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교섭 결렬을 선언했습니다.”
박근서 금속노조 한국쓰리엠지회 지회장은 22일 12시 30분 한국쓰리엠 화성공장 소속 조합원들에게 지난 17일 열렸던 사측과의 교섭 결과를 알렸다. 협상이 결렬됐고, 노동쟁의 조정 신청을 거쳐 파업에 돌입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박 지회장의 설명에도 조합원들의 표정은 담담했다. 한국쓰리엠지회는 2009년 노동조합을 만든 이후 사측의 탄압에 계속 시달려왔기 때문이다. 노조에 따르면, 포스트잇, 스카치 테이프, 산업용 마스크 등으로 유명한 미국계 다국적 기업인 한국쓰리엠(3M)은 용역깡패를 동원하고, 근무평가를 빌미로 조합원과 비조합원의 임금을 차별하고, 조합원들의 탈퇴를 회유하는 등 ‘노조 탄압 백화점’이라 불릴 정도로 온갖 일을 벌였다.
미국계 다국적 기업의 ‘노동 탄압’은 마치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우리에겐 어색하게 들린다. 드라마 ‘송곳’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저희 회사는 프랑스 회사고 점장도 프랑스인인데 왜 노조를 거부하는 걸까요?”라는 질문에 주인공인 구고신 노무사는 “여기서는 그래도 되니까”라고 말했다. 국회 논의 과정에서 기업의 압력으로 누더기가 된 ‘살인기업처벌법’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법과 제도는 기업에게 ‘그래도 되는’ 무한한 폭력을 부여했고, 노동자들의 생존은 위기에 몰렸다.
“김은희 조합원은 그동안 사무장을
연임해서 활동했고,
지금은 여성부장을 맡았어요.
늘 노조 운동의 선두에서
열심히 해요.”
‘그래도 되는’ 나라에 사는 노동자들의 삶은 고단하다. 박 지회장의 설명을 들으며 또 다시 ‘중식 선전전’을 비롯해 각종 투쟁이 이어질 것임을 직감한 조합원들 사이에 한 여성 조합원이 눈에 들어온다. 이날 간담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자리를 정리하고, 사무실 주변을 쓸고 닦으면서 분주하게 움직였던 조합원 김은희다. 박 지회장은 김 조합원을 “그동안 사무장을 연임해서 활동했고, 지금은 여성부장을 맡았어요. 늘 노조 운동의 선두에서 열심히 해요”라고 추켜세우며 “정말 고마운 사람”이라고 말했다. 화성공장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백계탁 수석부지회장은 “함께해서 든든한 동지예요. 늘 힘이 돼요. 자기 마음에 안 드는 것, 불의한 것엔 참지 않는 싸움꾼”이면서 동시에 “노조 활동을 묵묵하게 책임지는 살림꾼”이라고 김 조합원을 칭찬했다. 금속노조 한국쓰리엠지회 여성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합원 김은희를 지난 22일 한국쓰리엠 화성공장에 있는 지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지금은 노동조합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일꾼인 김은희지만 불과 15년 전까지만 해도 노동자가 되고, 노조 조합원이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 2006년 7월 한국쓰리엠 화성공장에 입사하면서 그의 삶은 분기점을 만났다.
“집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결혼 10년 만인 서른일곱 살에
공장일을 시작했어요.”
“올해로 입사한지 15년 됐어요. 결혼을 하고 서울에서 살다가 경기도 수원으로 이사를 왔는데 집안이 어려워졌어요. 취업 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거에요. 결혼 전엔 교회 어린이집에서 2년 정도 일한 게 전부였어요, 취직자리를 알아보다 생활정보지에 나온 취업 광고를 봤어요. 한국쓰리엠이 화성에 공장을 세우고 직원을 모집한다고 해서 화성공장 1기로 입사했어요. 그렇게 결혼 10년 만인 서른일곱 살에 공장일을 시작했어요.”
