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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울교협통신] 21호 96.6.7

 

'골리앗의 슬픈 그림자'를 딛고

  지난 6월 4일 현대중공업 노조는 조합 사무실 앞에서 쟁의발생결의를 위한 대의원대회를 열었으나, 대의원 221명 가운데 77명밖에 참석하지 않아 회의조차 열리지 못하는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9년 역사를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144명이나 되는 대의원들이 이렇듯 조합원들 눈치 안보고 '용감'하게 '행동'할 수 있는 지경까지 간 '현대중공업 노조의 숨김없는 현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첫째, 현대중공업 회사쪽의 노조 무력화 공세가 이미 반수를 넘는 대의원들을 '동원'할 수 있을만큼 발전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지난해 임투를 잠깐 되짚어 보자. 지난해 쟁의발생을 결의했던 대의원대회는 대의원 217명 가운데 123명이 참석해서 겨우 치뤄졌다. 가까스로나마 대의원대회에서 쟁의발생결의가 이루어지자 회사쪽은 만명이 넘는 조합원들을 무분규서명과 총회소집서명에 '동원'하기 시작했다. "무쟁의는 최하위 목표"라는 말을 서슴지 않을만큼 회사쪽이 현장 장악력에 자신감을 드러낸 것도 이런 '직접 동원'에 성공하면서부터다.

  10대 대의원선거는 그만큼 '중요'했다. 그러나 전노회는 43명을 당선시키는 데 그치고 말았다. 3분의 1 가까운 대의원들이 '새로운 노사관계 정착'이라는 조직으로 묶여졌다. 이렇게 보면 회사쪽은 100명 가까운 '무소속' 대의원들을 '밀착 마크'하면서 반 이상을 동원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회사쪽의 대의원 동원력이 과반수를 넘었다는 사실은 '무쟁의'를 뛰어넘어 '노동조합 무력화'라는 목표가 이제 현실의 공세로 코앞에 다가왔음을 말해준다.

  둘째, 일부 대의원들의 집행부 '공격'이 '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력화된 '행동'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임금교섭도 시작되지 않았는데 쟁의발생을 한다는 것은 빠르지 않느냐? 그리고 지금까지는 대의원대회를 쭈욱 신관 5층에서 해왔는데 이번 쟁의발생결의를 노상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이유는 뭐냐? 집행부가 대의원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조합원들이 보는 앞에서 분위기에 편승해 집행부의 입장을 관철시키려는 의도 아니냐?"

  지난해 "바깥 일정에 맞춰 쟁의발생 시기를 앞당겨서는 안된다"는 논리나 "위원장 호신용"으로 쟁의발생결의를 몰았던 것에 대면 반대 논거가 그다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문제는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대의원대회는 무산됐고 노동조합은 다른 누구도 아닌 대의원 자신들로부터 공격받고 있다.

  셋째, 조합원들의 '절망감'이 매우 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6월 4일 노동조합 앞에는 2,000명 넘는 조합원들이 대의원대회가 '유회'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대의원들을 욕하는 분노에 찬 목소리가 클 법도 한데, 되려 조합원들 자신을 탓하는 자책의 소리가 더 컸다. 그만큼 노동조합의 '위기'를 맨살로 느낀다는 얘기고, 점점 이기주의에 빠져드는 동료들을 보며 '배신감'에 '좌절'이 커진다는 뜻이다. "한번 콱 망해봐야 정신들 차린다"는 어느 조합원의 말은 현대중공업 조합원들 다수의 '절망감'을 대변한다.

  대의원대회가 '유회'되자 김임식 위원장은 "이러한 상태에서는 더 이상 96임단협 협상을 진행할 수 없다. 따라서 오늘로 협상을 중단했다. 그리고 조합 업무도 산업안전, 후생복지 등 꼭 필요한 것 이외에는 업무를 전폐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노동조합에 조합원과 대의원들이 하나로 뭉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말하고, "조합원의 결집된 힘으로 이를 극복해내느냐의 여부에 노조와 노동운동의 사활이 걸려 있다"며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말 그대로 '비상국면'이다.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죽고 삶이 여기서 결정난다 해도 지나침이 없다. '골리앗의 슬픈 그림자'를 딛고 노동조합의 '현장권력'을 되살릴 길은 어디에 있는가?

  첫째, 노동조합의 중추라 할 운영위원이나 대의원 선이 이렇게 '빵구'가 나 있다면, 집행부가 직접 현장을 조직할 수밖에 없다. 노동조합의 일상 공식체계로는 회의 자체가 될까말까 하는 판이니 어차피 바상체계로 의결과 집행을 통일시키는 길 말고 다른 뾰족수가 없다. 조합원총회는 그럼 쉽겠냐 하겠지만, 이런 비상국면에 믿을 건 조합원밖에 없다. 외통수라면, 그리고 거기에 사활이 걸려 있다면 온힘을 다해 뚫고 나갈밖에 다른 길이 없다.

  둘째, 전노회가 적어도 분과를 책임지고 주도해야 한다. 분과별로 편차야 있겠지만, 분과집해위가 됐든 분과비대위를 꾸리든 움직이는 대소위원들을 끌어세우고 500명 단위 이상의 분과 집회라도 꾸준히 꾸려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꿈적도 않는 조합원'을 탓하기 앞서, 다가가서 움직이도록 만드는 게 현장활동의 몫이다. 집행부와 현장조직이 하나되어 온몸으로 조합원을 설득해 간다면, 돌파할 수 없는 '난국'이란 없을 것이다.

  셋째, 금속연맹 울산지부가 힘을 보태야 한다. 상급단체가 단위 기업에 모든 하중을 떠넘긴 채 제 할 일을 못찾고 앉아 있으면 그 조직을 유지할 까닭이 없다. 금속연맹조차도 기업별 체계라 달리 무슨 묘수가 없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현장활동가 선에서라도 뭔가 달라진 모습이 보여야 하는데, 이건 도통 보이는 게 없다. 금속연맹 울산지부가 무슨 연대사업부 정도의 부서조직이 아닌 바에야, 현장의 어려움을 돌파할 '지도력'을 발휘해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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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4 07:58 2005/02/14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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