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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하타(赤旗), 붉은 깃발

 

첫 번째 순서로는 최근 독도 문제로 우리와 사이가 삐그덕 거리고 있는 이웃 일본의 대표적 좌파 일간지 ‘아카하타(赤旗)‘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조중동이라는 별칭이 있듯, 일본에도 이른바 3대 일간지가 있는데 아사히, 요미우리, 산케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산케이는 뭐 조선일보의 자매 신문(--;;)으로 불리는 신문이고 미디어재벌이자 프로야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모회사인 요미우리 또한 머 오십보 백보입니다. 그나마 아사히가 자유주의적인 신문으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아이구 아카하타 이야기 한다 해놓고 딴 신문들 이야기를 잠깐 했네요. 하여튼 이른바 일본의 삼대일간지에도 못미치고 니혼게이자이 같은 거대 신문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아카하타는 만만찮은 규모와 영향력을 자랑하는 신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아카하타는 일본 공산당의 기관지로 창간됐습니다만 편집권은 완전히 독립되어 움직이는 매체입니다. 한 때는 아카하타 구독료로 일본 공산당이 먹고 산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인기있는 신문이었구요. 최고 전성기라고 할 수있는 1980년에는 유료 정기구독자 수가 355만에 달했을 정도라고 하는 군요. 최근에는 많이 쪼그라 들어 200만도 안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만...


아카하타는 일본공산당이 창당한지 6년이 지난 1928년에 창간됐습니다. 아카하타가 왜 아카하타가 되었는지 잠깐 유래에 대해 말씀드릴께요. 일본에서는 1898년 사회주의 연구회라는 조직이 결성되었습니다. 이 연구회는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해산됐지만 후일 사회민주당으로 전화했습니다. 1906년 창당된 일본사회당은 같은 해 동경시 정부가 전기요금을 인상한 것에 대항해 대대적 민중운동을 전개하다가 경찰기동대와 대규모 충돌을 벌였고 이듬해인 1907년 대규모의 총파업을 진행해, 결국 일본군이 출동해 이들을 진압하기에 이르렀죠.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 정부는 다시 사회당을 해산시키고 당원들을 대규모로 구속시켰습니다. 이 때 구속된 사회당원들이 출소하면서 붉은 깃발(적기, 일본어로 아카하타죠)를 들고 행진하는 것을 다시 경찰이 공격해 또 당원들이 구속된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이 이른바 그 유명한 아카하타(赤旗)사건이고 그 이름은 일본 공산당의 기관지 명인 붉은 깃발, 즉 아카하타(赤旗)로 남은 것입니다. 헥헥..아휴 설명하느라 힘들다..물 한 잔만 마시구 계속 할께요.


이런 역사 속에서 “아카하타는 여러분들 자신의 기관지다”라는 감동적인 창간사와 함께 1928년 7월 15일 제 1호가 발간됐습니다.


일본이 우리를 식민지배 했던 탓이 크겠지만 아카하타와 우리나라는 관계가 깊습니다. 특히 식민지배 당시에 아카하타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몸소 실현한 매체였죠.


아실랑가 모르겠지만 일본의 쉰들러로 불리는 후세 다쓰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엠비씨 PD 수첩에서도 다뤄진 이 인물에 대해 우리 정부는 지난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기로 결정했죠. 여담입니다만 일본 사회주의자에 대해서는 작년에 건국훈장이 추서됐는데 우리 사회주의자에 대해서는 이 보다 더 늦은 올해 훈장이 추서된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죠.


하여튼 후세는1902년 메이지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그 이듬해부터 일찌감치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한일합방 직후인 1911년에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을 발표해 경찰의 조사를 받기도 했구요.  2·8독립선언 사건으로 검거된 최팔용·백관수 등 조선 유학생의 변론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조선 독립운동 지원에 나섭니다.


그는 아카하타 창간호에서 “한일합방은 어떠한 미사여구로 치장하더라도 실제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면서 ‘조선민중의 해방운동에 특단의 주의와 노력을 바칠’ 뜻을 공개적으로 표명했습니다. 이후에도 비슷한 활동을 쭉 펼쳐 어려움을 겪었구요.


1931년 3월 7일 아카하타는 “조선, 대만 등 식민지의 독립”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합니다. 한달 후인 4월 일본 공산당 정치국 테제 초안에는 그 문구가 그대로 슬로건으로 채택되고 일본공산당은 ‘민족부’를 설치하기에 이릅니다. 민족부는 조선과 대만 내의 공산주의세력과의 연락유지, 일본내에 거주하는 조선, 대만인의 조직화가 주된 목적이다는군요.


자 그럼 1931년 8월 30일자 아카하타 의 한 부분을 들여다 볼까요?


 “일본 내에 있는 조선인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것은 일본 프롤레타리아의 중대한 임무다.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의 투쟁은 일본프롤레타리아가 해야 할 책임이다. 우리는 공장에서 직장에서 조선인 일본인 노동자의 공동투쟁을 조직했고 또 조직하고 있다. 그러나, 결코 충분치 못하다. 조선인노동자에 가해지는 비인간적 학대에 대해, 노예적 대우에 대해 그리고 조선인노동자 및 혁명적 인텔리겐챠에 가해지는 야만적 취급과 고문 등에 대해 강력한 반대투쟁을 조직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일본 프롤레타리아의 치욕이다. 조선인노동자 대중을 공산주의측에 획득할 것, 反일본 제국주의의 강한 힘으로 조직할 것-이것이 일본 프롤레타리아 및 조선공산주의자의 임무이다."


이건 뭐 단어 몇 개만 바꾸면 현재 우리나라 어딘가에서 나온 문건이라고 해도 속을 정도군요^^


일본제국주의가 강고해지면서 아카하타는 엄청난 탄압을 겪고 폐간되기도 하죠. 2차대전 종전 이후에도 못말리는 반공주의자인 맥아더 군정정부로부터 엄청난 탄압을 겪고 정간, 편집진 구속을 밥먹듯이 당합니다. 전공투 시절의 아카하타는 말할 필요도 없겠죠.


재밌는 가쉽 거리 하나 알려드릴께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좋아하시는 분들 많을텐데요. 미야자키 하야오의 데뷔가 바로 아카하타의 청소년판인 ‘소년소녀신문’을 통해 이뤄졌답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사회주의자인 하야오 감독은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정치 하고 경제가 아니라 정치경제학이요)을 전공했다는군요. 대학시절 그는 ‘소년소녀신문’에 ‘사막의 백성’이라는 만화를 연재하면서 애니메이션과의 행복한 만남을 시작했답니다. 물론 저는 ‘사막의 백성’을 본적은 없습니다만--;; 주 내용은 맑시즘과 공상과학이 결부된 것이었다는구요.(상상들 해보세요. 어떤 내용일지)


자 이것으로 뉴스메이커 13호가 드리는 ‘세계의 진보매체’ 1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어때요? 재밌으셨나요? 아니면 너무 길어서 혹은 딱딱해서 재미가 없으셨나요? 소개글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여러분의 리플, 트랙백을 먹고 산답니다. 제가 굶어죽지 않도록 일용할 양식 많이 보내주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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