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양심'엔 한계가 있다

2005/03/04 23:38
‘제국의 양심’ 엔 한계가 있다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한겨레21] 2005년03월02일 제549호

가끔 쓰이거나 듣게 되는 용어 중에 ‘양심적 지식인’이란 말이 있다. 권위주의 정권 밑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나 야수들의 싸움터인 세계에서 지식·양심을 겸비하는 누군가가 암흑 속의 빛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적지 않은 이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심의 역사적 한계점이 망각되고 양심적 지식인이 초역사적인 성현이나 선지자쯤으로 과장되게 이해되기도 한다. 과연 특정 ‘국민’의 일원으로 편입돼 있고 특정 계급을 배경으로 그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는 사람이 양심과 지식이 풍부하다 해서 그 ‘국민’ 사회와 계급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장준하의 ‘반공주의’한계처럼


△ 1890년대의 후반의 우치무라 간조.

예컨대 한국 양심의 대표자라 할 장준하(張俊河·1918~75)를 생각해보자. 그의 독립운동이나 반독재 투쟁, 그리고 1970년대 초반 평화통일 논리의 정립은 꿋꿋한 양심의 발로였다. 그러나 <사상계> 창간 시절 미국쪽과의 유착이나 5·16 정변 직후 반란범 집단에 대한 지지 표명과 같은 장준하의 이면들을 과연 상황의 논리와 판단 오류만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서북 유산층 출신의 기독교 우파로서 장준하가 갖게 된 ‘조국 개발’ 지상주의와 미국의 이상화, 반공주의와 같은 한계는 그가 오랜 시련 속에 노력했음에도 끝내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암흑기 한국 양심의 상징인 장준하에게도 만만치 않았던 계급적 한계가 있었음을 보면 1970년대 제도 야권의 반독재 투쟁을 지도했던 한 종교 지도자의 최근의 극우적 발언들이 그리 놀랄 일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가진 자들에게 복무하게끔 돼 있는 제도 종교의 한계를 그 조직 안에서 극복하기란 거의 초인적 과제일 것이다.

제도권 속의 양심·지식의 한계는 국내의 문제만도 아니다. 필자는 최근 미 제국의 악행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파헤쳐 세계적 명성을 얻은 ‘미국의 양심’ 노엄 촘스키의 인터뷰를 읽고 의문을 가졌다. 인터뷰에서 그는 이라크에서 미 점령군이 이라크 무장 독립운동으로부터 부단한 공격을 받아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이 ‘놀라운 일’이라면서, 미국이 유엔 제재로 약해진 이라크를 점령해 식민화해버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에 불과하리라 예상했다고 회고했다.

베트남전쟁 때 인민전쟁의 위력이 어떠한가를 충분히 관찰한 바 있는 촘스키가 어떻게 미 제국이 같은 낭패를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저항세력의 공격이 아무리 지속돼도 미군은 석유 매장량이 많은 이라크를 떠날 리가 없을 것”이라는 촘스키의 ‘독립전쟁 무용론’은 무엇보다 의문스러웠다. 이라크의 무장 독립운동이 이미 미국으로 하여금 하루 약 2억달러의 전비를 쓰게 함으로써 쌍둥이 적자를 심화하고 달러의 급락과 제국의 도산을 현실적 가능성으로 만들었는데 이라크의 안중근·허위·신돌석 들의 희생이 그렇게까지 소용없는 일이란 말인가?


△ 우치무라 간조가 청일전쟁을 일본의 자기희생적인 의전으로 합리화한 1894년 8월11일 영문기사.

미국 자료를 가장 많이 보고 알게 모르게 미국의 분석가들의 관점을 참고하게 되는 촘스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제국의 능력을 과장되게 생각하고 약자의 저항능력을 미미한 것으로 평가하게 된 게 아닌가? 미국 지식인 사회 안에서 생활하면서 바깥의 약자들의 저항이 촉매가 되어 거대한 미 제국도 몰락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제국의 양심’이 가지지 않을 수 없는 한계를 잘 보여주는 친근한 사례로 동아시아 무교회(無敎會) 운동의 창시자로 알려진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1861~1930)가 있다. 1921~27년간 한국 무교회주의의 선구자 김교신(金敎臣·1901~45)을 지도하고, 장준하와 함께 한국의 양심이라 부를 함석헌(咸錫憲·1901~89)에게 세례를 준 우치무라가 한국과 직접적 인연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치무라 양심의 발로가 한국의 오늘날 현실과 맥을 닿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쫓겨나고 집에서 돌을 맞다

