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푸른 하늘, 칭기스 칸



- 몽골인에게 유일한 신은 지평선에서 지평선까지 사방을 가득 채운 ‘영원한 푸른 하늘’뿐이었다. 이 신은 땅 전체를 관장했다. 또 이 신은 죄인이나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돌로 지은 집에 가두어 놓을 수도 없었으며......신의 말을 붙잡아 책 속에 집어넣을 수도 없었다.

0. 칭기스 칸의 목소리는 소박하고, 분명하고, 상식적이다. 그는 자신의 적들이 쓰러진 것을 자신의 우월함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나 자신에게는 특별한 자질이 없소” 그는 ‘영원한 푸른 하늘’이 “오만과 지나친 사치” 때문에 주변의 문명을 벌했다고 말한다.

1. 몽골군은 평생 유목민 생활을 해온 사람들로 일찍부터 이동하며 싸우는 법을 배웠다. 농민 출신의 병사들에게 달아나는 것은 패배였고 추적하는 것은 승리였다. 정주하는 병사들은 공격하는 군대를 어떤 장소로부터 몰아내고자 했다. 반면 유목민은 적을 죽이려고 했다. 공격하다 죽이건 달아나다 죽이건 상관없었다. 달아나면서 이기는 것 역시 제자리에 머물러 이기는 것과 다름없는 어엿한 승리였다. 몽골군은 적을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끌어내면, 동물의 대규모 이동을 관리할 때 사용하던 기술을 이용했다. 몽골군은 추적자들이 그들을 따라오면서 긴 줄로 늘어서게 했다. 그렇게 되면 적의 방어력이 약해졌으며, 몽골군은 그들을 함정으로 끌여들여 쉽게 공격할 수 있었다. 아니면 작은 분대로 나뉘어 달아나면서 추적하는 적 역시 작은 무리로 나누어 놓았다. 그렇게 하면 적을 좀더 쉽게 요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 칭기스 칸은 전쟁을 위해 “모자를 벗고, 얼굴을 땅으로 향하여 사흘 낮밤을 기도하면서 ‘내가 먼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니 복수를 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말했다. 그런 뒤에 산에서 내려와 작전을 숙고하고 전쟁 준비를 했다”

3. 전쟁에 임하는 칭기스 칸은 “분노의 회오리바람이 불면서 인내와 자비의 눈에 흙이 들어갔고, 진노의 불이 사납게 타오르면서 그 눈에서 물이 말랐으니 그 불을 끌 수 있는 것은 피 밖에 없을”것이라는 말했다. “사람이 알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은 적을 정복하여 눈앞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타고 그들의 소유를 빼앗는 것이다. 그들에게 귀중한 사람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보는 것이다”

4. 칭기스 칸은 지도력의 첫 번째 열쇠가 자기절제라고 가르친다. 특히 자만심과 분노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데, 자만심을 누르는 것은 들의 사자를 제압하는 것보다도 어려우며 분노를 이기는 것은 가장 힘센 씨름꾼을 이기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했다. “자만심을 삼키지 못하면 남을 지도할 수 없다.” 절대 자신이 가장 강하거나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그 산에 사는 짐승들이 있다. 그 짐승들이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산보다 더 높아진다.

5. 칭기스 칸은 “지도자의 전망이 절대 원로들의 가르침으로부터 멀리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낡은 델이 더 잘 맞으며 늘 더 편안하다. 이 옷은 거친 덤불속에서 힘겹게 살아도 잘 버텨주지만, 새 델이나 입어보지 않은 델은 금방 찢어져 버린다.” 칭기스 칸은 자신의 수수하고 소박한 생활방식에 따라 자식들에게도 물질적인 천박함이나 허튼 쾌락을 추구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좋은 옷을 입고, 빠른 말을 타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거느리면 자신의 전망이나 목표를 잊기 쉽다.“ 그런 사람은 ”노예나 다름없으며, 반드시 모든 것을 잃고 만다.“
“나는 소치는 목동이나 말을 모는 사람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있소. 우리는 똑같이 희생하고 똑같이 부를 나누어 갖소”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늘 원칙에서 일치를 보며,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결합되어 있소”라고 고백한다.

