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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피해자 ‘헌쇠’ 박중기 선생

 

인혁당 핵심 피해자도 “강령 모른다”
인혁당 피해자 ‘헌쇠’ 박중기 선생
 
 
2012년 09월 14일 (금) 19:02:36 김치관 기자 ckkim@tongilnews.com
 
   
▲ 인혁당 사건 핵심 피해자인 '헌쇠' 박중기 선생과 12일 여의도 한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극심한 고문으로 양쪽 고막이 다 터져버린 사람도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는 박중기 선생. [사진 - 민족21 백운종 기자]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의 인혁당 관련 발언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 12일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인혁당 관계자들과 유가족들이 규탄 기자회견을 가졌다. 영정을 든 부인들의 뒷줄에 조용히 서 있던 한 노신사의 표정도 한없이 어두웠다.

‘헌쇠’ 박중기(78) 선생.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7명의 수형자 중 한 명이었고, 2차 인혁당 사건(인혁당 재건위 사건) 당시 혈육 같았던 동지들을 떠나보내고 천행으로 목숨을 건진 뒤 유족들과 함께 긴 침묵의 세월을 견뎌온 4.9통일평화재단 이사이다. 헌쇠는 고 이돈명 변호사가 고철 사업을 하던 시절 붙여준 선생이 아끼는 호다.

지난해 ‘4.9통일열사 36주기 추모제’ 이후 <통일뉴스>와 첫 인터뷰를 가졌던 선생은 박근혜 후보의 인혁당 관련 발언에 우려를 표하며 이날 새누리당 당사 앞 기자회견에 앞서 여의도에서 두 번째 인터뷰에 응했다. [첫 번째 인터뷰 보기]

무엇보다 박근혜 후보가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 여러 증언을 하고 있다”고 말한 대목에 대해 그는 “그것은 아마 4.19세대 후기에 들어온 박범진일 것”이라며 “강령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며 당시 정황을 설명했다.

그는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검거된 사람이 41명이고 참고인 조사도 여러 명이 받았지만 강령이나 선서와 관련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 때는 무자비한 때이니까 별별 짓을 다해서 무슨 건덕지라도 찾으려고 했을 텐데, 그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견디다 못해 자결한 사람도 있고 완전히 늑골이 나가고 양쪽 고막이 다 터져버린 사람도 있고, 자결하려고 자해행위한 사람도 있고 별별 사람이 많다.

그럼 거기서 무슨 정강.정책이든 비슷한 말이라도 하나 나왔어야 되는데 그 많은 사람 중에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 사람만 유일하게 선서를 했다, 뭐 정강정책이 있었다 하는데 나는 모를 일이다.

그 사람이 무엇인가 착각을 했든지 자기네들 서클 안에 있던 무슨 일들을 다르게 해석한 건지 아니면 들은 이야기를 침소봉대했든지 그런 거지, 그렇지 않고서는 그럴 수가 없지 않느냐.

또 하나, 검찰 취조를 할 때 20일간을 꼬박 밤샘을 하다시피 했는데도 검사가 하나도 그런 비슷한 근거를 못 찾아내니까 기소를 못 하겠다 했고 사표까지 내던졌다. 2중, 3중 걸렀는데도 그렇게 나왔다는 것은 그 사람이 과장됐다는 거다.”


그는 “41명 중 최종적으로 형을 산 것은 도예종 선생을 비롯해 7명이었다”며 “강령을 모른다. 판사도 이 사람이 무게가 있다 싶어 41명 중에서 실형을 줄 만큼 그때 중심핵에 속했던 나도 모르는데 알 사람이 별로 없다”고 확인했다.

1차 인혁당 사건 핵심 관계자의 입을 통해 당시 인혁당에 강령이나 조직가입 선서가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 4.9통일평화재단 등이 12일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개최한 규탄 기자회견 모습. 박중기 선생도 참가했다. 뒷줄 왼쪽 노란 중절모. [사진 - 민족21 백운종 기자]
그는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중정)에 의해 어떻게 엮여졌는지, 특히 2차 인혁당(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계자들이 왜 사형에까지 처해지게 됐는지를 당시의 시대 상황과 혁신계 진영의 흐름을 통해 상세히 설명했다.