그의 최초의 의거(義擧)는 일본 역사책에 ‘불경(不敬) 사건’이란 이름으로 기록된 1891년 1월9일의 도쿄 제일고등중학교에서의 작으면서도 큰 일이었다. 모든 것을 천황에게 바치는 것이 바로 도덕이라고 가르쳤던 메이지 천황의 ‘교육칙어’가 성상처럼 학교에서 봉안·봉독되어 교원들이 깊은 절로 황민(皇民)으로서의 경배를 해야 하는 자리에서 일개의 젊은 선생인 우치무라는 머리를 약간 숙여 ‘칙어’에 인사할 뿐 경배를 하지 않았다. 기독교인으로서 천황은 같은 인간이니 신격화할 수 없다라는, 내세의 자유로 현세의 속박을 뛰어넘는 논리였다. 곧장 매스컴이 ‘비국민의 행각’이라고 침소봉대한 이 사건의 결과 우치무라는 학교에서 쫓겨나고 그의 집에 욕을 퍼붓고 돌을 던지는 ‘애국자’들의 행렬이 끊어지지 않는 등 전 사회적 이지메를 겪은 것은 물론, 이 ‘만고의 역적을 낳은’ 기독교 교단 전체도 공격을 받아 난처해졌다.

오늘의 입장에서 정신병동을 방불케 하는 당시 일본 주류의 국가주의적 분위기는 섬뜩해 보이기만 하는데, 그러면 박정희 왕국에서 ‘교육칙어’를 닮은 ‘국민교육헌장’의 암기를 거부한 사람은 어느 정도의 국가적 이지메를 각오해야 했을까? 오늘날 국가주의적 색채가 짙은 국민의례를 종교적 신념에 따라 거부하는 학생들은 학교와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 독재가 끝난 이 시절에도 내세에 대한 신념에 입각한 자율적인 ‘나’를 지키기는 거의 우치무라 시대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것이다.

우치무라의 두 번째 의거는 러일전쟁(1904) 때 비전론(非戰論)을 제창해 일본과 러시아 두 ‘강도 국가’를 동시에 준엄하게 비판한 것이었다. 그 뒤 그는 정부로부터는 물론 ‘애국주의’ 노선을 걸었던 다수의 기독교인에게까지 미움을 받아 완전히 비주류가 되고 말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진리가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고 국가가 진리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믿고 실천하는 것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일과 다름이 없다.


△ 장준하(왼쪽)과 촘스키. 그들은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으로서 존경할 만하지만 계급적 한계 또한 뚜렷하다.

그러면 기독교 계통의 조선인 도일 유학생들이 1920년대에 그렇게도 존경했던 우치무라는 평화주의와 반제국주의 신념을 철저하게 체계적으로 전개해왔을까? 그의 천부적 정의감이나 용기, 신앙심은 아주 감동적이지만, 사무라이 가문의 유명한 한학자 아들이자 당시 명문이었던 삿포로 농학교 출신, 정부 공무원과 중앙 일간지 편집실 직원 이력의 소유자, 그리고 미국 유학까지 갔다온 ‘고급 개화인’인 우치무라는 ‘국민’ 집단으로부터의 탈주를 끝까지 일관되게 시도하지도 않았다.

‘국민적’ 본적을 중심에 두고 살다

1890년대의 우치무라는 청일전쟁 발발 당시에 ‘조선 독립과 문명을 위한 이 전역의 정당성’에 대한 장문의 글을 영어로 써서 외국인을 상대로 일본 정책을 선전하고, 스페인에 대한 미국의 승리와 필리핀의 점령(1898)을 ‘문명과 정의의 승리’로 오해할 정도로 (종교인의 자율적 영역을 주장하면서도) 국민주의와 문명 지상주의에 빠져 있었다. 1920년대에도 그에게는 조선에서의 일제의 여러 횡포보다는 미국의 일본인 이민 금지 정책이 훨씬 더 중요하고 마음 아픈 사항이었다.

