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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3/31
    민중언론의 전사 '외피소드 외전1'-(뉴스메이커 삼만호)(3)
    새민중언론
  2. 2005/03/31
    새 민중언론 창간제안자모임, 4월 5일
    새민중언론
  3. 2005/03/31
    [명칭공모] 레디안. Redian(3)
    새민중언론
  4. 2005/03/31
    [속보] 새 민중언론 현재 가입자 71명으로 확인 돼
    새민중언론
  5. 2005/03/30
    4월 5일 오후2시, 창간제안자 전체모임 열린다(1)
    새민중언론
  6. 2005/03/30
    간장 오타님의 [그 길을 지켜보며....]는 에피소드 4 로. ㅎㅎ(1)
    새민중언론
  7. 2005/03/29
    Monthly Review-下(5)
    새민중언론
  8. 2005/03/29
    Monthly Review-上(7)
    새민중언론
  9. 2005/03/29
    미디어참세상의 전사(前史)를 기록하며 -뉴스메이커 22호(7)
    새민중언론
  10. 2005/03/29
    준거집단....(4)
    새민중언론

민중언론의 전사 '외피소드 외전1'-(뉴스메이커 삼만호)

아~ 안녕하세요. 뉴스메이커 30000호입니다. 뉴스메이커 22(투투)를 보면서 아, 그렇구나 나도 그러면 30000(삼만)으로 해야겠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저, 사실 블로그라는 곳에 공식적인 문건들 말고 이런 글은 처음이랍니다. 좀 재미없더라도 첨 쓰는 글이니만큼 여러 블로거들의 응원부탁합니다. 아자~

투투님이 에피소드 2를 써주셨는데, 아마 이 글은 에피소드 1에 해당 할 수도 있겠지만 정확히 말하면 참세상 방송국 설립이전 이야기이기 때문에 참세상 '외전(外傳)' 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야기 시작해 볼까요!



이야기의 출발은 그러니까 1996년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 26일 새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때 신한국당으로 기억하는데 여당에서 새벽에 무슨 비밀작전 하듯이 국회에 모여서 단 몇 초만에 노동법, 안기부법을 비롯해 수백개 법안을 날치기 처리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게 그 악명높은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사건이었지요. 아~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12월 18일 민주노총에서 최종적으로 총파업 철회를 선언하고 나서 모두가 손을 놓고 있었죠. 저도 머리도 아프고 해서 쉴 겸 시골에 내려가 있었는데 아침에 그 뉴스를 보고야 말았습니다. 설마하고 있다가 덜컥하면서 당한 것이지요.

뉴스보고서 너무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아침밥 먹고 바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당시 같이 활동하던 정보통신연대 사람들하고 연락하다가 그날 저녁에 어느 단체 사무실에 모두 모였죠. 다들 흥분해 있었습니다. 노동자들도 총파업하는데 우리도 뭐라도 해야하지 않느냐, 이대로 있으면 우리는 인간도 아니다...뭐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그래 좋았어, 한번 해보자!'며 만든 것이 '총파업 통신지원단'이었습니다.

대부분 통신인들이었던 통신지원단 사람들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했습니다. (여기서 전부가 아니라 '대부분 통신인'이라고 한 이유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뉴스메이커 30000호 때문에 그렇습니다. 30000호도 참여했는데 당시에 이메일이 뭔지도 몰랐고 게시판에 글을 어떻게 올리는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거의 컴맹이었거든요..^^)
암튼, 이 사람들 제일 잘하는 일이 홈페이지 만들고, 온라인으로 지지서명받고 파업지지 여론형성하고 파업소식 알리는 것이었죠. 인터넷과 당시 하이텔, 나우누리, 천리안이라는 정보통신망을 잘 아는 네티즌들이 많았으니까 수백개 동호회 대문이랑 홈페이지 첫 화면에 블랙리본도 달고, 한국투쟁 소식을 영어로 번역해서 여기저기 메일링리스트로 뿌리니까 해외에서도 연대 메시지들도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통신지원단 했던 사람들, 지나치게 헌신적이었습니다. 12월26일부터 시작해서 수요파업으로 전환한 1월 중순까지 서로 집에 안가기, 잠 안자기, 안씻기 경쟁을 하면서 사무실에서 벌레처럼 살았드랬습니다. 12월31일과 1월1일에도 집에도 안 가고 밤새워 속보 만들고 지지성명 조직하고 외국에 한국의 총파업 상황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저것 마음속으로 해보고 싶었던 건 다 해봤는데, 당시 참세상(나중에 진보네트워크센터가 됩니다)이라는 독립적인 정보통신망에 대화방을 개설하고 최초로 온라인 토론회까지 개최했지요

아무튼 할 때는 쫌 힘들었는데 해놓고 보니까 재밋기도 하고 뭔가 온라인으로 새로운 실험들을 계속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시간이 쫌 지난 후에 그 때의 주역들이 다시 뭉쳤습니다. 이번 미션은 오디오 생중계방송이었습니다. 민주노총에서 98년 7월에 총파업을 한다고 했는데, 이 때를 맞춰 총파업 집회를 인터넷 생중계하고 해외에는 영어로 동시통역해서 전송하는 실시간 중계 방송을 기획했지요. 뭐 오디오 중계방송가지고 호들갑떨고 그러냐는 분들 계시겠지만 당시 컴퓨터, 386이면 거의 최고수준이었습니다. 동영상 꿈꾸려면 아직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할 형편이었으니까, 오디오 중계방송, 당시 최신 기술이었습니다.

