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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7/06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6월에 어울리는 시

-돼지의 변신-

『돼지들에게』中  -최영미 -

 

 

그는 원래 평범한 돼지였다

감방에서 한 이십 년 썩은 뒤에

그는 여우가 되었다

 

그는 워낙 작고 소심한 돼지였는데

어느 화창한 봄날, 감옥을 나온 뒤

사람들이 그를 높이 쳐다보면서

어떻게 그 긴 겨울을 견디었냐고 우러러보면서

하루가 다르게 키가 커졌다

 

그는 자신이 실제보다 돋보이는 각도를 알고

카메라를 들이대면(그 방향으로) 몸을 틀고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무슨 말을 하면 학생들이 좋아할까?

어떻게 청중을 감동시킬까?

박수가 터질 시간을 미리 연구하는

머릿속은 온갖 속된 욕망과 계산들로 복잡하지만

카메라 앞에선 우주의 고뇌를 혼자 짊어진 듯 심각해지는

 

냄새나는 돼지 중의 돼지를

하늘에서 내려온 선비로 모시며

 

언제까지나 사람들은 그를 찬미하고 또 찬미하리라.

앞으로도 이 나라는 그를 닮은 여우들이 차지라는

변치 않을 오래된 역설이  …… 나는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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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김용택-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김용택-

 

이별은 손 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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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회색의 서울 하늘도 푸를 수 있다는 건

서울 안에 숨겨진 희망이 있다는 거다

어둠과 탁함의 일상을 휘돌아 간혹 피어오르는 하늘의 진실은

입가에 머물다 순간 사라지는 미소만큼이나 잔잔한 즐거움이다


서울의 이 짧은 푸르름이 영원하지는 않겠지만

순환과 순환을 거쳐 또 다시 반복되지 않겠는가

물론 아주 짧은 시간이겠지만


이 짧은 미소가 서울 하늘을 자연으로 호명하리니

그 순간만큼 도시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도시의 힘에 밀려 다시 잿빛으로 돌아서는 단절이 거듭되더라도

하늘이 자연이고자 하는 에너지는 이 짧은 순간에서 연원 한다


사람이 사람이고자 하는 에너지는

의학이 정한 사람이라는 개념 밖에 있을지 모른다.

수 많은 찰나의 연속 속에서


수많은 찰나는 느끼지 못할 뿐

사회와 호흡하는 우리 몸속에서,

머리에서 언제나 요동친다


우리 가슴 속에서 살아 숨 쉬다 역류하는

36.5도에서 멈추지 않고

넘쳐 끓어 흐르는

몸 속 실오라기 붉은 줄기 들이

우리를 사람이게 한다.


찰나의 시간 속에

다시 서울 하늘이 잿빛으로 돌아 설 때

사람다운 사람들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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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운동을 찾아야 하는가, 운동에서 삶을 누려야 하는가

 

늦은 밤 이 공간에 있노라면 '삶'이 그리워진다

삶이 무엇인가

 

삶이 무엇인지 알아가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아직도 다 알지 못한다

 

 

다만 나만을 위한 것도, 남들 혹은 사회를 위한 것만도 아닐지니

그것은 밤 하늘 구름 처럼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있어도 알 수 없는 심연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그것일 게다

 

요즘 들어 특히 쾌락이 아닌 삶의 즐거움을 알고 싶어 하는 뒤 늦은 고민은

삶의 고민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역설에 다름 아니다

 

아직도 내가 아닌 남의 삶을 위하여 살아가는가

여전히 나를 끊임없이 멀리하고 있는가

 

당연히 아니려고 하지만, 아니고자 하는 그 한 발을 내 딛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별 것 아닌 한 족장 차이가 '삶'이 아니라 '삶'의 지향을 바꿀 수도 있기에

조심스럽다.

삶을 삶 자체로 추구하지 못하면, 삶에서 운동을 보상받고자 할터이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해오지 않았을까

 

운동을 보상받는 잔인함은 목도하는 것만으로도 처절하다

내 스스로 그 굴러에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면

내 인생의 절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잘나지 못하고 잘 날 수 없음에 자책할지라도

잘 남을 보상 받는 일은 하지 말아야지

이것을 잃지 않고 다시 한번 나의 삶을 찾아가고 싶다

망상일까 사치일까 그도 아니면 우문일까?

 

그러나 보잘 것 없고 초라한 나의 현답은

걸어 온 것 만큼 바라보고, 걸어온 만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운동을 포기 하지 않는 삶의 즐거음을 누릴 수 있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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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정신14호]독재의 망령이 신자유주의로 되살아 날 때! 당신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윤보다인간을-현장정신에 쓴글]

 

독재의 망령이 신자유주의로 되살아 날 때!

