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7/08/06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8/06
    영화<에쥬케이터, The Edukators>
    흑점
  2. 2007/08/06
    흠흠.
    흑점

영화<에쥬케이터, The Edukators>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느 늦은 밤. 혼자 병실에 있게 되어 리모컨을 붙들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 중에 SBS에서 해주던 영화 가 눈에 걸렸다. <에주케이터>라는 약간은 엉성한 한글표기와 익숙한 한국성우의 목소리들. 꽤 재밌게 봤던 영화라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런 영화를 TV에서 틀어준다는 사실이 아이러닉하게 우습기도하고(어찌됐던! 엄연히 이 영화는 혁명을 꿈꾸는 열혈청소년들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에), 병원에 있으면서 고픈 것이 영화인터라, 웬만하면 참고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줄리아 옌체의 매력적인 입술에 위에 교묘히 덧씌워진 한국성우의 느끼한 목소리는 채널을 돌리게 만들었고 마침 EBS스페이스 공감에서는 이승열의 공연을 하고 있었다. 이승열의 아쉬운 공연이 끝나고 다시 채널을 돌려보았을 때, 영화는 어느덧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아래 줄거리는 네이버에서 퍼왔습니다. 주소는 여기)

-

혁명의 시대는 지나갔다. 계급, 자본, 평등, 착취, 이런 말은 낡은 구호다. 집단보다 개인이, 부의 분배보다 부의 축적이 찬양받는 지금 <에쥬케이터>는 이제 와서 혁명을 말한다. 덜 떨어졌다 해도 좋다. 철없고 무모하다 해도 좋다. 세 주인공 얀(다니엘 브릴)과 줄(울리아 옌치), 피터(스티퍼 에르켁)는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자’로 나섰다. 아무것도 훔치지 않고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지만, 부자들의 집에 침입해 그들의 안온한 환경을 휘저어놓는 것이 목표다. ‘좋은 시절은 얼마 남지 않았다’ ‘너희들은 너무 돈이 많다’, 이런 경고를 써붙이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그러나 시대가 다르다. 2000년대의 <에쥬케이터>는 혁명 자체에서 끝나지 못한다. 실수로 고급차를 들이받아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게 된 줄은, 얀과 함께 차 소유주 하르덴베르그(버그하르트 클로즈너)의 저택에 침입해 ‘에쥬케이터’의 활극을 펼치지만 정작 그와 맞닥뜨리자 어찌할 바를 모른다. 피터까지 불러들여 하이덴베르그를 납치하면서 영화는 이들이 처한 거대한 아이러니를 하나씩 드러낸다. 배부른 돼지처럼 보였던 부르주아는 알고 보니 그들이 동경했던 68세대의 일원이었다. 가난한 자들을 등쳐 재산을 축적한 기성 세대에게도 회한이 있었다. 젊은이들의 구호는 열렬하지만 설익어 있다. 거기에 맞서는 하이덴베르그의 열변도 만만치 않다. 산장에 숨은 이들의 기묘한 동거가 계속되면서, 가난한 젊은이와 부유한 중년은 서로를 이해해가는 것처럼 보인다. 두 남자와 여자가 이룬 삼각관계도 평화롭게 정리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때, <에쥬케이터>는 다시 한번 사고를 뒤집는 결말을 마련한다. 그 위로 제프 버클리의 ‘할렐루야’가 간절하게 흐른다.