준비도 열심히 했습니다. 리얼서버 설치해서 돌려도 보고, 최대 동시접속수도 확인해보고, 리허설도 다 했죠. 남은 것은...민주노총 총파업 선언이었습니다. 해외에도 동네방네 소문다 내놨죠. 영국 레이버넷에서는 탑 화면에까지 올려서 한국 총파업 들으라고 광고까지 한 상태였습니다.

정부와 민주노총의 최종협상이 어떻게 될까 지켜보면서 그날이 왔습니다. 이른 아침 민주노총 위원장이 긴급기자회견을 연다고 합니다. 우리는 파업선언만 해라 해라하며 고사를 지냈는데, 글쎄 파업을 철회한다지 뭡니까?! 아~ 지금 생각해도 열 받는 일입니다. 며칠 밤새운 것은 둘째치고 외국에다가 온갖 설레발 다쳐놨는데 이거 원 민망해서리... 암튼 파업철회소식에다가 살짝껴서 '중계방송도 취소합니다'고 써서 올려놨지요.

그러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고 식칼로 노동자 때려잡던 재벌회장이 책을 낸지도 어언 1년이 다 가던 무렵 결국 성공하고 말았습니다. 98년 11월, 서울 국제민중대회 총결산과 민중대회 실황을 인터넷 오디오로 생중계했습니다. 이게 운동진영에서는 최초로 진행된 실시간 오디오 중계방송이었다고 하더군요.

당시 스튜디오에서 사회자와 게스트가 나와 국제민중대회 총결산을 진행하고, 중간에 민중대회 현장을 불러서 민중대회 실황중계를 했는데요, 자 여기서 잠시 그 때 사회자와 현장PD를 맡았던 두 사람이 출연한 진보넷 광고를 듣겠습니다.(클릭하고 3초만 기다려주세요)



현장중계방송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회선 문제였습니다. 당시 회선용량이나 속도도 크지 않아서 14400bps가 최신형 핸드폰이었거든요. 거 왜 아시는 분들은 아실텐데 한 글자 입력하면 모니터에 글자들이 처음부터 차례대로 주루룩 달라붙으면서 글 쓸 때마다 그렇게 달라붙고 심지어 어떨 때는 반응도 안하고 그냥 멈춰서 가만히 서 있는 바로 그 회선속도. 사람 인내를 시험하는 한계 속도지요.

물론 돈 들여서 한국통신에 전용선 신청해서 집회장까지 끌고 들어오면 되지만 어디 돈이 있었습니까? 어차피 다 노가다로 하는 일인데요. 설령 전용선이 들어왔다고 해도 행진을 하게 되면 그 전용선 끌고 다니면서 중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무지하게 고민 많이 했습니다. 현장중계하고 싶은데 어찌하면 될까~ OTL

다들 머리를 맞대고 며칠을 고민했어요. 뭐 좋은 방법 없을까... 그랬는데 한가지 아이디어가 번쩍하면서 눈에 들어 왔습니다. 당시 인터넷폰이라는 게 생겨나서 음성을 컴퓨터로 바로 입력시키는 방법들이 나왔거든요. 그걸 보니까 현장에서 핸드폰으로 사무실 서버 컴퓨터에 연결된 전화에 전화를 걸면 음성 입력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기술팀에서 새로 장비 몇 개 사서 실험을 해봤죠..그러니까..되더라고요!!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별건가 할 수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기발한 발상이었죠.

날은 밝았습니다. 오늘은 중계방송이 있는 날. 필자는 리포터와 함께 일찌감치 집회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최종 리허설을 했지요. 진보넷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어찌된 일인지 연습할 때는 되던 전화입력이 되질 않는 거예요. 몇 번을 시도하고 컴퓨터 다시 끄고켜도 말을 안듣더라고요. 집회시작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이번에는 무조건 될 것 같아서 대대적으로 홍보도 해놨는데 또 안되면 이거 무슨 개망신!
그러나 결국은 해 냈습니다. 전화입력이 됐냐고요? 그건 실패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했냐고요? 수화기에 엠프 마이크를 대고 엠프로 증폭시켜서 이 소리를 컴퓨터로 입력시켰지요...ㅎㅎ 암튼 당시 기술팀 정말 고생 많이 했다고 합니다.

