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차베스와 대처, 영웅과 마녀의 죽음

 

[제3세계 눈으로본 서구열강](28) 애도와 증오의 대상이 된 두 사람
 
유태영 박사
기사입력: 2013/05/16 [22:18] 최종편집: ⓒ 자주민보
 
 

차베스를 <애도하는 눈물>과 대처를 <증오하는 분노>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2013년 3월 5일에 서거했다. 차베스는 3년 전에 암 수술을 받고 치료를 계속했으나 질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눈을 감았다. 2019년까지의 4선 승리의 임기를 남겨 놓고 애석하게 떠나면서 차베스는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영웅적 <혁명의 꿈>을 못다 이루고 미완성으로 남겨 놓았다.

하지만 차베스가 남겨놓은 못다 이룬 <혁명의 꿈>은 21세기 제3세계에서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차베스의 확실한 정치적 신념은 날이 갈수록 제3세계에서 강력하게 확산되고 있다.

한편 지구의 반대편 영국에서는 마거릿 대처 영국 전 총리가 2013년 4월 8일 오랫동안 뇌졸중과 치매를 앓던 병세가 악화되어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마거릿 대처 영국의 전 총리가 뇌졸중과 치매로 사망했다고 하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런던 시민들이 길거리에 뛰쳐나와 <매기, 매기, 마녀는 죽었다>라고 기뻐하면서 샴페인을 터뜨리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런던에서 뿐만 아니라 북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도 역시 많은 군중들이 맥주와 함께 <잘가라 마녀, 마녀는 죽었다>라고 쓴 피켓을 들고 춤추며 거리를 행진했다. 대처 전 총리는 <철의 여인>으로 불리면서 1979-1990년에 걸쳐 11년 동안 집권 했는데 한국의 박정희 정권을 모델로 여겼다고 한다. 마거릿 대처는 한국의 6.25전쟁에 대하여 언급하여 말하기를 공산주의 침략을 막기 위해 한국이 싸웠는데, 유럽도 한국처럼 일어나서 공산주의와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차베스의 죽음과 대처의 죽음에 대하여 언론은 복잡한 이야기들을 전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 복잡한 이야기들을 간단하게 두 가지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무엇인가? <혁명의 역사>와 <침략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차베스가 통치한 역사는 실제로 <혁명의 역사>였다.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대처가 통치한 역사는 실제로 <침략과 전쟁의 역사>뿐이었다.

대처는 1982년에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섬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전쟁을 일으켰는데 영국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승리하였다. 30년이 지난 오늘도 영국은 포클랜드 섬에 영국군을 주둔시키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포클랜드 섬 주변에서 유전이 발견되어 영국과 아르헨티나와의 영유권 문제로 대립이 보다 더 격렬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대처의 <침략적 모델>과 차베스의 <혁명적 이미지>를 비교하여 고찰해 본다.

1. 마거릿 대처는 침략적 인종차별주의자

<죽은 사람에 대하여 나쁘게 말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예의는 동양이나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하지만 개인이 아니라 <공적인 인물>에 대해서도 사회적 예의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마거릿 대처는 영국의 첫 여성 수상으로서 전세계의 정치문제에 대하여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악영향을 끼친 <공적인 인물>이다. 대처는 중동 제1차 걸프전 발발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2003년에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전쟁을 시작할 때 대처는 부시 대통령을 적극 지지하며 후원한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대처는 칠레의 친미 독재자 피노체트를 지원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이란과 8년 동안 미국을 위한 대리전을 할 때 대처는 친미적 우방국으로서 사담 후세인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대처는 인도네시아의 악명 높은 독재자 수하르토 대통령에 대하여 말하기를 우리의 훌륭하고 소중한 친구라고 칭찬을 했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도 더 큰 가장 최악의 문제는 대처는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것이다. 대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넬슨 만델라에 대하여 <만델라는 테러리스트>라고 악담을 했다. 대처의 이와 같은 악담에 대하여 도의적 책임감을 느낀 영국의 캐머런 총리는 대처의 악담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잘못된 발언이다>라고 변명을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대처는 호주의 이민정책에 관여하여 호주가 남태평양 지역에서 동양계 이민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성 발언을 함으로써 호주의 밥 카 외무장관은 대처에 대하여 <염치없는 인종주의자의 내정간섭>이라고 혹평을 했다.

대처의 악성적인 통치행태를 <대처리즘>이라고 부른다. 대처리즘은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강행하여 건전한 영국 사회를 오히려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처의 통치행태는 기존의 영국 사회를 파괴하고 오직 <개인과 가정>만을 중요시하는 반사회적 정책을 주장했다. 대처는 <사회공동체>를 부인하고 많은 공공부문을 폐지하고 민영화를 강행함으로써 사회적 <복지국가>를 부인하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적 정치체제를 도모했다.

