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인물은 역사연구의 출발이자 본질이다. 또한 특정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인물에 대한 연구만큼 우선하는 것도 없다. 어떠한 인물에 대한 선택과 해석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가치관과도 무관치 않다. 백포(白圃) 서일(徐一, 1881-1921)은 일제강점기를 포효한 몇 안 되는 인물에 꼽힌다. 그럼에도 가장 저평가 된 인물 중의 하나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가치 수준과 맞물린다.

서일은 일제강점기 종교·철학·교육·무장투쟁 등 여러 방면에서 실로 기적에 가까운 업적을 이룩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손에 꼽힐 정도다. 무장독립투쟁분야 연구에 있어,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와 관련하여 간접적으로 언급된 것이 주종을 이룬다. 그나마도 김좌진이나 홍범도·이범석 등의 명성에 덮여, 그들을 통솔했던 서일의 이름은 너무도 희미하다.

올 해는 백포 서일이 순국한 지 꼭 100주기가 되는 해다. 인간 행동에 있어 중요한 요소는 그 개인의 가치관이다. 정신적 측면을 간과한 행동적 방면에서만의 접근은 본질을 외면한 채 현상구명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서일이 수많은 독립군들을 통솔하던 용기와 지혜의 바탕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수행·연구 속에서도 무장투쟁을 함께 할 수 있었던 수전병행(修戰竝行)의 삶의 토대는 무엇이었는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 백포 서일의 삶의 의미를 3회에 걸쳐 매주 월요일 연재하고자 한다. /필자 주

 

서일은 나서지 않는 인물이다. 모든 이들이 그를 ‘보이지 않는 선생’으로 존경한 이유다. 대종교의 항일선언이자 중광단선언(重光團宣言)인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1919년에는 대종교 교주(敎主)였던 무원(茂園) 김교헌(金敎獻)이 교주의 자리를 양여하려 하였을 때도 겸허히 사양하였다.

대종교의 중광단원들이 중심이 되어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사진제공 - 김동환]
대종교의 중광단원들이 중심이 되어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사진제공 - 김동환]

서일이 도모한 동원당(東圓黨)이라는 비밀단체도 주목된다. 동원당의 실체는 서일의 그림자와 같았던 이홍래(李鴻來)의 가출옥문서에 등장한다. 또한 1925년 4월 6일 청진지방법원 판결서에도 그 명칭이 언급되고 있다. 이홍래는 중광단과 대한정의단, 그리고 북로군정서의 핵심으로 마지막까지 서일과 동고동락했던 인물이다.

동원당은 서일을 중심으로 한 대종교의 비밀결사다. 서일이 수명의 동지가 협의하여 1912년 음력 8월 화룡현 삼도구(三道溝) 청파호(靑波湖)에서 조직하였다. 독립운동을 완수하기 위한 체계적 활동을 결정하고 이를 지도하기 위한 기관이었다. 당시 청파호는 홍암 나철이 기거한 곳으로 대종교 포교와 항일투쟁의 거점이었다. 강우·이상설·신규식·류완무·현천묵·백순·박찬익·김영학 등등이 드나들며 대종교의 발전과 항일투쟁의 포석을 구상하던 공간이었다. 그 공간 확보에 물심양면으로 헌신한 인물이 안중근의 백부(伯父)인 안태진(安泰鎭)이었다는 점도 흥미를 끈다.

동원당이 언제까지 존속했고, 대종교의 또 다른 비밀결사인 귀일당(歸一黨)과 동체이명(同體異名)인지의 여부 또한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동원당이 ‘대종교=항일투쟁기지’의 등식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밀조직이라는 점에는 의문이 없다. 이러한 움직임은 1919년까지도 지속되었다. 서일이 1919년에도 연길현 국자가(局子街)에서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자유공단(自由公團)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한 것이 그 근거다. 그 단원이 무려 1만 5천명에 이르렀다.

