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왜 이 세상을 사는가?


만감: 일기장 2010/06/26 23:55  

출처 :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27598 (박노자 글방)

 

 

20년 전인가요? 불교에 대한 관심이 날로 싶어졌던 그 때에, 저의 한 대학교 동창생과 함께 불교 수행을 아주 오랫동안 해온 한 정신과 의사를 찾아간 적이 있었어요. 그 동창생은 나중에 한국 무속에 대한 박사 학위를 받고 주평양 러시아 총영사까지 역임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때만 해도 불교에 아주 깊이 심취했었어요. 그 정신과 의사를 만났을 때에 불교 이야기부터 꺼냈는데, 우리에게 던진 첫 질문은 다음과 같았어요:

- 이게 (자신의 팔을 가리키면서) 싫은 것이죠? 고깃덩어리 속에서 살다가 지친 것이죠?

 

 

저는 답을 주저했었는데, 제 동창생은 당장에 "그렇다, 나는 왜 고깃덩어리로 태어나 살아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고 답했어요. 의사는, 그러면 근본적으로 불교적 성향이 맞다고 했었습니다. 불교를 일종의 염세적 성향으로 해석하는 건, 살려는 의욕을 잠재워야 하고 궁극적으로 인육을 필요로 하지 않는 완전한 "무"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던 쇼펜하우어를 "불자의 모범"으로 보는 서양인의 편견인지 모르지만, 그 의사의 말은 자주 생각이 납니다. 사실, 저로서도 "산다"는 과정이라는 게 "낙"보다 "부담"으로 많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박노자"라는 이름이 붙여진 고깃덩어리는 각종의 요구가 하도 많아서 그런 것이죠. 그 고깃덩어리에 차에 희발유를 붓듯이 식음을 부어야 되고, 그 분비물도 배출시켜주어야 하고, 고깃덩어리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그 휴식 시간, 즉 수면시간도 지켜야 하고, 또 고깃덩어리가 많이 아프지 않게 자꾸 그 덩어리를 움직여야 하고, 또 그래봐야 계속 아프니까 결국 지쳐지는 것입니다. 누가 보면 특히 식음 섭취는 "즐거운" 과정으로 보이는지 모르지만, 저로서는 그것까지도 무거운 업보로 느껴집니다. 물론 여기에서 다소 내향적이고 염세적 성향 이외에 또 한 가지 요인은 있을 것입니다. 고깃덩이리를 먹여주기조차 어려운, 내지 그 무슨 인간 모습을 띤 나찰, 아수라들이 "나의" 고깃덩어리를 어디엔가 가두어놓고 죄를 덮어쒸는 딱한 상황이라면 "생존 투쟁"의 열기 속에서 삶이라는 업보의 괴로움을 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교적으로 편한 상황에 놓인 고깃덩어리라면 그걸 끌고 산다는 게 그저 괴로울 뿐이죠.

 

 

이걸 뼈저리게 느낀 사르트르와 같은 다소 예민한 서방의 중생들은, 일찌감치 고깃덩어리를 끌고 산다는 걸 "선택",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질 용기"라고 결론내렸습니다. 신도, 인간에게 내재돼 있는 그 어떤 "본성", "본질"도 없는 실존주의적 "자유"의 허공 속에서 인간이 끝없이 선택들을 함으로써 "자신"을 만든다는 논리입니다. 좋은 선택 - 예컨대 파쇼들과 싸우겠다는 선택 -을 했다고 해서 "잘했어"하고 은총을 베풀 신도 없고, 꼭 그 선택을 하게끔 만드는 불변의 도덕률도 없는데, 일단 그러한 선택을 함으로써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드는데에 일조한다는 건 공산당 지지자 ("동반자") 사르트르의 논리이었죠. 글쎄, 사르트르도 끝에 가서 "나은 미래"에 대한 확신을 많이 버리신 것 같은데,  사르트르가 죽었을 때에 일곱살이었던, 아주 불행한 반동과 후퇴의 시대를 살고 있는 저로서는 아예 아무 확신도 가지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 유럽에서 보이는 자본주의의 야만화 정도 - 그 좋은 실례는 영국에서의 복지 국가의 거의 반쪽의 해체입니다 - 로 봐서는 저나 제 아이가 자연사할 수 있다는 데에 대한 확신도 전혀 없습니다. 자본주의가 공황과 같은 극단적 상황에서 야만화하다가 어떤 일이 일어나게 돼 있는지 하도 책에서 많이 읽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냉정하게 따져볼 때에 인류 전체의 차원에서 사회주의보다 야만이 선택되어질 확률이 더 많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자본과 국가가 부추기는 반이성, 비이성에 비해 개인의 이성도 아주 약하고 집단, 전체의 이성은 아예 보잘것도없습니다. 지금 4대강으로 생태가 망해가고 젊은 "백수"들이 취직자리가 전혀 안보여 절망에 빠지는 나라에서의 월드컵 열기를 한 번 보시고서, 이게 거짓이라고, 집단 이성이 정말 제대로 작동될 수 있다고 말씀해보시지요.