* 델(deel); 몽골의 전통 겉옷
* -Jack Weatherford. 정영목 옮김.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사계절-에서 발췌.





1227년(*주)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공리1- 전쟁기계는 국가 장치 외부에 존재한다.
명제1- 이러한 외부성은 먼저, 신화, 서사시, 연극 그리고 게임들에 의해 확인된다.

1. 국가장치의 두 극
*인도-유럽 신화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주권: ‘마법사-왕’, ‘판관-사제’라는 두 극; 밝음과 어두음, 격렬함과 평온함, 신속함과 장중함, 공포와 규율, 구속과 계약→이런 대립은 상대적 일뿐이며 분할이나 통일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쌍(서로 교대하면서 기능한다.)이다.
⇒ 두 극은 국가장치의 주요 요소로서 이항적 구분을 분배하고 내부성의 환경을 형성, 이중분절이 국가 장치를 하나의 지층으로 만든다.

2. 국가장치에는 전쟁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국가가 전쟁을 통하지 않고 폭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경우: 군인대신 경찰관과 교도관을 동원, 전투를 방지하면서 장악하고 속박하는 기능.
*국가가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경우: 전쟁의 법률적 통합과 군사 기능의 조직화가 전제.

3. 전쟁기계는 다른 곳(외부!)에서 온다.
*전쟁 기계는 국가 장치와는 다른 종류, 다른 본성,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다.

4. 전쟁기계와 국가장치의 비교
*장기와 바둑: 장기는 구조적으로 기능, 제도화되고 규칙화되어 있는 전쟁, 전선과 후방 다양한 전투들이 코드화되어 있다. 닫힌 공간을 분배→홈패인 공간. nomos
바둑은 투입 또는 배치 기능을 수행(바둑알은 경계짓기, 포위하기, 산개하기), 전선없는 전쟁, 충돌도 후방도 없으며 심지어는 전투마저 없는 전쟁. 열린 공간의 분배→매끈한 공간. polis.

5. 전사
*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전사의 독창성과 기인한 성격은 부정적인 형태로 드러난다.→따라서 전사란 언제라도 군사적 기능을 포함해 모든 것을 배반할 수 있는 사람이거나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칭기스칸)이다.

6. 국가 자체는 전쟁기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국가는 군사제도 형태로서만 전쟁기계를 전유할 수 있지만 이 전쟁기계는 끊임없이 국가에 문제를 제기한다.(유목민의 전쟁사)

7. 클라이스트의 작품
*전쟁기계를 국가장치에 대립, 산적떼/비밀, 속도, 정동/외부성에 의한 엄청난 속도와 발진력/정동(affect)는 전쟁무기이다. 정동의 탈영토화 속도/수없이 부서진 원환들/몸짓이나 감동의 탈주체화/죽을 힘을 다하는 광기와 응고된 긴장의 연속적인 질주

*스모선수, 바둑기사

8. 국가에 환원불가능한 전쟁기계가 국가에 도전할 수 있는 혁명력을 갖춘 사유기계, 사랑기계, 죽음기계, 창조 기계로 생성가능한가?

문제1- 국가장치의 형성을 방지할 수 있는 수단은 존재하는가?
명제2- 전쟁기계의 외부성은 민속학에 의해서도 똑같이 확인된다.

1.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원시공동체.
*원시사회의 메카니즘은 국가장치의 형성을 저지하고 불가능하게 만드는 장치!-추장(chef)은 위신과 설득과 집단의 욕망을 미리 간파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제도적, 정치적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추장은 권력자이기보다는 리더나 스타와 같은 존재, 항상 인민들에게 부인당하고 버림받을지 모를 위험에 처해 있는 존재이다.