김은희가 공장에서 맡은 일은 IP 업무라 불리는 검수업무였다. 모니터, 내비게이션 등에 들어가는 필름을 포장 직전에 마지막으로 불량이 없는지 확안하는 업무였다. “처음엔 멋모르고 일했어요. 공장에서 처음 일 해본 거였거근요, 시키는 대로만 했어요. 일이 많아서 하루 12시간 맞교대로 일했습니다. 힘은 들었는데 분위기에 휩쓸려선지 아무 생각 없이 했어요. 당시에 딸 아이가 초등학생이었는데, 봐줄 사람이 없어서 여러 학원을 보낼 수밖에 없었어요. 늦게 애들 아빠가 찾아서 돌봤습니다. 집안 부모님 도움은 받지 못했어요. 그런 딸아이가 지금 스물일곱 살이에요.”
시키는 대로 멋모르고 3년 넘게 일했던 김은희는 지난 2009년 노조가 만들어질 때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1977년 한국 진출 이후 32년 동안 노동조합이 없던 한국쓰리엠에 2009년 5월 노조가 세워진 것이다. 그해 5월 14일 한국쓰리엠 나주공장 노동자 70여 명이 노조를 설립했고, 이후 나주공장과 화성공장에서 현장직 노동자들의 가입이 이어졌고, 현장직 노동자의 90% 이상이 노조에 가입해 조합원 수는 670여 명에 육박했다.
2009년 노조 결성…
조합원 670여 명 참여
한국쓰리엠지회는 그해 8월 임금 인상, 노조 전임자 인정, 근무평가제도, 여성노동자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며 전면파업을 벌였다. 보수 언론에선 “32년 무분규 전통이 민노총 가입 후 와르르 무너졌다”고 보도했지만, 한국쓰리엠 노동자들이 말하는 현실은 달랐다. 노조는 당시 연 2천억 원에 달하는 주식 배당금을 챙겨간 한국쓰리엠이 경영 악화를 이유로 정년을 몇 년 앞둔 노동자들의 희망퇴직과 임금삭감, 복지 축소를 단행했고, 근무를 평가해 임금을 차별지급했던 근무평가제 등 노동자들의 불만도 많이 쌓여 있었다고 말한다. 현장직 노동자의 90% 이상이 가입한 건 이들이 처했던 현실이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 보여준다. 이때의 파업투쟁으로 임금협상이 타결되면서 노조의 앞날엔 장미빛 미래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임금협상 이후 단협은 차일피일 미뤄졌고, 한국쓰리엠을 두고 ‘노조 탄압 백화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노조 흔들기가 계속됐다. 2010년 노조가 파업과 농성을 통해 사측에 대응하자 6월 나주공장에 용역을 투입해 농성 천막을 강제로 철거하는 등 조합원에게 물리력을 행사했다. 8월에 농성을 시작한 화성공장에도 용역들이 상주하며 충돌이 벌어졌다. 그해 한국쓰리엠은 기존의 경비노동자들을 해고하고 민간방호기업인 컨택터스를 불러들여 공장 경비를 맡겼다. 컨택터스는 2007년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이명박의 경호를 담당한 후, MB정권 동안 한국전력이 발주한 국책사업 현장에 투입될 정도로 급성장한 업체로 SJM, 발레오만도, KEC, 상신브레이크, 유성기업 등 각종 노동 분쟁 현장에서 악명 높았던 기업이다. 별 생각없이 주변의 권유로 노조에 가입했던 김은희에게 이런 현실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사측에선 용역 동원해 노조에 폭력
“노조가 이렇게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냥 여기서 노조가 생긴다고 주변에서 가입을 권유해서 함께하게 됐어요. 노동조합에 특별히 거부감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별 생각업이 시작했어요. 그런데 노동조합을 파괴하려고, 용역깡패가 들어왔어요. 2010년 당시 공장 앞에서 싸운게 기억나네요. 조합원들이 코뼈가 부러지고, 병원에 실려가고 했어요. 저도 약간 다치긴 했지만 찰과상 정도였어요. 용역들의 폭력을 촬영하는 핸드폰을 빼앗으려고 해 지키다가 넘어지고 부딪혀서 다친 거에요. 그런 식으로 싸운 경험은 처음이었어요. 결국 싸우다 구치소까지 갔던 동료도 있었어요. 노조를 세울 때 방해가 많다 보니 노조가 제대로 활동할 수 있을까 회의감도 들었어요. 당시엔 그런 걸 전혀 몰랐거든요. 노조만 만들어지면 그냥 순조롭게 가는 줄로만 알았어요. 노조가 이렇게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어요.”