 

-

(과연 이들의 투쟁방식 -혹은 뻘짓거리- 이 과연 ‘운동’이라고 불릴만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많은 예술 안에서의 저항이 그렇듯이, 이 영화의 주인공들 또한 지극히 ‘반문화적’이다. 영화 속에 직접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들의 이론적 배경- 그리 두텁지는 않아 보인다-은 역시 기드보로나 보드리야르에 기대고 있을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이 세계에 ‘균열’을 가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이들은 혁명적일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이 보드리야르가 보수적이라고 비판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영화를 TV, 그것도 공중파에서 틀어주다니. 나는 반응이 궁금해서 다음날 네이버에서 영화를 검색해보았다. 이 방송이 나가고 난 뒤 이루어진 별점평가는 거의 10점 만점이다. “나, 이런 영화도 봤지롱” 자랑하기위해 블로그에 올린 쓰나마나한 영화평들은 하나같이 유쾌하고 재미있었다는 칭찬 일색이다. 하긴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독일영화를 끝까지 보고 인터넷에 들어와 감상평까지 쓸 정도면 재밌게 본 사람들이겠지만...
그런데. 이 영화가 재밌고 유쾌하다고? 정말?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영화가 너무너무 슬프다. 이 슬픔은, 대안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이상주의적이기만한 아해들에 대한 듀나의 조롱 때문이기도 하고, 또 그 조롱의 대상이된 모습이 어느 시기의 내 모습과 자꾸만 오버랩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당시 나는 (좀 우울하기는 했었지만 그래도) 68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진 꿈 많은 청년이었다.

 

 

잠시 그때 얘기를 해보자면. 그 즈음 나 또한 영화에 나오는 소년 소녀들처럼 자본주의 현실에 갑갑해하고 숨막혀했으며, 아는것과 가진것이 별로 없었으며, 그냥 막연히 혁명을 꿈꾸던 소년이었다. 김누리 교수의 독일문화수업에서 68에 대한 발표를 내가 맡았었는데,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나는 잘 이해하지도 못한 68혁명에 관한 논문하나를 읽고 발췌해서 발표를 했었다. 더군다나 68혁명이 뭔지도 모르는 학생들 앞에서, 68혁명이 기존의 고전적인 맑스주의의 한계를 어떻게 전복하고자 했는지를 마르쿠제의 이론에 기대어 설명해놓은 그 논문을 부분발췌해서 버벅거리며 읽었을 때, 그 강의실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나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어쨌든 수업이 끝나고 같이 발표준비를 한 창언형과 강의실을 나서면서 나는 어떤 이야기를 장황하게 했었는데 정리해보면 이렇다. 68혁명은 결과적으로 실패 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반동적이기까지 하다. 물론 68은 혁명을 일으켰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기존의 일방적 폭력-통제방식에서 더 교묘하고 견고한 조정적 통제-억압방식으로 바꿈으로서 자본주의 혁명을 일으켰다. 는 식의 논지를 펼쳤었고, 옆에서 내 말을 듣고 있던 재원형은 씩, 웃으면서 나에게 책 한권을 추천해줬는데 그 책이 바로 미셸 우옐벡의 문제적 소설<소립자>였다.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가서. 이 영화가 나에게 슬펐던 다른 이유는 이 영화의 반동성에 그때의 나도 혹, 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인 혁명소년소녀들과 보수주의자 부르주아 아저씨와의 대화에서, 나는 그 아저씨의 말에 얼마간 동조했었다. (이 부분은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정말로 슬픈 이유는 좀 더 복잡하다. 그것은 이 영화가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패배주의 때문이다. 바로 위의 문장에서 언급된 대화에서 출발하자. 비인간적이고 보수적인 뚱뚱한 부르주아 아저씨가 실은 한때 68운동에서 한가닥 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무려 ‘루디 두치케’의 친구이면서 프리섹스주의자이다!) 영화는 서서히 화해모드를 조성하기 시작한다. 혁명청년들은 아저씨의 말에 서서히 동조하게 되고 아저씨 또한 그들을 인정함으로써 영화는 사상과 계급의 차이를 단지 ‘세대간의 차이’로 변질시키기 시작한다. (여기서 잠깐. 이 ‘변질’은 중요하다. ‘세대간의 차이’ 즉 시간적인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무마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물론 해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언제든 새로운 세대들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청년들은 어른이 되고, 어린이는 자라서 청년이 된다. 갭은 남는다. 즉 이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계속해서 ‘지연’ 될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이다. 이렇게 문제의 틀을 인식하는 순간 이것은 해결할 수도 없고, 해결할 필요도 없는 ‘자연현상’으로 탈정치화·탈역사화 되어 저기 저편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시간적인 문제인가?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들이 납치했던 아저씨를 집으로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주고 아저씨 또한 여주인공 줄의 빚을 탕감시켜줌으로써 화해의 국면을 맞이하는 듯하다. 만약 영화가 이렇게 결말을 맺었다면, 조금 과장해서. “네, 부르주아 아저씨 계속 국가 경제를 위해 힘써주세요.” “그래, 자네들 같은 사람들도 있어야 세상이 더 좋아지지. 나도 젊었을 때는 그랬었지. 역시 젊음이란 좋은 것이여”하면서 서로서로 얼싸안고 각자 열심히 하자 파이팅, 하는 식으로 결말을 맺었다면, 이 영화는 볼 것도 없이 개쓰레기 반동이데올로기영화라고 치부 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면 문제는 오히려 쉽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영화는 그렇게 쓰레기는 아니다. 오히려 더 교묘한 건지도.

