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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룩과의 전쟁에서 생각하기

 

간만에 푹 자고 싶었다.

 

남들의 일상에 비하면 호사를 누리고 사는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10시간이 넘게 포장도 되지않은 동티모르의 도로를 밟으며 이곳저곳을 헤메고 돌아왔으니 할일이 산더미 같이 있더라도 오늘은 기필코 늦게까지 자보리라 마음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만사 제치고 잠자리에 든 게 밤 11시 30분. 하지만 채 30여분도 지나지 않아 몸 이곳저곳이 간지럽다. 모기에 물렸으려니 하며 애써 무시해보지만 한군데만 가려운 것이 아니다. 열심히 몸을 긁어보지만 가려움이 가라안지를 않는다. 혹시 모기 말고 다른 벌레에 물린 것은 아닐까해 방안은 뒤적거려보지만 오늘도 오후 8시부터 전기가 나간 탓에 ‘촛불’을 들고 ‘민첩한’ 벌레들을 찾아보겠다고 설치는 것이 우스워 보여 몇 분하다 포기하고 만다. 가려움은 새벽내내 가라앉지 않았지만 마치 잠과 경쟁이라도 하는 냥 눈을 뜨진 않았다.


아침, 커텐 쳐진 창문으로 햇볕이 비집고 들어온다. 눈을 1/3쯤 떳다가 다시 잠에 빠져든다. 얼마나 지났을까? 닭이며 맷돼지 우는 소리로 집안이 들썩들썩한다. 이것도 무시해야한다. 어디 하루 이틀이랴, 가축의 목따는 듯한 울음소리가. 하지만 계속된 마리아의 괴성 앞에선 더 잠을 잘 수가 없다. 게다가 몸은 계속 간지럽기만하다.


씩씩거리면서 잠에서 깬다. 문뜩 좀 더 자고 싶지만 잘 수 없는 이런 여행이 너무 고달프다는 생각이 들면서 가려운 곳으로 시선이 향한다. 팔뚝이며 허벅지며, 목 뒷덜미며, 얼굴만 빼곤 발끝에서 목까지 벌레에 잔뜩 물린 흔적이 가득하다. 같은 집에 머물고 있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쥐벼룩’에 물린 것 같다고 말한다. 약을 발라도 가라앉지 않는 가려움과 발열에 짜증이 밀려들었다. 그때부터 이집의 이곳저곳이, 동티모르의 이런 상황들이 너무 화나기 시작했다.


오늘도 2주전 동티모르에 도착했을 이후로 하나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이 시작되고 있을 뿐이었다. 밤부터 나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뒷마당에서 펌프질을 하면서 머리를 감고, 대야가 비싸기도 하고 위생관념이 한국과는 달라서인지 방금 머리를 감은 대야에 집주인은 설거이 거리를 담는다. 주위에 닭과 맷돼지, 개들이 모여든다. 오전 내내 울어대던 이집 막내딸 마리아가 발가벗은 몸에 흙은 한아름 뒤집어 쓴 채 거실과 부엌을 헤졌고 다니는 통에 바닥은 온통 흙먼지로 가득찼고, 4살 먹은 이집 아들 구디뉴는 언제 마지막으로 씻었는지 조차 모를 손과 얼굴을 해서는 아침 식탁을 뒤적거린다. 내가 묶는 방안 문틈으로는 열심히 막아보려는 나의 선방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생쥐가 민첩하게 방안 탁자 뒤로 숨어든다.


