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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직 줄줄이 무죄 ‘직권남용’ 법원 판결의 함정

고위직 줄줄이 무죄 ‘직권남용’ 법원 판결의 함정

강석영 기자 getout@vop.co.kr
발행 2018-10-08 20:07:16
수정 2018-10-08 20:3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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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법원청사 모습
서울 서초구 법원청사 모습ⓒ사진 = 뉴시스
 

지난 5일 이명박 전 대통령, 김기춘 전 비서실장 등 청와대 고위공직자 9명이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국정농단뿐 아니라 사법농단 관련자들 역시 ‘직권남용’을 주요 혐의로 받는 만큼 적폐청산에 있어 법원의 직권남용 해석이 중요해질 것으로 예측된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판사 정계선)는 이날 이 전 대통령을 다스 실소유주로 인정해 15년을 선고하면서도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이하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선 무죄로 판단했다.

검찰은 대통령 재직 시절 다스의 미국 소송 지원과 자신의 차명재산 상속세 절감 방안 검토에 공무원들을 동원했다는 이유로 이 전 대통령에게 직권남용 혐의가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검찰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직권남용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같은 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부장 최병철) 역시 김 전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 9명이 친정부 성격의 보수단체를 지원하는 등 이른바 화이트리스트 사건에 가담한 사실은 인정했으나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월권’이 아니라 ‘남용’일 때 직권남용 유죄  

두 재판부의 논리는 같다. 이들의 범죄 행위가 직무 권한을 ‘남용’한 것이 아니라 ‘월권’ 행위기 때문에 직권남용 혐의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원은 ‘직권남용’을 “공무원이 자신의 일반적인 권한에 속하는 사항에 관해 권한을 불법하게 행사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일반적 권한에 속하지 않는 행위를 하는 경우”인 ‘지위를 이용한 불법행위’와 구별했다.  

다시 말해 ‘직권남용’과 ‘지위를 이용한 불법행위’는 해당 행위가 공무원의 일반적인 직무 권한 범위 내에 해당하는지에 따라 갈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검사가 자신의 본래 업무인 수사·기소·공소 유지 등과 관련해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면 ‘직권남용’에 해당한다. 하지만 인사 청탁 등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권한 범위 밖의 일을 했다면 이는 ‘월권’, 즉 ‘지위를 이용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

이를 앞선 재판에 적용해본다면 법원은 이 전 대통령과 김 전 실장 등이 대통령, 비서실장 등의 직권 범위를 넘는 ‘월권’ 행사를 통해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고 판단한 것이다.

우리 형법은 권력자가 형벌을 남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매우 구체적인 행위에 대해서만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형법 123조가 규정하는 직권남용죄가 공무원의 일반적 직무 권한을 남용한 경우만을 처벌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공무원의 일반적 직권을 넘는 ‘월권’ 행위는 개인들에게 의무 없는 일을 시켰다면 ‘강요죄’, 돈을 갈취했다면 ‘공갈죄’ 등으로 처벌될 수 있다.  

대통령의 ‘직권’은 어디까지일까  

그렇다면 검찰이 이들에게 강요죄 등과 함께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한 이유는 뭘까? 법원과 검찰의 ‘직권’에 대한 해석차이다.  

법원은 직권을 일반적 직무 권한으로 좁게 해석했다. 반면 검찰은 직권남용으로 기소된 이들이 대통령과 청와대 고위공직자들이라는 점에 주목해 직권을 넓게 해석했다. 고위 공직자들은 직무 권한의 범위가 넓고 특히 대통령은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직권’에 대한 넓은 해석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블랙리스트 사건 항소심에서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기도 했다. 서울고법 형사4부(부장판사 김문석)는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사상·표현·예술의 자유 등을 근간으로 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헌법 수호를 위해 국민에게 부여받은 대통령의 권한이 오히려 헌법 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데 사용됐다”고 밝혔다.  

법원이 직권을 좁게 해석하는 것에 대해 ‘제 식구 감싸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나온다. 검찰이 사법농단 사건 관련 법관들을 주요 혐의로 직권남용을 적용할 것을 예고한 가운데, 최근 법원의 해석대로라면 ‘재판 개입’은 부적절하나 법관의 직무 권한을 벗어났다는 이유로 직권남용 혐의에 무죄가 선고될 수 있는 것이다.  

판사 출신 박판규 변호사는 ‘재판 개입’이 법원행정처의 직무권한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평소 법원행정처가 국정감사나 정책 수립을 위한 현황조사를 하면서 재판 정보를 수집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법원행정처가 이 같은 직무를 수행하다 권한을 남용해 재판에 개입했다는 것이다.

박 변호사는 판사 뒷조사나 개별 사건의 검토행위가 처음 드러났을 때 “(법원행정처가) 통상적인 업무일 뿐 위법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 해명은 이런 업무들이 행정처의 일반적인 직무권한 내에서 이뤄졌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직권남용 혐의 무죄 판결이 검찰의 불성실한 수사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김남근 민주사회를위한 변호사모임 부회장은 “강요죄·공갈죄 등은 직무유기보다 처벌이 세다. 그런데 해당 혐의들이 적용되려면 ‘협박’ 사실을 증명해야 해서 수사가 힘들다”고 설명했다. 수사 과정에서 협박 사실 증명이 어려워 검찰이 직권남용이라는 쉬운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공무원의 ‘월권’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법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민의 법의식에 따라 (공무원의 ‘월권’ 행위에 대한) 새로운 구속 요건을 만들어 처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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