 

 

여기서 반전. 서로간의 묘한 연대감을 확인하며 헤어짐으로써 이루어지는가 싶었던 그 화해는 결국 부르주아 아저씨가 그들을 잡기위해 그들이 살고 있는 집에 경찰특공대까지 보냄으로써 결별된다. 다행히 그들 또한 아저씨를 완전히 믿지 않았고, 그들이 떠난 빈집에 붙어있는 쪽지에 쓰여진 뭔가 굉장히 있어 보이는 말, “어떤 사람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를 달랑 남긴 채 그들은 어느 호텔방의 침대 위에서 셋이 같이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영화초반에 남자주인공의 목표였던 유럽 전지역에 방영되는 TV수상기를 폭파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들은 ‘일단은’ 타협하지 않는다. (여기서 ‘일단은’이란 말을 기억하자)

 

마지막 장면. 그들 셋은 TV수상기가 있는 섬으로 배를 타고 떠난다. 이 영화는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 위에서 저 너머 어딘가를 향해 떠나는 그들의 멋진 배의 아름답고도 진취적인 뒷모습을 보여주면서 끝이 난다. 이 장면은 굉장히 상징적이고 고무적이다. 그런데 나는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다시 살펴보자.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 이 말은 어떻게 보면 모순적인데, 수평선은 그 끝을 규정지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계속적인 듯하지만, 그냥 바라보았을 때 보이는 바다와 하늘이 이루는 선명한 대비의 일직선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경계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 경계가 나에게는 그들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어떤 ‘벽’으로 보인 것은 왜일까?

 

 

하나 더.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배경으로 큰 위성접시의 모습이 보인다. 아마 이 위성접시가 그들이 폭파하고자 했던 TV수상기일 것이다. 그리고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가면 위성접시는 폭발하고 영화는 마치 TV화면이 팟, 하고 나가듯이 꺼진다. (그런데 알다시피 TV에서는 엔딩크레딧이 시작되자마자 바로 광고가 나와서 그 장면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나는 영화가 끝나자마자 TV수상기가 무사하고 바로 광고가 이어져 나오는 상황이 더욱더 시사적이고 상징적이라고 생각한다.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본 어떤 이들 또한 영화가 끝나자마자 우후죽순으로 극장을 빠져나가 이 영화 재밌었지, 하는 식의 대화를 스타벅스커피 따위를 목구녕에 들이부으며 말할 것이다)  어쨌든 이 ‘폭발’이 전혀 통쾌하지 않고 패배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으로 보이는 것은 비단 나뿐일까?