2. 전쟁은 국가를 반대한다. 그리고 국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전쟁은 국가를 저지하고 물리치는 사회 상태의 한 양태이다.

3. 국가형성을 억제하는 여러 가지 집단적 메카니즘
*패거리나 무리: 보고타 거리의 청소년 갱 집단은 공동 도둑질(절도)과 공동분배 후 해산, 문제가 발생시 집단적 탈퇴, 15세가 되면 갱을 탈퇴해 독립한다
*동물의 무리에서도 리더제는 복잡한 메카니즘을 지니고 있다: 최강자가 리더가 아니라 내적인 관계들의 짜임에 의한 것으로 안정적인 권력의 설치를 억제한다.
*‘사교성’의 형식: 사교집단은 사회집단처럼 권력의 중심과의 관계가 아니라 위신을 전파(분산)함으로써 움직인다.
⇒무리나 패거리는 리좀유형의 집단으로 권력형 기관 주위에 집중되는 나무형 집단과 대립된다. 따라서 패거리, 도적떼, 사교계는 전쟁기계가 변신한 모습이다.

4. 전사와 전쟁기계의 규칙들-국가형성을 저지하는 것들(전사의 특징); 근본적인 무규율성, 위계제도에 대한 문제제기, 버림이나 배반을 통한 끊임없는 협박, 민감한 명예의식.

5. 국가의 출현: 국가는 전쟁의 결과이기보다는 경제적 혹은 정치적 힘들의 진전으로서 설명된다. 따라서 국가는 진화가 아니라 갑작스런 돌연변이(‘씨족에서 제국으로, 패거리에서 왕국으로’라는 낡은 시나리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진화가 아니라 절단이다)

6. 국가는 완성된 모습으로 항상 존재해 왔다(‘원국가’의 가설): 국가는 항상 외부와 관계를 맺어 왔다. 국가를 규정하고 있는 것은 내부와 외부의 법칙이다. 따라서 보편적인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7. 국가나 전쟁기계를 독립성의 관점이 아니라 영구적인 상호작용의 장 속에서 공존과 경쟁의 관점에서 외부성과 내부성, 변형의 전쟁기계와 동일성의 국가장치, 패거리와 왕국, 거대기계와 제국에 대해 사고해야 한다. 동일한 장이 국가 안에서 자신의 내부성을 한정할 뿐 아니라, 국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나 국가에 대항하는 것 안에서 자신의 외부성을 서술한다.


(*주) 1227년(1227년 8월 18일)은 징기스 칸[그의 본명인 테무진은 ‘대장장이’라는 뜻으로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패배시킨 적장의 이름을 본뜬 것이다]의 사망을 말한다. 천개의 고원은 ‘목차를 보면,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1914년 전쟁 그리고 ’늑대인간‘의 정신분석, 1947년 아르또가 기관없는 신체를 알게 된 해, 1874년 바르베 도르빌리(Barbey d'Aurevilly)가 중편소설을 이론화한 해, 1227년 징기스 칸의 죽음, 1837년 슈만의 죽음......여기 날짜들은 곧 사건들이자 연대기적 진행성을 잃어버린 흔적들이다. 천개의 고원은 사고들로 가득 차있는 셈이다.’(Deleuz. Gilles[1980]. 김종호 옮김. 2000. 『대담 1972~1990』. 솔. p.55.) 들뢰즈는 천개의 고원은 개념들로 가득 찬 책이며, 그 개념은 사건을 말하는 것이지 본질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따라서 천개의 고원은 비개성적이고 비사물적인 개별화를 가르키는 것이다.(같은 책 p.56. 참고)


-Deleuze, Gilles and Guattari, Félix[1980]. 김재인 옮김. 2001. 『천개의 고원』. 서울: 새물결. [12. 1227년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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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고, 국가를 사랑하고, 민중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어나, 진짜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다. 진짜 사랑, 구체적인 사람 개인을 사랑하려면 가슴이 필요하다. 머리는 인류를 사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류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인류는 없다. 존재하는 것은 구체적인 사람들뿐이다.”