스튜디오에서 국제민중회의 총결산을 마치고 사회자가 현장을 불렀습니다. 이렇게.. "네, 노동절 집회가 시작되었나 본데요, 집회현장 연결해 보겠습니다. 오**리포터..." 당시 현장 리포터를 맡았던 오모씨의 첫 멘트 "네, 여기는 노동절 집회가 열리고 있는 종묘공원입니다. 지금 종묘공원에는..." 이었고요, 마지막 멘트는 "지금까지 노동절 행진을 마친 광화문에서 진보네트워크센터 오**이었습니다". 마지막 멘트 나가고서 얼마나 기뻣던지...

진보넷의 처음이자 마지막 리포터였던 오모씨는 당시 공로를 인정받아 지금까지 진보넷 사무국장을 하고 있다지요 아마. 그리고 스튜디오 사회자가 오** 리포터를 불렀는데, 그 이름한번 불러보고 계속 부르고 싶었나 봅니다. 사회자와 리포터는 지금 한 지붕아래에서 한 이불 덮고 같이 산다고 합니다.

한번 성공하자 기술은 날로 발전했어요. 공공연맹 파업때는 파업대오가 명동성당과 서울대로 분리되었는데 양쪽 파업대오 모습을 플래쉬로 담아서 야간 파업집회 때 상영을 하기도 하고 집회가 열리면 실시간 중계는 아주 쉽게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99년 9월 "참세상방송국"이라는 이름으로 웹사이트를 열고 첫 시험방송을 내보내면서 참세상 방송국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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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민중언론 창간제안자모임, 4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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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공모] 레디안. Redian

* 이 글은 새민중언론님의 [새 언론의 이름을 공모합니다] 에 관련된 글입니다.

이 글은 진보 블로거 molot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한글 이름 : 레디안

영문 이름 : Redian

사용가능 도메인 : www.redian.org

의미 :  Red + 명사형 어미 ian

 

해제 : 붉은 사람들 이라는 의미지요. 전통적으로 reds가 '빨갱이들'이라는 의미인데

그에 비해 redian은 약간 품격(?)이 있는 뉘앙스를 주는 듯한 장점이 있는 듯 합니다.

비슷한 것으로는 영국의 좌파 일간지 Guardian(수호자라는 의미죠)이나 한국의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신문쟁이라는 의미)등이 있네요.

 

새로운 민중언론의 기조에 적합한 이름이며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도 쉬운 장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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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새 민중언론 현재 가입자 71명으로 확인 돼

3월 23일 홈페이지(블로그) 오픈 이후 31일 오늘 현재 71명이 새 민중언론 창간 회원으로 가입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같은 사실은 뉴스메이커33호의 집요한 뒷조사 끝에 익명을 요구한 내부고발자로부터 얻어낸 것으로, 초기 회원 가입 규모가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향후 조직에 미칠 파장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내부고발자는 "월 1만원 이상 회비를 약정한 회원 60명과, 기금만 약정한 분이나 아직 cms나 계좌이체를 확정하지 않은 분이 11명인 상황이다"라고 말하고, "다만 월 약정액 외에 기금 규모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내부고발자는 "가입자는 실행단이 진행중인 설명회나 간담회를 통해 가입하기도 했지만, 홈페이지(블로그)에서 직접 가입한 사람들이 상당수"라고 밝히고, "특히 노동자가 많은 편이며, 해외에서 가입한 사람도 다수 눈에 띤다"고 설명했다.

 

실행단의 1000명 회원 조직 목표는 가능한가라는 뉴스메이커33호의 질문에 내부고발자는 "워낙에 실행단이 점조직으로 조직중인 데다가, 홈페이지를 들렀다가 충동적으로 가입하는 사람이 많아 정확한 목표를 잡기가 어렵다"며 회원 조직 과정상의 혼란상을 실토하였다.

 

한편 회원 가입자나 관심있는 사람에게 처음 조직 현황을 있는 그대로 공개하지 않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홈페이지(블로그) 운영자인 뉴스메이커13호는 "100명이 넘으면 가입자와 모인 기금 액수를 카운터로 달 예정이었다"고 얼버무렸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새 민중언론은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시행 초기부터 관료적 행정에 빠져있다며 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아래는 내부고발자로부터 입수한

'자기소개'란에 쓴 가입자의 한마디를 모은 것이다.