4.19혁명으로 분출한 민주화의 열망을 짓밟고 들어선 5.16쿠데타 세력은 당시 꿈틀거리던 혁신계를 짓밟았고, 중정은 그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이던 이들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엮어 기소했지만 검찰이 사표를 내며 무죄를 주장할 정도로 유죄를 입증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중정의 고문사실이 폭로돼 국회 진상조사단이 감옥으로 그를 찾아오는 등 사회 문제화 됐고, 톡톡히 낭패를 본 중정은 벼르고 있다 2차 인혁당 사건을 조작해 이들을 사형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2차 때도 조직을 만들거나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구체적으로 조직이 없다. 2차도 1차와 같다”며 “무모하게 누가 그래 조직 만들어 이름 붙이고 강령 만들어 알리겠느냐. 그건 합법적일 때 하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보복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혁당이라는 조직이나 강령은 없었지만 4.19 공간에서 확인됐던 핵심 활동가들이 5.16 군사쿠데타로 구속되고 피신했지만 6.3사태 등을 계기로 연계망이 형성돼 활동했다는 증언도 덧붙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니까 선거 때 좀 자유스럽게 왕래하면서 A는 B를 알게 되고 B는 C있는 곳을 알게 되고 C는 A하고 다시 연결되고, 그렇게 하다 보니 4.19 공간에 알았던 사람들이 다 거점을 알아서 서로 소통이 됐다. 모이면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뭣이고 이렇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냐면, ‘지금 정당규제가 풀리고 나면 우리는 정당을 했을 때 어떤 노선을 해야 하냐’ 이런 이야기를 한 거다. 앞으로 나아갈 길, 민족이 살아가야 될 노선 이야기를 한 것이다.”


언론과의 인터뷰도 피한 채 동지들의 남겨진 가족들을 챙기며 침묵의 바다를 건너온 그는 2002년에야 비로소 열사들의 ‘제사장’이 되어 ‘민족민주열시.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의장으로 첫 공식활동을 시작했고, 2008년 무죄 판결과 국가 배상을 받은 유가족들의 출연금으로 설립된 4.9통일평화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그는 “죽 한 그릇 있으면 그것도 같이 나눠먹는 것이 도움이지, 내가 돈 벌어서 같이 산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며 “그걸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서... 애들이 헐벗고 그러는데 옳게 도와주지도 못했다”고 눈시울을 붉히고 “옳게 도와주기나 했으면 모르지만 그 양반들이 작은 걸 가지고 자꾸 고마워라 하면서 그걸 이야기하고 다닌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못했다”고 오히려 미안해했다.

3차례 체포돼 고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실신했다는 그는 당시 중앙정보부가 보복성 매타작으로 “사람을 못 쓰게 만들었다”면서도 “나도 거기에 끼어들어 갈런지 모르겠다. 나는 내 이야기 못하겠고”라고 시종 자신을 낮췄다.

그러면서도 박근혜 후보가 인혁당 사건에 대해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는 류의 발언을 한데 대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내가 화가 나는 이유는 공주같이 자라 가지고 세상일은 모르고 아버지 하는 것은 모조리 옳은 것으로 알고만 살았는데 그래도 따르는 무리들이 있다는 것”이라고 격분했다.

그는 “이번에 답한 것은 박근혜라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노출한 것이다. 얼마나 무식한지를. 이런 사람을 대통령 된다고 해서 뒤에서 미는 사람들 모두 같은 사람 아니겠나, 나는 그렇게 본다. 참 불쌍한 사람들이고, 우리 백성들 잘못하며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우려를 표했다.

지난해에 이어 헌쇠 박중기 선생과의 두 번째 인터뷰는 12일 낮 여의도 한 사무실에서 진행됐으며, 인터뷰 내용 중 당시 시대상황 설명 일부를 제외하고 가급적 모든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중심핵에 속했던 나도 모르는데 알 사람이 별로 없다”

   
▲ 지난해 4월 첫 인터뷰에 이어 두 번째로 <통일뉴스>와 인터뷰에 응한 박중기 선생. [사진 - 민족21 백운종 기자]
□ 인혁당 사건이 정치권에서 쟁점으로 떠올랐다. 어제 박근혜 후보가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 여러 증언을 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언론에서는 대체로 박범진 전 의원의 증언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그것은 아마 4.19세대 후기에 들어온 박범진일 것이다. 서울대 문리대 안에 4.19전부터 학생들끼리 청조회라든지 여러 서클 비슷한 게 존재했는데, 그 인맥을 타고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오병철, 서정복, 황건 이런 선배들과 접한 게 있었던 걸로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나도 안다. 깊은 속내는 모르고 그저 성실한 사람이고 또 나중에 조선일보에 있고 민정당으로 가서 국회의원을 한 것으로 안다. 서울신문에 가서 논설위원을 맡았다가 민자당에 가서 지역구 출마해서 당선되고 그러면서 차츰 사람이 변한 것 같다.