대처는 신자유주의를 강조하면서 <타협은 없다>라는 철의 여인의 통치형태를 주장했는데 이러한 통치행태로 인하여 그때 당시 영국의 힘없고 가난한 민중들은 더욱 더 빈곤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처가 남긴 악담(망언)들이 수없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반사회적인 것은 1987년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주장한 <개인과 가정은 있지만 사회? 그런 것은 영국에 없다>라는 악담이다. 이와 같은 대처의 언행은 영국의 신자유주의적 정치행태가 어떠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대처는 <사회복지론>을 완전히 부인하고 오직 부유층과 기득권자들만을 보호해주는 악덕정치를 했다. 대처는 <사회복지>를 주장하는 민중의 정당한 요구를 묵살하고 민중의 요구를 오히려 영국 내부의 적으로 단정했다. 대처의 사망을 계기로 하여 대처정권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영국의 국론이 둘로 분열되고 있었다. 영국의 언론들은 둘로 갈라진 국론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대처의 통치행태의 공과 실에 대하여 영국의 국론이 둘로 분열되고 있는 이모저모를 살펴본다.

ㄱ. 대처의 <반 노조>와 <공기업 민영화>정책은 영국의 빈곤한 시민들에게 주어지던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사회복지혜택을 박탈했다. 하지만 영국의 막강한 귀족사회는 대처를 권좌에서 <철의 여인>이 되도록 도와주었다. 영국 민중의 힘으로는 대처정권을 무력화시키는데 있어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대처정권은 약자에게 가혹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ㄴ. 대처가 죽기 전 2012년에 마거릿 대처의 삶을 다룬 영화 <철의 여인>이 개봉됐다. 그런데 대처를 좋아하건 대처를 혐오하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치매를 앓고 있는 대처에 대한 영화가 관심을 끌면서 많은 관객을 끌어 모았다. 치매라는 끔직한 질병을 앓고 있는 처량한 모습과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소름끼칠 만큼 영국 정치계에서 폭정을 감행했던 <철의 여인>에 대한 화려한 영화가 개봉되어 흥행했던 것이다.

대처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결단력 있는 페미니스트이자 영웅적 정치인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대처의 영웅적 결단이 사실에 있어서 모두 다 <옳지 않은 결단>들 뿐이었다는 것도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대처정권은 인두세(poll tax)를 가난한 민중에게 강요했다. 하지만 광활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백만장자들에게는 막대한 혜택을 부여하는 장면들이 이 영화에서는 모두 스쳐가고 있다. 대처정권의 11년 집권기간에 영국의 20개 대형국영기업들이 민영화가 되어 기업주들에게 단기간에 막대한 돈을 벌게 해준 기록도 대처의 전기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대처정권 하에서 빈곤한 가정의 7세 이하의 아동들에게 우유무료급식을 중단시켰던 ‘우유날치기법’(Thatcher Milk Snatcher) 사건에 관한 이야기도 이 영화에서는 언급이 전혀 없다.

대처정권의 통치기간에 실업자가 360만 명에 이르렀다는 사실과 서민들을 위한 공공주택의 총량을 감소시킨 사실도 대처의 전기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서민들을 위한 공공서비스 재정을 삭감하고 지방 의회에 지원해 주던 국고보조금도 삭감함으로써 대처행정부에 대한 지지가 감소되고 있었던 사실도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한마디로 대처를 오직 일종의 페미니스트 영웅으로만 묘사하고 있는 터무니없는 영화이다.

ㄷ. 대처 사망 후 영국 BBC방송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대처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70%가 부정적인 반응으로 나타났으며 대처주의에 대한 호감은 30%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처정권의 파괴적인 정치행태에 대하여 <대처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토니 블레어 전 영국총리는 말하기를 <대처는 영국뿐 아니라 전세계를 변화시킨 위대한 여성 정치인이었다>라는 이율배반적인 극찬을 했다.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개혁개방을 주도한 공로로 1990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소련의 반민족적인 인물 고르바초프는 대처와 동시대에 살았던 정치가로서 대처의 사망에 대하여 극찬을 했는데 <대처는 우리 시대의 역사에 남을 지도자이다>라고 말하여 초점이 흐려진 조사를 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소련의 고르바초프보다 한 수 더 떠서 대처에 대하여 보다 더 높은 평가를 했는데 오바마는 대처의 사망에 대하여 말하기를 <전 세계는 위대한 자유투사를 잃었으며 미국은 진정한 친구를 잃었다>라고 찬양했다. 아마도 오바마는 영국이 아프리카에 대하여 극악한 비극적인 침략을 감행하였던 죄악의 역사에 대한 기록들을 백악관의 호화로운 생활 속에서 완전히 잃어버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또한 프란치스코 로마 교황이 대처는 기독교적 공헌을 했다고 말한 것은 큰 실수였다. 1979년부터 11년간 대처가 여성 총리로서 펼친 영국의 경제정책은 별것이 아니라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주장한 <레이거노믹스>를 그대로 영국에 적용한 것뿐이었다. 흔히 말하는 영국의 <대처리즘>은 미국을 추종하는 신자유주의 통치이념에 기반을 두고 있는 미국식 <레이거노믹스>를 그대로 복사한 것이었다.