- 김희철, 스리랑카 기차여행에서 더러운 사람들에 대한 나의 태도를 곱씹으며


(참소리 http://www.cham-so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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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문화민주주의를 위하여

2005/03/18 17:57

새로운 문화민주주의를 위하여
-남원시장의 ‘한복 입는 날’ 지정과 관련하여

 

 

의복이란 개인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이다.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를 보면 그 사람에 대한 많은 정보를 첫 만남에서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옷을 입는 패션의 변화에 따라 그 사회변화를 통찰할 수 있다. 옷은 개인의 정보이면서 사회적으로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로인해 그 옷을 입게 된 개인적 동기와 더불어 사회적 동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들이 학교에서 배운 거시적인 왕족의 정치적 역사보다는 가족, 음식, 의복, 주거등과 같은 미시적 사회사를 연구한 페르낭 브로델(Femad Braudel)은 “의상은 욕망과 탐닉의 대상임과 동시에  사회,정치적 영향을 분명히 받고 있으며, 일부 세력은 정치적으로 주도하거나 이용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철학자 푸코(Foucalt, Michel Paul)는 이렇게 개인의 욕망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사회변화를 ‘통제사회’라고 했으며, 모든 영역에서 그물망 같은 규율과 통제가 작동한다고 분석했다. 일제시대나 군사독재시절의 교복이나 두발단속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옷은 성적 불평등을 야기하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현대 여성들의 평상복인 바지를 입기 위해서 여성들은 100여년간 투쟁했다(Diana Crane. Fashion and its social agenda. 2004). 이처럼 의복은 개인의 욕망과 사회,정치적 의도에 의해 항상 긴장관계에 있다.

 

남원시장은 ‘한복 입는 날’ 지정 운영 계획(자치행정과 공문-2233)에서 춘향제 성공적 개최와 우리고장 홍보를 이유로 3월까지 개별적으로 한복을 구입하여 4월부터 남원시 산하 전직원들은 한복을 입고 근무하라는 ‘협조’공문을 시달하였다.

 

한복을 입고 근무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실 우리 옷을 입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남원시청은 시장실, 부시장실, 국장실을 제외한 실과소 사무실은 근무자와 근무자간의 여유공간이 부족해 직원들이 지나다니기가 불편할 정도로 사무실이 비좁다. 여유로운 생활공간이나 일터가 보장되어야 그 품이 넉넉해 보이는 한복은 자칫 거추장스러운 애물단지로 전락할 수가 있다. 또한 현장에 달려 나가 일을 하는 기술 분야 공무원이나 수로원, 검침원, 주차요원, 공익근무요원들에 대한 배려나 언급이 없다.

 

더구나, 선배공무원을 포함하여 임금이 열악한 하위직 공무원이나 신규직원, 일용직을 포함한 비정규직 직원들에게는 20만원을 호가하는 한복을 구입하는 것이 뻔한 봉급쟁이로써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정식 공무원 신분이 아니라는 이유로 각종 사소한 혜택에서는 일상적으로 제외되고 차별받는 비정규직에게 지침이나 협조공문으로 그 ‘명령’을 지킬 것을 강제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다. 또한 여성들의 한복은 남자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입고 생활하는 것이 까다로우며, 자칫 잘못하면 그 옷차림으로 인해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힘을 얻어 직장내 성평등을 해칠 우려가 있다.

