치체제에 대한 반대 투쟁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이며 계급투쟁인 동시에 해방투쟁일 수밖에 없다.
<하늘을 덮다>를 읽을 또 읽은 여러분들에게 부탁한다. 부디 <하늘을 덮다>의 번역본을 많이 만들어주었으면 한다. 책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밝혀주고 추가해야 할 것이 있다면 채워달라는 것이다. 질타가 됐든 응원이 됐든 <하늘을 덮다>의 번역본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늘을 덮다>가 근간이 되어서 가부장제적 통치체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제2, 제3의 <하늘을 덮다> 번역본이 나오기를 바란다.
책을 내는 데 함께한 지지모임 분들도 마찬가지다. 책에 다 담지 못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늘을 덮다>의 다른 판본으로 내놓았으면 한다. 문제점도 좋고 논쟁점을 제시해도 좋다. 솔직히, 하고 싶은 이야기의 반의반도 못했을 수 있지 않겠나. 특히 출판을 코앞에 둔 한 달 동안에 분출된 생각의 차이들은 운동사회 반성폭력운동사에 새로 써야 할 논쟁과 평가이지 않을까 싶다. 여러분의 좀 더 능동적인 글쓰기가 기존 반성폭력운동의 표준화된 구도와 감각의 분할을 재배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자가 만드는 일터> 6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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