ㄹ. 대처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영국에 전해지자 애도가 아니라 대처의 죽음을 기뻐하는 민중들의 물결이 전국에 파도치고 있었다. 왜 그런가하면 대처가 집권한지 5년 만에 실업자 수가 150만 명에서 320만 명으로 급증했었기 때문이다. 영국 국민들의 상당수는 <대처야말로 영국을 망친 영국의 지도자였다>라고 외치면서 <대처리즘>에 증오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대처의 사망에 대하여 영국의 국론이 둘로 분열된 것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트위터, 유튜브 등을 비롯해 여러 TV와 신문들도 엇갈린 부정적 보도를 발표하고 있었다.

<대처의 무덤에 서서 노래를 부르며 먼지를 내리 밟아라> 등 기사와 함께 그 외에도 대처에 대한 험담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처의 사망에 대하여 아프리카와 남미에서는 보다 더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특이했다.

ㅁ. 대처에 대한 장례식도 영국의 국론이 분열되어 애도와 비난이 교차되고 있었다. 가난한 영국 민중에게 대처는 독일의 히틀러와 같은 지도자였기 때문에 대처의 장례식은 국가적 화려한 행사가 아니라 <대처 사망 축하파티>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처는 국가의 공공기관을 <민영화>하는 정치를 강행했기 때문에 대처의 장례식도 국가적 행사가 아니라 반드시 순전히 <민영화한 장례식>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영국의 유명한 영화감독 켄 로치는 말하기를 대처의 장례식은 물론 민영화해야하고 장례비용도 가장 싼 업체를 선택해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대처는 가장 분열적이고 파괴적인 정치가로서, 노동자들을 대량해고하고, 공장을 폐쇄했으며, 사회공동체를 파괴하는 등의 유산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어쨌든 말 많은 대처의 장례식은 2013년 4월 17일에 국장에서 한 단계 아래인 반공식 장례식으로 치려졌는데, 의회의 승인이 아니라 단지 영국 왕실의 동의에 의한 장례식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대처의 장례식에 참석하느냐 마느냐하는 논란으로 복잡했으나 세인트폴 성당에서 치러진 장례식에 여왕이 결국 참석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처의 장례식 비용에 세금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청원이 3만여 건이나 접수됐으며 북아일랜드 분리독립세력(IRA)의 테러 가능성을 우려하여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장례식이 진행됐다. 결론적으로 대처의 장례식은 대처의 죽음을 축하하는 수백만 민중들의 축하 파티와, 이와는 대조적으로 삼엄한 경찰의 경계 속에서 치러진 것이 사실이다.

또 하나 특기할 사실은 대처와 가까웠던 소련의 고르바초프와 레이건 전 대통령의 부인 낸시는 장례식 초청장을 받고도 고령에 따른 건강상의 이유로 불참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포클랜드 섬의 영유권 문제로 대처와 적대관계 속에 있었던 아르헨티나의 페르난데스 대통령에게는 아예 초청장을 보내지도 않았다고 한다.

2. 우고 차베스는 21세기 사회주의 건설자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2013년 3월 5일 오랜 암 투병 끝에 지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2019년까지의 임기를 남겨 놓고 58세의 나이에 끝내 눈을 감았다. 차베스 대통령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베네수엘라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군중들의 추모 열기는 베네수엘라 방방곡곡에서 물밀듯이 파도치고 있었다.

차베스의 시신이 임시로 안치된 카라카스의 군 박물관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군중들은 차베스가 잠들어 있는 대리석 석관주변에서 기도를 하거나 석관을 바라보면서 24시간 내내 떠나지 않고 차베스의 명복을 빌고 있었다.

베네수엘라 차베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물결이 이같이 광대하고 이같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경우는 남미에서도 특이한 현상으로 여겨진다고 세계 언론들은 보도했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이 국제 사회에 전해지자 차베스 대통령에 대한 애도 메시지가 잇따라 쇄도했다. 영국의 대처 전 총리의 사망 소식과는 완전한 차이점을 드러낸 것이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사망에 대하여 고인의 명복을 빌며 베네수엘라 인민들의 슬픔을 위로하는 메시지를 보내온 국가들과 지도자들의 명단을 밝힌다.

ㄱ. 쿠바 정부는 차베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3일간 애도기간을 선포했다. 쿠바 정부는 TV로 낭독한 공식 애도 성명에서 차베스는 쿠바혁명 지도자 카스트로의 사상적 아들이라고 추모했다.

