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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울교협통신] 16호 96.5.3

 

장장손 뒤에는 누가 있는가?

지난 5월 1일 이철수 제일은행장과 장장손 전 효산그룹 회장이 구속됐다. 죄목은 이철수 행장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상의 배임수재 혐의'고 장장손 전 회장은 마찬가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상의 배임증재 혐의'다. 한마디로 뇌물을 주고 받았기 때문에 쇠고랑을 차게 됐다는 얘기다.

어떻게 된 건지 그 '구린 속'을 한번 들여다 보자.

효산그룹은 92년 8월부터 94년 3월까지 제일은행에서 열두 차례에 걸쳐 모두 1,150억원을 빌려 썼다. 효산은 이렇게 빌린 돈으로 서울 신사동에 있는 호텔을 사들이고 1,300억원을 들여 경기도 미금시에 서울리조트라는 스키장을 지었으며 경기도 양평에 콘도미니엄을 짓는 공사까지 벌였다. 문제는 관광진흥법에 정해논 관광단지가 아닌 지역에서 호텔, 여관, 콘도미니엄이나 골프장 같은 사업을 벌일 때는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못하게 되어 있는 '여신운용규정'이라는 게 있는데도 법을 어기고 제일은행이 큰 돈을 꿔줬다는 데 있다. 뿐만 아니라 담보가치가 없는 부동산을 담보로 맡겼는데도 은행장이 '너그럽게'(?) 담보가치의 열배나 되는 돈을 빌려줬다는 것도 문제다. 이 행장은 이렇게 돈을 빌려준 댓가로 효산그룹에서 모두 2억 5천만원을 '커미션'으로 챙겼는데 장학로가 받아챙긴 '떡값'에 대면 그야말로 '껌값' 몇푼에 쇠고랑을 차게 된 셈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효산은 부도 위기에 몰려 있던 94년 여름에도 제일은행에서 70억이 넘는 돈을 빌렸고 고려증권에서도 회사채 지급보증으로 40억원을 빌려 썼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회사에 담보의 몇배나 되는 큰 돈을 통 크게 빌려주는 은행들의 '배포'(?)가 놀라울 뿐이다. 은행감독원은 94년 제일은행을 정기감사했을 때 이른바 '주의 조처'만 달랑 내려서 제일은행의 '통 큰 배포'를 감싸줬다. 감사원도 95년 4월 주택은행의 자회사인 주은리스가 세금계산서를 가짜로 꾸며 96억원을 효산그룹에 빌려준 사실을 알아냈지만 이를 발표하지 않고 슬그머니 넘어갔다. 감사원은 또한 95년 5월 건설교통부를 감사하면서 효산그룹이 경기도 남양주에 짓고 있던 '시티 21 콘도'가 수도권 정비 심의를 받지 않은 채 편법으로 허가되었다는 걸 알고서도 감사를 그만뒀다. 남양주 콘도 문제는 감사원 뿐만 아니라 수도권 정비 심의를 맡는 건설교통부, 심의 대상을 가리는 경기도, 콘도 허가를 위한 준도시지역 개발계획 변경의 실무 관청인 남양주시, 허가 반려를 재심하는 경기도 행정심판위원회 등 여러 기관이 얽혀 있다.

이쯤 되면 내노라 하는 은행들과 행정관청, 감사기관까지 떡주무르듯 한 효산의 '힘'이 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궁금해진다. 몇가지 고리들을 살펴보자. 효산 장 회장은 94년 여름 장학로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에게 세차례에 걸쳐 6천만원의 '떡값'을 준 일이 있다. 또 하나는 효산그룹이 김영삼 대통령의 중학교 동창인 김경배씨를 93년 초에 고문으로 받아들이면서 사업이 빠르게 확장됐다는 점이다. 한겨레신문은 3월 30일 "김씨가 대통령 측근 인사들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어왔으며 효산에 들어가기 전 시가 5천만원짜리 딸 집에 살다가 93년 청와대 측근들을 통해 제일은행으로부터 대출을 알선해주고 그 대가로 시가 5억원짜리 단독 주택을 받았다"고 고발한다. 이 두개의 고리가 어디와 이어지는지는 분명하다. 바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절대 권력' 청와대다.

장장손 뒤에는 '안되는 일도 되게 하는 파란 기와집 사람들'이 있었다. 서울은행, 제일은행, 주택은행, 고려증권이 '파란 기와집 눈에 나지 않으려고' 불법으로 뭉칫돈을 빌려줬고 은행감독원이 이 사실을 눈감아줬다. 건설교통부, 경기도청, 남양주시청이 '파란 기와집에 밉보이지 않으려고' 편법으로 건설 허가를 내줬고 감사원이 이를 알면서도 사실을 숨겼다.

'얼음산의 한 귀퉁이'가 이렇고 보면 '모든 길은 청와대로 통한다'는 게 우리 사회가 굴러가는 '뒷쪽의 진실'임이 보다 뚜렷해진다. 우리는 '얼음산의 나머지 전체'인 재벌과 청와대의 '뒷거래'가 어떻게 '세계화와 신한국 건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회의 '앞쪽 진실'이 되는지 똑똑히 알고 있다. 우리는 또한 '저들의 진실' 뒤편에 숨겨진 '구린 속'을 뿌리부터 도려낼 수 있는 '힘'이 바로 우리 노동자들의 보다 큰 단결과 재벌-청와대의 힘을 뛰어넘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에 있다는 것도 분명하게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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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4 07:52 2005/02/14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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