계속 몸을 긁어대면서 입었던 옷과 방안에 있는 이불보따리를 챙겨다가 뒷마당으로 나가 펌프질을 해댄다. 갑자기 이렇게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살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동티모르란 세계에 발을 들였을 때 이 나라의 고요함이 좋았다. 99년 독립이후 어떠한 재건과정을 거치고 있는지, 이들의 삶은 어떠한지가 궁금해 무작정 찾아들었다. 처음 딜리에 왔을 때, 5층을 넘는 빌딩이 없음이 좋았고, 오염되지 않은 바다의 광할함이 좋았다. 맷돼지가 뛰놀아 차들이 비껴서야하는 도로는 자연적인 것이라 생각했고, 흙에 파묻혀 사는 아이들을 보면서도 한국의 아이들보다 풍요롭다 생각했다. 정리되지 않은 부엌살림을 보면서는 거의 매일 8시면 전기가 나가고 수도가 집으로 잘 들어오지 않아 개수대조차 없는 곳에서 살림살이의 정돈을 요구하는 것이 참 배부른 소리처럼 여겨졌다. 방안에 살림살이라곤 하나도 없어 맨 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노곤함도 이곳 사람들의 살림살이, 그래서 잠 잘 곳이 없는 곳에 비하면 그래도 풍족하다 생각했다. 가끔 눈을 찌푸리게 하는 것들도 낯선 이방인이 너무 많은 위생관념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서 생쥐에 요란을 떨거나 몇일이고 받아 둬 먼지가 고인 물로 양치를 하면서 궁시렁 거리는 이들을 볼 때마다 참 소란스럽다 생각했다. 근데 오늘은 내가 그 모양이다.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다 짐을 꾸렸다. 오늘은 내일마감인 원고도 하나 있고, 잠도 좀 자야겠고. 이것저것 핑계를 만드니 한순간에 한아름이 된다. 더 망설일 이유가 없다며 점심을 먹자는 소리를 뒤로하고 약속이 있다며 빠져나와 근처 호텔에 짐을 푼다. 하루에 3만 5천원. 두명이 묶는 숙소이니 1만 7천원인 셈. 짐을 풀고 따뜻한 물에 몸을 씻는다. 얼마만에 보는지 모를 거울 위로 벼룩이 지나간 흔적이 가득 남아있는 내 몸이 비쳐진다. 혼자 중얼거린다. 그래 이걸 봐,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어. 그동안 잘 지내왔잖아. 오늘 하루뿐이라고. 니가 호사스럽게 지낸 것도 아니고 1만 7천원이면 그리 비싼 돈도 아니라고. 게다가 오늘은 해야할 중요한 일이 있잖아라고.


맥주를 한캔 따고 언제 마지막으로 누워보았을까 싶은 하얀 침대위에 앉는다. 그렇게도 졸립고 자고 싶었는데, 딱딱한 시멘트 바닥이 아니라 푹신한 이불위에 누워 잠을 청하고 싶었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다시 맥주를 딴다. 그리고 원고를 쓴다고 부산을 떨어본다. 하지만 한 줄도 제대로 써지지 않는다. 온몸은 계속 간지럽고, 물린 곳은 하도 긁은 탓에 핏줄이 선다. 계속 머릿속으로는 잘 온거라고 생각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는다. 항상 이렇게 도망칠 곳이 있다면 언제 ‘사람’들과 같이 살 수 있는 것일까? 나의 고민은 땅위에 발 딛고 있는 것일까? 그저 생각으로만 시선이 그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고, 나의 삶은 사람들 속에 있다고 최면을 걸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몇 시간째 풀리지 않는 고민만 계속한다. 무엇인가 나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호텔방에서 일어서지 못한다. 아니 일어서지 않는 것이다. 이런............


동티모르의 딜리에서 7월 19일 호텔방에서 낮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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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한 아이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망설였다. 돈을 줄까 말까..

조금이라도 주어야겠다 생각하고 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돈을 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눈동자가 무엇인가에 취해있었기 때문이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하고, 외면하자 아이는 더욱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손을 툭툭 쳐대며 1페소만 달라고 말했다. 매연을 피하는 손수건을 눈밑까지 올려 눈의 마주침을 피하려고 애썼다.

 

마침 집으로 향하는 차가 왔다. 재빨리 차로 뛰어가보지만 아이는 필사적으로 나의 행로를 방해했다. 그리곤 자신의 일에 방해가 되는 차를 쫒아버린다. 물론 어디가 정거장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차도에서 차는 그냥 쌩하니 지나간다.

 

그 순간부터 아이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불과 10살도 채 안되보이는 아이에게서 두려움이 느껴졌다. 불과 5일전인가? 친구와 함께 필리핀 국립박물관에 갔었다. 마닐라 가장 중심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입구가 도로 뒷편으로 나있어서 그랬는지 박물관 앞은 한산했고 마침 주말의 오후라 그랬는지 행인보다는 노숙자가 많은 편이었다. 그리고 그 노숙자의 대열에는 필리핀에서 심심치않게 볼 수 있는 약을 하고 있는 아이들도 보였다. 아이들은 수건을 코에 대고 약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고, 그곳의 광경이 적잖은 두려움으로 다가와 발걸음을 재촉했고, 박물관쪽으로 차도를 건너려고 할때 한 아이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약을 하고 있던 아이들 중 가장 어린 아이였다. 7~10살쯤 되었을까? 친구가 가방에서 돈을 끄내려고 할때 아이가 먼저 가방을 붙잡고 늘어졌고 나와 친구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친구를 왼편에 서게하고 아이에게서 떨어뜨리려고 하자 아이는 약을 하고 있던 수건을 나의 얼굴에 드밀었다. 순간 이상한 냄새가 코전을 스쳤다. 반사적으로 아이의 손을 반사적으로 비틀었다.