ㄴ. 브라질의 호세프 대통령은 추도문에서 차베스는 <위대한 남미인>이며 브라질의 친구를 잃은 큰 손실이라고 했으며 전국적으로 1분간 묵념하면서 고인을 추모했다. 또 브라질 전 대통령인 룰라는 차베스의 사망은 남미의 민중 모두의 슬픔이라고 추모했다.

ㄷ.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은 TV연설에서 눈시울을 적시면서 말하기를 <차베스 대통령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있으면서 남미 민중의 귀감이 될 것>이라고 추모했다.

ㄹ. 이란도 하루를 국가 애도의 날로 선포했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말하기를 <차베스는 현명하고 헌신적인 지도자이며 미 제국주의와 싸운 혁명가>라고 높이 평가했다.

ㅁ. 인도의 만모한 싱 총리는 차베스 대통령이 인도와 베네수엘라의 양국관계를 강화한 그의 공적을 찬양했다. 싱 총리는 특히 차베스의 죽음을 추모하면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 반제국주의와 투쟁한 차베스의 업적을 기렸다.

ㅂ.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차베스는 미래를 내다보는 스스로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투쟁했으며 러시아와 양국간에 단단한 관계를 만들었다>라고 추모했다.

ㅅ. 중국은 차베스에 대하여 <그는 위대한 지도자이며 중국 인민의 절친한 친구였다>라고 하면서 많지 않은 나이에 떠난 차베스의 서거를 애도했다.

ㅇ. 유럽연합(EU)의 바호주 상임의장은 공동성명을 내고 차베스 대통령은 사회개혁 정책에서 두드러진 능력을 발휘한 위대한 지도자라고 조의를 발표했다.

ㅈ. 영국의 외교장관인 헤이그는 차베스는 탁월한 통치이념으로 남미의 넓은 지역에 큰 영향력을 남겼다고 추모했으며, 프랑스의 올랑드 대통령은 고인의 주장을 모두 다 공감하지는 않았지만 정의를 위해 싸운 것은 진심으로 추모한다고 했다.

ㅊ. 우루과이 호세 무히카 대통령은 일간신문에 기고하여 <차베스는 떠나갔지만 차베스주의는 페론주의처럼 남미 민중들의 가슴속에 오래 기억될 것>이라고 추모했다.

ㅋ. 라틴 아메리카 카리브해 국가들은 공동으로 차베스 대통령이 카브리해 국가들의 연합을 위하여 공헌한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 차베스는 영원한 지도자라고 추모했다. 뿐만 아니라 남미의 동맹국들도 공동으로 그들의 지도자들이 차베스의 서거에 대하여 <차베스 형제의 죽음>으로 애도한다고 전했다.

ㅌ. 독일의 좌파당 카트야 릭싱어 대표, 할리우드 영화 감독 올리버 스톤과 개성파 배우 숀 펜 등과 미국의 온라인 언론 <데일리 비스트>, 유엔 반기문 사무총장, 심지어 미국 마이애미주의 한 식당에 모인 군중 등, 전 세계 지구촌 여러 나라들에서 일제히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서거에 대하여 추모의 물결이 파도쳤다.

베네수엘라 현지 외신 보도에 따르면 차베스 대통령을 추모하는 민중들의 행렬은 한 달 동안 계속되고 있었다고 한다. 지면상 제한으로 차베스 대통령 추모에 대한 많은 기록들을 모두 다 기록할 수 없으므로 여기서 생략한다.

ㅍ. 하지만 끝으로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차베스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추모의 물결이 세계적으로 파도치는 것과는 크게 엇갈리는 매우 짧은 애매한 문구로 차베스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발언을 했다는 사실을 추가한다. 오바마는 차베스 대통령의 서거에 대하여 말하기를 <베네수엘라의 어려운 시기에 미국은 베네수엘라 국민에 대한 지지와 베네수엘라 정부와의 건설적인 관계 발전에 대한 관심을 다시 확인한다>는 이상하고 엉뚱한 발언을 했다.

그런데 오바마는 차베스 대통령의 서거에 대하여 <조문, 추모>라는 단어는 일절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차베스 대통령이라는 칭호조차도 언급하지 않않다. 그러면서 오바마는 베네수엘라의 <국민>과 <정부>라는 두 단어만을 사용하였는데 아마도 오바마는 베네수엘라의 <국민>과 <정부>를 구별하여 상호 대립하게 하려는 미묘한 음모가 담긴 발언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오바마는 대처의 사망에 대하여는 보다 높은 찬사를 하였다. 오바마는 <대처는 세계를 위한 자유투사이며 미국의 진정한 친구였다>라고 추모했다.

