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기

“두발자유! 복장자율화! 체벌(폭력)금지!” 이 구호하면 생각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당연 대한민국 청소년이지 않을까 싶다. 청소년들의 40년 동안 가장 큰 염원 중 하나라면 단연 두발자유나 체벌금지 같은 청소년인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구호를 단지 ‘애들만의 구호’로 묻어버리기엔 뭔가 부족한 느낌을 받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난 당시 20년 전에 어머니의 배 속에서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나여서 잘 모르긴 몰라도, 그 당시 울산의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와 외쳤던 구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학교 등교시간에 교사들이 몽둥이를 들고 교문지도를 한다. 그리고 머리 긴 애들을 잡고 오리걸음으로 운동장을 돌리거나 벌을 세워놓고 발로 차거나 때린다. 심지어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껌을 씹으며 등교하는 모습을 보고 정강이를 까는 교사도 있다. 그리고 청소년들은 밤10시까지 수업하거나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학원으로 하루를 채우는, 그런 삶을 보낸다. 학교게시판에 비판글을 올리면 불려가서 혼나기 일쑤며 교장의 허락 없이 어떠한 대외활동도 불가하다는 교칙이 전국을 지배하고 있다. 교육부나 교육청에 도움의 요청을 하면 고장 난 라디오처럼 학생-학부모-교사 3주체의 공정한 교칙개정만을 말한다.

쉽게 설명해서, 87년의 대기업 노동자들의 현실과 똑같다는 것이다. 경비원이 몽둥이를 들고 문 앞을 지키고 있고, 머리 긴 사람들 불러서 벌주고, 안전화로 까는 등의 체벌을 하고 ‘회장’의 허락 없인 노조도 안 되고 주머니의 손 넣고 건방지게 온다고 맞고, 노동부나 노동청에 도움을 요구하면 그 당시에는 없었으나 노사정대타협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정중, 옥동중 학내시위


울산에서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며 많은 것들 들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일들이 있었다. 교육청 앞에서 1인시위도 하고 어떤 학교에서 서명운동을 하다 학생이 징계를 받아 활동을 그만 둔 일, 교감과 논쟁하다 강제전학을 요구 당한 일, 그리고 신정중-옥동중의 학내시위까지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수많은 청소년들이 “미안해, 나 이제 더 이상 힘들어서 안 되겠어”라고 말하며 떠날 때 가슴 아팠던 기억이 난다.

학교는 그 어떠한 기관 중에서도 민감하다. 인권의식의 싹부터 잘라내기 때문에 학내의 어떠한 조직이나 변화의 조짐이 있으면 초기진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밀하며 확실하다.

그런데 이러한 활동을 하다 보니 확실히 선입견이 깨진 하나는 같이 운동을 하는 입장의 사람들은 적어도 우리를 이해해주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없어졌단 것이다. 일반적인 부모들은 이러한 활동을 할 것을 알았을 때, ‘착한 자기자식을 선동한 죽일 놈’화 되어 협박전화를 많이 받게 된다. 그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소위 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들과 다른 점을 찾아보기 힘든, 오히려 아집이 강해 ‘아직 어리니 대학 다니고’라는 논리로 반대하는 노동활동가도 있었다.(현재 한 청소년은 그 일로 가출투쟁을 벌이는 중이라 나의 집에서 숙박 중이기까지 하다.)

웃기지 않는가. 20년 전에 두발자유를 주장했던 세력이, 체벌금지를 주장했던 세력이 자기 자식에겐 그런 불합리한 것들에 대해 ‘그것은 추억이야’ ‘한 때일 뿐이야’라며 스스로 87이 한때의 쓸데없는 짓이었다고 인정하는 셈이 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전교조만 하더라도 89년 전교조 출범 때 수많은 청소년들은 전교조 사수를 함께 외치며 지금의 전교조가 있도록 했다. 하지만 현재는 다면평가, 교원평가제 문제인 즉 국가가 학교를 통제하는 것에 대해선 반대하지만 학교가 학생을 통제하는 시스템에 대해선 똑같은 무게로 비판하지 않는다.

학생에겐 학교운영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불가하고 참관조차 불가능하다. 학교 내에서도 사실상 비정규직-정규직이 학생-교사란 전선으로 나눠져버렸다. 청소년은 ‘당연히’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 되어버렸다.


▲과학대 학생들의 항의시위

그러한 교육효과의 결과가 울산과학대가 아니었나. 학생들은 당당하게 ‘노동자는 부끄러운 것’이라며 외쳤다.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끊임없이 부정한 결과는 그것이다. 운동사회에서도 ‘보호해준다’식의 논리로 청소년을 현재의 주체가 아닌 ‘미래의 꿈나무’로만 생각하는 데에는 거의 이견이 없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이 20년 후 망하는 운동하는 거라면 너무 과한 표현일까?

신해철의 ‘영원히’라는 가사 중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세상에 길들여짐이지, 남들과 닮아가는 동안 꿈은 우리 곁을 떠나네.”라는 구절이 생각난다. 87대투쟁 때 노동자들이 나온 근본적 이유는 ‘임금’같은 것 때문이 아니었다. 프랑스 68혁명에서 반CPE투쟁, 칠레 청소년들의 시위 또한 자신들을 억압하는 것들에 대한 저항이었고 미래가 아닌 현재를 위한 투쟁이고 길들여지지 않기 위한 불온이었다.


▲칠레 고등학생들의 반신자유주의 시위

"두발 자유화, 인격보장, 연장근무철폐, 8시간 근무로 생계보장, 식당개선, 근무중 휴식시간 보장…"
20년 전 현재의 청소년들과 똑같은 구호를 외쳤던 87대투쟁에게 청소년들은 정면으로 질문한다. “87, 그거 뻥이죠?”

덕기(청소년 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 ) / 울산노동뉴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12/27 13:42 2007/12/27 13:42
Trackback Address :: https://blog.jinbo.net/plus/trackback/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