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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브이 포 벤데타.

에르메스님의 [이퀼리브리엄/브이포벤데타] 에 관련된 글.

 주위 사람들(특히 운동권들)이 이 영화에 대해 하도 언급을 많이 해서, 결국 나도 봤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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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르메스는 이 영화를 “지리한 프로메테우스 세미나의 귀결. 전위의 조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라고 지적했지만, 나는 이 의견에 그닥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브이라는 인물자체가 명백한 테러리스트이고, 헐리우드식 영웅들의 변조에 지나지 않으며, 영화 속의 대중들은 무지해서 브이의 tv연설 한번으로 바로 계몽되어버리고는, 브이의 가면을 쓰고 똑같은 옷을 입고 “마치 중국 문화혁명에서 단 한가지의 붉은 책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홍위병의 획일성을 연상”시키지만, 그렇다고 하더라고 이 것을 단순한 ‘전위조직으로의 귀결’로 쉽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차라리 이것을 “파시즘의 시각적 스펙터클을 도리어 재현하고, 폭력을 선과 악의 단순한 기준으로 갈라 손쉽게 이야기의 결론을 맺는” 이 영화의 태도라고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기사를 참조: 폭력의 판타지와 스펙터클 <브이 포 벤데타> 영화가 빠져든 파시즘의 함정.)
 물론 이 영화에서는 시민들의 궐기 후 “이제 어떻게?”에 관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비전에 대한 제시’에 주목했다. 영화에서의 혁명은 철저한 ‘브이’의 원맨쇼다. 하지만 정작 혁명의 그날에 브이는 죽는다. 그리고 죽으면서 그는 말한다. “나는 이전의 시대를 살아왔던 사람이다. 새 시대는 새로운 사람들이 이끌어 가야한다.”(내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얼추 비슷하지 싶다.) 이것은 ‘이비’에게만 했던 말은 아닐 것이다. 이비가 말하듯이 “V는 당신도 될 수 있고 나도 될 수 있고 누구든 될 수 있는 것”이다. 11월 5일 브이의 가면을 쓰고 그의 옷을 입고, 의회로 행진한 시민들은 결국 일제히 가면을 벗고 자신들을 드러낸다. 여기서 브이는 한번 더 죽는다!. 이제 ‘브이’는 일종의 ‘상징’에 불과해진다. 실제로 영화는 주구장창 ‘브이’의 행적만 보여주지만 실제로 브이가 한일은 그리 많지 않다. 건물2개 폭파하고, TV에 나와서 뻔한 소리를 지껄였을 뿐이다. 나머지는 자기가 맘에 안드는 놈 죽이러 다닌다.(물론 그런 상황에서 작용하는 의미는 무척이나 다르겠지만 말이다.) 즉, ‘브이’는 실체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체게바라 티셔츠처럼. 이제 논의를 좀 깊게 들어가서 이에 대해 좀더 얘기해 볼 생각이다. 나는 이 영화를 동일한 감독 워쇼스키형제의 <매트릭스>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되어, 마침 요즈음 읽고 있는 책(<혁명을 팝니다>마티,2006)에 이 부분이 잘 정리되어있기에, 아래의 글은 그 책에 나오는 부분을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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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은 생략).....매트릭스의 철학에 대해 쓴 글은 많지만, 대부분이 틀렸다. 1부를 이해하려면 네오가 흰 토끼를 보게 되는 장면을 아주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그가 친구에게 책을 건넬 때 책등에 장 보드리야르가 쓴 <시뮬라르크와 시뮬레이션>이라는 책의 제목이 보인다.
 <매트릭스>를 평한 많은 비평가들이 영화의 핵심적 개념-우리가 사는 세상이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환영일지 모르며, 기계들이 우리의 뇌에 감각을 입력시켜 마치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며 물리적 세계와 서로 교류 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을 “당신이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라는 르네 데카르트의 회의론적 사고 실험의 업데이트 버전으로 보았다. 하지만 잘못된 해석이다. <매트릭스>는 존재론적 딜레마의 재현을 의도한 영화가 아니다. <매트릭스>는 60년대에 근원을 둔 정치적 사상, 상황주의자 인터네셔널의 비공식지도자인 기 드보르와 그의 사도인 장 보드리야르의 작품에서 최고조로 표현된 사상의 은유이다.
 드보르는 급진적 사회주의자로 <스펙터클의 사회>의 저자이며,1968년 파리 봉기의 주모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의 이론은 간단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실재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모든 참된 경험을 취해서 상품으로 변모 시킨 뒤, 우리에게 광고와 대중매체를 통해 되팔았다. 따라서 인간 삶의 모든 부분이, 상징과 재현의 체계에 불과하며 자체의 고유한 내부 논리에 지배되는 ‘스펙터클’안으로 들어왔다. ‘스펙터클’은 이미지가 될 만큼 축적된 ‘자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본질적 특성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세계에서 산다. 스펙터클은 필요해진 꿈, 즉 “궁극적으로 잠자고 싶은 욕망만을 표현하는 수감된 현대사회의 악몽”이다.
