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기

<<울산민족문학 3호>>

 

전하동 산 번지

-안윤길 시집 '불꽃'에 부친다

 

백무산

 

 

아직도 그곳에 있을까 전하동 산 번지

낡은 슬레이트 지붕, 공사장 폐목으로 덧댄 집들

얼기설기 비닐로 막은 쪽방이 늘어선 골목

연탄재 함부로 뒹굴고 진눈깨비 퍼부어대던 그 골목

바람에 긁힌 얼굴들 고단하던 어깨들 슬픈 노래들

한밤중 유리창 깨어지던 소리 취중 고함치던 소리

아직도 그곳에 있을까 전하동 산 번지

 

붉은 꽃등 내다 건 여인숙 골목

사천원에 하룻밤을 자주던 여자가 있다던 그 집 붉은 불빛 골목

간판도 없이 술을 팔던 작고 귀여운 여자

사고로 반신 마비된 남자 뒷방에 눕히고

수줍음 많던 여자

취객들 손장난에 어두운 골목길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 자주 눈물 훔치던 여자

그 술집 건너편 작은 가게 언제나 여자아이가 지키던 가게

새벽에 일없이 출근하더니 아이들 아침밥상 물리기도 전에

거적에 덮여 짐차에 실려서 온 남자를 그렇게 보내고

겁이 많던 그 집 여자

늦은 밤 자주 짙은 화장에 술에 취해 뻐꾸기처럼 울던 골목길

가게를 지키던 여상을 다니던 여자 아이

연탄난로에 빨래가 끓어 넘치고 삼십 촉 전등불 아래

언제나 시집을 읽던 아이 기침이 심하던 아이

 

시장통으로 이어지던 공터 옆 이층 슬래브 중국집

펴지지 않는 살림살이 회사 때려치우고 중동 아라비아로 떠난 사람

보내온 돈으로 마누라가 얻어 차린 가게 반년도 못가서

주방장과 배가 맞아 살림살이 거덜낸 여자

이틀 밤낮 비행기 타고 온 남자 윽박지르고 달래어

저 애들 봐서도 저 홀어미를 봐서도 다시 살아보자고 다시 살아보자고

달래고 협박하고 안티푸라민 발라주고 붕대도 감아주고 떠난 사람

석 달도 못되어 다시 와서 식칼 들고 여자를 찾아

겨울비 퍼붓던 골목골목 울부짖던 남자

 

자고나면 도둑이 들었다는 소문 흉하던 골목

착해 보이던 남자 쪽방 맨 끝방에서 홀어미 모시고

말없이 살던 남자 어느 날 순찰차에 실려 수갑을 차고 오고

늙은 애미 젖은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머리 풀고 울던 그 골목

아, 아직도 그곳에 있을까 그 아이와 걷던 그 골목길

젓가락 장단에 울고 넘는 박달재를 숨이 탁 막히도록

잘 부르던 그 여자 폐병을 앓던 그 여자

공장 돌담장 정류장에서 떠나는 봇짐 끌어안고

허벅지 다 드러내고 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떠난 여자

바람처럼 스쳐간 가엾은 내 사랑

 

아아, 아직도 그곳에 있을까

자정이 넘은 시각 내 방문을 두드리던

가겟집 그 아이 숨이 멎은 여덟살 동생을 업고

빙판에 뒹굴어 온몸이 흙탕이 되어 눈물범벅으로 찾아온

그 아이 그 골목

 

아아, 둘도 없던 내 동무 스물여섯 붉은 피 팔월 염천

내 가슴 아파 찢어져 다시 가지 못한 그 골목

나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지 못한 죄 가슴 미어져

내 분노 때문에 잃어버린 사랑 때문에

언제나 겨울비 진눈깨비 퍼붓던 그 골목 먼지바람 살을 에던

전하동 산 번지

내 가슴 아파 찢어져 다시 찾지 못한 그곳

나 이룬 일 없어 우리 싸움으로 아직 이룬 일 없어

그 세월 젊음 바쳐 싸운 그 날들이 욕이 되어 가는 날들

그 아픔 때문에 먼먼 추억으로나마 가지 못하는 그 골목

나 오늘 그리워도 못 볼 그 얼굴들 그 노래들 그 눈물들

 

가슴에 내 가슴에 남은 노래

내 차가운 가슴에 끓어 넘치는 그 노래

내 젊음 묻은 전하동 산 번지

팔월 염천의 진눈깨비

 

그 얼음장 아래 펄펄 끓어오르던 피의 노래

그 노래 다시 부르리라 언젠가

우리 함께 일어나 다시 부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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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06 17:29 2006/04/06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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