□ 박범진 전 의원이 1차 인혁당에 강령과 규약이 있고 자신은 입당선서도 했다고 주장했다.

■ 자기네들끼리 작위적으로 한 지는 모르겠는데 강령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걸 증명할 수 있는 게 처음에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검거된 사람이 41명이다. 그런데 41명 뿐 아니고 거기에 관계되는 여러 사람들을 참고인으로 불렀다.

그 때는 무자비한 때이니까 별별 짓을 다해서 무슨 건덕지라도 찾으려고 했을 텐데, 그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견디다 못해 자결한 사람도 있고 완전히 늑골이 나가고 양쪽 고막이 다 터져버린 사람도 있고, 자결하려고 자해행위한 사람도 있고 별별 사람이 많다.

그럼 거기서 무슨 정강.정책이든 비슷한 말이라도 하나 나왔어야 되는데 그 많은 사람 중에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 사람만 유일하게 선서를 했다, 뭐 정강정책이 있었다 하는데 나는 모를 일이다.

그 사람이 무엇인가 착각을 했든지 자기네들 서클 안에 있던 무슨 일들을 다르게 해석한 건지 아니면 들은 이야기를 침소봉대했든지 그런 거지, 그렇지 않고서는 그럴 수가 없지 않느냐.

또 하나, 검찰 취조를 할 때 20일간을 꼬박 밤샘을 하다시피 했는데도 검사가 하나도 그런 비슷한 근거를 못 찾아내니까 기소를 못 하겠다 했고 사표까지 내던졌다. 2중, 3중 걸렀는데도 그렇게 나왔다는 것은 그 사람이 과장됐다는 거다.

□ 64년 1차 인혁당 사건 때 연루 됐나? 41명 중 한 명이었나?

■ 그렇다. 나는 들어가서 형을 1년 살았다. 다 나가고 최종 기소된 사람이 13명인데 11명이 무죄를 선고받고 나왔고 그때 나도 나왔다. 그리고 고법에 항소한 게 뒤집어져서 유죄가 돼 법정구속이 돼서 7명이 형을 살고 나머지 6명은 집행유예로 나왔다. 41명 중 최종적으로 형을 산 것은 도예종 선생을 비롯해 7명이었다.

□ 그러면 7명 중의 한 명이었던 선생은 강령을 보거나 입당선서를 한 적이 없었나?

■ 강령을 모른다. 판사도 이 사람이 무게가 있다 싶어 41명 중에서 실형을 줄 만큼 그때 중심핵에 속했던 나도 모르는데 알 사람이 별로 없다.

□ 선생님도 고문을 많이 당했나?

■ 그때는 6.3 때니까 계엄령 상황이어서 살벌할 때다. 그리고 군사정권이 옷만 바꿔입고 들어섰으니 수사기관의 무자비함은 말할 수가 없다. 중앙정보부에 갔다면 죽은지 산지 잘 모를 때고 무법천지일 때다. 그 시절에 우리가 잡혀들어 갔으니. 대형사건이다. 도예종 선생이 내가 자취하던 방에 와서 한 일주일 묵기도 했다.

그때는 (생명이) 갔다왔다 했다. 졸도도 하고, 뭐. 나는 세 차례 갔는데 두 번은 졸도를 몇 차례씩 했다. 그걸 당한 사람들은 대개 옳지(온전치) 않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 2차 인혁당 사건은 8명이 사형까지 당했는데 과연 2차 인혁당 사건의 실체가 있느냐? 사실 이번 두 번째 인터뷰도 이 문제에 대해 듣고 싶어서이다.

■ 그전에 1차 대담할 때도 약간 비쳤는데, 우리가 기준을 두는 것은, 가치를 두는 것은 4.19였다. 이미 분단사회가 돼서 60년대니까 15년 후 아닌가. 군정 3년을 제하고 난 뒤에 대한민국 분단정권을 세운 게 이승만이다.