 

 

이 영화는 젊다. 감독도 배우도. 젊은 감독의 재기발랄함과 매력적인 독일배우들의 향연만으로도 이 영화는 꿈틀꿈틀 요동치고 있고, 그래서 예쁘다. 그런데 바로 이 ‘예쁨’이 문제다. 조금 시야를 넓혀보자. 최근 몇 년 사이에 좁은 간격으로 개봉된 68과 관련된 영화들. 이 영화를 비롯해서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 이상일의 <식스티 나인>, <박치기>까지(물론 <박치기>는 나머지 영화들과는 맥락이 조금 다르다). (또 한편으로는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에서 우후죽순으로 번역된, 68혁명을 낭만주의적으로 해석해놓은 책들 또한 연관이 있을 지도...어쨌든,) 이들 영화는 각각의 다른 위치에서 제각기 다른 정치색을 가지고 68을 바라보고 있지만, 공통점 한 가지가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모두 다 파릇파릇하고 매력적인 젊은 배우들이다. 이들 영화의 감독들은 직·간접적으로 68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이들 중 68을 직접 겪은 사람은 베르톨루치뿐이다). 그 '향수'를 40년이 지난 '지금'에와서야 '그때'를 회상하며 '그때의 현재적시점'으로 다루고있다. 즉, 이들은 68을 일종의 ‘청춘영화’로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지금 언급되고 있는 <에쥬케이터>란 영화에서 한때 급진주의자였던 부르주아 아저씨가 “나도 한때는 그랬었지”하는 식의 ‘회상’에 다름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냥 지금의 ‘그 세대들’에게 모든 짐과 책임을 씌우고서 잘못을 물을 수는 없다. 청년들은 어떤 식으로든 성장하고 그래서 어른이 되어야만 하기마련이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머물 곳이 없었다. 짐모리슨에 관한 누군가의 글에서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그들 세대는 두 가지 갈림길 앞에 놓여있었다. 미쳐서 일찍 죽어 신화화되어 상품이 되는 길. 다른 하나는 그냥 조용히 타협하고 살아남는 길이다.” 이 두가지 갈림길은 '일단은' 타협하지 않은 이 영화의 주인공들 앞에도 놓여져있다.  

 

다시 돌아가서. 이 영화 초반부에 남자주인공이 캐릭터상품이 되어버린 체게바라 티셔츠를 바라보며 한탄을 하는 장면이 있다. 68혁명 때 체 게바라의 이름에서 따온 체!체!라는 구호는 그 당시 권력에게 위협적이었다. 권력은 더 이상 그들의 입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닫고, 다른 식으로 대처했다. 권력은 그 이미지들을 티셔츠나 뱃지 따위에 마구 찍어 복제하고 상품으로 팔아치움으로써 그 기호들을 널리 퍼뜨렸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제 그 기호들은 원래 지녔던 불온성은 소멸된 채 마구 증식하기 시작했다. (내가 들은 최고의 농담: 체게바라평전을 읽은 한청년이 '불가능한 꿈'을 지방대를 나온 자신의 '대기업 입사'로 해석했다는 이야기) 결국 역설적으로! 68과 관련된 이 영화들 또한 그러한 작용을 하고 있다. 68의 이미지를 한때의 아름다웠던 청춘으로 복제함으로써 68이 가졌던 혁명성은 상실된다. 지금 남은 것은 온통 껍데기들뿐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이들 68에 관한 영화와 책들을 반가우면서도 반길 수 없고, 재밌고 유쾌하게 보면서도 마냥 재밌고 유쾌할 수만은 없었던 이유이다.                 
 
다시, 이제 글의 마지막. <에쥬케이터>의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의 마지막 폭발이 그들의 목표, 즉 체제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붕괴(혹은 자폭)로 받아들인 것은 나뿐일까? 이 영화는 영화 내·외적으로 그 세대의 붕괴를, 즉 어떤 저항의 종말을 몸소 실천해 증명해보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단 나뿐일까. 그래서 이 영화의 "유쾌한" 결말이 나에게는 너무나 패배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으로 보이는 것은...그래서 암울하기까지 한것은...

 

 

이들의 뒷모습은, 또 이 폭발은, 그래도 유쾌하고 희망적인가?