그러면서 오바마는 스페인과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침략하고 400년간 극악한 식민통치를 감행한 죄악의 역사와 영국이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를 침공하고 있는 오늘의 역사에 대하여서는 전혀 모르는 척 하고 있다. 오바마는 차베스 대통령이 민중을 위하여 반침략주의 투쟁에 일생동안 헌신한 고귀한 정신에 대하여 흑인의 눈으로 보려하지 않고 오직 백인의 눈으로만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3. 차베스가 못다 이룬 꿈 베네수엘라와 남미는 어디로?

차베스는 1954년 6월 28일 베네수엘라의 시골에서 평범한 교원의 아들로 출생했는데 그의 할머니는 인디언 원주민으로, 차베스는 혈연으로 민중과 연대를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주민의 현실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부모들은 차베스가 목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차베스는 어러서부터 남미의 해방자 영웅인 <시몬 볼리바르>의 전기를 읽고 백인들의 강포와 토착 원주민들의 비극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된다.

차베스는 군관하교에 입학하여 군인으로 성장했다. 차베스는 남미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의 사상을 본받아 베네수엘라의 민중을 위한 혁명을 꿈꾸기 시작했다. 차베스는 군인으로서 친미정권에 대항하여 반정부 항쟁을 감행했으나 실패하여 투옥되었다가 1994년에 석방된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후에도 항쟁을 계속했다.

이러한 차베스는 1998년에 민중투표 64%로 당선되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차베스 대통령은 베네수엘라에 <21세기 볼리바르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차베스 대통령이 신식 사회주의 건설을 선포하자 남미의 나라들은 <제2의 피델 카스트로>, <제2의 체 게바라>가 새로 출현했다고 환성을 올렸다. 미국의 자본주의적 침략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던 남미 나라들은 열광적으로 호응했다.

차베스 대통령의 등장으로 위협을 느낀 미국은 2002년에 차베스 대통령을 제거하려고 친미 쿠데타를 시도했다. 그런데 차베스 대통령을 제거하려는 친미 쿠데타는 48시간이 채 안 되어 실패하였으며 차베스 대통령은 무사히 다시 대통령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미국의 쿠데타 음모를 물리친 베네수엘라 해방을 위한 차베스 대통의 통치이념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미국의 눈엣가시>가 된 차베스 대통령의 반미와 민중을 위한 개혁정치는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존엄을 되찾아주었으며 그동안 중남미에서 주인행세를 하던 미국의 손아귀에서부터 베네수엘라를 해방시켰다. 베네수엘라의 반미 투쟁 승리는 우선 중남미에 확장되어 미국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구심점이 되고 있었다.

차베스 대통령이 14년간 통치한 결과를 보면, 역대로 빈곤에 허덕이던 베네수엘라 민중의 삶이 우선 역사상 처음으로 <하루에 세끼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차베스 대통령의 집권 전에는 실업률이 20% 이상이었는데 7% 이하로 줄었다는 사실과 극빈층도 3분의 2가 줄었다고 하는 사실도 평가된다.

차베스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 2012년 10월 7일에 대통령 재임을 위한 선거가 있었다. 미국이 지원하는 막강한 반대파 후보자였던 카프릴레스를 물리치고 54% 이상의 득표로 재선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도 차베스 대통령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서민 차베스>의 민중파워가 막강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이 강요하는 국제통화기금(IMF)을 물리치고 제국주의 침략을 배격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은 2005년 1월 브라질에서 개최한 <세계사회포럼>에서 5만 군중을 향해 반미반제의 연설을 하여 제3세계의 반제국주의 투쟁노선을 밝히는데 공헌했다.

뿐만 아니라 차베스 대통령은 UN 총회연설에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맹렬히 공격하면서 부시에게는 <악의 축>, <노랑 냄새나는 악취>라고 독설을 서슴지 않고 퍼부었다. 또한 차베스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이 중남미를 순방하는 것을 비판하여 말하기를 <악마의 괴수>라고 혹평을 했다.

차베스 대통령의 집권 14년 동안에 베네수엘라에는 22개의 공립대학이 신설됐으며 교사의 수는 65,000명에서 무려 다섯 배가 넘는 350,000명으로 껑충 뛰어 올랐다. 문맹퇴치와 토지개혁을 동반한 농업개혁이 농촌중심으로 지속되었고 병원과 주택이 대량으로 신축되었으며 수많은 협동조합도 농업부문에서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차베스 대통령이 목숨을 걸고 추진했던 중요한 정책은, 베네수엘라의 국운을 좌우할 수 있는 석유산업을 친미악덕 자본주의자들의 손으로부터 몰수하여 국가의 통제 하에 국영산업으로 확립한 것이다. 베네수엘라가 보유하고 있는 석유매장량은 3천억 배럴에 달한다. 차베스 대통령이 2007년에 석유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함으로써 미국의 엑손 모빌 같은 거대한 석유회사들은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에서 그 기반이 한 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차베스 대통령은 베네수엘라의 뿌리 깊은 친미 기득권세력들의 <꿀단지>였던 석유산업을 과감하게 몰수하여 국가 통제 하에 들어가도록 하는 개혁에 성공했다. 차베스 대통령은 야심 찬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우선 첫 해에만도 100만 명이 교육의 혜택을 받았으며 기초의료보험 혜택을 1,800만 명이 받았다. 또한 값싸게 식료품을 공급하는 국영소매점을 14,000개 이상 설립했다. 이와 같은 파격적인 사회봉사 프로그램들은 다방면으로 차베스 대통령의 집권 14년 동안 지속됐다.