그는 태생적인 독립심이나 정의감으로 천황의 신격화나 조선에서의 폭력적인 식민화에 대해 거부감을 가졌지만, 서구 기독교 문명의 우월성과 아시아에서 ‘개화의 영도자’가 된 일본의 특별한 역할, 일본 국민으로서의 긍지와 같은 허망한 근대주의적 편견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그의 말로는 그가 “평생 두 J, 즉 예수(Jesus)와 일본(Japan)을 섬겼다”고 하지만 이를 다르게 보자면 그는 서구의 기독교와 일본이라는 자신의 ‘국민적’ 본적을 늘 중심에 두고 살았던 ‘선량한’ 부르주아적 근대인이었던 것이다. 사회주의를 ‘하나님에의 복종을 거부하는 악마의 유혹’으로 생각하고 제국주의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을 할 줄 몰랐던 그로서는, 감성으로 그렇게도 혐오하던 전쟁의 진정한 원인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제국주의 시대의 선의의 부르주아 지식인의 양심과 지식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조선인 제자들에게까지 광신적 국가주의에 대한 혐오와 인도·박애의 이상을 심어준 그의 양심은 고귀하지만, 그는 제국주의 시대의 테두리를 넘어 혁명·변혁으로 가는 길을 끝내 몰랐던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이와 같은 양심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물론 이와 같은 양심들을 존경해야겠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을 과장되게 이해해 우상으로 받드는 등의 과오를 저지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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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여라

2005/02/03 00:18

[준근이에게]

 

 

찔레꽃에게 미안하다

민들레인 너에게 미안하다

 

눈부신 세상

이 아름다움을

나는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었다

 

삶이 죄였다

이제는 용서하지 마라

나를 죽여라

 

 

 

- 2005. 2. 2 눈내리는 늦은 저녁에 두성이형이 술집에서 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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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군대 가면 똥개 된다

2005/01/31 23:52
군대 가면 똥개 된다


육군에서 이번 ‘인분’ 사건을 계기로 훈련소 시스템에 대한 재점검에 들어간다는 소식이다. 그런데 내가 겪은 바에 따르면 정작 훈련소는 몸이 힘들어서 그렇지, 실은 마음의 천국이다. 왜냐하면 훈련소 내무반에는 위아래 없이 동기들만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식판에 올라갈 깍두기의 개수를 둘러싸고 싸움은 벌어져도, 일방적 폭력은 일어나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육체적, 정신적 폭력은 자대배치 받은 후에 내무반에서 일어난다.

자대 배치를 받아 간 내무반에서 내가 처음 목격한 풍경도 구타 장면이었다. 무슨 일인지 화가 잔뜩 난 병장이 일등병을 엎드려뻗쳐 시켜놓고 야전삽으로 엉덩이를 내리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앞으로 2년을 넘게 살아야 한다니.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문에는 “이 문을 들어서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리라”고 씌어 있다. 그때는 내무반의 문이야말로 내게 모든 희망을 접어야 할 지옥문처럼 여겨졌다.

이번에는 소대장의 가혹행위가 문제가 됐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군대에서 정작 심각한 폭력은 피라미드의 바닥에 있는 사병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프란츠 파농은 ‘수평폭력’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식민지의 인민들이 억압자들에게 당하는 폭력에 대항할 수 없을 때, 자신의 폭력성을 동료들에게 폭발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없애자고 해도 아직도 구타가 성행하는 것은 우리 사회와 군대의 소통방식에 아직도 위계성과 폭력성이 강하게 남아 있다는 증거다.

“군기가 빠졌다”는 말을 군대에서는 흔히 “당나라 군대 같다”고 표현한다. 듣자 하니 한국전쟁 때 중공군은 의용군 행세 하느라 사병들의 계급장을 뗐고, 거기서 유래한 표현이란다. 군대에서 듣는 얘기는 워낙 허구가 많이 섞여 있어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 설명을 들었을 때 나는 속으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나라 군대는 계급의 차이 없이도 얼마든지 군대를 유지할 수 있다는 명백한 증거. 아니, 계급장이 없다니. 그 얼마나 선진적인 군대인가.”