 

 

나는 이 영화가 너무너무 슬프다.

  

 

 


사족1.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영화초반 두남녀 주인공이 어떤 건물옥상에서 야경을 내려다보며 “지금쯤 혁명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하는 물음을 던지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 물음은 ‘아멜리에’가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며 “지금쯤 오르가즘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하는 물음보다 실효성도 없고 흥미롭지도 않다.

 

 

사족2. 병원을 나가면 68과 동시대 감독의 영화들을 찾아봐야겠다. 특히 고다르의.

 

 

사족3. 이글과도 연결될 수 있을 듯한. 얼마 전 <요코 이야기>에서도 폭발!되었고, <화려한 휴가>로 인해 진행되고 있는 논의들 - 역사를 예술에서 어떻게 재현·해석하는가에 관한 문제가 궁금하다. 물론 한일전쟁과 5.18은 68과는 매우 다른 맥락에 서있지만.  

 

 

사족4. 차라리 68을 ‘추억에 대한 회상’이 아닌 ‘트라우마’로서 해석해보는 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왜냐하면 ‘트라우마’는 어쩌면 반성과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줌으로써 현재적 시점으로 되살려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나는 아직까지 이런 영화 혹은 소설을 보지는 못했다. (우옐벡의 <소립자>에 나오는 브루노 역시 2차적 피해자이다) 혹시 아는 사람 있으면 추천해주기를 바란다. 물론 68의 역동적 에너지를 트라우마 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반동적으로 흐를 수도 있다. 생각건대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어떤 여성들’이 아닐까 싶다. 프리섹스의 피해자는 생물학적 임신주체였던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락스타들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했던 ‘그루피’는 어떨까. 물론 이것 또한 그때 여성들의 2차적 착취가 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흠흠.

예의가 아닌줄은 알지만서도.

이 블로그에 들어오는 누군가들,

- 제가 어림짐작만 할 수 있을뿐이지만,

그럼에도. '당신들'과

-같이 읽고 싶어서.

허락없이 무단으로 서동진님의 블로그에서 글하나를 퍼왔습니다.

아래는 전문이지만, 아래 주소로 가져서 그곳에서 직접보는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몽상님에게, 갈대로부터'라는 글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이제 막 니체를 만나고자 하는 시점에서,

제 욕망들을, 그래도 인정하고자 마음먹던 시점에서,

제가 예술을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떤 예술을 지지하고 싶은 마음에서,

지아장커의 전작들을 4편이나 보았지만 그의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결정적으로 정작 <스틸라이프>는 보지 못한 상황에서.

한번쯤 개그맨이 되어볼까 고민도 했었던 시기에ㅋ.

이 글을 읽은 터라

지금은 너무너무 슬픕니다. 

 

서동진님의 블로그 주소입니다.