 

그 순간 차도의 가운데 있던 한 노숙자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이는 뒷걸음 쳤고 나는 아무일도 아니라며 재빨리 길을 건넜다. 그 순간, 그 노숙자는 아이에게도 달려갔고 아이를 패기시작했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노숙자들 역시 그 대열에 합류했다. 퍽하고 등과 머리를 치는 소리가 지독한 마닐라의 소음을 넘어 차도 건너편까지 들렸다. 하지만 길 건너편에서 선 나와 친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보통때라면 그러면 안된다고 말했겠지만 그렇게 말할 자신이, 그 대열쪽으로 건너갈 자신이 없었다. 또한 그자리에 서 있는 것 역시 무서웠다. 시선을 띄지 못한 채 발걸음만을 재촉했다.....

 

갑자기 그날의 기억이 스치면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아이의 손에 다른 무엇인가가 없는지를 살피게 되고, 한걸음씩 뒷걸음 쳐서 사람들의 대열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따라붙으며 내 손을 치고 있는 아이에게서 'don't touch' 라고 말했다. 아이는 손에 들고 있던 물병을 내게 던지며 뭐라고 욕설을 퍼붓더니 사라졌다. 아이가 사라지고도 한 동안 나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돌아 오는 차안에서, 그 공포를 어떻게 설명해야할 지 몰라 헤맸다.

필리핀에 처음왔을때, 아이들의 눈빛이 나의 가슴에 큰 짐으로 남았다. 그들이 학교에 갈 수 없는 것, 길거리로 나와 물건을 팔아야하는 현실, 힘든 노동과 욕설을 견디며 살아나간다는 것이 마주대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때 적지 않은 필리핀 사람들이 그런 아이들의 위선에 대해 얘기했었다. 그리고 아이에게서 느끼는 어른의 공포에 대해서 말했다. 아마도 그때 그 얘기를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던 것 같다. 하지만 그 공포를 이젠 내가 느낀다.

 

어떻게 그 공포를 나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필리핀 아이들은 나에게 어떤 존재로 남게 될까? 필리핀을 떠남을 앞두고 묵직한 무게가 가슴을 짓누른다.

 

모순이다. 이성과 몸의 원초적 반응과 그리고 감성의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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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함, 그 가슴 저림에 대하여

 무기력함, 그 가슴 저림에 대하여


심란하다는 말에 큰 맘 먹고 일주일 생활비에 해당하는 돈을 털어 국제전화를 걸어봤자 “야, 너 왜 전화해? 술 한잔 했냐?”고 말할게 뻔했다. 그래도 잠수를 타고 싶다는 메일을 받곤 연락을 안 하곤 배길 자신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술집의 시끌벅적함이 흐른다. “잘 지내요?”라는 안부 인사를 채 마무리하기도 전에 “미안해. 내가 다 망쳐놨어”라는 울먹임이 전해진다. 모르지 않는 마음이기에 울컥 울음이 솟구친다.


엉덩이가 들썩했다. 불연 듯 내일이라도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떠나오면서 한국으론 고개도 돌리지 말자 다짐 또 다짐했었다. 아무도 발목을 잡지 않겠지만 돌아보면 떠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마음 때문이었다. 7년을 인권운동이라는 공간에서 해왔던 숙제들을 하나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채 함께 일했던 활동가들의 짐으로 하나씩 고스란히 떠넘기면서 ‘할 만큼 했다’며 ‘내 몫만은 아니’라고 독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지난 3년동안, 사회보호법 폐지를 위해 함께 싸웠던 이들이 법안의 국회통과를 놓고 느끼는 무기력함 앞에서 결심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너져 버리고 만다.


항상 무기력함과의 싸움이었다. 주어진 과제들 앞에서, 심장을 울리는 목소리들 앞에서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 운동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했음에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간들 속에서, 내 의지로 집회에 나가고 집회를 만들며 나선 시간부터를 운동이라고 한다면 지난 15년의 시간이 모두 무기력과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항상 주저앉고 싶다는 욕심과 편하게 살고 싶다는 갈등과의 싸움이었다.