 

 

그러면, 망해가면서 언젠가 인류를 멸망시킬는지도 모를 정신병적 체제 하에서 이 고깃덩어리를 끌고 살면서 미륵보살의 하생도 야소기독의 재림도 후천개벽도, 심지어 무산계급 혁명의 필수적 성공도 믿지 않는 중생은, 왜 하필이면 진보정당 지지하고 정치색이 있는 글쓰고 난리칩니까? 사르트르는 "선택"을 이야기했지만, 저는 인간을 "선택"쯤이나 할 수 있는 위대한 존재로 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존재이었다면 우리가 지금과 같은 더럽고 수치스러운 시대를 살지도 않았을 걸요. 저는 진보정당을 믿고 따르고 사회주의를 외치는 이유는, 아주 쉽습니다. 미래가 어떻게 되든 (저는 낙관보다 비관에 더 기울입니다), 무산계급이 어떤 본질적 변혁을 할 수 있든 없든 (지금의 체제 포섭 정도로 봐서는 매우 어려우리라 봅니다) 사회주의적 전망이 인류에 있든 없든 (저는 꼭 있다고 자신과 남을 기만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냥 제 본능에 충실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 본능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인터넷에서 (집에 바보상자가 없어서 세상을 접하는 루트가 인터넷뿐에요) 미제 군대가 아프간에서 또 몇 명의 마을 사람을 "테러리스트"라고 하여 무인비행기로 죽였다는 이야기를 볼 때마다 그냥 속이 뒤집어져요. 악마 파순을 제 얼굴 앞에서 보는 것 같아서요. 그런데 꼭 불교를 믿어서도 그런 게 아니고 믿지 않았다 해도 똑같았을 거에요. 저는 제국의 폭력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그저 살고 싶지 않은 것이고 그게 제 본능입니다. 이 폭력의 근원이 자본체제의 이윤추구라는 걸 아니까 이 본능상으로 사회주의 할 수밖에 없어요. 고귀한 "선택"도 아니고 그저 본능대로 사는 것뿐이죠. 그래서 고깃덩어리라는 업보를 계속 지고 있는 한, 이 사회주의라는 말을 계속 화두로 삼아 사는 겁니다.

 

 