http://www.homopop.org



제가 조금 과했겠지요. 어쩌면 지금 우리가 기대를 품고 보는 거의 유일한 영화 감독이라고 할 지아장커였기에 - 사실 그를 제외한다면 우리는 누구에게서 영화에 관한 우리의 피곤한 연민을 지탱할 이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 그의 동요나 침체를 더욱 못견뎠겠지요.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예술의 성쇠를 따라다니는 진드기라고 믿습니다. 저는 문학, 미술, 영화, 음악이 있다고 당연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장르와 미적 형식으로서 나뉜 예술로서의 그것들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당대의 가장 잘 나가는 예술을 졸졸 따라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부끄러울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고삐리시절 시인이 되고 싶었고, 대학 초년 시절 소설가가 되고 싶었고, 대학원시절 록밴드의 기타리스트가 되고싶었으며, 그 뒤엔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습니다. 가장 잘나가는 예술이 세상에 말을 거는 재주를 가졌고 그래서 예술을 사랑할 온전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게 갈보짓이라면 저는 갈보 할애비라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지금 가장 슬픈 일은 그런 갈보짓을 할 상대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초기자본주의가 소설의 시대 혹은 문학의 시대였다면, 그리고 20세기 초 여명기의 자본주의가 미술의 세기였다면 저는 전후 자본주의의 세기는 영화 그리고 록큰롤 따위의 역사적 시대였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바로 장르로서의 특성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시대와 공명하는 독특한 감성적인 능력을 획득하고 또한 발휘했다는 뜻에서입니다. 이를테면 저는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문학의 종언을 지지합니다. 물론 문학은 죽지 않지요. 오락으로서 문학은 건재할 것입니다. 바로크 음악을 완벽하게 재연하는데 몰두한 음악가들이 있듯이 문학을 복제하는 문학가들은 있을 것입니다. 모든 역사적 양식을 혼합하고 재연하는 것으로서의 문학(이를테면 지난 10년간의 한국현대문학이 보여준 장르화되고 양식화된 글쓰기를 보면 잘 알 수 있겠지요. 번거롭게 말해 문학은 세상을 대하기보다는 문학 자신을 대하지요. 그래서 저는 신경숙, 김영하, 성석제같은 소설가들을 무척 싫어하고, 격하게 말하자면 혐오합니다)이 있다면 저는 문학은 간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문학의 독자와 문학의 애호가들은 다른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미술에서 이런 풍경은 더욱 가관이지요. 저는 그래서 현대 미술을 가끔 증오합니다.

 

 

그런데 영화로 이야기를 옮기면 사정은 조금 달라집니다. 저는 여전히 영화가 “동시대”적인 예술이라고 믿었고 또한 지금도 아슬하게 믿고 있습니다. 제 공부와 머리가 짧아 잘 모르겠지만 어떤 학자의 말을 흉내 내자면 지금의 “감성적 체제”에 부응하는 것은 영화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지요. “문학이 맛이 갔다고 해서 뭐 그리 슬퍼할 일이냐, 또한 미술이 쫑났다는 것이 뭐 애석한 일인가. 새로운 감성적 체제와 대응하는 그리하여 현실과 상대하는 예술은 언제나 존재할 것이며, 따라서 현실을 체험하도록 조직하는 감성적 질서에 대적하는 새로운 예술은 언제나 발생할 것이다. 나는 지금 그것이 영화라고 믿으며, 나는 영화를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를 저는 언젠가부터 저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끔 냉소적인 심정으로, “씨발, 지금 혁명적인 예술은 개그아냐? 지금 ‘사모님’ 개그나 ‘홈쇼핑’ 개그보다 더 현실을 삽시간에, 그러니까 찐하게 감성적으로 니가 사는 세상을 느끼게 해주는 예술이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라고 뇌기도 했답니다(이 대목에서 전 아주 알뜰한 아드로노의 팬이지요)

 

 