친구들은 ‘운동을 계속 할 수 있어 좋겠다’ 혹은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좋겠다’는 부러움을 표하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식구들은 의지대로, 꿈을 쫒아 살 수 있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팔자 좋은 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항상 갈증을 느꼈다. 쉬이 결실을 얻을 거란 기대없이, 내 주머니에 무엇인가 채우고 싶다는 욕심없이 시작한 길이었지만, 그래서 운동을 하는 것을 제외하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고민조차 욕심조차 내보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쉬이 바뀌지 않는 현실 앞에서, 눈물을 쏟아내고 밤잠을 설치며 세월을 살아내도 너무나 굳건한 세상 앞에서 나는 ‘무기력’함과의 싸움을 하며 지쳐왔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시간들 속에서, 나처럼 믿었던 동지에게 등 돌림을 당하면서 앙칼지게 다른 길로 돌아서야 한다 생각했었다. 좀 더 길게, 나의 성을 쌓아야한다며 떠나온 시간이었다. 그래서 한국에 눈조차 돌리지 않으려 했다. 근데 마음이 흔들렸다. 메일 한통에, 무기력함을 느끼고 울먹이는 전화 한통에, 돌아가야 한다는, 그 무기력함이라도 같이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저렸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돌아가도, 내가 시간을 쏟아 붓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해도, 그들과 함께 날밤을 세우며 대책을 만들어도 쉬이 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하지만 마음이 저려온다. 떠나야 한다고, 돌아가야 한다고, 그 아픔이라도 함께 해야한다고 마음이 머리보다 먼저 말한다.


그렇게 세월과의 싸움에서, 세상과의 싸움에서, 그리고 지독한 무기력함의 싸움에서, 동생을 ‘열사’로 먼저 보내고, 이승과 저승을 오고가는 동지로 살며, 인생의 절반을 넘게 살아온 선배가 말한다. “네가 말했듯이 난 45살, 정말 중년이다. 이제 늙어간다는 말. 앞으로 얼마를 더 활동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배우가 무대에서 죽기를 바라듯이 죽음을 활동의 현장에서 맞을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남아 있는 삶의 흔적도 없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면 좋겠다. 그때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다. 사람들의 관계에 대해서도.” 나도 그처럼 세월의 풍파 앞에서, 이 질긴 무기력함 앞에서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모래와 같은 활동가의 무기력함을 견디며, 자신만을 찾아 10년의 ‘동지’도 ‘신의’도 등지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절박함에서 생활하는 이들을 마주대하며 그들의 서글픔과 절망을 함께 나누며 동지들과 함께 나도 그렇게 살아낼 수 있을까?


다시 전화를 해본다. 자정이 넘은 시각. 시끌벅적한 소리가 국제선 너머에서 들려온다. 자정까지 대책회의를 하고 방금 술집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지난 3년간 한 가지 주제를 붙잡고 싸웠던 역사의 동지들이 웃는다. 그래도 함께 있으니 마음만은 든든하다고.


그래, 이렇게 내 소중한 이들이 살아간다. 무기력함에, 자신의 능력 없음을 한탄하며 무너지면서도, 마르지 않는 눈물을 훔치면서도, 또 다시 옆에 있는 이들의 온기를 느끼며 다시 일어서려고 발버둥 치고 일어서고 다시 무너지고 그렇게 선다. 안도가 스민다. “힘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누구보다도 그 말은 내게 던져져야할 말임을, 그리고 그 말에 화답해야하는 것이 나의 인생임을. 무기력함의 싸움에서 나는 과연 이길 수 있을까? 나 역시 그들처럼 서있으면서, 운동의 길 가는 사람에게 작은 온기하나 나눠 줄 수 있는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


필리핀 마닐라에서.

필리핀을 흔드는 빗소리에 마음이 울적해 낮부터 술 취한 6월 19일 일요일 오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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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수 있는 게 다행'인 사람들