서일은 나입네 하는 성격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의 천성이자 덕성이다. 가장 극렬한 저항을 누구도 모르게 실천해 갔다. 우리 독립운동사에 숨겨진 수전병행(修戰竝行)의 삶의 길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진중(陣中)에서도 늘 수행(修行)과 연구(硏究)를 함께 하였다. 서일에게는 우리의 정체성(正體性)이 곧 항일의 무기였다. 그것을 증명해 보인 인물, 그가 바로 서일이다.

중광단은 1919년 5월 일부 공교도(孔敎徒)들과 연합하여 대한정의단으로 변모된다. 그러나 정체(政體)의 이견으로 순수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정비되었다. 당시 공교도들은 보황주의(保皇主義)를 내세웠다. 그러나 대종교인들은 대종교의 교의(敎義)인 홍익인간에 부합한 공화주의를 주장했다. 이것이 결별의 이유다.

대한정의단 역시 대종교 정신을 토대로 한 무장투쟁을 추구했다. 단장으로 추대된 서일은 독립군정회(獨立軍政會)라는 무장조직을 따로 설치하고 본격적인 무장혈전을 준비하였다. 또한 『일민보(一民報)』와 『신국보(新國報)』라는 순수한글신문을 발행하여 재만동포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순수한글신문 발행 역시 대종교 정신과 무관치 않다. 언어와 역사와 철학을 통한 정체성 투쟁의 중심이 대종교였다. 한글과 민족주의역사학 그리고 삼일철학(三一哲學)의 정착이 그것이다. 일제강점기 홍암 나철의 정신을 이은 주시경·김두봉·이극로·최현배 등, 한글개척의 선각자들 역시 모두 대종교도였음을 상기해 보자.

서일의 한글 구사 능력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의 스승 나철이 1916년 순교하며 「순명삼조(殉命三條)」라는 유언을 남겼다. ‘대종교를 위하여, 천하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이 유언의 골자다. 서일은 그 삼조의 유언을 새기며 스승의 주검 앞에 「가경가(嘉慶歌)」라는 추모가사를 아래와 같이 바쳤다.

한검교 참이치 밝히려고 목숨을 다하신 한스승이여
가냘프고 약한 어린 우리 가셔도 못잊음 아옵나니
아사달메에 두르던 그 노을빛 그 환으로
더러운 티끌을 녹이시며 늘 도우소서 늘 도우소서
한배검 큰 도를 넓히려고 목숨을 마치신 한스승이여
옳으신 그 뜻을 아오나 저희는 두려울 뿐이오니
저만치 밀지 마옵시고 늘 때때로 일깨우소서
저 환하고 거룩한 그 빛깔에 늘 쪼이소서 늘 쪼이소서
우리의 허물을 걷어지고 목숨을 바치신 한스승이여
저희는 귀먹고 눈 어두워 즐거움과 새로움도 모르오니
아사달메 하늘집에 둥근 송이 큰 얼굴로
피었던 고운 꽃 그 빛으로 늘 씻으소서 늘 씻으소서

*한검교-대종교, *아사달메-구월산, *한스승-홍암 나철

무장투쟁의 대명사로만 인식되는 서일의 우리말 구사 능력이 범상치 않음을 알게 해 주는 가사다. 우리말의 탁월한 구사는 많은 대종교지도자들의 상식적 능력이기도 했다. 이 추도가사는 후일(1942년) 고루 이극로(李克魯)가 개사(改詞)·정리하여 대종교 노래 「가경가」로 정식 편입되었다.

한편 서일은 대한정의단에 대한 정비와 더불어 왕청현을 중심으로 대종교 정신을 통한 민중적 기반 또한 확고히 다져 갔다. 이러한 토대 위에 김좌진·조성환·박성태 등 대종교계 군사전략가들을 대거 영입했다. 이들 역시 대종교의 중심인물들로서 대한정의단의 약점이었던 체계적 무장투쟁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가들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태동하는 것이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일명 북로군정서)다.