위에서 이야기했지만, 저는 자본주의적 세계라는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환자들이 집단적으로 언젠가 다 완쾌되리라 확신하지도 않아요. 굳이 확률을 따져보면, 환자들끼리 불놀이하다가 대형화재로 이 병원 전체가 전소될 확률은 더 높을지도 모르죠. 그래도 고깃덩어리가 여기에서 서식하고 있는 이상, 고깃덩어리에 붓고 있는 식음에 대한 감사의 뜻에서라도 초보적 차원이라 해도 "치료 행위"를 계속 시도하는 게 "교환논리"상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영원불변의 도덕론을 별로 믿지 않아요. "나"의 고깃덩어리로서 필요하고 또 다른 고깃덩어리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다면 복수의 상대자들과 성관계를 맺는 것도, 배고픈 사람으로서 빵을 훔치는 것도, 아프간에서 미군 폭격으로 모든 가족을 잃어 고아가 되는 사람이 무기를 들고 빨치산이 되는 것도, 저는 꼭 "죄악"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상황적, 역사적 도덕논리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영원불변의 원칙이 있다면 그게 "호혜성"의 원칙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받는 만큼 세상에 베풀라는 건 바로 이 원칙의 연장선상에서 이야기하는 것이죠. 옛날 스님네들이 이야기했던 "재시와 법시의 교환논리"이기도 하죠. 그런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어쩌면 법화경을 강독하는 것보다 만델 선생의 <후기 자본주의> 강독은 요익중생의 차원에서 더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불교는 전쟁과 같은 현상들을 개인적 심성의 차원에서 설명하지만, 마르크스주의는 이를 보충하여 집단의 차원에서 현대적 살육의 기원과 살육을 종식시키는 방법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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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2010/06/26 01:19

나는 남녀간의 사랑을 믿지 않는다

終局에는 너무 세속적이다.

 

가장 숭고한 사랑은 神에 대한 사랑이다.

 

어쩌면 나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 대해 비극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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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스님] 다시 길을 떠나며

2010/06/15 16:55

다시 길을 떠나며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떠납니다. 먼저 화계사 주지 자리부터 내려놓습니다. 얼마가 될지 모르는 남은 인생은 초심으로 돌아가 진솔하게 살고 싶습니다.

 

"대접받는 중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

 

초심 학인 시절, 어른 스님으로부터 늘 듣던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그런 중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칠십, 팔십 노인분들로부터 절을 받습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 이상은 자신이 없습니다.

 

환경운동이나 NGO단체에 관여하면서 모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비록 정치권력과 대척점에 서긴 했습니다만, 그것도 하나의 권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원력이라고 말하기에는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을 보면서 제 자신의 문제가 더욱 명료해졌습니다. '한 생각'에 몸을 던져 생멸을 아우르는 모습에서, 지금의 제 모습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저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제 자신의 생사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 살면 제 인생이 너무 불쌍할 것 같습니다.

 

대접받는 중노릇 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위선적인 삶을 이어갈 자신이 없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납니다. 조계종 승적도 내려놓습니다. 제게 돌아올 비난과 비판, 실망, 원망 모두를 약으로 삼겠습니다.

 

번다했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어느 따뜻한 겨울, 바위 옆에서 졸다 죽고 싶습니다.

 

2010년 6월 14일 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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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

2010/05/31 23:34

자기 내면의 두려움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스스로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진짜 일을 할 수 있다.

 

2010. 5. 31.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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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와 고통의 윤리학


출처 : [아트앤스터디] 지식메일

http://www.artnstudy.com/sub/community/minerva.asp?clip=C&idx=170&page=1&src=email&kw=000045

 

아우슈비츠와 레비나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독일에 유학하여 후설의 현상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하이데거의 존재론 탐구에 열정을 쏟은 철학자였다. 하지만 그는 결코 공부만 열심히 하다가 교수가 된 평범한 철학자가 아니었다.


“나는 아우슈비츠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아우슈비츠에서 나의 가족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렇다. 레비나스는 아우슈비츠에서 가족을 잃었고, 포로수용소에서 2차 대전을 보낸 전쟁 피해자였다. 그에게 있어 죽음과 고통은 관념 따위가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실재였던 것이다. 삶에 대한 그의 철학이 그토록 설득력이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죽음의 복마전을 힘겹게 건너왔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사역 당시 숱한 구타와 굶주림을 경험해야 했다. 그와 다른 수감자들에게 피로란 한결같이 따라다니는 멍에와도 같았다. 레비나스는 ‘사람의 몸과 마음이 피로해지면 삶의 의욕을 잃기 쉽고, 또 다시 피로가 더해지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를 레비나스는 ‘존재가 오그라드는 현상’이라고 했다. 이렇듯 육체의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일을 해야 했던 수감자들은 이미 인간성을 잃고 삶에 대한 의지를 상실한 사람들이었다. 당시의 나치와 히틀러 그리고 전쟁 가해자들은 그렇게 사람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갔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경험을 자신만의 고통이 아니라 유대인 전체의 고통, 나아가 인류 보편의 고통으로까지 확장시켜 타인과 제대로 소통할 수 있는 철학을 전개한다.