군대 생활 해 보면 알겠지만 장교, 하사관, 사병 사이에는 뚜렷한 기능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사병들 사이에는 그런 차이가 거의 없다. 이병이나 일병이나 상병이나 병장이나 어차피 하는 일은 똑같다. 차이가 있다면 졸병들은 임무 끝난 후에 식기를 닦고, 고참들은 배 깔고 누워 TV 본다는 것뿐. 그런데 왜 계급의 구별이 필요할까? 미군처럼 직업군인이라면 계급의 구별이 월급의 차이라도 의미할 텐데, 우리의 경우는 징병제라 어차피 돈 몇 천원 차이 아닌가.

설사 이병, 일병, 상병, 병장을 구별하는 심오한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신분의 높낮이가 아니라 수행하는 임무의 기능적 차이를 의미해야 한다. 그런데 정작 그 기능적 차이는 분명하지 않고, 외려 신분의 차별만 남아 사병들의 군대생활을 힘들게 만들고 있다. 계급으로도 모자라 심지어 같은 계급 내에서도 입대 날짜에 따라 기수별로 위계질서를 만들어낸다. 꼭 그래야 할까? 국방부는 사병들의 계급이 무엇을 위한 것이며, 그 효력이 어디까지인지 분명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번 일은 군대에서 터졌지만, 군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끔 개그맨들을 보며 섬뜩할 때가 있다. 개그맨의 원조는 궁정의 광대다. 모든 이가 왕 앞에서 굽실거려도 왕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는 게 광대의 특권. 그런데 누가 대한민국 광대 아니랄까봐 가장 자유로워야 할 광대들까지도 자기들끼리 위계가 아주 엄격한 모양이다. 텔레비전에 나와 ‘선배님, 선배님’ 하며 군대 내무반 뺨치는 위계질서를 흘리곤 한다. 선진 당나라 군대에서 배워야 할 것은 국방부만이 아니다.

“사병의 인권유린.” 이 말은 너무 신선해 생뚱맞게 느껴진다. 언제부터 사병이 인간이고, 언제부터 그에게 권리가 있었던가? 어차피 훈련소 문 들어설 때 우리는 인간의 권리를 포기하라고 배웠다. 툭하면 “군대 가야 사람 된다”고 하지 않던가. 이게 어디 군대 가서 인간으로서 권리를 자각한 개인이 되라는 뜻이던가? 주는 똥 군말 없이 받아먹는 똥개를 ‘사람’의 모범으로 추켜세우는 ‘인간-똥개’들이 짖어대는 한, 사람이 개가 되는 엽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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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아느냐고 꼭꼭 눌러 썼더니...

2005/01/28 16:42

남원시지부 사무차장 김준근을 아십니까?! 
 

남원시지부 사무차장 김준근을 아십니까
준근이가 남원시지부로 온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지요
저는 지부와 관련된 일보다 개인적으로 준근이를 동생으로 좋아해
가끔씩 술을 한잔씩 하곤 합니다.
술은 언제나 제가 삽니다
준근이는 돈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와서 월급은 두번인가 받아 보았고
지금은 조합비가 없어 월급을 못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준근이는 서남대 뒤에 살고 있는데
술 먹고 집에 갈 때는 항상 걸어서 갑니다.

 

얼마전에 지부사무실에서 준근이하고 이야기하다
조합비가 얼마 남았냐고 물어 보았더니
십오만원 남았다고 그러더군요
인터넷 사용비나 기타잡비등 줄돈도 많은데 걱정이랍니다
혹시 면사무소에 종이컵 같은거 남은거 있으면
조금 갔다 주면 안돼겠냐고 그러더군요

 

얼마전에는 성호형하고 술 먹다가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파면이 된후에도 여러 가지 지부일에 신경쓰다보니
건강이 매우 안좋은 것 같더군요
저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같이 동참하지 못하는“살아 남은자의 슬픔”뿐입니다

 

사람은 가장 성스러우면서 또한 가장 이기적입니다.
타인의 눈물이나 슬픔등은 별로 생각하지도 신경쓰지도 않습니다.
저 또한 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간혹 괴로운 마음에 힘이 듭니다.
그래도 세상은 정말 아름답다고 저는 항상 믿고 있으며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저는 한 사람의 공무원노동조합남원시지부 조합원입니다.
......

그리고 노조활동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해도
앞에서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일하는
그들에게 따스한 시선이라도 보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제 마음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두서없이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관심과 협조를 부탁드리며
이만 줄입니다.
 [2005.1.20.]