 

우리 문화를 지키고, 남원을 홍보하는데 한복을 입는 것은 좋은 생각일 수 있다. 그렇지만, 대안적 생활문화운동으로 차분히 고민되고 실천되는 ‘우리옷 입기’가 아니라, 행사준비를 위한 전시성 행정이라면 그 방향이 옳지 않다고 본다. 옷을 억지로 입혀서 남원이 홍보되는 것은 아니다. 꾸준하고 진지하게 기획되어야 하는 일이다. 설령 급하게 기획되었다 하더라도 한솥밥을 먹으면서 일을 하는 동료공무원들에게 그 의미와 의견을 들어 차분히 준비되어야 한다. 최소한 720명이 넘는 조합원을 대표하는 노조와의 협의나 지역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수렴이 없이 일방적으로 ‘시달’하는 협조공문은 요즘 진행하고 있는 지자체의 혁신사업이나 공직사회개혁과는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적 행정절차이다. 아직도 공직사회에서 시장지시에 의한 협조공문은 법보다도 무섭게 하위직 공무원을 위협한다. 공직사회 내부의 상명하복이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것이 안타깝다.

 

옷이나 축제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다이아나 크레인이 말하는 ‘의상민주화’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존의 구태의연한 행정관습을 과감히 버리고 내부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봄이 성큼 다가오면서 남원의 춘향제도 가까워지고 있다. 공무원노조 남원시지부는 남원시민과 더불어 2005년 춘향제가 온 국민과 함께 하는 기쁨의 축제, 어울림의 축제가 되기를 바라며 명실공히 전 지역주민이 준비하고 참여하는 축제를 희망한다. 그 축제를 위하여 일방적 지시나 업무하달이 아니라 사소한 부분까지 공무원과 시민이 함께 하고, 새로운 문화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남원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 2005. 3. 17. 이유없이(?) 한복을 구입해야 하는 공무원들을 보고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북본부 남원시지부]명의로 발표하기 위해 쓴 논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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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우디요(Caudillo) 경제와 ‘생명없는 발전’

우석훈 (초록정치연대 정책실장, 경제학 박사)

1. 세 명의 여성경제학자
내가 경제학 공부를 시작한지 이제 20년이 되어가고 박사 학위를 받은 걸로 생각해보더라도 10년이 지나갔다. 그 동안에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경제학자가 누구일까라고 지난 연말에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우연한 일인지 모르지만, 그 세 명은 전부 여성 경제학자들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스팔타쿠스당을 만들고 이끌었던 여성 정치인 정도로 알려진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ourg), 케인즈의 제자 정도로 치부되는 죠안 로빈슨(Joan Robinson) 그리고 이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도넬라 메도우즈(Donnella Meadows)가 그 세 명이다. 아마 나의 학문적 계보나 이론적 흐름은 이 세 명의 여성 경제학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합친 것 혹은 그들의 공통점 어디엔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들은 메도우즈라는 이름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지만, 로마 클럽이 세상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전망하는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최고의 시스템 공학자가 바로 2년 전에 급작스럽게 사망한 메도우즈 여사였고, 이제는 사라진 학파인 제로성장론학파를 70년대 10년 간 끌었던 사람이 바로 메도우즈 여사였다. 세상이 자원 고갈로 인하여 멸망할 것이라는 로마 클럽의 우울한 예언의 기술적 근거를 만들었던 메도우즈 여사는 0%의 성장률로도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경제적 운용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였고, 정부가 도로공사 등 쓸데없는 공공사업과 군수산업을 후생 분야에 투입하면 물량적인 측면에서의 성장을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행복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10년간 ZEG(Zero Economic Growth)라는 개념을 입증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우연일지 모르지만, 로자 룩셈부르크의 분석의 상당 부분은 미국의 철도 산업에 맞추어져 있고, 그렇게 건설과 토목으로 확장된 자본주의가 결국에는 더 이상 착취할 비자본주의적 요소가 사라져 제국주의 단계를 거쳐 멸망하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죠안 로빈슨 역시 축적과 성장에 대한 개념을 제시하면서, 가난한 사람과 고용에 관심을 갖지만, 정부의 토목산업에 재정지출로 성장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연일지 모르지만, 이 세 명의 여성경제학자들이 지금의 우리나라 경제에 대한 담론을 보았다면, 아주 이상한 논리들이라고 웃어버렸을 것 같다. 지금 우리나라는 짓고 부수는 것으로 경제를 살리자는 논리가 지고지순의 사회정의론처럼 되어있는 사회이다.