고통의 윤리학

그간 서양철학은 인간의 고통에 대해 그리 깊은 성찰을 보여주지 않았다. 성찰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고통이 ‘더 나은 선을 이룩하기 위해 유용한 가치가 있다’고 설파하는 것에 그쳤다. 칸트는 고통이 전제된 이후라야 진정한 쾌락이 올 것이라 하였고, 니체는 성장을 위한 발판인 고통에 동정을 보태지 말라고 하였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다르게 말한다. 고통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 없고 쓸모없는 경험이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이성으로 고통을 파헤치려는 행위는 보여주기 토목공사만큼이나 무의미한 삽질로 보일 뿐이다. 단지 고통은 우리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며, 감당하지 못할 질료이고 고통을 종합하는 우리 감성은 그것을 수용해 낼 능력이 없을 뿐이다.


고통을 받은 인간은 그 자신의 주도권을 상실하기 쉽다. 이는 주체적으로 미래를 건설하려는 의지 자체를 상실해버리는 것을 말한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의지 혹은 그에 관한 계획은 자신의 미래를 긍정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 이러한 능동적 활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그저 ‘당하는 것’이고, ‘수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고통을 ‘수용성보다 더 수동적인 수동성’이라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고통 없이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타인에게 고통 받고, 사회구조에 고통을 받으며,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기도 한다. 레비나스의 말대로라면 우린 그저 고통의 순환에 몸을 맡기고 존재의 오그라듦 속에서 한없는 쭈구리가 되어야만 하는 걸까? 아니다. 레비나스는 되려 고통 없이는 진정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해괴한 소리를 하는 레비나스의 저의는 무엇인가. 앞에서 말한 고통의 무의미성은 현상으로서의 고통 그 자체였을 뿐이다. 윤리가 존재론적인 것보다 선행하며 더 나아가서는 그것의 근거가 된다고 믿는 레비나스는 고통을 윤리와 직결시키고 나서야 의미가 생성된다고 말한다. 레비나스의 철학적 작업은 고통을 단순히 정당화하는 것을 뛰어넘어 그것을 현상적으로 바라봄으로써 고통의 윤리학을 생성시키는 것이었다.


고통의 쓸모있음

옆에 있던 누가 나를 때렸다고 치자. 무방비로 가격당한 나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아!’하고 신음소리를 낼 것이다. 이것은 고통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렇듯 고통과 대면한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표현을 하고 더 나아가 타인에게 호소의 메시지를 보낸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고통과 동시에 타자와의 관계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이런 관계의 열림은 실행에의 직결이 아니라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기에 레비나스는 이 열림을 ‘절반의 열림’이라 부른다. 하지만 우리는 도리어 그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바로 이 고통과 열림의 순차적인 고리에서 윤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신음소리에 귀 기울일 때, 또 그의 찡그린 얼굴에서 고통을 발견하고 난 후라야 비로소 연민, 존경, 행복이란 감정이 발생할 수 있다. 고통은 철저히 무의미한 현상이고, 극도의 고독이지만 그것을 통해 관계성이 열린다는 데에서 다른 역설적 의미가 발생시킨다.


물론 우리는 타인 정확히 말하면 소외자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들의 얼굴을 보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인생은 살아진다. 하지만 그것은 레비나스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주체’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주체의 주체됨은 타인을 대리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구성된다. 우리의 존재가 고통의 심연에 내던져져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필연적으로 누군가에게 고통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타인의 고통에 속죄하고 그것을 대신 짊어질 수 있는 진정한 주체성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21세기 창조의 시대에 쓸모없는 것을 쓸모 있는 것으로 바꾸는 능력이 우리 인간에게 필요하다면 말이다.  

[작성자 : NILNILIST (nilnilist@artnstud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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