그간에 6.25 치르고 하면서 10여년 집권했는데 나라가 나라가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게 지상에서 가장 질 나쁜 나라, 하등한 나라로 사람이 사는지 야만이 사는지 모를 정도였다.

4.19가 나서 민족 자존심을 찾은 거다. 그런데 그 중심이 학생이지 그걸 이끌 정당은 9개월 전에 조봉암이 죽고 진보당은 깨져버렸으니 혁신계의 구심점이 없었다. 그래서 중심이 되는 게 혈기왕성한 청년단체다.

어른들을 모시고 밤낮없이 뛰었다. 4.19가 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남쪽을 재건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고 정신이라 생각하고 우리는 혼신을 다했다.

그런데 5.16 쿠데타가 나자 모두 에누리 없이 단속을 해버렸다. 우리만 외톨이 되고 고립됐다. 하나 없이 다 잡혀 들어갔다. 나 같은 사람은 도망갔다. 당시 우리가 합법적으로 했는데 무슨 죄가 있느냐? 그래도 그걸 모두 10년, 15년, 20년, 사형 뭐 이래서 다 가뒀다.

“형, 오늘 우리 사형 받았어”

   
▲ 그는 역사의 한 복판에 서 있었지만 동지들의 죽음 뒤 침묵을 지켜왔다. [사진 - 민족21 백운종 기자]
□ 2차 인혁당 사건 때도 핵심으로 찍혔나?

■ 내가 그때 주변에 장훈고등학교에선가 선생하고 있던 이재오니 이런 젊은이들이 좋다고 찾아오고 나도 간혹 그들 집에 갈 때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감시를 받고 있는 차인데 너무 분다하게 나한테 오는 게 좋지 않아서 수원에 있는 김정태라고 서울대 농대를 다니다가 4.19때 들어가서 감옥 살고 나온 사람인데, 이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다른 짓을 하다가 들통이 난거다. 경찰을 치고 도망가다가 김정태가 권총에 발목을 맞았다. 발포를 할 정도니까 사건이 커진 거다. 잡혔는데 캐물으니까 나도 관계가 있고, 나는 이미 전과가 있는 사람이 돼 놓으니 내가 무슨 지휘자로 되어 있었다. 저쪽에서 그렇게 오해한 거다.

여러 날 감시하다가 날 끌어간 것 같다. 남산 치안본부 대공분실, 지금은 치안본부지만 그때는 치안국이다. 대공분실에 끌고 갔는데 느닷없이 사람을 하체를 못 쓰게 만들어 버리는 거다.

내가 못 서니까 자기네들이 업고 다니면서 화장실도 다니고 나중에는 옷을 가지고 와 바지가 벗어지지 않으니 가위로 잘라내서 벗기고 집에서 가져온 풍덩한 바지를 입고. 내가 뭐 일하러 다니던 것도 중도파직 돼 버렸고.

9월 하순인지 10월 초순인지 끌려갔는데 경찰에서 20일 가까이 있다가 검찰로 넘어갔는데 그 때 이한동이가 공안부장을 했다. 나중에 민정당 원내총무도 했던. 그래 가지고 6개월 꼭 채우고 집행유예로 나온 거다. 그때는 걸려 들어가면 조사 끝났다고 내주지 않고 어쨌든 1심 6개월을 채우고 나서 내주니까.

6개월 만에 나온 게 4월 19일 저녁이었다. 아침에 김용원 선생, 이수병 선생 들어가고 나는 저녁에 나오고 그랬던 거다. 그 사람들을 2차 인혁당이라고 하는데, 그때는 발표를 그렇게 안했고 민청학련이라고 했다.

당시는 수감자가 원체 많으니까 내방에도 독방인데 임시로 도둑놈, 잡범을 집어넣었다. 학생들은 따로 넣고. 그래서 바깥 소식이 자꾸 들어오는 거다. 학생들이 오늘은 몇 명이 나가고 뭐 어쩌고, 백기완 들어오고 장준하도 들어왔다고. 나중에 들으니까 지학순 주교도 들어온다 하고.

내가 나와 가지고 아흐레인가 열흘이 채 못 되는 시간에 2차 인혁당 사건으로 다시 잡혀들어 갔다.