2. 쿠즈네츠와 팬 테이블
남성 경제학자 중에서 건설산업으로 경제가 좋아질 수 없고, 빈곤의 문제가 오히려 심화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1971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하버드 대학의 사이몬 쿠즈네츠(S. Kuznets)이다. 쿠즈네츠가 젊은 시절 통계자료를 만들면서 고단한 시절을 보낸 유펜(UPenn)에는 펜 테이블이라는 대단히 훌륭한 국가별 거시경제 통계가 아직도 업데이트되고 있다. 이 쿠즈네츠가 사용한 방식대로 국민총생산과 건설업 지출액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경제를 간단히 분석해보고, 이를 국제 통계와 비교해 보았다 졸고, “아픈 아이들의 세대”, 2005. 뿌리와 이파리
. 건설업매출액/GDP가 선진국은 8~13 사이에 존재하고, 이를 벗어난 선진국은 일본 밖에 없다. 일본의 경우 18을 넘어서면서 헤이세이 공황이라고 하는 10년 공황에 빠져들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두 번 20을 넘어서는데, 79-80년 공황이 그렇고, 97-98년도의 IMF 경제위기 때 20을 넘어 26까지 증가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20을 넘어서면 누적된 건설산업이 공황을 일으키는 셈이다. 이론적으로는 경제의 다른 부분에 투입되어야 할 요소가 건설산업으로 집중되면서 요소 부족을 일으키는 일과 ‘지대(rent)’를 과잉으로 획득하기 위한 투기로 인한 거품(bubble)이 발생하게 된다는 두 가지 경우로 설명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국민경제 내에 건설 관련 활동이 13% 내외 정도에서 유지되어야지, 20%를 넘어서면 이미 건설 중심의 투기경제로 전환된다고 할 수 있다.

3. 중남미형 경제와 스위스-덴마크형 경제
남미 경제를 설명하는 가장 큰 요소가 지방 토호 즉 ‘카리스마를 가진 사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까우디요(Caudillo)의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졸고, “한국경제의 위기가 저성장이 아닌 이유 - 참여정부의 실체, 까우디요 경제로 가는 길”, 당대비평 2005 신년 특집호 “불안의 시대, 고통의 한복판에서”.
. 역사상 가장 악랄하고 잔인했던 착취 경제였던 스페인의 중남미 수탈이 끝나고도 중남미의 고통은 끝이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스페인이 물러난 다음에 토지를 불하받은 까우디요들이 계속해서 플렌테이션과 광산을 중심으로 수탈 경제를 운영했고, 중남미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발부터 양극화된 중남미 경제는 21세기에도 이 까우디요 경제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국가들보다 낮은 국민소득을 가지고 있던 덴마크와 스위스는 전혀 다른 형태의 경제 발전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가족형 소농이 아직도 존재하고, 직접 민주주의가 꽃을 피웠으며, 가족형 기업에 의한 경제활동이 활성화되고, 현재 국민소득은 3만 5천불을 넘은 상태이다. 현재의 건설산업을 중심으로 한 각종 경제 살리기 움직임은 한국형 대공황의 전주곡일 뿐만 아니라, 토지를 소유한 새로운 한국형 까우디요라는 새로운 계층을 발생시키거나 강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골프장이 개발될 산을 소유한 지방지주, 도로 옆의 생태보존지구의 지주 그리고 만평 이상의 농가소유주들은 현재의 전국적 개발정책에서 새로 까우디요로 편입되고, 이와 상관없는 대다수의 1주택 소유자나 전세거주자, 도시빈민과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대부분의 선량한 농민은 건설을 내세운 새로운 부의 ‘부등가 교환’을 둘러싼 경제 게임에서 일방적인 피해를 입고, 중산층에서 하류민으로, 그리고 하류민에서 극빈층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사태의 심각성이 존재한다.