피와 땀을 쏟으며 싸운 한국쓰리엠 노동자들은 사측의 압박이 전방위적이었다고 증언한다. 사측은 한국컨택터스의 폭력에 맞선 조합원 19명을 해고했고, 징계도 250여 건에 이르렀다. 노동조합 지도부를 상대론 2억 6천만 원에 이르는 손배·가압류로 압박했다. 조합원의 본가를 찾아가고 조합원들을 일일이 만나 노조 탈퇴를 회유하기도 했다. 전문 부서까지 만들어 전환배치를 통해 소위 강성 조합원을 격리하고, 업무에서 배제하는 방식으로 노조 탈퇴를 압박했다. 경력 십 년이 넘는 노동자들에게 풀을 베고 페인트칠을 하고 청소를 하는 업무를 맡기기도 했다.
노동조합을 처음 만들 때부터 외쳐왔던 여성 노동자 처우 개선과 관련해서도 한국쓰리엠에선 제대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여성 노동자들이 맡고 있는 검수업무가 대표적이다. 검수업무만 15년째 해온 김은희는 자신의 현실을 이렇게 설명했다. “필름 검수를 오래하다보니 이 정도면 나가도 되고,나가선 안 된다는 게 쉽게 판단돼요. 그런데도 회사에선 간단한 업무로만 취급합니다. 그래서 검수업무를 ‘IP 직군’이라고 아예 별도 직군을 만들어서 진급도, 승진도 없고, 아무리 경력이 오래되도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만 줘요. 기계를 만지는 일이나, 검수하는 일 모두 힘들다고 생각하거든요, 15년 동안 보람을 가지고, 많은 제품을 검사해왔어요. 어떤 면에선 누구도 하지 않으려는 일을 맡아온 건데 그에 맞는 대접을 안 해주네요. 사측에선 말로는 그런 노고를 인정한다면서도 절대 제도는 바꿀 수 없다고 해요.”
근무평가제로 노조 압박
얼마 전 임금 협상에선
임금 인상률 낮추자는 노조 제안에도
근무평가제 고수
“회사에선 근무평가제 폐지하면
관리가 힘들다고 해요.
말이 관리지, 결국 회사에
목소리 안내고, 자기들 하자는 대로
따라오게 노동자들을
조종하겠다는 거잖아요.”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 한국쓰리엠이 노조를 견제하는 가장 대표적인 수단은 ‘근무평가제’다. 노조를 만들 당시부터 폐지 요구가 많았지만, 오히려 노조가 만들어진 이후엔 적극적으로 활용해 노조를 압박하고 있다고 김은희는 증언한다.
“근무평가를 1차는 파트장이 하고, 2차는 팀장이 해요. 두 점수를 합산해 평가하는데, 조합원의 경우 파트장이 점수를 많이 주면 팀장이 점수를 적게 주는 경우가 많아서 늘 낮은 점수를 받아요. 근무평가는 절대평가가 아니라 부서에 고득점자와 저득점자 비율을 정해놓고 하는 일종의 상대평가거든요. 그런데, 늘 고득점은 비조합원, 저득점은 조합원 위주로 돼요.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많아요. 이렇게 근무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으면서 조합원들은 승진이 힘들어요. 노조를 처음 만들었을 때 조합원 중에 조장을 맡았던 이가 있었는데, 내려올 수밖에 없었어요. 노조를 만들면서 정직도 당하고 해서 근무평가가 낮아졌거든요. 지금은 조합원 가운데선 경력이 많아도 조장이 거의 없어요. 그래도 회사는 차별이 아니라고 해요. 정당한 근무평가에 의한 진급이라고 주장하거든요. 또 노동조합에선 매번 폐지를 주장하지만, 회사에선 폐지하면 관리가 힘들다고 해요. 말이 관리지, 결국 회사에 목소리 안내고, 자기들 하자는 대로 따라오게 노동자들을 조종하겠다는 거잖아요.”