대한군정서는 중앙조직 체계를 총재부와 사령부로 나누었다. 총재부는 주로 대한정의단의 중심인물들이었으며 사령부는 주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었다. 물론 그 연결의 끈은 대종교였다. 정신의 상징인 총재부와 행동의 상징인 사령부의 체제는 서일이 지향하던 군교일치(軍敎一致)·수전병행의 효율적 수행(遂行)을 위한 조직체계였다.

또한 대한군정서 관할 구역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종교 신자들이었던 까닭에 모연대(募捐隊)를 통한 군자금의 징수와 모금이 훨씬 수월했다. 일제강점기 대종교의 교당은 곧 학교이자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내는 종교적 성금은 곧 후학을 기르는 학자금인 동시에 항일투쟁을 위한 군자금이었다. 군교일치의 실천을 그대로 확인시키는 부분이다.

대한군정서의 경신국(警信局) 조직을 보면 이러한 군교일치의 지향이 더욱 확연해진다. 경신국이란 경사(警査)와 통신(通信)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경사 업무는 민정시찰, 각 단체의 행동과 적정(賊情) 정찰, 군사기밀조사, 내부 불순분자 색출, 임원 경호 등이었다. 또한 통신 업무는 신보(新報) 전파, 보도 및 통신 전달, 서령(署令) 및 선유문(宣諭文) 배포, 하물(荷物) 운반 등을 관할하였다.

대한군정서의 경신국 조직이 39분국까지 펼쳐졌다는 점도 흥미롭다. 나아가 각 분국을 보면, 소분국은 1과에서 대분국은 20과까지를 두어 총 218과를 운영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 분국장이나 과장들이 모두 대종교인들이었다. 대한군정서 경신국 조직이 대종교의 시교당·포교소 조직과 동일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당시 관할 지역 교포의 7할 이상이 대종교도였으며, 대종교의 확장이 곧 독립운동의 확장이었다는 주장과도 합치된다. 또한 독립군들 대부분이 대종교의 신앙에 뭉쳐서 파벌이나 사리잡념이 없었고 광명정대했다는 증언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10월 상달이 되면 돌로 제단을 쌓아, 어려운 재정에도 불구하고 돼지와 소를 잡아 제천보본하고 우리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영원한 번영을 빌었다고도 한다. 이 역시 대종교 군사제천(軍事祭天)의 전통과 그대로 부합하는 주장이다. 대종교단에 전해 내려오는 아래의 신가(神歌, 어아가·얼노래) 내력을 알면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신가(얼노래)는 어느 시대부터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고사기(古事記)에 ‘동명성왕 시절 제천 때가 아니더라도 항상 이 노래를 불렀으며, 광개토대왕 시절 전쟁에 임할 때에 군사들에게 반드시 이 노래를 부르게 하여 사기를 북돋웠다’고 한다”

청산리독립전쟁 당시 대한군정서의 연성대장으로 참전한 이범석은, 청산리전쟁의 승리 또한 대종교라는 신앙의 힘과 민족정신에 불타는 신념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서일의 군교일치·수전병행의 행동가치가 승리의 원인임을 알게 해 준다. 서일 총재를 비롯한 말단사병, 심지어는 경신조직에 참여한 민간인들까지도 대종교 정신으로 무장된 이념집단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청산리전투에서 대패한 일제는, 그들이 당한 수모를 대종교도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로 앙갚음했다. 당시 희생당한 대종교도들만도 수만 명이 넘었다는 것이 대종교 내부의 증언이다.