 스펙터클의 세상에서 유행에 뒤떨어진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과 계급기반 사회의 철폐는 구식이 된다. 이런 사회의 신진 혁명가는 “욕망에 대한 의식과 의식에 대한 욕망” 두 가지를 추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체제가 우리에게 강요한 필요와는 독립된 우리의 고유한 쾌락의 원천을 발견해야만 하고, ‘스펙터클’의 악몽에서 깨어나려 애써야만 한다. 네오처럼 우리는 빨간약을 선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반란과 정치활동에 관한 한, 체제의 사소한 문제들은 변화시키려 해봐야 소용없다. 누가 부유하고 누가 가난하지가 무슨 대수인가? 혹은 누가 직장과 기회를 가질 수 있는지가 뭐가 중요한가? 모두가 덧없는 환영일 뿐이다. 상품이 이미지에 불과하다면 어떤 사람들이 더 가지고 어떤 사람들이 덜 가진들 누가 상관하겠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화전체, 사회전체가 백일몽-우리가 총체적으로 거부해야 하는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중략)..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플라톤에게 필요한 것은 수십년 간에 걸친 원칙에 의거한 연구와 철학적 반성이었다. 기독교인들은 더욱 더 힘든 방법을 택했다. 죽음만이 저 너머의 ‘실재’세계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한편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은 환영의 망을 훨씬 더 쉽게 뚫을 수 있다고 보았다. 약간의 인식적 불협화음-우리주변에 뭔가 옳지 않은 것이 있다는 징후-만 있으면 된다. 드보르의 견해로는 “근원이 가장 낮고 가장 일회적인 혼란들이 결국 세계의 질서를 교란시킨다.”
 바로 문화 훼방이라는 개념의 근원이다. 전통적인 정치활동은 쓸모없다. 그건 마치 매트릭스 안에서 정치제도를 개혁하려 애쓰는 것과 같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가 정말로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을 일깨우고 접속을 끊어버려 스펙터클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스펙터클의 세상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상징적 저항 행위들을 통해 인식적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면 된다.
 문화전체가 이데올로기 체제에 불과하므로 문화를 송두리째 거부하는 것이 자신과 타인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바로 반문화의 근원이다. <매트릭스>에서 시온주민들은 60년대 이후 반문화 반란자들이 자신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한 것에 대한 구현이다. 깨어나 기계의 폭정에서 해방된 사람들이다. 반문화 견해에 따르면 적은 깨어나기를 거부하는 자들, 문화에 순응하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주류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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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가 이 책에서 <매트릭스>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다. <브이 포 벤데타>에도 별 무리 없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하지만 나아가 이 책은 이러한 반문화가 허위라고 주장한다. 계속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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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에, 베이비 부머들은 ‘체제’에 대한 인정사정없는 반대를 선언했다. 그들은 물질주의와 탐욕을 비난하고, 매카시 시대의 원칙과 획일성을 거부했으며,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신세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어떻게 된 걸까? 40년 후, ‘체제’는 별로 많이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소비자본주의가 수십년만의 반문화 반란을 겪고 이전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모습으로 부상했다. 드보르가 60년대 초의 세상을 광고와 매체에 흠뻑 빠져있는 세계로 생각했다면, 21세기는 어떤 세상으로 생각했을까?
 우리는 이 책에서 수십년에 걸친 반문화 반란이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 것은 반문화 사상이 기대는 사회이론이 허위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매트릭스에 살지 않으며 스펙터클에서도 살지도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훨씬 더 단조롭다. 수십억의 인간들, 각자가 다소 그럴듯한 선의 개념을 추구하고, 서로 협력하고 애쓰며, 협력에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통합하는 단일의 체계는 없다. ‘문화’ 혹은 ‘체제’가 없기 때문에 문화에 훼방 놓을 수 없다. 모호하게 뭉뚱그려 말하자면, 때때로 우리가 공정하다고 인식하지만 대개는 명백히 불공정한 다양한 유형의 사회적 제도들이 있을 뿐이다. 이런 세상에서 반문화 반란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뿐이고 확실히 비생산적이다. 반문화 반란은 사람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는 의안들에 쏠릴 에너지와 노력을 분산시킬 뿐만 아니라 그러한 점진적인 변화를 모조리 경멸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하 생략)

-<혁명을 팝니다>서론 중에서.


 

이후의 더 자세한 내용은 책을 직접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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