지난 17일 열린 한국쓰리엠 사측과 노조의 협상 과정에서도 근무평가제는 가장 큰 논란이 됐다. 박근서 지회장이 22일 화성공장 조합원들과의 간담회에서 설명한 바에 따르면 지난 협상에서 사측은 임금 인상안을 제시하면서도 근무평가 등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차등지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이에 노조에선 차등 지급은 안 된다면서 차라리 임금인상률을 낮추더라도 정률 인상을 주장했다. 하지만, 사측에선 이 제안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노조에선 스스로 인상률을 낮출 정도로 파격적인 제안을 했음에도 사측이 이를 거부한 건 한국쓰리엠이 근무평가제만큼은 결코 놓칠 수 없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해석했다.
노조룰 먼둘 덩사 600명이 넘던 조합원은 1년 여 만에 100여 명으로 줄어들었고, 사측이 근무평가제 등으로 압박을 계속하면서 조합원 가입률은 좀처럼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현재는 조합원이 화성공장에 31명, 나주공장에 83명이에요. 많은 조합원들이 견디지 못하고 노조에서 탈퇴했어요. 그리고, 비조합원들은 사측이 무서워 노조 가입을 꺼려하고 있고요.”
“노조에서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 유형이죠.
‘진심’인 사람. 노조에도, 사람에도, 투쟁에도
가식없이 진심인 사람,
그런데 따뜻한 사람이 바로
김은희 동지에요.”
김은희는 함께 노조활동을 하던 이들이, 특히 노조에 함께하자고 자신을 이끌었던 동료가 먼저 탈퇴하면서 인간적인 상실감 때문에 힘들었다고 한다. “당시에 저희 조장이 먼저 노조에 가입하자고 제안을 했어요. 그런데 상황이 힘들어지니깐 먼저 탈퇴했어요. 너무 배신감이 컸어요. 그런 감정은 처음이었어요. 사람에 대한 신뢰감이 사라지면서 정말 힘들었어요. 사람들이 너무 밉고 싫어서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하고 고양이한테 정을 줬어요. 강아지와 고양이가 없었으면 어땠을지 몰라요.”
김은희는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던 그에게 사람이 아닌 강아지와 고양이가 힘이 되어 주었다는 고백을 언젠가 금속노조 모임에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김은희의 진솔담백한 고백은 함께 모여 노조활동이 힘들다고 울먹이면서 신세한탄을 하던 사람들을 와하하 웃게 만들었고, 그제서야 사람들이 편하게 얘기하기 시작했다고 엄미야 금속노조 경기지부 부지부장은 말한다.
“맞아, 맞아. 그땐 정말 (배신하고 떠나는 조합원들이) 인간 같이 안 보이지.”
“회사보다 조합원들 때문에 힘든것 같아.”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노조 간부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니까.”
엄 부지부은 당시 모임 현장에서 동료 노조 활동가들의 마음을 움직인 김은희의 힘을 이렇게 설명했다. “상급단체 소속인 제가 백마디 ‘힘내라’, ‘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이 무색해지더라구요. 찐으로 겪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공감, 따뜻함, 그리고 이어지는 격려와 위로. 그게 김은희 동지가 가진 최고의 힘이라고 그 때 생각했어요. 어설픈 공감이나 어설픈 위로는 종종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고, 자신의 힘듦이 별거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자존감이 더 낮아지고 하곤 하거든요. 그런데 김은희 동지는 달라요. 예전에 쓰리엠 노조 만들때 본인은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누가 ‘꼬셔서’ 막판에 가입을 했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다 어려울 때 떠나더래요. 그때 어려웠는데 지금은 괜찮다. 이렇게 절대 말하지 않더라구요. 지금도 미운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지금 같이 하는 수석부지회장도 자기 속을 얼마나 썩였는데 지금도 아웅다웅한다고 솔직히 말하죠. 그런데 눈빛에서는 애정이 뚝뚝 묻어나요. 노조에서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 유형이죠. ‘진심’인 사람. 노조에도, 사람에도, 투쟁에도 가식없이 진심인 사람, 그런데 따뜻한 사람이 바로 김은희 동지에요.”
“우리 목소리를 현장 안에서
낼 수 있다는 게 큰 보람이에요.
비조합원들은 불만이 있어도
목소리를 제대로 못내거든요.”