당신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87년의 추억을 간직한 선배들께 드리는 글



1. 우리가 찾아야할 것은 87년의 추억이 아니라 ‘역사’

87년 사진 속․영상 속에서 보았던 낯익은 얼굴을 찾는 광고가 나온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기성 정치인들이 아닌 87년의 함성, 87년의 거리, 바로 그 곳에 있었던 사람들을 미디어에서 찾고 있다. 이 추억과 역사라는 이름으로 전개되는 혼란 속에서 87년 20주년을 다시 생각해 본다.

참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사실 많은 것이 변했다. 그 때문일까! 여러 인터뷰나 글에서 사람들은 20년 전 그날의 격정과 고뇌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오늘의 이야기는 찾기 어렵다. 세상을 이만큼이나 바꿨다는 그들의 감동이, 자꾸 멀게만 느껴지는 건 내가 87년 그 거리에 있지 않아서일까!


일반적으로 달은 밤에, 해는 낮에 볼 수 있다. 그래서 해가 져야 달이 뜬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둘이 서로 다른 운동주기를 가지고 있고 햇빛에 가려 낮에 달을 잘 볼 수 없을 뿐이다. 해와 달이 그렇듯이 독재의 시대는 가고 민주주의의 시대가 왔는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사회의 모습은 온전한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2. 아직 살아 숨 쉬고 있는 87년 세대에게 고함!

87년 투쟁의 직선제 쟁취와 노동자 대투쟁을 통한 노동운동의 비약적인 질적․양적 성장은 이후 우리 사회가 한 발 전진하는데 훌륭한 밑거름이 된 것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87년 이후의 역사도 그리 순탄하게만 달려 온 것도 아니다. 91년 열사투쟁, 97-98년 총파업투쟁과 IMF, 2003년 열사투쟁 그리고 현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각한 양극화 현상, 비정규직들의 투쟁은 치열한 생존의 역사이자, 투쟁의 역사다.


하지만 숨 가쁘게 달려 온 열정의 20년 뒤에는 87년 투쟁을 추억으로 바라보는 세력이 존재해 왔다. 그들은 ‘추억/을 밑천으로 정당으로 국회로 달려갔다. 그리고 점점 그들은 오만해지고 있다.

처음에는 자신들을 믿어달라고 했다. 혹은 남아 있는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제도 정치 안에서도 한국사회를 진보시키기 위한 나름대로의 역할이 그 곳에 있다고 말했던가! 이제 시간이 지나자 오히려 자신이 정당하다고 말한다. 민주화운동과 진보는 시효가 만료되었다고, 노동자들이 기득권자가 되어 양보할 줄 모른다고, 온갖 파렴치한 언사를 쏟아 붇고 있다.


87년의 사람들 또한 이제 자신이 할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지 새로운 독재의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말을 한다면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형식적 민주주의’를 쟁취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해가 뜨기 전에 떠 있는 달을 볼 수 없고, 태양이 항상 그 자리에 있어도 밤에는 볼 수 없듯이 세상이 돌아가는 하나의 ‘과학적 법칙’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고 있다. 바로 ‘계급에 의한 계급에 대한 착취’다.


 그리고 착취의 모습은 87년의 선도적이고 양심적인 열정적인 시민들이 민주화에 만족할 때, 당신들이 군부독재를 몰아냈다고 환호하며 자신의 생활 속으로 돌아가서 안주하고 있을 때,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독재로 태어났다. 신자유주의 독재는 더 세련되고 더 교활하고, 더 악랄하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민주주의를 갈망하고, 민주주의를 배고픔과 착취를 분쇄하는 원칙으로 사고했다. 그러나 87년 민주화세대가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시대, 87년 이후의 민주화 체제에서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 이외에 민주주의를 사고하는 것조차 사치일 정도로,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다.


오늘 노동자 민중들의 삶의 질을 결정하고 파탄 내는 비정규직법안이나 FTA 문제가 일방적으로 결정되고, 전쟁기지 확장을 위해 주민을 내 모는 행위가 무차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독재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노동자 민중이 신자유주의의 반 민주성에 대해서 사고하지도, 행동하지도 못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독재가 지배하고 있는 87년 민주화체제다.


3. 당신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꿈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슬픈 자화상이다. 87년을 거리에서 보냈고, 청춘을 바치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던 선배 그리고 동지들의 행진곡은 더 이상 메아리치지 못하고 슬픈 노래로 마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은 민주화 이후의 비 착취 대안사회를 구상하지 못했고, 민주화체제 이후의 착취체제로서의 자유주의를 분석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화 체제 이후에도 착취체제는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 민주화체제 이전․이후에도 커다란 틀에서 자유주의 체제가 지배해왔고, 87년 이후에는 신자유주의 독재가 민주화의 간판을 달고 착취를 정당화 하고 있다.