'일할 수 있는 게' 다행인 사람들 “개새끼.”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잘못 들은 것임에 틀림없다며 다시금 물었다. 보다 또렷한 음성이 귀에 와 닿는다. 분명 “개새끼”였다. 한국 공장에 다닌다는 리아와의 첫 만남에서 머쓱함을 피하기 위해 아는 한국말이 뭐냐고 물었을 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욕지거리였다. 마사에게 각인된 말도 다르지 않다. 마사는 “야, 임마”라는 성난 소리를 가장 자주 듣는다고 했다. 국내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모르지 않으면서 그래도 남의 집 안방까지 가서 그리 험한 짓 하겠나 싶었다. 하지만 마닐라에서 불과 두 시간 거리에 위치한 까비테에 닿자마자 기대는 여지없이 허물어진다. 필리핀 내 4개의 수출자유구역 중 가장 크다는 까비테에 자리 잡은 250여개 공장 중 해외기업의 30~50%는 한국기업. 다른 기업들이 그러하듯 한국기업들 역시 수출자유구역이 주는 장기간의 세금 면제 혜택과 값싼 노동력을 찾아 이곳에 왔다. 공장들이 문을 열자마자 가족부양과 가난의 무게를 진 필리핀 노동자들이 앞 다투어 줄을 섰다. 리아와 마사 역시 5년 전, 여고생 교복을 벗자마자 그 대열에 합류했다. -해외진출 한국기업들 횡포-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일해요. 주문량이 밀리면 토요일은 물론이고 밤을 새는 일도 비일비재해요. 하지만 할당량제라서 초과 근로 수당이나 야근수당은 거의 없어요. 연일 야근이 계속되면 몸이 못 견디는데 맨 처음에는 겁 없이 ‘하루 쉬겠다’는 말도 했었죠. 어떻게 됐느냐고요? 한국인 관리자가 별일 아니라는 듯 쉬어도 된다고 하기에 쉬고 다음날 출근했더니 필리핀 상사가 불러서 해고됐다고 하더군요. 그 일이 있은 후론 아파도 쉬고 싶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어요.” 결혼 혹은 임신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해고된 사람들이 있기에 2살 된 딸의 엄마이면서도 싱글이라 속이고 공장에 다니고 있다는 리아. 그는 매일 녹초가 된 몸으로 공장에 충성을 바치고서도 법정 최저임금에도 채 못 미치는 월급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조건에서라도 일할 수 있는 게 다행이다. 예고도 없이 폐업을 하거나 “경기가 안 좋다”며 무기한 휴업에 들어가는 공장이 많기에, 그 알량한 월급조차 체불돼 제때 받지 못하는 노동자도 많기에. 거기에 6개월 이상 일한 노동자들을 정규직화하도록 한 필리핀 노동법 망을 피하기 위해 기업들이 5개월 이상의 계약을 하지 않다보니, 다음달부터는 꼼짝없는 실업자 신세다. “화장실 가는 것도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해요. 한국 사람들은 이상하게 화장실에 머무르는 시간까지 체크해요. 관리자들의 대부분이 남성이다보니 생리라도 하는 날엔 얼마나 끔찍한지….” 마사가 몸서리를 친다. ‘한국인’임이 창피하고 부끄러워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성희롱도 건너 뛸 수 없는 화두다. 툭툭 몸을 건드리거나 슬쩍 껴안는 것은 예사고 어떤 관리자들은 공공연히 성적 요구를 해오면서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해고시키겠다고 협박을 해온단다. 공단 내 일본, 대만 등의 기업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발생하지만 한국기업처럼 성희롱이나 욕설이 일상화된 공장은 없다는 게 노동단체 관계자의 말이다. 그래서인가 보다. 필리핀 노동자들이 한국 공장을 가장 ‘나쁜’ 일터 중 하나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는 것은. -현지서 가장 나쁜 일터로 꼽혀- 넌지시 노조를 만들거나 싸움을 해보는 건 어떠냐고 떠본다. 한숨 섞인 답변이 되돌아온다. “일곱 식구가 저만 쳐다보고 있어요. 한번 눈 밖에 나면 지금 다니는 공장은 물론이고 다른 공장에 취직하는 것도 불가능해요. 당신이 저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꿈이라곤 계속 일을 할 수 있어서 가족을 부양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전부라는 사람들. 너무나 소박하지만 돈에 눈먼 한국 기업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투자자 유치’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자국 정부의 방관 속에서 한없이 아득해진 그네들의 꿈은, 과연 이뤄질 수 있을까? 〈필리핀 까비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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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동안 되풀이 되는 동생 만나기

 <퍼온 글>

 

17년 동안 되풀이 되는 동생 만나기


박래군(유가족,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봄날의 끝자락이다. 어느새 녹음은 짙어지고, 산마다에는 흰색의 아카시아 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다. 곧 뻐꾸기가 우는 초여름이 될 것이다.

1년 중 나는 이 기간을 가장 침울하게 보낸다. 나와 동생에게 5월은 계절의 여왕이 아니었다. 광주학살 원흉 처단 투쟁을 매년 벌여야 했던 투쟁의 계절이었다. 학교에서 거리에서 경찰에 맞서고 쫒기면서도 뜨겁게 외치고, 거리를 내달려야 했던 그런 계절이 5월이었다.

우리 형제에게 5월은 투쟁을 요구했고, 우리 형제는 그 투쟁을 외면하지 않았다. 1986년 5월말에 난 감옥을 가야 했고, 1988년 6월초에 동생은 광주학살 원흉 처단을 외치면서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나의 아름다웠던 투쟁의 계절은 거기서 끝이 났다. 노동운동에 대한 꿈도 접고, 나는 유가족이 되었고, 이제는 그 길에서 발견한 인권운동의 길을 가고 있다. 동생의 뜻이 몇 사람의 분신으로 이룰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날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을 하면서도 오늘도 난 동생과 약속한 이 길을 가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고, 억압하지 않는 세상, 자유와 해방의 세상을 만들자는 그 약속을 안고 벌써 17년째를 살아내고 있다.