◇ 비디오로 다큐멘터리를 만듭니다.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며 함께 하기를 희망합니다.
◇ 노동해방 인간해방 투쟁 !!
◇ 부산의 **고등학교 교사입니다. 전교조 부산지부의 ***장 등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 반갑습니다. 저는 축협중앙회노동조합 *** 입니다. 우리들의 투쟁이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좋은기사 많이 써 주십시요. 노동자의 힘으로 바꿔봅시다.
◇ 비정규직 차별철폐연대가 쓴 작곡자이며 노동자 노래활동하는 가수 임
◇ 랄라 언니 힘내요! ^^
◇ 참세상 파이팅
◇ 참된 민중 언론의 탄생을 소망합니다.
◇ 귀 단체가 보는 세상이 내가 보고 있는 세상과 같은 지 모르겠지만,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고 생각하고 후원합니다.
◇ Make Capitalism History!! 말 그대로 더욱 탐욕스러지고,더욱 흉폭해지는 자본주의를 이제는 역사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때라 생각됩니다. 이를 위한 새로운 관점의 언론은 꼭 필요하고 적절한 때입니다. 한가지 덧붙인다면 어떤 언론보다도 발랄하고, 창의적인 언론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금 저는 영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 2007년에는 반드시 2% 대 진입을!!


뉴스메이커33호 였습니다. 씨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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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5일 오후2시, 창간제안자 전체모임 열린다

스윽~ 안녕하세요. newsmaker33호 입니다.
오늘은 간단히 공지 기사만 쓰고 갑니다.
앞으로 33호의 활약을 많이 지켜봐 주세요. 씨익~


3월 21일 새 민중언론 창간을 제안했던 82명의 제안자들은 4월 5일 오후 2시 창간제안자모임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모임을 무척 기다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창간 제안을 하는 데는 뜻을 같이 했지만 워낙에 하는 일들이 다른 데다 한 자리에 모이기 힘든 사람들이라 얼굴 마주 하는 것만으로도 뜻깊은 만남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창간제안자인 강동진 님은 "4월 5일날은 매년 나무를 심었는데, 올해는 민중언론을 심게 되어 벌써부터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라며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말했다.

 

3월 13일 창간제안자모임 때는 제안자가 확정되지 않아 모인 사람이 몇 안 되지만, 4월 5일로 예정된 창간제안자모임에서는 그 동안 새 민중언론 창간을 준비하며 있었던 애환을 공유하고, 창간 계획을 논의하는 한편, 편집위원회 구성과 새 민중언론의 제호와 도메인도 결정하게 된다. 특히 제호와 도메인 결정은 후보 도메인 간에 치열한 접전이 예상된다.

 

한편 창간제안자모임이 어디에서 열리냐는 newsmaker33호의 질문에 창간준비위 실행단의 한 관계자는 "창간제안자모임의 장소는 기자들의 과잉 취재를 막기 위해 철저히 비밀에 부쳐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행단의 한 내부고발자가 "아직 적당한 장소를 확정하지 못했는데 무슨 소리냐"라고 말해 거짓 진술임이 폭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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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장 오타님의 [그 길을 지켜보며....]는 에피소드 4 로. ㅎㅎ

* 이 글은 간장 오타맨...님의 [그 길을 지켜보며....] 에 관련된 글입니다.

오오 간장님이 저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기억하고 계시는 군요.

에피소드4 정도에서 공공 3사 파업에 대해 이야기해 생각이었습니다.

어찌나 고생도 많이 하고 우여곡절 많던 3사 파업이었던지.

 

당시 발전 38일 파업투쟁을 이끌었던 이호동 전 발전노조 위원장님은 이번 민중언론의 제안자로 나서기도 하셨답니다.

 

무엇보다 진보넷 갈월동 숙대역 출구 앞에 생긴 훼밀리 마트에서 새벽 5시까지 마셨던 기억이 새록새록해 진다는 부분이 참 감명깊게 다가온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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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hly Review-下

이런 문제에 대한 자유롭고 허심탄회한 토론이 강력한 금기사항 아래 억압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기 때문에, 이 잡지(먼쓸리 리뷰)의 창간은 공공에 대한 중요한 서비스라고 나는 생각한다” 라는 문장을 다시 읽으니 가슴이 뭉클하면서 newsmaker13호의 어깨가 갑자기 무거워 옵니다. 우리가 만드는 새 민중언론도 ‘공공에 대한 중요한 서비스’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것을 넘어 정말 ‘공공에 대한 중요한 서비스’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입니다.

이렇게 창간된 먼쓸리 리뷰는 아카하타가 그랬던 것 처럼 파시즘적 정권에 탄압 받았습니다. 공동 발행인 리오 휴버만은 1952년 매카시와 FBI의 에드가 후버가 함께 이끈 미국의회의 ‘비미국적 활동에 관한 하원 청문회’에 소환되 사상검증의 치욕을 당했습니다. 폴 스위지는 1953년 뉴햄프셔 검찰에 소환되 투옥당할 뻔 하기도 했구요.

그러나 이 들은 자신들의 활동과 발언, 잡지 출간에 대한 추궁에 답변을 전면적으로 거부했습니다. 당시 먼쓸리 리뷰가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고 하니, 겉표지가 보이지 않도록 포장해 발송하고 기고자들도 실명을 사용하지 못했을 정도랍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고통을 겪고 있지 않는 것은 세상이 좋아져서라기 보다는 우리가 ‘저들’에게 위협이 되지 못해서 일까요?