여전히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여성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쓰다버리는 소모품 취급을 받고 있다. 여전히 돈이 없으면 치료받지 못하는 사회, 배우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아직도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노동조합을 만들지 못하는 사회, 농어민 자녀가 서울대에 들어가는 비율이 3%인 사회, 신분이 대 물림되는 사회가 87년 민주화체제 이후 (신)자유주의 착취체제가 지배하는 사회다.


그렇다면 87년 세대와 87년 세대의 후광을 입고 오늘을 사는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에 만족하고 있는가? 무엇을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는가? 왜 우리는 다시 분노할 수 없는가? 87년 세대여! 당신들은 너무 늙어 버렸는가? 87년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방송에 출현하며, 신문에 칼럼을 쓰며 87년을 회고할 정도로 오늘의 현실에 만족하는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면, 아직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그 무엇이 있다면 다시 사회변혁운동의 전선에 나서야 한다. 당신들이 있어야 할 곳은 방송국도 아니고 신문사 기자와 인터뷰하는 자리도 아니다. 어느 정당, 386 정치인의 후원행사 자리는 더욱 아니리라!


87년 20주년 그 첫 포문을 열었던 6월 항쟁이 다가온다. 당신이 진정한 87년 세대라면 더 이상 만족하지 마라! 다시 분노해야 하며 다시 거리로 나와야 한다. 그것이 당신들의 역사적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당신들의 이마에 주름살이 늘었어도, 87년을 거리에서 보낸 당신들의 심장에 새긴 “분노와 희망”이라는 시계는 예전 그대로 이지 않은가? 87년 당신들의 피와 땀을 먹고 성장한 한국사회가, 민중들의 피와 땀을 가로 첸 어제의 386세대 오늘의 신자유주의자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현실을 인정할 텐가?


이제 87년과 같지만 다르게, 다시 당신이 나서야 한다. 노동현장에서, 비정규직 문제에서, 계급투쟁에서 그리고 여성문제에서, 환경과 생태, 인종주의 문제에서, 반전평화운동에서 전 사회적인 변혁운동을 신자유주의 독재체제에 맞서 싸우는 사회운동항쟁을 펼쳐야 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군사독재에 맞서서 새로운 신자유주의 독재에 맞서 싸우는 또 다른 양식의 싸움을 만들어야 한다. 이제 적을 타도하는 투쟁에서 착취 이데올로기를 분쇄하는 투쟁에서, 성찰하는 투쟁, 비착취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주체의 노력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만 신자유주의라는 또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난 독재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꿈꾸는 자에게는 추억이면 족하다. 그러나 미래를 원한다면 행동하자!


왜 그래야만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싸파티스타의 구호 “모두에게 모든 것을! 우리에겐 아무것도!”로 대신할 수 있으리라. 아직 아무것도 달라 진 것 없는 이 시대에 바로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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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이 허광평에게]보내는 글을 읽으며

[노신이 허광평에게 ]

인생이라는 장도에는 큰 난관이 두 개있다. 갈림길과 막다른 궁지가 그것이다.

갈림길에서는 묵자선생도 통곡하고 돌아갔다고 하지만, 나는 울지도 돌아가지도 않고 우선 갈림길 앞에 앉아 쉬거나 한숨자고 괜찮을 만한 길을 택해 계속 걸어갈 것이다.

가다 정직한 사람을 만나면 음식물을 달라해서 허기를 달래되, 길을 묻지는 않으련다. 내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그 길을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호랑이라도 만난다면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 놈이 배고픔을 참다 못해 제 갈 길을 가면 그 때 내려올 것이고, 끝내 가지 않는다면 나무 위에서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혁대로 몸을 꽁꽁묶어두고 시체마저도 놈에게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무가 없다면 놈에게 잡아먹히긴 먹히되, 놈을 한 입 물어 뜯어도 무방할 것이다.

다음으로 완적선생도 대성통곡하고 돌아갔다는 막다른 궁지에서는 다른 길에서처럼 성큼 걸어갈 것이고, 가시밭길이 가로막는다해도 여전히 걸어갈 것이다.
다만 온통 가시밭뿐이어서 결코 갈 수 없는 길은 분명 한 번도 맞닥뜨려 본 적이 없다. 그러고보면 세상에 본래 막다른 궁지란 것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다행히도 아직 그런 지경에 데이지 않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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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이 제자이자 부인이었던 허광평에게 썼다는 글이다.

선택과 궁지는 어느 시대 어느 누구에게나 닥치는 문제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개인이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 진실이 혼란 스럽고 과학이 승리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착취와 계급투쟁이라는 역사과학이 인정 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노신의 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고민해보면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갈림길과 막다른 궁지를 "치명적 실수, 비과학적 오류"라는 문제는 제외하고 글이 전하는 감동을 느끼고자 한다면 새로운 시대를 '우리' 스스로 건설해 가는 주체의 정치, 구성의 정치를 고민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이 중요 한 것이 아니고 그 길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그 길에 놓는 발걸음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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