 

 

 

준근이에게 (너를 아느냐고 꼭꼭 눌러 썼더니) 
 

준근아,
너를 아느냐고 글을 꼭꼭 눌러 썼더니
화를 참으며 꼭꼭 눌러 썼더니
성호형을 밟는 사람이 있구나.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왜 사는 줄도
무엇이 사는 것인줄도 모르는
철없는 애 같아
불쌍하기만 해서.

 

준근아,
언제나 정면이다
바위를 으깨 씹으며, 햇불을 들어라
전사는 그렇게 사는 것,
아니면
죽음이다

[2005.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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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1894)

2005/01/26 12:43


 

김개남(1894)

 

[동학농민군 4대 명의]


1.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2.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
3.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다.
4.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귀들을 모두 없앤다.


[동학농민군 12개조 군율]


1. 항복하는 자는 대접한다.
2.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3. 탐학한 자는 추방한다.
4. 순종하는 자에게는 경복한다.
5. 도주하는 자는 쫓지 않는다.
6. 굶주린 자는 먹인다.
7.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그치게 한다.
8. 빈한한 자는 진휼한다.
9. 불충한 자는 제거한다.
10. 거역하는 자는 효유한다.
11. 병든 자에게는 약을 준다.
12. 불효한 자는 죽인다.

 

 

[동학농민혁명 일지]

 

1892. 4. 28          조병갑 고부군수로 임명(「日省錄」)

1892. 10             동학교도의 공주신원운동(오지영「동학사」)

1892. 11. 1          동학교도의 삼례신원운동(오지영「동학사」)

1893. 2. 9           동학교도의 광화문 복합상소(오지영「동학사」)

1893. 2. 14          동학교도의 서울 괘서사건(「구한국 외교문서」) 10, 美案-1)

1894. 3. 10          동학교도의 보은집회(「취어」)

1893. 3. 4           금구원평집회(「일성록」)

1893. 4. 2           보은집회해산(「일성록」)

1893. 8. 14          전라도에 親軍武南營 창설(「일성록」)

1893. 11. 14        전주 익산민란(오지영 「동학사」)

1893. 11. 15        전봉준 등 고부군민 조병갑에게 수세감면 요구(「전봉준공초」)

1893. 11             사발통문 거사계획(사발통문)

1893. 11. 30        조병갑 익산군수로 전임 발령(「일성록」)

1893. 12             고부군민 전라감영에 수세 감면 호소(「전봉준공초」)

1894. 1. 9           조병갑 고부군수로 재부임(「승정원일기」)

1894. 1. 10          고부농민봉기 고부점령(「전라도 고부민요일기」)

1894. 1. 17          말목장터에 진을 침(「전라도 고부민요일기」)

1894. 1. 25          고부민군 백산으로 이동함(「전라도 고부민요일기」)

1894. 2. 15          조병갑 정죄, 김문현을 감봉, 박원명 고부군수 임명(「일성록」)

1894. 2. 16          이용태 안핵사로 임명(「승정원 일기」)

1894. 2. 19          전라감영군의 전봉준 체포기도 실패(「전라도 고부민요일기」)

1894. 2. 22          전라감사의 병정소집 대기령(황현 「오하기문」)

1894. 2. 25          고부군민 다시 백산으로 이동(「전라도 고부민요일기」)

1894. 2. 25          순천민란(황현 「오하기문」)

1894. 2. 28          영광민란(황현 「오하기문」)

1894. 2월말        함열조창 습격계획(장봉선 「전봉준실기」)

1894. 3. 1           박원명의 설득과 회유로 고부군민 기본세력 해산(황현 「오하기문」)

1894. 3월초        이용태의 강경탄압(「전봉준공초」)

1894. 3. 13          고부군민 완전 해산, 전봉준 무장 손화중포로 피신(「전라도 고부민요일기」)

1894. 3. 20          동학농민군 무장에서 전면기포(「전라도 고부민요일기」

                           창의문 선포(황현 「오하기문」)

1894. 3. 23          고부군 재점령(황현 「오하기문」)

1894. 3. 25          백산에 호남창의대장소 설치.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손화중, 김개남을 총사령관으로 추대. 격문과 농민군 4대 행동강령 선포(오지영 「동학사」)

