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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울교협통신] 17호 96.5.10

 

한국합섬 노동자들의 파업·분신투쟁


지난 5월 4일 구미 한국합섬 노동조합 이진권 부위원장과 서상준 회계감사가 분신했다. 두 동지는 다음 날 새벽 서울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져 지금까지 치료를 받고 있으나 중태다.

한국합섬은 지난 91년에 창립된 폴리에스텔 섬유회사다. 구미에 본사가 있고 대구에 이화화섬, 이화섬유, 이화상사 등 5개 계열사를 갖고 있다. 한국합섬 사측은 회사 창립 초기에 유령노조를 만들어 박동식 회장의 조카를 위원장에 앉히고 70년대식으로 현장을 통제해 왔다. 800여명의 조합원들은 94년 10월 사측의 무노조 방침과 무리한 현장 통제에 맞서 밤샘 농성을 벌였다. 이 싸움으로 유령노조는 없어졌고 민주노조가 들어섰다. 그러나 95년 첫 단협에서 사측은 유령노조 때 만들어놓은 단협을 인정하라며 교섭 자체를 거부했다. 노동조합은 결국 무쟁의를 약속하고 단협을 새로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작년 12월 2일 구미 3공단에 있는 한국합섬 2공장에서 김영, 김호영 두 조합원이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었다. 탱크 안에서 일을 시켜놓고는 질소를 집어넣는 바람에 가스 중독으로 죽은 것이다. 기가 막히는 것은 산소호흡기를 쓸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살릴 수 있는 목숨을 둘이나 잃게 될 만큼 안전교육이 아예 없었다는 사실이다.

노동조합은 '산재사망 진상위원회'를 만들어 산업재해를 예방하자고 사측에 제의했다. 그러나 사측은 "칼로 찔러 죽이겠다. 노동조합에 복수하겠다"며 황영호 노조 위원장을 협박하고 폭행까지 했다. 이에 분노한 노동조합은 89%의 찬성율로 파업을 결의하고 투쟁에 들어갔다.

다급해진 사측은 12월 15일 박동식 회장의 아들인 박노철 부사장을 통해 노조의 요구를 100% 수용하겠다고 약속했다. 노동조합은 이 약속을 믿고 조업을 정상화시켰다. 그러나 사측은 약속을 어기고 42명 조합 간부 전원을 징계조치했다. 거기다 한술 더 떠 24억 6천만원의 손해배상을 김천 법원에 청구하는 작태까지 서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박동식 회장은 전조합원 앞에서 "노조때문에 산재 보상금을 많이 지급해줬다. 노조는 회사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다"라는 망언을 퍼부었다. 노동조합은 손해배상 청구와 징계 철회를 요구하며 항의했으나 사측의 대답은 "단체협약 유효기간을 2년으로 연장하고 앞으로 2년간 무교섭, 무쟁의 선언을 하면 손해배상과 징계를 유보하고 97년말에나 이를 철회하겠다"는 것이었다. 사측은 아예 이같은 내용의 합의서까지 만들어 노조 간부 전원이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노조는 96년 임단협을 맞아 8차례에 걸쳐 사측에 교섭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측은 계속 교섭 거부로 일관했다. 이에 노조는 3월 18일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 3월 30일 쟁의발생 결의, 4월 1일 쟁의발생 신고를 거쳐 4월 4일 쟁의행위 찬반투표에서 조합원 93.5%의 찬성으로 파업투쟁을 결의했다. 그러나 노동부는 노조가 4월 1일에 쟁의발생 신고를 했는데도 4월 15일이 임단협 만료기간이라며 노조의 쟁의발생 신고를 불법으로 몰아부쳤다.

결국 노조는 '불법'파업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4월 8일 한국합섬 전공장은 노동자들에 의해 점거됐고 정문은 폐쇄됐다. 4월 9일 30여명의 노동자가 '민주노조 사수를 위한 분신 결의'로 죽음을 무릅쓴 결사투쟁의 각오를 다졌고 4월 11일 새벽 2시부터 전공장 총파업에 들어갔다.

한국합섬 파업 노동자들은 이진권 부위원장을 비롯한 35명의 조합원들로 서울 상경투쟁단을 꾸렸다. 상경투쟁단은 4월 22일부터 26일까지 서울 마포 민주당사 전해투 사무실에서 농성을 벌이고 명동, 여의도 일대에서 대시민 선전전을 벌였다. 그리고 4월 27일 전해투 집회에 결합하여 투쟁 경과를 보고했다. 한편 분신을 결의한 30여명의 노동자들은 30여미터 높이의 싸이로(2기)탱크에 상황실을 만들어 결사항전의 태세를 갖춰나갔다.

5월 4일 한국합섬 2공장 장성택 전무이사 등 2공장 관리부 직원 100여명은 경찰서로 몰려가 "불법파업이니까 빨리 공권력을 투입하라"고 항의(?)했다. 공(公)권력은 자본의 집단 항의(?)를 받자마자 전투경찰 150여명을 동원하여 진압에 나섰다. 2공장 입구가 경찰에 의해 봉쇄됐다. 조합원 5명이 2공장에서 나오다가 전경들한테 무자비하게 폭행당했다. 이 과정에서 22명의 조합원이 강제 연행됐다. 이 상황을 보고받은 이진권 부위원장과 서상준 회계감사는 다른 3명의 조합원과 함께 2공장으로 달려갔다. 2공장 입구를 경찰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왜 우리 공장에 사원이 못들어 가느냐?"며 5명의 동지들은 공장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끝내 거부당했다. 이에 5명의 동지들은 몸에 신나를 붓고 공장 진입을 다시 시도했다. 그러나 전투경찰들은 아랑곳 않고 계속 막아섰다. 격분한 이진권 부위원장이 라이타 불을 당겼다. 불길은 눈깜짝할 사이에 옆에 있던 서상준 회계감사에게 옮겨 붙었다. 나머지 동지들이 급히 달려들어 불을 껐다. 이 와중에 경찰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저 놈들 잡아라!"였다. 분신 동지들은 15분동안이나 전경버스 안에 방치되었다가 순천향병원으로 후송되어졌다. 서상준 동지의 얘기로는 이때 전경버스 안에서 "대가리 쳐박고 있어라. 너같은 놈들 몇놈은 죽어도 상관없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5월 5일 새벽 경찰의 불법 연행에 항의하러 간 조합원 130여명이 또다시 강제 연행됐다. 이중 16명이 구속되고 29명이 불구속 기소됐으며 103명이 구류를 살았다.

5월 6일 성문밖교회에서 '한국합섬노조 분신투쟁 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그리고 5월 8일 구미역 광장에서 지역대책위 주최로 '분신 부른 공권력 규탄 및 한국합섬노조 사수를 위한 결의대회'가 열렸다. 투쟁은 5월 11일 영남노조대표자회의 주최의 구미역 규탄집회로 발전하고 있다.30일을 이미 넘긴 한국합섬 노동자들의 분신·파업투쟁은 96년 전국 임투전선을 선도하고 있다. 이 투쟁은 또한 민주노조운동의 후발 주자인 '실 만드는 노동자'의 총단결을 일궈나가는 시작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어느 해든지 임투가 깝깝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지만 언제나 '돌파'는 투쟁으로부터 왔다. 이제 이 투쟁을 받아서 전국 공동임투전선으로 모아내야 할 곳은 상급단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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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4 07:52 2005/02/14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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