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규 : 한국의 경우를 보면 뉴라이트가 저변으로 확산되는 것보다는 정부 요직에 많이 등용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 같다. 노태우 정부 때 남북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고 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들기도 했다. 또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으며 미국이 마냥 좋은 국가가 아니라는 점을 국민들이 알기도 했다.
미국이 지난 2003년 발발한 이라크 전쟁에 실패하고 이후 2008년 금융위기,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당선까지 이어지면서 세계 경영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지자, 한국에 미국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통치 세력을 집권시켜야겠다고 생각했고 그에 따른 결과가 지금 윤석열 정부로 나타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정세현 : 미중 경쟁 시대에 미국이 중국을 견제해야 하는데 그러면 아시아 국가들이 중국과 원만한 관계를 설정하도록 놔두면 안 된다. 최근 중국 부동산 위기를 많이 언급하는데 이 역시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 속에서 만들어진 부분이 있어 보인다.
그런 큰 틀에서 보면 현 정부의 뉴라이트 세력은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헤게모니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미국이 보여주려는 것만 보면서 대통령을 구석의 골방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건 지도자의 성향도 영향이 있다. 사실 최종 결정권자는 어떤 사실을 인지했을 때 이것이 사실인지 '크로스체크'를 해야 한다. 김영삼 대통령의 경우 외무부 장관의 이야기만 듣지 않았다. 외교안보수석 이야기도 함께 들으면서 상황을 다각도에서 파악했다.
김대중 대통령도 참모들이 제공한 정보질서 속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독자적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북핵 문제가 있음에도 한미관계가 대미 추종적이지 않을 수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말하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설득해서, 북한과 대화하고 북한에 쳐들어가지 않으며 인도적 지원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도출해내기도 했다.
박인규 : 그런데 정부 관료가 '테크노크라트'라고 하더라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부에서 관료를 했던 사람들은 그래도 나름대로의 자기 판단 능력과 실행 능력 같은 게 분명히 있었는데 지금 윤석열 대통령 집권 시기에 보면 우리 외교의 자기중심성을 가질 수 있을 정도의 판단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 같다.
상급자가 시키면 그대로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본인이 국가와 민족, 시대를 위해 어떤 판단을 내릴지에 대한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갈수록 더 없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2015년 박근혜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과 합의는 했지만 그래도 대놓고 '중일마'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었다.
정세현 : 김영삼 정부 때는 일본과 관계에서 네오콘이 주장하는대로 끌려가지만은 않았다. 미국이 북한과 대화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 하고 우리도 대화에 같이 들어가야 한다고 미국에 항의하기도 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뉴라이트의 접근이 불가했고 독자적인 판단을 통해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북한과 관계를 원활하게 끌고 가면서 미국과 중국에 발언권을 높이는 식이었는데 윤석열 정부는 일단 대통령 본인이 그런 문제를 고민하려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국가의 정책 결정권자가 고민해야 하는 것을 방기하다 보니 특정 세력의 정보질서에 갇힌 것 같다.
박인규 : 윤석열 개인의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이나 능력의 문제이기도 하고 미국의 영향력이 대단히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 측면도 있다고 본다. 한국 사회 내에서 미국 유학생들의 영향력이 압도적이라는 것도 미국만을 바라보는 주요 이유가 되는 것 같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미국식 세계관을 받아들인 학자, 관료, 경제 엘리트들이 한국을 지배하고 있기도 하다.
경희대학교 사회학 교수 김종영의 저서 <지배 받는 지배자>(2015년)를 보면 한국의 미국 박사는 중국, 인도에 이어 세계 3위지만 인구 당 숫자는 세계 최고라고 한다. 2013년 통계 기준으로 유학생 수가 중국이나 인도가 20만 명 내외인데 한국이 7만 명이었다고 하더라. 이들이 한국의 요직을 차지하면서 우리의 세계 인식을 주도하고 있다.