1894. 3. 26          태인으로 이동(황현 「오하기문」)

1894. 3. 29          태인 점령(황현 「오하기문」)

1894. 4. 1           원평으로 이동(황현 「오하기문」)

1894. 4. 2           홍계훈 양호초토사 임명(「승정원일기」)

1894. 4. 3           전라감영군 백산 출동, 동학농민군 태인 화호와 부안으로 나누어 이동(「전봉준공초」「저날도 고부민요일기」)

1894. 4. 6           부안과 태인으로 후퇴(오지영 「동학사」)

1894. 4. 7           황토현에서 감영군 격파. 정읍관아 점령(오지영 「동학사」, 홍계훈의 경군 전주성 입성(홍계훈 「양호전기」)

1894. 4. 9           무장 점령(「양호초토등록」), 홍계훈 경병 160명, 항병 200명 금구, 태인파견(「동비토록」)

1894. 4. 12   영광 점령(「양호초토등록」)

1894. 4. 14          홍계훈 선발대 무장 파견(「양호초토등록」), 이용태 경사도 금산군 유배(「승정원일기」)

1894. 4. 15          경군 원평 진출(황현 「오하기문」)

1894. 4. 16          함평 점령(「양호초토등록」)

1894. 4. 18          경군 태인 진출, 전라감사 김문현 파직, 김학진을 전라감사로 임명(「승정원일기」)

1894. 4. 21          경군 영광 도착(「양호초토등록」)

1894. 4. 23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경군 격파(황현 「오하기문」, 오지영 「동학사」)

1894. 4. 25          정읍, 태인, 원평 진출(「양호초토등록」)

1894. 4. 26          원평에서 선전관 이주호, 군관 이효응, 배은환 등 참수(「양호초토등록」)(」동비토록」). 전주 삼천 진출(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1894. 4. 27          전주성입성(황현 「오하기문」, 「양호초토등록」). 이원회를 양호 순변사로, 엄세영을 삼남염차사로 임명(「승정원일기」)

1894. 4. 28           경군 완산 포진(「갑오실기」). 동학농민군과 경군1차 접전.(「양호초토등록」)

1894. 5. 1           동학농민군과 경군 2차 접전(황현 「오하기문」)

1894. 5. 3           동학농민군과 경군 3차 접전(황현 「오하기문」, 「양호초토등록」)

1894. 5. 4           조선정부의 요청으로 청의 섭사성 부대 아산만 상륙(박종근, 「청일전쟁과 조선」)

1894. 5. 6           일본군 인천항 상륙(박종근, 「청일전쟁과 조선」)

1894. 5. 7           나주화약 체결. 전봉준은 전라도 일대 순회이후 전라도 일대 집강소 설치(나주, 운봉 제외)(「전봉준공초」, 황현 「오하기문」)

1894. 5. 13          전운사 조팔영 파직. 이성렬 전운사로 발령(「승정원일기」)

1894. 5. 20          조팔영 경복궁 침입. 개화정권 수립(김홍집 내각). 군국기무처 설치(「승정원일기」, 황현 「오하기문」)

1894. 6. 27          성환에서 청,일 교전(박종근, 「청일전쟁과 조선」)

1894. 7. 1           청일전쟁 선전포고(박종근, 「청일전쟁과 조선」)

1894. 7 15           전봉준, 김개남 남원대회 개최(김재홍 「영상일기」, 황현 「오하기문」)

1894. 7 26           조선과 일본 사이에 양국 맹약 체결(박종근, 「청일전쟁과 조선」)

1894. 8 13           전봉준 나주로 가서 목사 만종렬에게 집강소 설치 권고, 실패(황현 「오하기문」, 「금성정의록」)

1894. 8. 17          청,일 사이의 평양전투에서 일본군 승리. 일본의 조선내정 적극 간섭(박종근, 「청일전쟁과 조선」)

1894. 9월초        전봉준 원평에서 2차기포 결정. 삼례 집결 통문(「전봉준공초」)

1894. 9. 21          양호 순무영 설치. 도 순문사로 신정희 임명(「승정원일기」)

1894. 9. 24          충청도 진천에서 신재련 봉기(「양호우선봉일기」)