잡혀 들어가서 1차 조사를 받는데 너무 심하게 해가지고 내가 거기서 졸도를 해서 앰블란스가 오고 난리를 쳤다. 그런 사고까지 안에서 있었는데, 나중에 감이 오는 게 처음에 조서를 받은 것은 완전히 무시되고 새로 하는 거다.

불려 다니다 보니 이상하더라. 전혀 조서 꾸미는 것도 조서도 아니고, 수사관들끼리 하는 얘기가 “이놈들 내줘서는 안 된다. 이번에는 완전히 그걸 해야 한다”, “이번에는 느그 나갈 생각 하지 말라” 이런 식이다.

뭐, 죄가 없는데 저희가 해봐야 뭘 하겠나 싶어서 그랬는데. 나중에는 부르지도 않고 놔두다가 두 달 조금 넘어서인가 어느 날 저녁에 저녁 먹고 짐 챙겨 나오라고. 나오니까 남산으로 데려갔다.

다른 사람 조서 꾸민 걸 보여주면서 “왜 너는 안했다고 하느냐?”, 난 “말이 안 되지 않나. 나는 여기 들어앉아 있었는데 어떻게 12월에 지도부 회의를 하느냐”하고. 6개월 감옥에 있어서 공백이 있으니 이제 안 맞는 거다. 그래서 나중에 어긋나겠다 싶으니까 빠진 것 같다. 그게 전부다.

어떻든, 하루는 기다리고 있는데 구형받고 들어오더라고. 김종대 선생이 “형, 오늘 우리 사형 받았어”, 장난삼아 하는 거다. 복도를 지나가면서. 아무리 계엄령이고 협박이지만 사형이라는 게 말이 끔찍하잖나.

복도에서 서로 아는 체 하고 통방을 못하게 돼 있으니까. 건성으로 “야, 걱정하지 마라”, 그랬거든. “그래 못한다. 어떻게 사람들을 마음대로 그래 하냐”. 그리고 모두 방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그리고 구형을 받고 며칠 후에 우리는 나왔다.

“학교 다닐 때 담임까지 수사를 다 했으니까”

   
▲ 숱한 고문과 동지들의 죽음을 겪어온 박중기 선생. [사진 - 민족21 백운종 기자]
□ 2차 인혁 관계자들을 잘 아실텐데, 그 분들이 조직사건으로 엮일만한 게 있었나?

■ 63년에 박정희가 정권을 쥐고 들어와서 군인들이 옷 벗고 들어오니 나라살림에는 등한할 거 아니겠나, 잘 모르니까. 힘을 가지고 관료들만 두드려 조지는 거다. 중앙정보부라는 절대권력이 나는 새도 부를 정도로 힘이 쎘으니까.

한일회담 문제가 나오자 그해 가을 방학 전에 기동을 하다가 3월달 개학되자 문제의 시작이 김종필이가 오히라 메모를 써가지고 구체화됐다. 64년에 학교는 개학하면서 계속 농성만 하니까 문이 닫혔다.

그때 김중태, 김도현, 현승일이라는 학생 3인방이 있었다. 3개 신문 톱에 맨날 이 세 사람이 오늘 서울광장에서 무슨 연설했다 그거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니까 선거 때 좀 자유스럽게 왕래하면서 A는 B를 알게 되고 B는 C있는 곳을 알게 되고 C는 A하고 다시 연결되고, 그렇게 하다 보니 4.19 공간에 알았던 사람들이 다 거점을 알아서 서로 소통이 됐다. 모이면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뭣이고 이렇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냐면, ‘지금 정당규제가 풀리고 나면 우리는 정당을 했을 때 어떤 노선을 해야 하냐’ 이런 이야기를 한 거다. 앞으로 나아갈 길, 민족이 살아가야 될 노선 이야기를 한 것이다.

거기에 가령 내가 남정현이란 사람을 안다면 남정현은 고향 후배가 있을 것이고 서울대학교 친구도 있을 거고, 또 문인이니까 문인세계에 가서 자기 평소에 친한 사람한테는 이야기를 하니까 자꾸 퍼져가지고 동의를 받는 거다.

그러던 중 도예종 선생이 5.16때 지명수배가 내리는데 집에서 잡히지 않고 서울에 와서 기피를 하고 있었는데, 학생 민통련 속에 조금은 티나게 한다고 하는 김정강의 불꽃회에 김정남이 있다.

