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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베트남 신부 -경향신문

[여적]베트남 신부
입력: 2008년 11월 05일 18:04:01
 
결혼중개업자들은 베트남 시골 처녀들을 ‘수집하듯이’ 모은다. 이렇게 모인 여인들은 합숙을 하며 ‘그날’을 기다린다. 그날은 외국인에게 낙점을 받는 날이다. 그러나 그날은 빨리 오지 않는다. 여인들은 서서히 지친다. 기다림은 바래고, 설렘도 늘어진다. 제발 누군가 나타나기만을 고대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사내들이 와서 얼굴이며 몸매를 더듬듯 쳐다본다. 이윽고 누군가에게 찍힌다. 그의 아내가 된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남자 품에 안긴다. 다음 날 결혼식을 올리고 한국으로 간다. 이 여인들의 공통점은 가난이다. 딸은 부자나라 한국에만 가면 부모와 동생들을 가난에서 꺼내리라 믿는다. 부모들은 부디 내 딸만은 가난의 땅을 벗어나 잘살라고 기도한다. 그렇게 떠나오고 보냈다.

한국의 거리에는 베트남국제결혼 광고가 경쟁적으로 나붙기 시작했다. ‘재혼도 가능’에서 시작한 문구는 이내 ‘후불제 염가 제공’ ‘100%환불 가능’으로 치달았다. 엄연한 인신매매였다. 베트남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흔드는 일들이었다. 거기에 남편에게 맞아 죽거나 투신 자살한 신부들 이야기가 베트남인들을 분노케 했다. 특히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한 베트남 신부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엄마를 만나고 싶다. 다만 엄마가 슬퍼할 것이, 더 아플 것이 두렵다.”

1970년대 이 땅에도 소위 ‘기생파티’라는 것이 있었다. 일본인이 대거 몰려와 한국 여인들을 껴안고 술을 마셨다. 기생파티가 관광코스에 들어 있었다. 그들의 무기는 물론 돈이었다. 가난했던 이 땅의 딸들은 그들의 품에 안겼고, 우리들은 극도의 수치심에 몸을 떨어야 했다. 가난한 나라의 공항은 늘 눈물에 젖는다. 1970년대까지 김포공항도 그랬다. 순전히 돈을 벌기 위해 낯선 나라로, 잘사는 나라로 눈물을 뿌리며 떠나갔다. 우리네 누나와 형들이 이 악물고 주먹을 쥐고 떠나갔다. 지금은 호찌민 공항이 젖어 있다.

우리가 지난날 그렇게 울며 가슴을 쳤는데도, 다시 베트남을 울리고 있다. 베트남 당국이 불법 결혼중개를 근절하겠다고 했는데도, 최근 한국 남성 7명이 수십명의 베트남 여성들을 세워 놓고 자신의 신붓감을 골랐다. 그리고 결혼중개업자들은 단속을 피해 이웃 나라 캄보디아로 옮겨가고 있단다. 다시 시골 처녀들을 수집하듯이 모으고 그녀들을 줄세울 것이다.

<김택근 논설위원>


베트남과 관련된 소식을 찾다보면 별의 별 상황을 다 본다.
요즘 진짜 웃기는건.

다음의 세계엔이라는 곳에 있는 베트남.......방?

- 난 그 들.이 참. 싫다. 가끔은. 정말. 내 눈앞에 있으면. 한대.때려주고 싶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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