내게 동생은 나이 어린 동생만이 아니었다. 80년대 그 엄혹했던 독재의 시기에 함께 고민하고, 갈등하고, 투쟁하던 동지였다. 그런 동지의 부재를 확인하는 것은 고통이었다. 처음 동생이 죽었을 때 환청과 환시에 시달렸던 나날이 있었다. 늘상 난 동생이자 동지였던 래전이와 대화하고는 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고 자연스레 그가 죽었다는 점을 인정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여느 유가족들처럼 아무에게나 보일 수 없는 가슴 속 비밀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다가는 술에 취해 동생과 자취하던 집을 찾아가고, 그 앞에서 쓰러져 잠이 들었다가 깨고는 했던 날들이 그의 부재를 확인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죽은 자를 추억한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17년이 지난 오늘에도 스물여섯의 청년으로만 기억된다. 과도한 책임감으로 민중의 현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던 가장 문학적인 삶을 살았던 그는 살았더라면 더 풍부해진 세상과 삶에 대한 인식으로 열정적인 시를 쓰고 있을까?

오늘 민주화운동의 성과는 산산이 부서져 보수정치인들의 득세에 이용되고 있고, 소득수준은 높아졌다고 해도 오히려 빈곤층은 증대한다. 진보운동은 분열하고, 약화되고 있다. 민주주의는 형식과 절차만 발전할 뿐, 이전의 민주화운동세력에 의해 민주주의는 오히려 질적으로 후퇴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광풍은 이미 우리 사회의 당연한 분위기가 되었으며, 한반도에는 전쟁의 위기가 쉴 새 없이 밀려든다. 그가 죽던 그날보다 세상은 그래도 나아졌다고 위안해야 하지만 눈으로 보이는 화려함 뒤에 감추어진 우리 시대의 추악함 앞에 난 다시 절망한다.


올해도 다시 난 그의 무덤 앞에 설 것이다. 그의 유작시인 ‘동화’가 적힌 묘비가 있는 그 무덤 앞에서 그래도 꺾을 수 없는 새 세상에 대한 의지를 되살려내야 한다. 그렇게 결심하고, 그 결심으로 1년을 살고, 지나온 세월처럼 다시 무덤 앞에 서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가장 행복하게 동생이자 동지였던 래전이와 만난다. 작은 인간의 아들이고자 했던 그의 염원, 그리고 열사들의 염원을 다시 확인한다. 죽은 자를 욕되게 하지 마라, 그의 뜻을 받아 열심히 살아가자 그렇게 다짐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승과 저승의 형제는 이어지고, 동지는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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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따따 두 번째 이야기