이후 리오 휴버만 외에 폴 바란, 해리 매그도프등이 스위지와 함께 먼쓸리 리뷰를 발행하고 편집했습니다. 이 중에 해리 매그도프는 91세의 나이에도 현재 존 벨라미 포스터와 함께 이 잡지의 발행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빼놓을 수 없는 인물 하나가 또 있으니 그는 바로 해리 브레이브만이죠. ‘노동과 독점자본’의 저자 말입니다. 철강 노동자로 일하며 노조조직책을 맡기도 했었던 해리 브레이브만은 먼쓸리 리뷰 프레스를 책임지며 로자 룩셈부르크, 부하린, 콜쉬등의 사회주의 고전 뿐 아니라 혁명 쿠바에 관한 책들, 사미르 아민의 책들을 발굴해 출간했습니다.



자신들의 50년 역사를 자축하는 글을 이렇게 끝맺었더군요. “자본주의와 제국의 불평등과 불안정이 여전히 깊이 있는 사회 재건설의 절박한 필요성을 야기하기 때문에, 먼쓸리 리뷰가 지난 50년 동안 그랬던 것과 똑같이 다가오는 새 천년에도 전세계 해방투쟁과 연대하는 미국 맑스주의의 깃대로 계속 봉사할 것이라고 기대할 충분하고도 넘치는 이유가 있다”
이 글에서 펠프스는 유료 정기구독 부수가 “작년에는(1998년) 1991년 이후 최고 수준인 5795부에 달했다”고 자랑하면서--;; “이런 변화를 상징하기라도 하듯, 잡지는 1998년 표지와 판형, 글꼴을 모두 키움으로써 역사상 첫 편집개편을 시도했다”라과 말하기도 했습니다.(허걱...49년 만에 첫 편집 개편이라니 ㅠㅠ) 여튼 먼쓸리 리뷰는 요즘도 여전합니다. 94살 먹은 해리 매그도프는 존 벨라미 포스터와 함께 “먼쓸리 리뷰는 1980년대 레이건 시대 이래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우익들의 계속되는 공격에 직면해 사회안정망위기의 본질을 지적하며 지속적으로 대응해왔다”로 자신있게 시작되는 권두언을 이 달에도 내놓았더군요.

 

먼쓸리 리뷰는 2000년에는 네그리와 하트가 지은 ‘제국’을 두고 특집판을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발리바르, 아리기, 지젝, 캘리니코스의 현란한 논쟁들이 이 특집판을 장식했더랬죠.

 

아이고 한 시간 동안 꼼짝 않고 포스팅을 하려니 newsmaker13호의 좀이 막 쑤시는군요. 슬슬 마무리 짓겠습니다. 오늘 역시 가쉽 아닌 가쉽을 하나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아까 해리 브레이브만 이야기를 하면서 먼쓸리 리뷰 프레스를 잠깐 언급했는데요. 먼쓸리 리뷰 출판부, 즉 먼쓸리 리뷰 프레스는 어쩌면 먼쓸리 리뷰 자체보다 더 유명할지도 모릅니다. (돈을 더 버는 것은 확실합니다^^)

 

아까 몇몇 저작들을 언급했지만 좀 더 자세히 소개해드릴께요. 고전들 외에도 체 게바라의 저서 ‘쿠바 혁명전쟁 회고록’, 만델의 ‘맑스주의 경제학 이론’ 알뛰세의 ‘레닌과 철학’ 사미르 아민의 ‘세계 수준의 자본축적’ E P 톰슨의 ‘이론의 빈곤’ 등(아이고 많기도 하다)등이 모두 먼쓸리 리뷰 프레스를 통해 출간됐습니다. 해리 브레이브만의 ‘노동과 독점자본’ 역시 마찬가지구요.

 

그런데 먼쓸리 리뷰 프레스가 우리에게 더 긴밀하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아리랑’을 출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정래의 아리랑은 아니구요--;; 김산의 아리랑, 님 웨일즈가 쓴 바로 그 책, 우리나라에선 1984년인가 동녘 출판사에서 나온 바로 그 ‘아리랑’ 말입니다. 사실 ‘아리랑’을 초간 한 곳은 먼쓸리 리뷰 프레스가 아니지만 50년이 넘게 꾸준하게 발간하고 있는 곳은 바로 먼쓸리 리뷰 프레스입니다. 일본의 나름대로 진보적인 출판사 이와나미 서점 에서는 먼쓸리 리뷰 프레스 판 아리랑을 번역해 참회의 필독서로 ‘세계의 명작 100선’에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아 참, 역시 진보넷 블로거이신 홍실이 님께서 얼마전 보스턴에서 스위지 1주기 추모 모임에 다녀오신 소식을 전해주시기도 했습니다.  홍실이 님이 전해주신 스위지 1주기 추모 모임의 한 장면을 들여다 볼까요? “고인이 93세에 돌아가셨다 하니 그 친구, 동지들이라는 양반들이 다 머리가 하얗게 샌 할머니 할배들.... 한 할배 나와서 말씀하시길 ‘내가 그를 를 처음 만난 건 1943년...어쩌구....’  이크... 거의 내가 제일 젊은이가 아니었나 싶다..... 미국 젊은이들은 다 어디 갔는고....  지난번 하워드 진 강연 때도 젊은이들은 안 뵈고 나이 지긋한 양반들만 줄줄이 앉아 있었는데....”