미국의 설문조사기관인 <갤럽>의 발표에 의하면 베네수엘라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가로 뽑혔는데 베네수엘라 민중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사회주의적 생활의 만족도를 10점 만점에 7점으로 평가했다.

차베스 대통령이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것은 어떤 독재로 인함이 절대로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정치적으로 반제국주의적인 사회체제로의 개혁을 통한 사회복지 제도 때문으로 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이었다.

민중의 영원한 행복을 꿈꾸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사회주의 통치를 시작한 지 14년 만에 그의 꿈을 못다 이루고 애석하게 2013년 3월 5일에 서거했다.

차베스 대통령은 <우리는 자본주의를 극복해야한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주의는 날이 갈수록 보다 더 강해지고 있다>, <사회주의는 평등과 정의가 있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등의 말을 남겼다. 이와 같이 차베스 대통령은 죽음의 순간까지 외쳤다. 하지만 차베스 대통령은 못다 이룬 꿈을 베네수엘라와 남미에 남겨놓고 떠나갔다.

2013년 3월 8일에 거행된 차베스 대통령의 장례식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에서 민중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았으며 죽은 차베스를 <아버지> 또는 <사령관 차베스>라고 울부짖으며 뜨거운 햇볕 아래서 5-6시간 넘게 서 있는 모습들은 그저 눈물겹고 경이로운 민중들의 모습이었다.

베네수엘라의 헌법에 따르면 현직 대통령 사후에 30일 내로 새 대통령을 선거로 선출해야 한다. 차베스 대통령이 생전에 후계자로 지목한 니콜라스 마두로 부통령이 4월 14일에 치려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마두로 부통령은 정계 진출 전에 버스운전수였던 노동자 출신 부통령이다. 1994년 차베스가 쿠데타 실패로 투옥됐을 때 구명운동을 전개한 것이 인연이 되어 차베스 대통령과 절친한 정치적 동지가 됐다. 마두로 부통령(51세)은 선거에 승리하여 차베스 대통령의 후임 대통령이 됐다.

2013년 4월 15일에 치러진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후보자로 키프릴레스(41세) 주지사가 출마했다. 키프릴레스 주지사는 중산층, 기득권층 출신이며 막강한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출마하면서 버스운전수 노동자 출신인 마두로 부통령을 깔보는 교만한 태도로 거만한 선거전략을 펴고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 결과는 마두로 부통령이 50.7%의 표를 얻어 49.1%를 얻은 야권 후보 키프릴레스를 따돌리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마두로 대통령 당선자는 버스운전수 출신으로서 14년간 국회의장, 외무장관 그리고 부통령을 역임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2013년 4월 19일에 버스운전수 출신인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공식 취임식이 거행됐다. 마두로 대통령 취임식은 차베스 대통령의 대형사진과 베네수엘라 독립 영웅 <시몬 볼리바르>의 대형 초상화 앞에서 마두로 대통령이 취임선언을 하면서 진행됐다. 취임식은 남미의 모든 나라들을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진보적인 국가들의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하여 한 자리에 모이는 성대한 축하행사였다. 중국과 러시아도 정부차원에서 고위급 대표단을 보냈다.

4월 19일에 대통령에 취임한 마두로 대통령은 4월 27일에 동맹국인 쿠바를 방문하여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을 예방하여 취임인사를 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마두로 대통령에게 두 나라는 카리브해 지역의 <한 가족>이라고 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카스트로의 <한 가족>이라는 말에 화답하여 쿠바와 베네수엘라는 보건, 교육, 스포츠 등 여러 분야에 새로운 장을 열고 <전략적 동맹> 관계를 보다 더 공고히 맺을 것을 강조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연설을 하는 도중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피델 카스트로의 둘째 딸과 군중 앞에서 포옹했다고 한다.

베네수엘라 대통령 선거를 감독한 국제기구에서 60개국의 대표들 200여 명이 선거진행을 참관했다고 한다. 2013년 4월 19일에 치러진 베네수엘라 대통령 선거는 민주적인 절차를 통한 평화롭고 공정한 선거가 진행됐다고 국제적으로 판정되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당 후보자인 카프릴레스 주지사는 선거 패배를 시인하지 않고 중산층 기득권의 막강한 세력과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등에 업고 이른바 <선거개표부정>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소동을 일으켰다.