4. 생명 없는 발전의 말로
건설 위주의 경기부양책은 현재 한국 경제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선택 중에서 최악의 선택이지만, 이미 이 정부는 이 선택의 버튼을 눌렀다. 금년 7월 헌법 121조의 ‘소작금지’ 원칙을 어겨가면서 도시투기자들에게 전면적으로 농지보유를 허용하는 농지법 개정안을 실행할 것이고, 국토의 생태적 안전장치를 해체할 ‘토지규제기본법’을 제정할 것이다. 카지노와 골프장을 시범사업 종목으로 선정한 기업도시나 국내 법규가 적용되지 않는 경제자유구역은 이 전면적 건설업 활성화의 전주곡에 불과하다. 이러한 발전을 ‘생명 없는 발전’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짓고 부수기 좋아하는 폭력만 남은 남성들의 경제학에 대하여 여성들의 시각으로 본 대안 경제학이 가장 필요한 시점이다. 환경은 미래가치이고, 개발은 현재가치라는 조악한 2분법이 아니라, 실제로 무엇이 국민들이 행복하고 잘 사는 길인가라는 ‘어머니의 경제학’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회 구성원 모두를 위해서 간절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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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우주의 벽을 깨부수다

우리의 생각을 바꾼 아인슈타인의 세계관… 세계의 기본단위를 입자 대신 사건으로 설명

▣ 김동광/ 고려대 강사 · 과학사회학

정녕 아인슈타인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무엇일까. 흔히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라는 현대 물리학의 두 기둥에 해당하는 이론체계를 수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지만 그것이 우리와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을까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게 많지 않을 것이다. 올해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아인슈타인 기념행사를 접하면서 이런 의문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으로 대표되는 상대성이론이 우리에게 준 영향은 생각보다 깊고도 근본적이다. 한마디로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큰 폭으로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4차원의 시공간 ‘시공연속체’

우리는 흔히 이런 변화를 세계관의 변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말처럼 간단하거나 쉬운 것이 아니다. 세계관의 변화는 토머스 쿤의 말을 빌리자면 패러다임의 전환이며, 말 그대로 혁명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아인슈타인에게 크게 빚지고 있다는 뜻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이다. 아인슈타인 이전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점은 뉴턴의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의 개념에 기반한 것이었다. 즉, 인간을 비롯한 삼라만상이 움직이고 활동하는 배경이자 무대로 항구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을 서로 분리되지 않은 ‘시공연속체’로 인식했다. 오늘날 우리가 공간 3차원에 시간의 1차원을 더해서 4차원의 시공간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우주와 나를 하나로 묶어주었다. 어느 쌍성계가 거느린 한 행성의 표면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이 시공연속체 개념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말 그대로 서로 별개의 것으로 인식되던 시간과 공간이 하나의 통일된 연속체(continuum)로 인식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시공연속체의 특성이 관찰자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가지는 중요한 함축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어떤 물체의 속도가 빛에 가까워질 때 나타나는 길이의 수축이나 시간의 지연과 같은 기괴한 효과를 연상시킬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관찰자가 속한 계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 가령 지구에서 빛의 속도에 가깝게 달리는 우주선의 시계가 느리게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주선에 탄 사람은 자신의 시계가 정상으로 가는 것으로 보인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여서 수많은 공상과학(SF)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동안 인간이라는 주체와 분리되어 ‘저 너머’(out there)에 우리와 무관하게 있는 것으로 생각되던 세계가 아인슈타인에 이르러 비로소 하나로 이어지게 됐다는 사실이다. 이 발견의 함의는 관찰자인 주체와 그 대상인 객체 모두에게 새로운 지위를 부여하며, 양자가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이라는 인식을 열어주었다. 따라서 세계는 더 이상 인간활동의 대상으로 머물지 않고, 인간 역시 데카르트 이래 물질로만 간주했던 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게 되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이루는 기본적인 단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다. 다시 말해서, 아인슈타인 이전의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만물의 기본은 입자였다. 근대물리학의 집성판인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힘과 운동을 통해 세계의 작동원리를 설명했고, 여기에서 삼라만상의 기본단위는 입자였다. 그에 따르면 지상에서는 입자로서의 포탄, 사과 등이 운동 3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천상에서는 입자로서의 행성들이 중력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이 입자는 손으로 만지고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체이며, 근대적인 존재론은 이러한 입자를 기반으로 삼는다.