김정남이 몇몇과 핵심이 되서 학습도 하고 이랬던가 본데, 처음에 잡으러 갔을 때 도망을 갔는데 하숙집에 가 뒤져보니까 일기책이 압수된 걸 읽어보니까 도예종 이름이 나온 거다.

‘존경하는 선생님은 이럴 때 어떻게 판단하실까?’, 이런 게 나왔다. 그래서 도예종이 지시했다고 5백만원인가를 걸고 지명수배했다. 김정강이 하고 둘을.

그런데 근처에 있을 것 같은데 수사관들이 감이 있지 않나. ‘아, 이게 옛날 서류 압수한 민민청(민족민주청년동맹), 통민청(통일민주청년동맹) 이놈들이 박혀있는 것 보니 이 계통 수사해야 한다’. 그래서 뒤진 거다. 뒤지다가 인맥을 찾아서 모조리 찾아 걸린 게 중심인물 41명이다.

나머지는 얼만지 모른다. 친척 뭐 해가지고 다 뒤져내는 거다. 학교 다닐 때 담임까지 수사를 다 했으니까. 부지기수다. 그렇게 잡히고 한 게 1차 인혁당이다.

구성을 해보니 긴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여러 사람이 가면 개성이 다르니까 약한 사람은 뺨도 한 대 안 때려도 미리 겁을 내 다 불어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친구 잘못 불다가는 망신시키니까 그런 피해 안 입히려고 고문을 더 받아야 되고. 안다고 해서 공무원 하는 친구들은 옷 벗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또 똑같이 고문을 받는데도 인간적으로 미운 사람이 있지 않겠나? 그 사람은 반쯤 죽이는 수도 있고. 병신 되기도 하고. 그랬던 게 1차 인혁당 모습이다.

자기네들 하자는 대로 “누구는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아니다” 그러면 두드려 맞으니까, “그렇다 하소”. 어떤 사람은 아무리 두드려 패도 고집을 피우고 안하니까 저희들 맘대로 하고 도장 찍으라고 하니, “내가 왜 거기 도장 찍어” 하면서 조서 몇 시간 꾸민 걸 확 쥐어 뜯어내버린 사람도 있었다.

그런 별별 사람이 있었는데, 그래서 1차 인혁당도 사형은 안 시켰지만 희생도 많았고 평생을 지병을 가지고 병신된 사람도 있다.

□ 대표적으로 사망하거나 큰 지병을 얻은 사람은 누가 있나?

■ 송상진 선생도 옳지 않았고, 서도원 선생은 그 후에도 세 차롄가 들락날락했으니 저 사람은 분명 자기네들한테 거슬리는 사람인데 구체적으로 증거가 없으니까 “온 김에 혼이나 나라” 일종의 보복 매타작을 해서 보내는 거다. 사람을 못 쓰게 만드는 거다. 나도 거기에 끼어들어 갈런지 모르겠다. 나는 내 이야기 못하겠고.

돌아가신 강무갑 선생은 양쪽 고막이 다 터져버리고 늑골이 나가 가지고 병원에 입원도 안 시켜주고 그 안에서 자연치유 돼 가지고 나와서 그 뒤로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

“인혁당은 ‘저거 죽여야 된다’ 생각했겠지”

   
▲ 새누리당 규탄 기자회견을 마치고 이수병 선생의 부인 이정숙 여사를 위로하고 있는 박중기 선생. [사진 - 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1차 인혁이 그렇다면, 2차 인혁은 조직적 실체가 있었나?

■ 그건 자기네들 보니까 통민청 민민청이 혁신계 주류라고 알았는데 사회에 알려져 있는 명사들이 진짜가 아니고 그 사람들은 이름만 있고 실제 움직인 사람은 이렇다는 걸 5.16 나고 나서 알았다. 수사 속에서 알았는데 잡힌 사람이 몇 사람 안 된다 말이다.

그런데 (1차 인혁당 관계자) 잡아보니 그 사람들인 거다. 자기네들은 노다지 캤다고 생각한 거다. 신원확보만 한 것도 큰 성과다.