평화롭게 진행된 선거전에서 패배한 야당 후보자로서 카프릴레스는 <선거개표부정>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카프릴레스가 제 아무리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소동을 일으킨다 할지라도 그는 이미 세계적으로 확인된 공명선거의 결과에 대하여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야당의 대통령 후보자였던 카프릴레스가 베네수엘라의 선거결과에 대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이모저모의 이야기들을 간략하게 간추려 살펴본다.

ㄱ. 카프릴레스가 제기하는 문제는 선거 득표수 차이가 2%에도 못 미치는 23만 표인데 이 근소한 차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득표수의 격차가 2%에도 못 미친다는 것에 패배자로서 아쉬움이 큰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아쉽다고 해서 무조건 불법선거라고 주장할 수 는 없는 것이며 아쉬움 때문에 불법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카프릴레스가 억지를 부리고 있는 이유는 차베스 대통령이 석유산업의 국유화를 강행하여 친서민 정치노선을 확립했는데 이것을 마두로 대통령이 계승하고 있는 것을 방해하기 위함이다. 카프릴레스가 억지를 부리고 있는 이유는 분명히 미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중산층계급의 기득권 세력들이 굳게 뭉쳐서 2%의 선거 격차를 문제삼기 위함이다. 또한 이것은 마두로 대통령의 정권을 흔들어 놓고 통치의 초창기부터 방해공작을 펴고 있는 음모인 것이다.

ㄴ. 베네수엘라 대통령 선거투표의 개표결과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면서 야당이 억지로 <재개표>를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 백악관 대변인 제이 카니는 브리핑에서 주장하기를 베네수엘라 대통령선거 결과의 <재개표>는 유권자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절차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베네수엘라에서 차베스 전 대통령의 반미의 정치적 영향을 차단하기 위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베네수엘라에서 차베스 전 대통령의 정치적 영향을 끝장내고 친미적인 중산층이 승리하여 정권을 잡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번 선거에서 극우파 친미 세력이 패배한 것을 몹시 불행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미국은 <재개표> 소동을 뒤에서 지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미국의 무례한 행태는 제3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친미정권이 실패했을 경우에 항상 찾아 볼 수 있는 미국의 전통이다.

ㄷ. 차베스 대통령 사망 후 베네수엘라 후임 대통령 선출을 위한 선거진행 과정에 있어서 현직 부대통령이며 동시에 강력한 차베스 대통령의 후임자로 부상하고 있는 마두로 대통령 후보자에 대한 암살 음모설이 비밀로 나돌고 있었다. 베네수엘라가 혼돈에 빠지도록 미국이 부채질을 하고 있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마두로 부통령에 대한 <암살 음모설>은 콜롬비아 알바로 우리베 전직 대통령을 암살 음모자로 여긴다는 AFP통신 보도를 통하여 알려졌다. 하지만 우리베 전 대통령 본인은 암살 음모설에 대하여 근거가 없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모략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콜롬비아 전직 대통령인 알바로 우리베는 남미의 민중반역자로 악명 높은 친미주의 대통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베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다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정평이 높다. 그러므로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음모설에 대하여 우리베 전직 대통령을 의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의심이라고 여겨진다.

ㄹ. 또 하나 터무니없는 소문이 있다. 그것은 미국 CIA가 베네수엘라 대통령 선거전에 개입하여 야권 후보자인 기득권 친미 후보자인 카프릴레스에 대한 암살을 계획했다는 소문이다. 미국이 친미적인 대통령 후보자를 암살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미국이 조건반사적 이익을 획득하기 위함이다. 차베스의 후임 대통령으로 등장한 마두로 대통령 후보자에게 치명적인 손실을 입히기 위한 복합적인 이중공작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작 음모설에 대한 확실한 입증은 알려진 것이 없다.

ㅁ.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4월 19일 선거에서 승리하여 집권당으로서 의회를 4월 30일에 소집했다. 하지만 의회는 초창기부터 주먹다짐 난투극을 벌였다. 얻어 맞은 의원들은 여당이든 야당이든 모두 17명이나 됐다고 한다.

카베요 의장은 난동을 부리는 야당 의원들에게 <공명선거의 결과를 부인하고 의회에서 난동을 부리는 야당 의원들은 의회에서 발언할 자격이 없다>고 했다. 의원들이 공명선거를 부인하는 것은 의원이 된 것을 스스로 부인하는 행동이 된다.

야당 의원들이 선거결과에 불복하여 <재개표>를 주장하고 있지만 마두로 대통령의 당선을 무효화하기에는 법률상으로 불가능하다. 베네수엘라 대법원도 공명선거에 의하여 마두로 대통령이 당선된 것을 헌법상 승리라고 시인했다.