△ 아인슈타인은 나홀로 입자에서 관계망의 사건으로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사건의 개념은 뉴턴(오른쪽)의 입자론에 기초한 존재론을 바꾸었다.

이런 뉴턴의 생각이 아인슈타인에 이르면 입자는 그 의미를 잃고 사건(event)이라는 개념이 제기된다. 사건은 사상(事相)이라고도 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입자 개념과는 달리 관계망(network)을 기반으로 삼는다. 따라서 포항공대 소흥렬 교수(과학철학)는 “아인슈타인의 사건이라는 개념이 이러한 기존의 존재론을 바꾸어놓았다”고 설명했다.

아인슈타인은 물질과 에너지, 가속도와 중력이 실제로는 하나라고 말한다. 우주 탄생 초기에는 물질과 에너지의 구분이 없었고, 오늘날 우리가 자연력이라고 생각하는 중력,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도 모두 단일한 ‘초힘’으로 통일돼 있었다. 오늘날 표준가설로 받아들여지는 ‘빅뱅 이론’에 따르면, 그 뒤 우주가 팽창하면서 온도와 압력이 내려가자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네 가지 자연력으로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자기력과 약한 핵력은 하나로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전약력’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을 비롯한 삼라만상이 외따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무수한 요소들이 상호 작용하는 연결망 속에서 끝없이 명멸하는 사건임을 보여준다. 결국 오늘날 지구를 지배한다고 자부하는 인류도 우주의 역사라는 척도에서 보면 지극히 일시적인 사건에 불과하다. 오늘날 생명현상 자체를 개체나 종의 실체가 아닌 생태계로 인식하는 생태적 관점도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세계가 법칙성에 지배된다고 믿어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아인슈타인이 근대적인 인식론을 철저히 부정한 사람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그는 세계가 조화롭고 법칙성에 의해 지배된다고 굳게 믿었고, “세계가 가장 불가사의한 점은 우리가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라는 말로 세계에 대한 이해 가능성이라는 신념을 끝까지 견지했던 인물이다. 자신이 기초를 닦은 양자역학의 함의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세계가 확률과 우연에 지배된다는 생각을 거부한 사례는 유명하다. 근대과학의 기반을 다진 뉴턴이 물리학에 대한 연구보다 연금술에 대한 연구가 더 많았던 것처럼 아인슈타인도 자신이 열어놓은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의 손잡이를 선뜻 쥐지 못했던 셈이다.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이 남긴 유산은 실로 풍성하다. 우리는 대개 그의 과학이론이 우리 생활에 응용된 기술품이나 과학이론으로 그 영향력을 한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기실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그에게 빚진 셈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우리는 그의 이론이 우리의 인식과 세계의 존재에 대해 갖는 함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이는 비틀스에서 환경운동에 이르기까지 그의 입김을 받지 않은 분야가 없다고까지 이야기한다. 아마도 이 말은 부분적으로는 옳고 부분적으로는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특수상대성이론 100주년을 맞이해서,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려는 본격적인 노력이 필요한 때다.

 

[한겨레21 2005년03월02일 제5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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