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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울교협통신] 26호 96.7.11

 

노동자 정치운동을 시작하자!


  노동자 정치운동 하면 선거, 정당, 노동자 후보… 이런 말들이 떠오른다. 생각을 좀더 붙잡아 보면 노동자 정치운동이라는 게 보수 정치판 하고야 생판 다를 거고 무슨 참신한 야당 어쩌고 하는 것과도 뭔가 다를 거라는 생각, 현장이 중요하고 대중투쟁이 기본이 되어야 할 거라는 생각들이 엉켜져 뒤따른다. 이런 생각 조각들을 덜떨어진 낡은 원칙쯤으로 깔아 뭉개는 차가운 비웃음들이 훼방을 놓더라도 꾹 참고 한 걸음 더 생각을 모아 보면, "우리 노동자들이 바라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그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우리가 지금껏 피땀 흘려 쌓아온 힘은 뭐고 턱없이 모자라는 것들은 어떤 건가? 이 힘들을 하나로 묶어 뚫어내야 할 고리는 어딘가?" 하는 물음들과 만나게 된다.

  하나씩 붙어 보자.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는 직장이 안정되고 적절한 소득이 있어서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큰 고통 없이 아이를 낳아 키우고 가르치며, 필요한 곳에 편리하고 저렴한 값으로 다닐 수 있고, 아플 때 큰 부담 없이 치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연로했을 때 최소한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즉 개인적인 소비만이 아니라 사회적 소비가 적절한 수준으로 제공되어야 하는 것이다."(장상환, 「한국 자본주의의 현주소와 노동자 상태」, 『현장에서 미래를』 제7호, 1996. 2)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하고 초라한(?) 바램이다. 허나 '죽지 않고 일할 권리'가 당장 급한 우리네 처지고 보면 이나마의 바램조차 목숨 건 투쟁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만큼 '먹고 사는 일'이 여전히 팍팍하고 고단하다는 말이다. 물론 지난 9년동안 우리가 쟁취해 낸 '생활상의 분명한 변화'까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게 자본이 호들갑 떨듯 '남부럽잖게 먹고 살 수준'까지 됐다는 건 결코 아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특히 생산직 노동자―는 TV 드라마에서조차 소외받는 '하층민'이다.

  우리 노동자가 바라는 세상은 사실 이 정도 '꿈'에 갇혀 있지는 않다. 지금껏 우리가 싸워온 게 결코 '돈 몇 푼' 때문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단협 몇 조항의 개선에 목숨 걸었던 게 아니라면 우리에겐 이른바 '경제적 이해'보다 더 큰 지향과 소망이 있다. '먹고 살만한' 독일과 프랑스의 노동자들이 몇 십만명씩 총파업을 벌이고 남아프리카와 브라질의 노동자들이 정치파업을 일으키며 미국의 노동자들이 새롭게 단결하여 노동자 정당을 건설하고자 떨쳐 나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중의 소망 속에서 가치를 찾고 대중의 경험 속에서 방법을 찾자"는 말처럼 지난 9년동안 우리가 쌓아온 '내공'은 우리 사회 미래 삶의 새로운 질서와 가치의 싹을 틔웠고 그 싹을 지키고 키워갈 방법을 발전시켰다. 자본이 우리 사회를 조직하는 기본 원리는 '경쟁과 분열'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난 투쟁으로부터 키워낸 것은 자본의 조직 원리에 맞선 '단결과 공동체의 조직 원리'였고 자본의 죽은 '대리 민주주의'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직접 민주주의'의 실천 정신이었다. 우리가 직권조인이라는 치욕스런 배신행위로부터 목숨 걸고 사수해낸 '총회 민주주의'는 세계 노동조합운동 역사를 통틀어 누구도 가져 보지 못했던 빛나는 창조물이다. 게다가 우리는 94년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이 '살인기계 중국 이전 반대투쟁'을 벌이면서 보여준 연대투쟁의 남다른 모범까지 갖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이런 훌륭한 싹들을 '우리 자신의 힘'으로 모아내고 키워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을 선거 정치나 의회주의로 가두지 않고 개량을 쌓아가는 '기어가는 변혁(?)' 따위로 변질시키지 말아야 한다. 노동자 정치운동을 '한 판에 기본 30억' 하는 가진 자들의 선거 놀음에 가두려고 하는 것은 지구 위 다른 어느 나라보다 풍부한 가능성을 많이 갖고 있는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대중 정치'의 싹을 짓밟는 짓이다. 95년 프랑스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3월 연대투쟁은 길거리에서의 대중 정치(투쟁)가 의회와 국가를 어떻게 압도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줬다. 우리에게는 91년 5월의 경험이 있다. 게다가 우리는 길거리에서뿐만 아니라 공장 안에서 한 해도 거르치 않고 자본과 국가의 물리력과 부딪혀왔다. 이 속에서 우리는 자본의 정치와 노동의 정치가 뿌리에서부터 대립되고 있음을 온몸으로 확인해왔다. 노동의 정치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대중투쟁의 한가운데 있고 우리가 발전시킬 '정치 총파업' 속에 있다. 의회는 이 대중 정치(투쟁)를 발전시키기 위해 제한되어 활용될 수 있을 뿐이다. 이 대목에서 삐끗하게 되면 '물 건너 가는' 것이다. 정치가 '표 긁어 모으는' 활동으로 축소되자마자 거기 노동자라는 '계급'은 사라져 버린다. 적어도 우리가 발전시킬 노동자 민주주의는 대중들을 돈 주고 사는 표 하나 하나로 파편화시키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더디 가는 듯 하지만 정도(正道)가 가장 빠른 길이다.

  97년 대선과 이어 줄짓고 있는 선거 일정은 앞으로의 정세를 가름짓는 중요한 계기들이긴 하지만 그것이 우리 주체의 상태를 떠나 어떤 '상수'가 되는 건 아니다. 이렇게 보면 언제부턴가 선거 일정에 맞춰 정세가 분석되고 선거 대응을 중심에 두고 이러저러한 계획들이 잡혀지는 건 잘못이다. 지금은 산별노조 건설운동과 현장활동의 통일, 노동자 정치운동(투쟁)과 현장활동의 통일을 고민하면서 현장 활동가의 선진층으로부터 노동자 정당 건설운동의 주체를 모아내는 계획이 필요할 때다. 그 최소한의 출발 대오는 노동자 정당 건설을 자기 목적으로 하는, 선진노동자들이 주체가 되는 노동자 정치조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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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4 08:06 2005/02/14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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