그 과정을 설명하면 조금 이해가 될지 모르겠다. 중앙정보부에서 조서를 꾸며서 의견서를 만들어서 자기들의 조사부(서)를 검찰에 넘기는데, 검찰에서 20일간을 아침 9시에 문을 열면 밤 1시, 2시 어떨 때는 4시에 들어가고 그랬다. 대기실에서 졸고 밤 야식을 빵을 사다 넣어주고 이랬는데, 그리 조사를 해도 안 됐잖느냐.

그때는 검찰이고 뭣이고 모든 게 중앙정보부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검찰로서는 이 똥대가리 같은 놈들이, 아무 법도 모르는 놈들이 완전히 깡패짓을 하고 있거든. 검찰 공안부라는 게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고 그냥 그 권위도 인정 안하고 달려드니까, 아마 자기네들도 알력도 있었을 것이다.

모조리 서울대 교수니 각 대학교 경제학 교수니, 합동통신사 외신부장이니 다 있으니까 중앙정보부에서 조서를 꾸며보니 도대체 수준이 무엇을 물어도 대답을 하는 걸 알아들을 수 없는 거다. 도둑놈 잡아다 두드려 패고 옛날 빨갱이라고 수틀리면 죽여버리고 하던 그런 놈들이 수사를 하고 앉아 있으니.

검찰이 와서 하나하나 해보니 “이 사람들은 대단히 수준 높은 사람들이다. 정치를 해도 날라리 정치가 아닌 옳은 정치를 할 사람들이다”라고 존중도 받았다.

그때 신직수가 검찰총장인데 부장이 가서 “기소를 할 수 없습니다”, “도장이나 찍어. 책임은 내가 질테니”, 검찰총장도 (중정에) 꼼짝을 못하니까. 그렇게 다투다가 3명이 사표냈다는 것 아니냐. 12시가 넘으면 영장 시효가 넘어 모두 내줘야 하니까 숙직검사가 공소자가 되서 기소를 한 거다. 쇼도 보통쇼가 아니다. 나라 운영에 그런 게 어디 있느냐? 똥칠할 수 있는 건 다한 거다.

그게 신문에 막 터졌다. 그때는 조.중.동이 지금처럼 안 그랬다. 그래서 국회에서도 발칵 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숨죽이고 있는데 야당에서 살판이 났다. 명분이 생겼으니까.

국회조사단을 꾸며가지고 조사단이 와서 “우리 고문 조사하러 왔는데, 어떻게 고문했느냐?”, 맞은데 보자고 바지를 한번 벗어보겠냐고. 벗어보니 시커멓게 이게 보였다. 그래서 “고문 흔적이 맞다”. 요즘처럼 칼라사진이 있으면 딱 좋았을 텐데, 그렇게는 못하고 눈으로 여러 사람이 본 걸 확인해서 국회에 보고서를 낸 거다.

그래서 정식으로 중앙정보부 해체해야 한다고 했다. 소위 혁명정부 구조가 무너지는 꼴이 되니까 이 사람들한테는 인혁당은 “저거 죽여야 된다” 생각했겠지. 그런 사람들이 2차에도 남에게 존경받는 사람들로 구성이 돼 있으니까 죽인 거다. 보복이라고 본다.

□ 2차 때도 조직을 만들거나 하지 않았나?

■ 구체적으로 조직이 없다. 2차도 1차와 같다. 그 무모하게 누가 그래 조직 만들어 이름 붙이고 강령 만들어 알리겠느냐. 그건 합법적일 때 하는 이야기다.

□ 도예종 선생과 이수병 선생이 특별했던 관계인 것으로 아는데, 소개해달라.

■ 특별한 관계는 이런 것이다. 이수병은 5.16 나고 학생 민통련으로 조선일보에 있던 류근일하고 똑같이 취급받아 (감옥)살았다. 그 사람들은 그래 가지고 68년에 나오는데 도예종 선생은 재판에서 3년형을 받아서 안양교도소로 내려가 나머지 잔여 2년 형을 살았다.

도예종 선생이 가보니까 이수병이라는 사람이 거기 있었다. 나이가 차이가 많으니까 서로 이야기를 한번 해보니 참 대단한 사람을 만난 거다. 그래서 거기에 혁신계 사람들이 같이 살면서 도예종 선생이 가 가지고 여때까지 했던 분위기와 전혀 다르게 분위기가 혁신이 돼 버렸다.

거기는 아마 형을 살면서도 방에 꼭꼭 가둬놓는 것이 아니고 적당한 운동시간에 잔여시간 한두 시간 화단에 가서 화초도 기르고 야채도 기르고 한다. 거기서 두 사람이 내내 붙어 있더라는 거다.