 

에휴 미국 꼴이 요새 요 모양 요 꼬라지인 갑네요. 스위지도 저 세상으로 가고 이제 미국에는 할배 둘만(하워드 진, 놈  촘스키 -이들도 먼쓸리 리뷰의 단골 필진들이죠) 남아 있나 싶어 가슴이 짠합니다.

 

아 참, 홍실이님은 곧 새 민중언론의 해외통신원으로 맹활약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계시니 많이들 기대하세요^^ 절찬 개봉박두입니다요.

 

휴~ 이것으로 ‘세계의 민중언론’ 2회- 먼쓸리 리뷰 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꼬부랑 글씨로 된 사람 이름들 많이 나와서 헷갈리지는 않으셨나요? 혹 “야 neswmaker13호 너는 니 글에 언급한 사람들 책들은 다 읽고 야부리 푸는 거냐?”고 질문하신다면 전 당당하게 대답하겠습니다. 그것도 영어로 말이죠. “No Comment!" ㅋㅋㅋ

 

자꾸 말씀드려서 지겨우시겠지만 저는 여러분의 리플, 트랙백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고 있습니다. 제발 일용을 넘어 이용, 삼용 할 수 있도록 뜨거운 관심 기다릴께요.

첨언: 혹시 회원가입 절차를 몰라서 새 민중언론 후원회원으로 가입 못하고 계신분^^은 즉각 덧글 주세요.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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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hly Review-上


안녕하세요. 뉴스메이커 13호입니다. 세계의 진보매체 그 두 번째 순서로 여러분들을 다시 찾아 뵙게 됐습니다.(BGM은 두구두구두구둥-작은 북 트레몰로) 지난 24일 첫 번째 순서로 소개해드린  ‘아카하타’는 재밌게들 보셨나요? 그럭저럭 제 주위에서는 반응들이 좋았던 것 같은데 여러분들께서 겨우 리플 6개, 트랙백 하나라는 양식 밖에 안주셔서, 여러분의 사랑 아니 리플과 트랙벅을 먹고 자라는 저 뉴스메이커 13호는 굶어 죽을뻔하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 ㅠㅠ

 

에휴 잡설이 길었네--;; 하여튼 두 번째 순서로 어떤 매체를 소개해드릴까 고민하다가 어젯밤을 꼬박 세웠습니다. 베네주엘라 볼리바르 혁명의 주력군 역할을 했던 매체를 소개해달라는 주문들도 있었고 세계의 진보매체를 소개하면서 어떻게 ‘로동신문’을 빼놓을 수 있냐는 딴지 아닌 딴지도 있었습니다. 결국 도처에서 암약하고 있는 뉴스메이커들의 의견과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두루두루 들어 제 마음대로 결정했습니다 ㅋㅋ

 

첫 번째 순서로는 좀 대중적 일간지인 아카하타를 소개해드렸으니 이번에는 전혀 다른 성격의 매체를 소개해드리는게 어떨까 싶네요. 오늘 소개드릴 매체는 해리 매그도프와 존 벨라미 포스터가 공동 발행인을 맡고 있는 미국의 월간지 Monthly Review(이하 먼쓸리 리뷰)되겠습니다.

 

모름지기 좌파를 자임하는 사람들은 영웅적 개인을 기리기 보다는 계급의 힘을 믿는 편이고, 또 그러려고 의식적으로 노력들도 하는 듯 합니다만 1818년 맑스가 태어난 이후 계급 운동이라는 은하수 속에는 수많은 붉은 별들이 빛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앗 그렇다고 제가 ‘한 별 을 우러러 봅니다’라는 노래를 즐겨 부른다던가 하는건 절대 아닙니다--;; 의심하지 마세요)



먼쓸리 리뷰를 소개하기 위해서는 폴 스위지라는 붉은 별 하나를 빼먹고 넘어갈 수 없을 것 같군요. 지난 해 10월 자끄 데리다가 사망했을때 미디어참세상을 보니 Peyo라는 기자가 오비츄어리를 썼더군요. 전 그 기사의 마지막 문장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잠깐 인용해 볼께요. “에드워드 사이드, 피에르 부르디외, 폴 스위지 그리고 자끄 데리다의 죽음과 함께 이제 20세기는 역사의 장으로 넘어가고 있다”


전 Peyo가 쓰는 기사가 못마땅할 때가 많은 편이지만 윗 문장 하나 만큼은 잘 뽑았다 싶더라구요^^ 여튼, Peyo가 말했듯이 1910년에 태어나 2004년에 영면한 폴 스위지는 20세기 역사의 한 장을 차지한 사람이고 오늘 소개드리는 먼쓸리 리뷰를 창간한 사람입니다.

