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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울교협통신] 12호 96.4.4

 

4·3 제주 민중항쟁 마흔 여덟 해를 맞으며

남목고개에 개나리가 한창이다. 그 노란 행렬 뒤로 진달래가 붉게 번지고 겨우내 헐벗었던 나무들이 가지마다 연록색 새 잎을 다투어 틔운다. 산과 들에 쑥이며 나물들이 고개를 내밀고 온 누리에 봄 기운이 가득하다. 봄은 이렇듯 언제나 느닷없이 갑작스레 우리 곁에 다가온다.

이 봄에 우리는 48년전 4월 3일 새벽 2시 남녘 끝 제주에서 그 많은 오름마다 그렇게 한꺼번에 터져올랐던 봉화들을 기억한다. 해방된 조국의 미래를 해방된 민중들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하고자 했던 피어린 제주 민중의 항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8만명(한 세대당 한 명꼴)이 죽고 169개 마을 가운데 130개 마을이 불에 타 없어져버린 이 '피의 역사'를 48년이 지난 지금 새삼 되돌이켜 보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이 역사로부터 우리의 현재와 미래까지 연결되어 있는 '미완의 과제'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 위해서다.

4·3 제주 민중항쟁은 1947년 3월 1일 8만명이 참가한 대규모 3.1 독립운동 기념대회의 해산과정에서 미군정 경찰이 무차별 발포를 시작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이 발포로 6명이 사망하자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3월 10일 제주도 총파업투쟁위원회가 구성되고 3월 12일부터 19일까지 8일간 4만여명이 참여한 총파업투쟁이 일어났다. 미군정 경찰은 "빨갱이 섬"에 대한 초강경 탄압을 자행했다. 이 과정에서 무자비한 고문으로 3명이 죽고 200여명이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무장의 필요성은 절박해졌다. 1948년 4월 3일 새벽 1,500명의 무장대가 11개 경찰관서를 습격함으로써 4·3 항쟁은 시작되었다. 5.10 단독선거 거부투쟁은 제주도 3개 선거구 가운데 북제주군의 2개 선거구가 투표율 미달로 선거 자체가 무효화됨으로써 부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투쟁은 10월 19일 여수·순천 민중항쟁으로 번져갔다. 그러나 군경토벌대의 민간인 대량 살육작전이 전개되면서 사상 유례없는 대학살이 시작되었고 무장대는 고립되어갔다. 항쟁은 피바다와 화염 속에서,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사그라져갔다. '살아남은 자들'은 40년 넘는 세월을 더 큰 고통 속에서 보내야 했다. 87년 민중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이 이 역사를 그나마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주기 전까지…

MBC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20일을 훌쩍 넘어 총선을 앞뒤로 한 공권력과의 전면전으로 치닫고 있다. 방송 4사 노조들의 연대파업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공노대가 해고자 문제를 중심으로 전선을 치고 있고, 한라중공업 노동조합은 삼호조선소에서 한 달 사이에 5명의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하자 책임자 구속을 요구하며 상경투쟁을 벌이고 있다. 아암도 노점상들은 이덕인 열사의 주검을 앞에 놓고 넉달 넘게 투쟁하고 있다. 등록금 부당 인상에 항의하여 시작된 학생들의 교육개혁투쟁은 노수석군의 주검을 부여안고 4월 9∼10일의 동맹휴업투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4·3은 "민중의 미래를 민중의 손으로" 개척해가고자 하는 오늘 우리의 투쟁 속에 여전히 살아 있고, 이 모든 투쟁에서 승리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그것은 4·3이 갖지 못했던 노동자군단이 오늘 우리들의 투쟁의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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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4 07:49 2005/02/14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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