두 양반이 거기서 만나서 특별한 우정을 쌓고 자기 속에 있던 회포, 나라의 앞일,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 이런 걸 한 2년동안 논의하고 친해졌다고 하니까.

도 선생이 나머지 2년만 살고 이수병 보다 먼저 나왔다. 그래서 도 선생이 나를 한번 찾아왔다. 오셔서 점심을 자기가 사면서, “왜 자네는 그리 가까운 사람을 학대해?”, “왜요?”, “다른 사람이 책을 넣어주고 그러는데 책이라도 부지런히 넣어줘야지. 읽을거리가 없어서 책을 굶주리는데 그러느냐”, “녜, 알겠습니다”.

그전에 한 달에 한 번씩 꼭 가서 영치금 넣고 면회를 했는데, 그때는 김금수 선생 나, 김달수 선생 셋이서 형 살고 나와서 제재소를 했다. 그때는 형무소 아침에 가면 하루 걸린다. 안양 내려가는 교통도 안 좋고, 형무소 가면 대기해야 했다. 면회를 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고 그랬는데, 생각하면 아쉬움이 많다.

□ 선생과 이수병 선생도 함께 산 걸로 아는데.

■ 고등학교 때부터 암장이라는 서클을 같이 했으니까.

□ 감옥에서 도예종 선생이 선생 이야기를 많이 들었겠다.

■ 그래도 내가 미더우신지 대구에서 찾아오셔서 나를 좀 보자 해서 이야기 하고.

□ 그 이후에도 도예종 선생과 자주 만났나?

■ 대구에 내려가신 후에는 자주 만나지 못하고 그 전에는 서울에서는 만나고 최종적으로는 나한테 한 열흘 숨어 있다가 나갔다. 내가 나가서 약속시간에 집에 안 들어오니까 문을 안에서 따고 나갔다. 나중에 잡혀 들어가서 (도 선생 구속 사실을) 알았지.

□ 사형 당한 여덟 분과 다 친했나?

■ 다 친하지. 여정남이만 모른다. 여정남이는 나하고 차이가 많아서.

“박근혜라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노출한 것”

   
▲ 그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에 대해 "어린애"라고 단언했다. [사진 - 민족21 백운종 기자]
□ 박근혜 후보가 인혁당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고 역사의 판결에 맡겨야 한다고 하는데.

■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나는 어린애라고 생각한다. 내가 화가 나는 이유는 공주같이 자라 가지고 세상일은 모르고 아버지 하는 것은 모조리 옳은 것으로 알고만 살았는데 그래도 따르는 무리들이 있다는 거다.

새누리당에 지금 붙어서 좋다고 하는 사람은 출세하기 위해서 줄 선 사람이지 나라 일을 위해서 아니면 박근혜가 경륜이 있어서 “이 사람은 분명히 나라를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고 믿고 그 사람을 따른 사람이 아니라고 본다.

그 사람한테 붙으면 국회의원도 오래 할 수 있을 것 같고 출세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거기에 따르는 거지, 그 사람 스스로를 헤아리면 인격이나 뭣을 알고 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이번에 답한 것은 박근혜라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노출한 것이다. 얼마나 무식한지를.

이런 사람을 대통령 된다고 해서 뒤에서 미는 사람들 모두 같은 사람 아니겠나, 나는 그렇게 본다. 참 불쌍한 사람들이고, 우리 백성들 잘못하며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든다.

□ 2차 인혁당 사건 이후 선생의 삶은 유족들 뒷바라지 하고 살았나?

■ 뒷바라지라고 할 게 있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죽 한 그릇 있으면 그것도 같이 나눠먹는 것이 도움이지 내가 돈 벌어서 같이 산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려울 때 같이 나눠먹는 걸로 생각하고 그저 벌면 같이 먹는 걸로 생각했다.

그걸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서... 애들이 헐벗고 그러는데 옳게 도와주지도 못했다. 내가 돈을 번 게 몇 푼 되나? 거기다가 돈을 벌면 쓸 때는 그처럼 많더라고. 옳게 도와주기나 했으면 모르지만 그 양반들이 작은 걸 가지고 자꾸 고마워라 하면서 그걸 이야기하고 다닌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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