청산리대첩 후 일제의 무차별 학살을 피해 중소 접경지역인 밀산으로 집결한 독립군 부대릉은 대한독립군간을 결정하고 백포 서일을 총재로 추대했다. 중국 조선족 후예들이 '서일 총재 항일투쟁 유적지' 기녀비를 밀산에 세운 이유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청산리대첩 후 일제의 무차별 학살을 피해 중소 접경지역인 밀산으로 집결한 독립군 부대릉은 대한독립군간을 결정하고 백포 서일을 총재로 추대했다. 중국 조선족 후예들이 '서일 총재 항일투쟁 유적지' 기녀비를 밀산에 세운 이유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서일은 청산리독립전쟁 이후 동포들의 희생을 최소화시킨다는 계획 하에 북만주 밀산(密山)으로 이동하였다. 그 때가 1920년 12월 말 경이다. 서일은 이곳에서 대한군정서를 중심으로 10여개의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총재로 추대되었다. 군단 휘하에 상급부대로 여단을 두고 그 아래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를 편성하였으며 총병력은 3,500여명에 달하였다. 당시 대한독립군단의 수뇌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총 재 서일(徐一)
부총재 홍범도(洪範圖)
고 문 백순(白純)·김호익(金虎翼)
외교부장 최진동(崔振東)
참모부장 김좌진(金佐鎭)
참 모 이장녕(李章寧)·나중소(羅仲昭)
군사고문 지청천(池靑天, 이청천)
제1여단장 김규식(金奎植)
참 모 박영희(朴寧熙)
제2여단장 안무(安武)
참 모 이단승(李檀承)
제2여단기병대장 강필립
중대장 김창환(金昌煥)·조동식(趙東植)·오광선(吳光鮮)

일제의 문서에 실린 대한독립군단 임원의 명단 [사진제공 - 김동환]
일제의 문서에 실린 대한독립군단 임원의 명단 [사진제공 - 김동환]

만주 항일운동지도자들이 총집합하였다. 그러나 대한독립군단은 재정의 궁핍과 군세(軍勢)의 분산이라는 현실적 문제로 완전한 정착을 이루지 못하였다. 더욱이 서일의 반대에도 홍범도·이청천·오광선·안무 부대 등이 자유시로 넘어갔다. 이후 러시아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독립군들이 살상되는 자유시 참변을 겪게 된다.

서일은 밀산에서 둔전(屯田)을 통한 재기를 도모했다. 이 시기 이홍래를 대동하고 수행과 연구에도 열정을 쏟았다. 그러나 1921년 음력 8월 26일, 수백 명의 토비들이 야습하여 살인·방화 그리고 약탈을 자행했다. 함께 둔전(屯田)하며 훈련하던 전사들이 이들을 대적하다 장렬하게 산화했다.

청산리 치욕을 씻기 위한 일제의 광란, 독립군의 전선(戰線)을 무너뜨린 자유시 참변, 그를 따르고 의지했던 최후의 전사들의 참변, 역사의 무게가 한 순간에 그를 덮쳤다. 그들의 대부분이 대종교도이자 독립군이었다. 종단(宗團)의 최고 간부로, 독립군을 지휘하는 총수로, 자진순명(自盡殉命)의 비장한 각오를 새기게 된다. 서일의 마지막 상황을 『독립신문』(1921년 12월 6일)은 이렇게 적었다.

“씨(氏, 서일-인용자 주)는 무장군인 십이 명을 거느리고 앞서 말한 한 촌가에 머무르면서 군무(軍務)에 관한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바, 돌연히 같은 해 구월 이십 팔일에 토비 한 무리가 이 촌락을 포위하고 공격하여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며 재물을 약탈을 행하므로, 그의 부하 열두 의사(義士)가 그들을 대항하여 분전하다가 중과부적이 되어 마침내 몰사한지라. 산상(山上)에서 이 비참한 광경을 바라보던 씨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호천호지(呼天號地)하다가, 이 슬픔을 견디지 못해 자상(自戕)하야 비상한 최후를 마쳤는데, 그가 통제하던 군서(軍署)에서 이 놀라운 소식을 접하고 달려와 그의 유체를 수장한 후에, 곧 총재 대리를 보선하야 군무를 진행 중이다.”

1921년 음력 8월 27일 백포 서일이 살신성인의 길을 택한 밀산 당벽진 마을 뒷동산. [자료사진 - 통일뉴스]
1921년 음력 8월 27일 백포 서일이 살신성인의 길을 택한 밀산 당벽진 마을 뒷동산. [자료사진 - 통일뉴스]

1921년 음력 8월 27일 서일은 살신성인의 길을 택한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자신의 죽음으로 대종교의 재도약과 흩어진 독립진영의 재기를 다지고자했다. 그는 죽음의 목전에서도 스승인 나철의 가르침을 되뇌었다. 나철 유서 중의 다음 한 구절을 읊조리면서 생을 마감했다.