내 친구 따따 두 번째 이야기 “아, 따따 보고 싶다” 이건 불치병이다. 고작 1주일 다바오에서 떠나있었을 뿐인데, 말도 잘 안 통하고 게다가 나를 골려먹을 궁리만 하는 따따가 보고 싶다니. 그것도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번번이 짐을 꾸려 여행을 떠날 올 적마다 따따가 생각나다니, 이건 분명 원인을 알 수 없는 희귀병이다. 말로 뱉어낸 그리움은 더욱 커진다. 전화를 걸어본다. ‘뚜~ 뚜’ 전화는 종일 통화중이거나 아무도 받는 이가 없다. 진작부터 주인장이 딸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 갈 계획을 잡고 있었던 터라 허공에 울리는 전화벨 모양새에 주인장이 서울로 떠났음을 알아챈다. “살판이 났겠구만. 이제 밥이나 제대로 얻어먹고 다닐 수 있을까” 쩝하고 궁시렁 거려보지만 입가엔 묘한 웃음이 감돈다. 일주일을 예정했던 마닐라 행은 마닐라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수빅과 클락 방문에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서 졸지에 2주일로 불어나버렸다. 3월 한국 떠나온 이래 처음으로 한국인들과 어울리면서 필리핀이 아닌 ‘한국’인 것처럼 살았던 1주일은 모두 끝나버렸다. 모처럼 맛보는 한국 음식에 넋이 나가 허리살 부는지 모르고 음식에 눈독을 들이던 날도, 역시 술은 ‘소주’가 최고라며 은근히 술자리를 탐했던 시간도, 영어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데다 비슷한 일을 했던 이들을 만난 즐거움에 얘기가 잘 통한다며 끊었던 담배를 슬쩍 다시 집어 들었던 새벽도 안녕이다. 우리에 갇힌 새가 하늘로 비상을 시작했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비행기의 차창너머로 탁 트인 바다와 끝없이 이어진 산맥, 그리고 광활한 대지가 눈에 들어온다. “다바오다” 나도 모르게 반가움과 안도가 흐른다. 없는 게 없는, 그래서 삶의 불편함이 없어 보이는 마닐라지만 서울과 닮았기에 ‘숨’이 막혔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따스한 햇살이 전해져 온다. 뜨겁긴 하지만 분명 마닐라의 햇살과는 다르다. 무거운 마음으로 서울을 떠나 생면부지의 낯선 다바오 땅에 도착했을 때의 ‘평온’이 감돌면서 따따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집안엔 잔치가 벌어졌다. 주인장 없는 틈을 타 따따가 그네의 친구들과 친척들을 초대한 것. 도착할 것임을 알면서도 판을 벌였다는 것이 괘씸하긴 하지만 평생 못 누려보았을 ‘호사’임을 알기에 또 묘한 웃음이 스친다. ‘Oh, I miss you'라고 따따가 말한다. ‘진짜로’하며 얼굴을 찡그려보지만 금세 실토하고 만다. 나 역시 그리웠다고. 그렇게 지난 두 달 동안 우리는 하숙집 핼퍼와 하숙객의 관계를 넘어 ‘친구’가 됐다. 따따에게 배운 것들 고백하건대, 아마도 연민이었을 게다. 누구는 ‘연민’과 ‘책임’이 성립되는 관계는 불행한 것이라 거침없이 내뱉기도 하지만 따따의 친구가 되고자 했던 것은 그의 처지에 대한 안쓰러움과 무엇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던 마음에서부터였을 게다. 하지만 두 달을 지내면서 그는 더 이상 ‘연민’의 대상만은 아니다. 교만한 나의 친구이자 스승이다. 아무 것도 버리지 않았다. 가난함이 삶이되었기 때문일 수도, 아님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삶을 너무 오래 동안 살아서인지 몰라도 따따는 남은 음식은 물론 비닐봉투 심지어는 종이 한 장도 쉽사리 버리지 않는다. 때론 내가 콩나물을 씻는다며 떼어낸 머리 꼬대기를 모두 모아 음식을 만든다. ‘이건 버려야 할 것들’이라고 말하지만 따따의 눈초리가 무섭다. 8년을 헬퍼로, 남의 집 살이로 아득바득 살았지만 따따의 통장에 든 돈은 고작 800페소(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6,000원). 두세 번인가 책을 산다며 따따와 장보기에 나서보았지만 따따의 주머니에서 10페소 이상 나오는 것을 본 적은 그네 딸에게 보내기 위한 속옷을 살 때뿐이었다. 한국에서 ‘짠순이’로 소문난 나도 그녀의 ‘씀씀이’를 따라잡기엔 너무 소비에 익숙해져 있다. 만들어 쓰기를 좋아한다 말하면서도 그에 투여되는 시간을 아까워하고, ‘싸다’는 이유로 ‘나중을 대비한다’는 이유로 물건을 사고 ‘필요없다’ 쉽게 버린다. 하지만 가난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현실에서, 지구의 80%가 빈곤에 허덕이는 사회에서 이건 사치다. 그걸 따따는 내게 원망의 눈초리와 그의 삶으로 가르친다. 해되지 않는 생명은 미워하지 않아야한다는 것도 따따에게서 배운다. 유난히 곤충(?)이 싫었다. 지하 방에서 살았기 때문인지 몰라도 집안에 유난히 온갖 종류의 곤충들이 많았다. 바퀴벌레가 밥상에 출몰하는 것은 기본이고 송충이가 신발장에 붙어있거나 이불위에 귀뚜라미가 출몰했던 일들은 유년시절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던 공포 그 자체였다. 음식물의 작은 잔재라도 남은 곳엔 어김없이 개미떼가 행렬을 짓지만 따따는 개미를 죽이는 법이 없다. 다만 손으로 툭툭 치거나 ‘오’하며 까르르 웃을 뿐이다. 집안 곳곳을 기어다는 도마뱀도 따따에겐 그저 나를 놀려먹기에 좋을 존재일 뿐이다. 천정 위 여기저기를 기어 다니는 작은 도마뱀에 소스라쳐 그를 불렀던 시간에도 따따는 ‘It's good(해충을 잡아먹는 존재라는 의미)’이라며 ‘푸하하하’ 웃는다. 절대 쫒거나 잡는 법이 없다. 따따가 잡는 곤충이라곤 바퀴벌레 정도. 엄지손가락보다 훨씬 큰 바퀴가 날라 들어올 때면 사정없이 슬리퍼를 집어 던지며 ‘Not good'을 연발한다. 그래서 해되지 않는 곤충은 죽이지 못한다. 매일 쉬도 때도 없이 작은 개미들이 얼굴에 몸에 올라타며 미끄럼을 타지만 이제는 툭툭 쳐낼 뿐이다. 언제가 읽은 책 제목이 기억난다. ‘지구를 살리는 풍뎅이’라는.(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책인데, 당시에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또 다시 배운다. 책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은 삶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임을. 따따가 그리운 이유 하지만 무엇보다도 때론 되도 않는 똥배짱을 튕기는 따따를, 대책없이 게을러 가끔은 끼니조차 거르게 하는 따따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은 사람에 대한 따스함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을 향해 열려있는 마음이 아닌 무관한 존재들을 향해서도 닫히지 않는, 그 사람 눈높이에 맞춘 그의 배려다. 향수병인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때 슬쩍 자리를 피해주는 배려를, ‘아픈 것 같아’라는 말에 서툴게 끓여 내주던 죽 내음을, 매운 것은 죽었다 깨도 못 먹으면서도 한국음식 먹고 싶을 거라며 김치를 담겠다며 고춧가루 양념의 간을 맞추던 날도, 농담처럼 내뱉은 말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닭을 튀겨주던 모습도, 말은 통하지 않지만 마음이 흐른다. 동전 몇 푼을 얻으려 이집 저집은 전전하는 아이를 보면 주인장 몰래 만들어다 팔고 있는 아이스캔디의 수익을 내어주고, 자신의 접시에서 빵을 덜어주는 것도 따따다. 매번 종을 흔들며 온갖 잡일을 시키는 주인장이지만 내가 싫은 낯이라도 보일 때면 ‘no!’라고 말하는 것 역시 따따다. ‘연수’라는 명목으로 떠나오긴 했지만 마음 가는 데로 떠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계획도 없는 여행이기에 짐 되는 것은 아무것도 갖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짐이라고 해봤자 갈아입을 옷 몇 벌에 책 몇권 든 가방하나가 전부. 여기에 ‘정’은 금물이었다. 그저 길 위에서 만난 ‘좋은 인연’정도로 스쳐가기만을 바랬다. 하지만 벌써부터 따따가 그립다. 힘겨운 현실 앞에서도 웃음을 보내지 않는 그의 밝음이, 사람들의 발아래 선 듯하지만 가슴 안에 서있는 그가, 그래서 더욱 여행객의 가슴을 울리는 따따가 그립다. 나는 안다. 이곳에서 떠나면 다시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이집 저집 핼퍼로 떠도는 인생이기에 편지 부칠 주소한줄 없다는 것을. 그래서 더욱 따따가 그립다. 이 그리움을 안고 다바오를 떠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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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산 16