 

먼쓸리 리뷰는 1949년 폴 스위지에 의해 창간됐습니다. 사실 창간 당시나 지금이나 먼쓸리 리뷰의 발행부수는 만부를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간지와 월간지의 차이라고 한다손 치더라도 첫 번째 순서에 소개드린 아카하타가 지금도 이백만부 가까이 발행하고 있는 것하고는 천양지차지요. 그러나 이 잡지의 권위, 영향력은 일만이라는 발행부수와는 무관합니다.

 

서른 두 살의 나이에 자본주의 발달이론-맑스주의 정치경제학 원리 라는 이 시대의 클래식을 혼자 써서 발간한 스위지는(흑 스위지는 서른두살에 이런 책을 썼는데 nesmaker13호는 지금 뭐하고있는지 ㅠㅠ 만 서른 두 살 되려면 아직 좀 남았다는 걸 상기하며 자위하겠습니다)

 

물론 스위지 혼자 먼쓸리 리뷰를 만든 것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땀과 헌신이 함께 했지만 먼쓸리 리뷰의 창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리오 휴버만입니다.

 

요즘은 이 책 잘 안 읽는 모양이지만 리오 휴버만의 미국사 우리, 인민들(we, the people)은 정말 유명한 책이죠. 이차대전 중에는 (미국)전국해운노조의 대외협력, 교육국장직을 맡기도 했던 연구자이자 활동가였던 리오 휴버만은 1968년 사망할때까지 스위지와 함께 공동 발행인으로 먼쓸리 리뷰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1949년 매커시즘이 슬슬 몰아쳐오기 시작할 즈음에 세상에 나온 먼쓸리 리뷰 창간호에는 기념비적인 아티클이 실려있습니다.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쓴 ‘왜 사회주의인가 (Why Socialism?)이라는 글이 바로 그것이죠. 여담이지만 올해가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표한지 딱 백년이 되는 해라 여기저기서 아인슈타인 열풍이 불고 있는데 사회주의자 아인슈타인에 대해서 다시 주목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새 민중언론에서 한 번 다뤄볼까요?

 

일단 이 기념비적 아티클의 몇 부분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몇가지 번역본이 있지만 진보넷 블로거 marishin님의 신뢰할 만한 번역본에서 인용하겠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경제나 사회 문제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사회주의에 대한 견해를 표해도 되는 걸까?”라고 묻고 바로 답합니다. “나는 몇가지 이유로 그렇다고 믿는다” 이 부분은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겠죠? 제가 글을 쓰고 있는 이 밤, 철야하며 라인을 타고 있는 노동자들도, 응급실에서 당직을 서고 있는 의사들도, 전동휠체어를 타고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했던 장애인차별철폐투쟁단들도,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세상의 절반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여성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여성활동가들도 우리, 인민 모두는 사회주의에 대한 견해를 당당히 표할 수 있을겝니다. 아인슈타인이 그랬던 것 처럼.

 

아인슈타인은 과학적 지식의 관점과 윤리적 관점에서 사회주의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표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이어 아인슈타인은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적 무정부 상태가 악의 진정한 근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그나마 우직했던 1949년의 자본주의사회를 ‘경제적 무정부상태’라니...만일 아인슈타인이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약탈적금융경제를 본다면 허허 과연 뭐라 말할지 궁금하군요.

 

자 좀 더 들여다 보죠. “이런 악을 제거하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것은 사회적 목표를 추구하는 교육체계를 동반한 이른바 사회주의 경제를 확립하는 것이다. -중략-사회주의의 목표와 문제를 분명히 하는 것은 지금 이행의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아인슈타인의 아티클은 아주 멋진 문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첫 번째 순서에서 소개해드렸던 아카하타의 창간하의 한구절 “아카하타는 여러분들 자신의 기관지이다”에 맞먹을 만합니다.

 

“왜 사회주의인가”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자유롭고 허심탄회한 토론이 강력한 금기사항 아래 억압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기 때문에, 이 잡지(먼쓸리 리뷰)의 창간은 공공에 대한 중요한 서비스라고 나는 생각한다”

 

글이 길어 상, 하로 나누어 포스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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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참세상의 전사(前史)를 기록하며 -뉴스메이커 22호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뉴스메이커 22호 - ‘투투’라고 해요. 블로거인 뉴스메이커가 각 디렉토리마다 분열을 시도하면서 22호 ‘투투‘가 탄생했어요. 뉴스메이커 22호 ‘투투’의 역할은 미디어참세상의 지난 역사를 기억나는 데로 정리하는 일이랍니다.  민중언론의 전사 디레크토리의 주인이라고 하겠지요.