마두로 대통령이 새로 출범시킨 정권은 전임 차베스 대통령이 시작한 사회주의 혁명을 계승하고 완성할 수 있는 투쟁전선으로 튼튼한 토대를 가지고 있다. 베네수엘라 풀뿌리 조직들인 50여개 단체들이 수도 카라카스에 모여 기자회견을 갖고 미국의 모략과 음모를 폭로하고 규탄했다.

풀뿌리 조직들은 마두로 대통령을 결사 옹호하여 차베스가 못다 이루고 남겨 놓은 미완성의 혁명을 베네수엘라와 카리브해의 국가공동체에서 그리고 남미와 제3세계에서 기어이 완성할 것을 굳게 결의했다.

베네수엘라에서 버스운전사 노동자 출신인 마두로 대통령이 당당하게 대통령이 되어 통치하게 됐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그것은 오늘 베네수엘라와 제3세계가 어디로 가는가를 분명히 가리켜주는 나침반이 되고 있음을 뜻한다.

글을 맺으며

최근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중남미를 순방하던 중 코스타리카에서 언론과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기자들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베네수엘라 대선 결과에 대하여 미국의 <인정 여부>를 질문했다.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은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엉뚱하게 동문서답식으로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다.

<폭력과 시위와 야권 탄압 등이 발생한 베네수엘라 대선 과정에서 민주주의, 인권, 언론의 자유와 같은 기본적인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라고 대답을 했다.

기자들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던진 질문의 요점은 <대선 결과에 대한 인정 여부>였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고 즉답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초점이 흐린 언어로 베네수엘라를 비방하는 정치적 발언을 한 셈이 되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이런 식의 답변은 강대국 지도자들이 제3세계에 대하여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강압적인 언어의 말장난이며 동시에 강대국의 책임회피의 수단과 방법이다.

이와 같은 오바마에 대하여 마두로 대통령은 직격탄을 날렸다. <오바마는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는 우파 기득권세력의 손에 달러를 쥐어주고 있으면서 베네수엘라가 혼돈에 빠지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마두로 대통령은 오바마에 대하여 <건방지고 무례한 악마의 수괴>라고 비난했다.

베네수엘라 외무장관은 오바마 대통령의 코스타리카에서의 발언에 대하여 말하기를 베네수엘라를 괴롭히는 미국의 역대 백인 대통령들보다 오바마가 조금도 덜한 점이 없다고 논평했다.

그런가 하면 오바마 대통령 뿐만 아나라 미국의 존 케리 국무장관도 역시 오바마 대통령을 편들어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베네수엘라 마두로 대통령의 당선을 반대한다면 우리는 재검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베네수엘라 정부의 생존 능력에 대하여 진지하게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라는 어정쩡한 발언을 했다.

뿐만 아니라 존 케리 국무장관은 말실수로 남미 국가들에게 큰 파문을 일으켰다. 존 케리 국무장관은 남미를 <미국의 뒷뜰>이라고 지칭했다는 소문이 남미 나라들에 퍼졌다. 그런데 이 소문에 즉각적인 반발을 일으킨 나라는 바로 베네수엘라와 제일 가까우면서 상호 연대하고 있는 사회주의 혁명의 나라 볼리비아이다.

볼리비아는 미국 국무부 산하 기관인 국제개발처(USAID)에 당장 볼리비아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며 추방명령을 내렸다. 미국 국제개발처는 남미의 빈곤한 나라들에게 교육, 보건 등을 지원해 준다는 명목으로 현지에 와 있지만 사실은 약소국가들에 대한 내정간섭과 스파이 행위가 주목적이라고 볼리비아 모랄레스 대통령은 폭로했다.

영국의 대처 총리는 <철의 여인>으로 불리면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밀착하여 이른바 <레이거노믹스>를 주장하여 신자유주의를 영국에 정착시킴으로서 악명을 떨친 것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그런데 미국 언론에서도 <독재자의 딸>로 불렸던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과 밀착하여 이른바 <북의 비핵화>와 <강력한 대북억제력> 등을 주장하여 민족문제를 미국에 의존해서 해결하려는 입장을 한층 더 견고하게 정착시키려는 외교를 했다.

역사에 큰 이름을 남기고 간 영국의 <대처>와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이 둘을 비교하다 보니,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인지 궁금해진다.(2013년 5월 11일)



관련기사
 
제국주의 침략논리와 민중들의 삶의 투쟁
 
서구문명은 인종주의 지배체제
 
남북전쟁 이후에도 계속된 흑인들의 비극
 
독립전쟁, 남북전쟁에 참전한 흑인노예들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흑인들의 역사
 
서구의 동남아시아 침략과 기독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