1894. 9. 25          경상도 안동에서 농민군 3천명 봉기(「양호우선봉일기」)

1894. 9월말        최시형 휘하 북접 가담(「정봉준공초」, 「천도교교회사초고」)

1894. 9월말-10월초 충청, 경상도 일대에서 동학농민군 대관·일본군의 산발적 전투 다수

1894. 10월초      여산, 은진 거쳐 강경포 진출(황현 「오하기문」)

1894. 10. 6          황해도 해주에서도 봉기(「갑오해병비요전말」)

1894. 10. 11        관군 선봉장 이규태군 남하(「선봉진일기」)

1894. 10. 15        일본군 남하(박종근 「청일전쟁과조선」)

1894. 10. 16        논산도착. 북접과 합류(「이유상상서」, 「전봉준공초」) 김개남부대 전주 도착(「고문서」2, 「관부문서」)

1894. 10. 21        목천 세성산 전투에서 동학농민군 선발대 패퇴(「선봉진정보첩」)

1894. 10. 23        이인전투(「선봉진정보첩」). 김개남부대 금산 점령(황현 「오하기문」)

1894. 10. 24-25    효포, 대교 곰터 전투(「선봉진정보첩」)

1894. 10 26         동학농민군 경천점으로 후퇴(「선봉진정보첩」)

1894. 11월초      노성과 경천 진격(「선봉진정보첩」)

1894. 11. 8          공주 진격. 이인전투. 농민군과 관군 모두 우금치로 병력집결(「공산초비기」, 「순무선봉진등록」)

1894. 11. 9          우금재전투. 동학농민군 패퇴(「공산초비기」)

1894. 11. 10        김개남 진잠 점령(「선무사정보첩」)

1894. 11. 11         곰터에서 관군이 기습공격(「공산초비기」) 노성으로 후퇴, 김개남 회덕 점령(「선봉진정보첩」, 「순무선봉진등록」)

1894. 11. 12         동도차의소의 이름으로 경병, 영병, 일반 민중에 항일투쟁 초국하는 격문 고시(「선유방문병동도사서소지등서」)

1894. 11. 13        김개남 청주 공격 실패. 공주 방면으로 후퇴(「순무선봉진등록」, 「선봉진정보첩」)

1894. 11. 14        노성일대에서 접전. 황화대로 후퇴(「순무선봉전등록」)

1894. 11. 15        황화대에서 접전. 강경으로 후퇴(「순무선봉진등록」)

1894. 11. 19        전주까지 남하(札移電存案)

1894. 11. 23        전주에서 원평으로 남하(札移電存案)

1894. 11. 25        원평 구미란 전투. 태인으로 후퇴(「순무선봉진등록」)

1894. 11. 26        운봉 박봉양 반농민군 남원 회복(황현 「오하기문」, 「박봉양경력서」)

1894. 11. 27        태인 전투. 동학농민군 주력부대 해산(「양호선봉일기」, 순무선봉진등록」) 손화중, 최경선부대 광주 입성(「순무선봉진등록」)

1894. 11. 29        전봉준 입암산성 도피. 전라감사 이도재 부임(「승정원일기」)

1894. 11. 30        전봉준 백양사에 도착(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1894. 12. 1          손화중부대 해산. 김개남 태인에서 체포(「선무사정보첩」, 「선무선봉진등록」)

1894. 12. 2          전봉준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순무선봉진등록」)

1894. 12. 3          최경선 체포(「최경선 판결선고서」)

1894. 12. 5          전라도 남해안의 동학농민군 장흥 점령(「선무사정보첩」, 황현 「오하기문」, 「장흥군지」)

1894. 12. 7          전봉준 일본군에 의해 나주목으로 압송(「순무선봉진등록」)

1894. 12. 10        전라도 남해안의 동학농민군 강진 점령(황현 「오하기문」)

1894. 12. 11        고창에서 손화중 체포(장봉선 「전봉준실기」)

1894. 12. 13        김개남 전주 (장대)에서 효수(「주한일본공사관기록」)

1894. 12. 24        최시형의 북접군 충주에서 해산(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1895. 1. 1           원평에서 김덕명 체포(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1895. 2.9-3.10     전봉준 5차례 심문(「전봉준 판결선고서」)

1895. 3. 29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환 등 교수형(「전봉준 판결선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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