노조에 함께하자고 했던 이들이 나중엔 김은희에게 탈퇴하자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은희는 그런 제안을 “나는 끝까지 남겠다”면서 거부했다고 한다. 그 이후 11년 가까이 그 말에 스스로 책임을 지기 위해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대의원으로 시작했던 노조 활동은 사무장이란 중책을 맡아 여러 해 일했고, 지금도 여성부장을 맡아 활동하며 자신의 말을 실천하고 있다.
힘겨운 여정이지만, 노조 건설 이후 작지만 의미있는 변화들이 공장에서 일어났다. 가장 큰 변화는 회사에 당당하게 할 말은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우리 목소리를 현장 안에서 낼 수 있다는 게 큰 보람이에요. 비조합원들은 불만이 있어도 목소리를 제대로 못 내거든요. 이 때문에 주변의 비조합원들 가운데서도 노조 활동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가 많아요. 그럴때 자부심과 보람을 느껴요.”
할 말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불합리했던 공장의 부조리가 바로잡히기 시작했다. “나주공장 등에선 친인척, 아는 동생, 고교동창, 고교후배 등 지역사회에서 얽혀있는 관계 때문에 제대로 체계가 서지 못했어요. 현장에선 ‘야’, ‘너’, ‘이 새끼’ 등 노동자들을 함부로 불렀어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막무가내로 16시간 작업도 하는 분위기였는데 노조가 생기고 나선 이런 일들이 없어졌어요. 법대로, 규정대로 이뤄져요. 또 작업복, 작업화 등 물품 지급도 바뀌었어요. 그전엔 달라 그래도 안 줘서 본인이 사비로 사서 쓰기도 했거든요. 심지어 볼펜 등 사소한 문구류도 다 개인이 샀어요. 당연히 개인이 사야하는 거로 알았는데 이제는 회사에 달 라고 하면 바로 지급이 돼요. 연차도 눈치가 보여 못쓰는 바람에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달라졌어요. 가끔 비조합원에겐 눈치를 주기도 하지만, 조합원에겐 절대 그러지 못하거든요.”
“노조활동이 활성화되는 건
청년들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일이기도 해요.
자녀를 키우는 조합원들에게
저는 항상 우리가 투쟁하지 않으면
앞으로 자녀들은 더 살아가기가
힘들 것이라고 말해요.”
이렇게 공장을 바꾸고, 임금을 인상하고, 노동 환경을 개선하는 것은 한국쓰리엠 노조와 조합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를 바꾸고, 특히 자신의 딸과 같은 예비 청년 노동자들을 위한 일이라고 김은희는 믿는다.
“청년들이 취직이 힘들다면서도 중소기업이나, 노동현장으로 가는 건 꺼려요. 청년들이 그런 현장에 가지 않는다고 욕할 수 있을까요? 노동이 대접을 잘받는다면, 일한 만큼 받는다면 청년들도 주저없이 그런 곳에서 일하겠죠. 노조활동이 활성화되는 건 청년들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일이기도 해요. 자녀를 키우는 조합원들에게 저는 항상 우리가 투쟁하지 않으면 앞으로 자녀들은 더 살아가기가 힘들 것이라고 말해요.”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예비노동자인 자신의 딸과 청년 노동자들에게 김은희는 이런 당부를 전했다. “노동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얘기해 주고 싶네요. 그리고, 노동자로서 나의 목소리를 낼수 있고 들어주는 곳은 노동조합뿐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노동조합은 노동자 편이란 걸 꼭 기억했으면 해요.”
한국쓰리엠 화성공장에서 15년 넘게 일해온 김은희는 이제 정년을 9년여 앞두고 있다. 남은 정년까지 계속 일하고 싶다는 김은희의 꿈은 ‘신규조합원 가입’이다. 힘겨운 현실 때문에 벌써 10년여 동안 정체된 신입 조합원을 어떻게 하면 늘릴 수 있을지 늘 고민한다. 아직은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진 않지만, 가식없이 진심으로 자신의 약속을 묵묵히 지켜온 그는 조합원들에게 끝까지 함께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조합원들한테 하고픈 이야기는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하자는 거에요. 끝까지 해야지요. 이제와서 그만 둘 수는 없잖아요.”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