강을 따라 내려왔다. 물살이 거셌다.

친구들을 길동무를 위해 서슴없이 강에 사람다리를 놓아주었다.

한 2~3시간여인가를 강을 따라, 그리고 바위를 따라 내려왔다.

 

그 험한 산행을 마치면서 내가 얻은 것은

자신감이었다.

혼자서도 산행을 떠날 수 있는 자신감,

그리고 자연을 대하면서 얻은 평온함.

그리고 삶에 대한 욕심한자락 이었다.

 

다시 이런 길을 떠날 수 있을까?

내 인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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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산 15

산행은 벌써 4일째로 접어들었다. 

이제는 하산 길..

 

내려오는 길에 점심을 먹었다.

자그마한 공터 옆으론 작은 내울이 흐르고,

또 따뜻하면서도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점심이 아포에서 먹는 마지막 식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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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산 14

다시 산행이 시작됐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기 시작했다.

같이 산에 올랐던 가이드에서 친구가 된 '존코이'의 손을 잡고 정상에서

베나드 호수로 내려왔다. 혼자라면 결코 오지 못했을 길이었다.

 

별을 세는 즐거움과

가이드에서 친구가 된 프란시스, 쿠키, 존코이와 술은 나누고 노래를 나누며

한밤을 자고

새벽에 일어나 베나드 호수의 고즈넉함과 평온함을 맛보았다.

 

땅의 습한 기운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보다는 햇볕에 몸을 말리는 따사로움이 좋아 쉬이 일어서지 못했다.

이렇게 앉아있으면,

이 평온함의 기운이 내게도 감도는 것일까?

떠나오고 싶지 않은, 그냥 그렇게 질리도록 머물고 싶은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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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산 13

정상의 감동을 가지고 베나도 호수로 향했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기 시작했다.

다시 산행이 시작됐다. 비탈진 길을 헤치며 다시 내려왔다.

혼자라면 내려오지 못했을 길을 가이드로 만나 친구가 된 존코이의 손을 잡고 내려섰다.

 

호수는 생각보다 넓지 않았다. 그리고 동그랗지도 않았다.

하지만 고요함이 좋았다. 그리고 비속에 모습을 나타낸 하늘도 맑았다.

밤새 필리핀 친구들과 노래를 부르다 별을 세며 잠이들었다.

그리고 다시 베나도 호수 앞에 섰다.

베나도 호수에서 새벽 6시경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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