“귀신이 휘파람을 불고 도깨비 뛰노니 하늘·땅의 정기빛이 어두우며, 뱀이 먹고 돼지가 뛰어 가니 사람·겨레의 피고기가 번지르하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오.”

때로는 죽음의 힘이 삶의 의미를 앞설 때가 있다. 물론 생사의 경계를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담보되어야 한다.

“마땅히 살아야 하지 않을 때 오래 살면 이것은 도리어 욕됨이다.(不當壽而壽 斯反辱矣)”[『회삼경(會三經)』「삼망(三妄)」]

독립군 총재 서일의 저술 속에 담긴 구절이다. 그는 황천(黃泉)에 늘 발을 걸치고 살았다. 그에게 죽음이란 한걸음 내딛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죽을 때와 죽음의 의미를 진정으로 알았던 인물이 서일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의 철학적 투쟁의 본질과도 맞닿는다.

서일의 죽음은 살아있는 자들에게는 슬픔이었다. 종교와 이념을 넘어선 아픔이었다. 나라를 걱정하는 모든 이들이 통곡했다. 기독교 목사로서 『독립혈사(獨立血史)』의 저자인 일재(一齎) 김병조(金秉祚)도 울었다. 김병조의 「고(故) 서일 선생을 조(吊)함」이라는 추모글(현대어로 번역·윤문함)을 여기 소개해 본다.

『독립신문』 1면 맨 앞에 실린 일재 김병조의 서일 선생 추모 글. [사진제공 - 김동환]
『독립신문』 1면 맨 앞에 실린 일재 김병조의 서일 선생 추모 글. [사진제공 - 김동환]

아, 슬프도다.
선생의 돌아가심이여!
누구를 위하여 오늘의 소동이 일어났으며
누구를 위하여 오늘의 죽음을 맞이하였는가.
선생의 죽음은 과연
이천만 동포의 자유와 존영을 위한 것이며
선생의 죽음은 또한
십삼 의사와 수백 양민이 무고히 피해 입음을 위함이시니
생을 마침도 나라를 위하심이요
비장한 죽음도 동포를 위하심이라.
곧 선생의 고결한 의기는
스스로의 목숨을 자신의 목숨으로 인정치 아니하고
오직 동포의 생명으로 자신의 목숨을 삼으심이며
동포의 생사도 자신의 생사와 같이함이시니
그의 삶도 동포와 더불어 사셨고
그의 죽음도 또한 동포를 위하여 돌아가셨도다.
선생이시여!
선생이 만일 나라를 되찾고 나라를 살피는 자리에 계셨더라면
나라의 희로애락를 같이하는 충성스런 신하의 자격이 선생이시며
필부의 얻지 못함으로 세상을 채찍질함과 같이
천하를 떠맡은 어진 선비 또한 선생이실지라.
만리초보(萬里初步)의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바로 눈앞에 두시고
죽음으로써 살신성인하시며 의를 취하심은
비록 선생의 양심에 부끄럼 없고
천손만대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실지나
아직도 살아있어 거적에 누워 창을 베고
백전고투 중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만리장성이 무너짐이며 큰 집의 대들보가 부러짐과 같도다.
하물며 청산리 전역에 승리의 노래를 부르시던 소리
우리의 귀에 잊혀질 수 없는 경종(警鐘)이 되질 않았던가.
밀산(密山)의 송백(松柏)이 만고에 푸르름은
우리 선생의 절의(節義)를 딛고 선 것이요
파저강수(婆猪江水)가 천추(千秋)에 오열함은
우리 선생의 풀지 못한 한을
울음으로 안고 흐르는 것이니
아! 송백(松柏)아 끝없이 푸르고
아! 강수(江水)야 한없이 울어라!
감지 못할 선생의 두 눈이
해와 달이 되어 보시느니라.(『독립신문』1921년 1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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