하지만 역시 영화에 대한 저의 기대는 접기가 제법 어려웠습니다. 우리가 “뉴 저먼 시네마” 이후에 사실 영화운동다운 영화운동을 가져본 적이 있던가요. 저는 미국 인디와 중국 5세대 이후의 영화운동을 영화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화연구”를 통해 영화의 본원적 자기동일성을 묻기보다는 문화적 정체성과 차이를 묻는 소위 내셔널 시네마니 하는 따위로 전락한 영화 이론에 대하여 폭소를 거두기 어렵습니다. 이를테면 장 뤽 고다르는 누벨 바그 감독이 아니라 프랑스 내셔널 시네마의 감독으로 지역화, 맥락화해야 할까요? 더 나아가 마르크스의 생각은 독일적 문화정체성을 반영하는 로컬 지식인의 아이디어라고 주장해야 옳은 건가요? 물론 그런 생각은 개좆이지요. 세상에 그런 코미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를테면 겉멋들었지만 영화는 세계의 진실을 주장하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던 왕년의 <키노>를 사랑하지만, 내셔널 시네마 따위를 이야기하고 세대, 문화적 정체성, 성별의 정체성 따위에 따라 나뉜 다양한 취향의 세계로서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영화 아닌 영화를 두고 지지고 볶는 <씨네21>(물론 그보다 못한, 거의 영화의 위엄을 조롱하고 숫제 영화를 장례치르는 데 여념이 없는 싸구려 잡지들은 열외로 치고)을 딱하기 짝이 없게 생각합니다. 그런 너는 그러지 않았냐고 말한다면, 물론 정확히 보신 겁니다. 저는 그랬고, 그래서 90년대의 혹은 그래서 21세기의 표준적 이데올로기가 된 영화에 관한 저능한 주장을 거들었다는데 대한 자책감으로 영화에 관한 어떤 말도 자제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다시 지아장커로 돌아가지요. 저는 앞의 이야기에 비추어 그가 제일 나쁜 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영화가 세상에 관하여 무슨 말을 전하고 어떤 이데올로기를 만드는 능력이 있는가를 반성하며 나온 그 맹렬한, 이를테면 노도윅같은 영화평론가의 말을 빌면, 정치적 모더니즘을, 그 자는 그냥 맥없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욱 슬픈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영화를 통해 세상에 말을 건넬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무능함을 바로 정치적 모더니즘의 상투적인 형식을 통해 감추려고 합니다. 갈수록 그는 더욱 노골적입니다. 그 시절의 모더니즘 영화를 통해 영화에게서 혁명적인 예술로서의 능력을 본 사람들에겐 지아장커의 영화는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그래서 그는 영화제에서 앞 다투어 모셔 갈 거의 유일한 거장입니다. 그러나 그가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영화에 처량한 희망을 걸고 있는 저같은 이들이 많은 것이지요. 그래서 그 희망을 대신할 어떤 대역을 찾고자 그에게 온갖 축복을 퍼붓고 싶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얄팍한 짓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영화를 시체검시소에 운반하고 그것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 그리고 다음의 혁명적 예술을 위해 웃음을 머금고 부고장을 들고 화장터를 나오는 것, 그런 게 필요한 것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듯이 애도란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인가요.

 

 

그러면 넌 무엇에서 희망을 거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군요. 그 대목에서 저는 요지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혁명적인 예술을 완벽하게 대체하는 무엇이 예술이 하던 모든 일을 떠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본주의를 통틀어 지금과 같은 시대가 있었나 싶기도 합니다. 저는 그것이 디자인 혹은 광고와 마케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역설적으로 디자인을 예술이 아니라고 역성을 들면서 예술의 아류라고 젠체하는 인간들을 정말 같찮게 여깁니다. 그 인간들은 예술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모르는 삼류입니다. 디자인은 사실 일급의 예술입니다. 세상을 체험하는 감성적 질서를 조성하고 가공하는 능력-싱겁게 말해 과학적 지식, 도덕적 지혜, 미적 감성을 우리가 세상과 섞이는 세 가지 앎의 형태로 나눈 칸트같은 이의 구분을 따르자면 말입니다-을 예술에 관한 온전한 정의라고 받아들이자면, 디자인을 우리 시대의 예술이라고 인정하는데 주저하는 것은 정말 촌스럽고 좀스러우며 나아가 더러운 짓입니다.

 

 