 



 22호는 미디어참세상이라는 민중언론이 진보넷에서 독립함과 더불어 새로운 민중언론을 만들기 위해서는 미디어참세상의 지난 일을 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찌나 22호는 생각도 잘 하는지 ^^


문제는 22호가 미디어참세상의 전신인 참세상뉴스와 참세상방송국을 처음 만들 당시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2호는 그래서 주위사람들에게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다들 처음 어케 만들었는지 긴가민가하더군요.(사실 귀찮아서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어딘가 정리된 자료가 있을 텐데 그런 연혁 궁금하시면 노동미디어 행사자료나 진보넷 총회자료등을 찾아보면 되겠죠) 아무튼 들었던거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풀어볼까합니다.


미디어참세상의 전신은 참세상방송국과 참세상뉴스입니다. 사실 아직도 참세상뉴스, 참세상방송국으로 부르는 분들이 많지요? 처음에는 지금처럼 본격적인 뉴스를 생산하지는 않았답니다. 98년 9월경 처음 시도 되었던 참세상뉴스는 그야 말로 진보진영의 카인즈(kinds, 뉴스데이터 베이스)라는 개념으로 진보적인 매체들을 네트워크에 모아보자는 취지였다고 합니다. 물론 보도자료 요약 정도의 수준에서 간단한 뉴스가 제공되기는 했지만 뉴스생산을 위한 역량투여는 거의 없는 상태 였지요. 또한 오마이뉴스보다도 먼저 ‘모든 민중이 기자다’라는 모토로 민중기자석을 운영했습니다. 당시 민중기자석에 쓰인 기사를 보면 지금의 참세상 속보와 뉴스의 중간형태의 기사를 현장 노동자들이 직접 작성해 보내준 것이 있습니다.


아참 여기서 잠깐 주먹구구식 기억에 의존하다보니 이보다 더 전사가 있군요. 참세상뉴스와 참세상방송국의 시작보다도 먼저 미디어적 시도가 되었는데요. 바로 96-97 총파업기간에 시도되었다더군요. 일명 총파업 통신중계단이라고 다들 들어 보셨죠? 22호는 그때 열심히 노동법개악저지를 위해 거리를 뛰어다니던 때라 다른 뉴스 메이커에게 통신지원단 얘기는 넘겼습니다. 그래서 이글은 에피소드2입니다.  하지만 통신지원단 이야기(에피소드1)를 해줄 뉴스메이커가 지금 분열중에 있습니다. 조만간 나타날 겁니다.


오늘은 민중언론의 탄생설화를 시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22호가 직접 지었 답니다. 22호는 언론이 만들어지고 나면 시인으로 다시 태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시상이 막 떠오르는군요.

 

'나는'


나는 98년에 태어났다.

나는 태어날때부터 빨갛게 태어났다.

나는 빨갛다고 탄압도 많이 받았다.

나는 언론이 뭐 그러냐는 말도 많이 들었다.

나는 수많은 자본의 네트워크 안에서 버그로 인식되며 자랐다.

나는 외로웠다. 나 한참을 울었다. 사랑받고 싶었다.

그래도 나는 꿋꿋했다.

그러다 나는 민중들이 탄압받고 생존을 위해 싸울 때 더 이상 버그가 아니었다.

나는 민중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나는 투쟁의 현장에서 맞아가며 컸다.

나는 수많은 카메라를 깨먹었다.

나는 굶기를 밥 먹듯이 했다.

그래도 나는 민중언론의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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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거집단....

* 이 글은 자일리톨님의 [조그만 준거집단이라도 있었음 싶다] 에 관련된 글입니다.

글쎄요. 저도 직장생활 경험이 있습니다만 너무 실망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네요. 원래 노조라는 것은 성인군자들로 조직된 집단이 아니잖습니까...사측에 맞서 자기 밥그릇을 챙기는 것, 그것이 바로 노조의 기본적 목적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그것이 다여서는 안되겠지만요. 게다가 그런 문제는 중산층 지식노동자의 이중성 뿐 아니라 생산직 현장 노동자들의 문제이기도 하구요--;;

 

그리고 자일리톨님 말씀처럼, 저 뉴스메이커 13호도 진보넷 블로그를 통해 일상을 살아나갈 힘과 용기를 많이 얻고 있습니다. 이 곳이 제 준거집단의 전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준거집단의 일부인 것은 분명한것 같네요.

 

왜 저기 머냐..'힘을 내요 미스터 김'이라는 노래가 있었죠? 자 '힘들 내요 미스터 자'^^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오늘 따라 유난히 푸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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