일전 어느 디자인평론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좋은 디자인을 살리고 나쁜 디자인을 죽여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의 디자인 “계”에 대하 애착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저의 결론은 물론 “디자인” 자체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보적인 모더니즘 디자인이 보여주었던 놀라운 힘을 생각하며 디자인이 세상을 체험하고 조망하는 가능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은 일리 있습니다. 그러나 디자인은 그 힘을 지금까지 예술이 가져왔던 자명한 능력, 즉 예술은 언제나 세상을 적대적인 방식으로 보아 왔다는 그 능력에 반하여 사용합니다. 그래서 디자인은 예술의 힘을 이용하여 근대적 예술 자체를 죽입니다. 그래서 저는 디자인을 제일 증오합니다. 그래서 저는 디자인이 죽어야 예술이 산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저는 좋은 디자인, 착한 디자인이라고 그 디자인 평론가가 말한 말을 농담이라고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그러면 저는 아니면 몽상님도 영화와 디자인 사이에서 헤매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거의 아무 것도 듣고 보고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 제게는 사실 헤맬 것도 없습니다. 미어터질 듯한 제 싸구려 빌라 집에 친구가 가져다 준 자전거 한 대가 지금 놓여있습니다. 자전거 매니아인 제 매제가 온갖 재주와 돈을 들여 조립하고 장만하 무슨 값 비싸고 귀한 자전거라고 합니다. 그가 선물한 그 자전거를 제게 주었습니다. 역시 자전거 광인 제 친구는 그걸 들고 제가 지금 살고 있는 나라로 갈수가 없어, 제게 그걸 처분하는 셈치고, 아쉽고 배 아픈 심정으로, 그걸 제게 준 것입니다. 물론 그건 제게 그냥 평범한 자건거입니다. 외려 비싸고 귀한 것이기 때문에 세워둘 외발도 붙어있지 않고, 무슨 거치대를 장만해서 집 안에 모셔두어야 하는 것이 더 성가시고 짜증이 납니다. 가뜩이나 발뻗을 자리도 없는 집안에 자전거 한 대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마땅찮고 불편합니다. 저는 그 자전거를 보면서, 문득 니가 지금 예술의 자리를 닮았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더 말 안 해도 잘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 지식정보사회에서, 혹은 지식기반경제에서, 나아가 창의성의 경제에서, 예술이 제 자신의 반현실적 전통을 뒤집어 현실을 엄호하는 일급의 지식이 된 것. 편의를 위한 기능적인 작은 물건이 집을 점령하고 위세를 부리듯이, 세상을 등지고 그 세상을 다음의 세상으로 가게 하는 억센 박차였던 예술이 지금의 세상을 위해 가장 달콤한 알랑방귀를 뀌는 쓰레기가 되었다는 것. 그렇습니다, 뭐. 예술이 간 마당에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사실 저는 그래서 예술이 언제나 정치에 딸려있다고 봅니다. 예술은 그 스스로 정치적이지만 또한 동시에 정치의 충격이 없는 한 제 스스로 정치적일 수 없습니다. 예술은 결단코 자율적으로 정치적이지만, 그 자율성을 가지기 위해 언제나 정치의 충격을 필요로 합니다. 정치가 예술을 결정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그렇다면 예술은 정치적 프로파간다이고 국정홍보처이며 왕년의 KBS입니다) 예술은 한 번도 정치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순간 예술은 자신이길 단념하고 현존하는 질서를 포장하는 감각적 기교로 전락합니다. 감성의 능란한 능력을 숱한 철학자들이 불신한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요. 이 대목에서 저는 플라톤주의자이고, 아울러 헤겔주의자입니다, 혹은 반하이데거주의자입니다.

 

 

제가 이렇게 횡설수설한 것은 술취한 탓입니다. 실은 깡술을 한병 부었습니다. 무언 글을 하나 쓰려는데 마음이 후둘거려 잘 안나갑니다. 그래서 마감은 일주일 전에 지났는데 여전히 한줄도 안나가고 줄창 술만 마시고 있습니다. 글도 말도 짧아져, 아주 불안합니다. 참 한심하지요. 제가 사랑하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이데올로그 파스칼의 아름다운 말. 항상 오해받았던 그의 무시무시한 말,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그 말이 진화생물학자의 "인간은 생각하는 원숭이다"보다 더 낫잖나요? 전 원숭이보다 갈대같단 생각을 더 자주 합니다. 제 자신을 단백질로 환원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한 삶을 제 단백질의 명령 탓이라고, 제 본능의 명령 탓이라고 핑계대는 잡넘들, 잡년들보다야 끝까지 제 생물학적 본성에 저항하는 광기를 저는 사랑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