한국의 뉴라이트가 사실 미국으로 따지면 '네오콘'이다. 미국의 네오콘이 1960년대 베트남 전쟁에서 패해하면서 생겨났다. 베트남 전쟁에서 지는 꼴을 도저히 못보겠는 사람들이 이들인데, 이 중 상당수는 좌파에 '트로츠키스트'들이었다.
이들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 닉슨 대통령이 중국 등과 데탕트(긴장 완화)를 하는 것을 봐줄 수 없다는 식의 사고를 가지고 있다. 공산주의와는 타협하지 않고 때려잡아야 한다는 식인데, 1980년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해서 2000년대 부시 대통령 집권 때는 정부의 전면에 등장했다. 미국의 대외 정책을 완전히 망쳐놓은 주역인데 오바마와 바이든 집권 때도 이들의 영향력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뉴라이트는 대체로 1987년 민주화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전면에 나선 것은 이명박 정부 때다. 이들 이념은 "서방과 자본주의, 시장주의가 옳다"로 요약된다. 서방이 비서방을 착취한 적 없고 일본이 우리를 문명화시켰고 한일합병조약도 합법이라는 세력인데, 이들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1905년 을사조약 때 우리가 외교권을 뺏겼고 1965년 청구권 협정은 미국이 시켜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일본과 협정을 맺었다. 이런 와중에 내년이 또 을사년인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지금도 군사적 자주권이 없지만 미국과 일본 밑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경제 문제다. 러시아에서 동방경제포럼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 아세안(ASEAN‧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동남아시아국가연합)이 참여하고 있다. 자율적 외교 주체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경제 상황을 보면 이미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 협의체)가 G7보다 GDP 규모가 커졌고 중국 대외 무역의 절반이 달러가 아닌 다른 화폐로 운영되고 있다. 중국이 미국 국채를 예전처럼 사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중국과 러시아를 지금처럼 대하면 군사 영역이 아닌 경제 전선에서 더 먼저 무너질 수 있다.
뉴라이트가 대외 정책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입장을 편협한 방향으로 강화하게 되면 이후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 미국이 일본과 화해를 주문하면서 우리가 그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이게 한국의 미래를 봤을 때 적합한 선택인지가 의문이다.
정세현 : 미국이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가 지고 있어서 초조해서 그런 것 같다. 몰락의 시간을 늦추기 위한 것인데, 중국을 찍어 누르면 자기들의 몰락이 늦어진다고 생각하니까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등을 데리고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중국을 압박해 들어가는 것이다.
즉 미국이 한국을 찍어 눌러서 한일 간 군사적 협력 관계를 구축하려는 것이 미국의 힘이 빠지는 것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한 행동임을 알아야 한다. 미국이 동맹과 스크럼을 짜고 들어가지 않으면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약해졌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한데, 뉴라이트 등은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윤석열 정부는 러시아, 중국, 북한 모두 기회만 있으면 군사적으로 괴롭히려고 하니, 이를 막으려면 미국으로부터 확장억제를 보장 받아야 하고 전술핵 재배치를 통해 북핵에 대응한 억지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 하라는 건 무조건 따라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미국은 동아시아에 자신의 대리인으로 일본을 내세우려 한다. 여기서 윤석열 정부는 미국이 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일본에 굽히고 들어가려 하는 것 같다. 한일 관계 개선을 통해 '미국식'의 동아시아 평화를 유지한다는 건데, '헛꿈'을 꾸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일본이 뉴라이트와 유사하게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 협조하고 있지만 속셈은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일단 미국 휘하에 들어가 있다가 더 이상 미국이 힘을 못쓰면 자기가 아시아의 주인이 되어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부활시키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뉴라이트는 미국 말을 들으면 된다는 친미주의 성향이 강해서 미국이 하라고 하니까 일본과 손잡고 있는데, 사실 일본은 러일, 청일 전쟁에서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어 한다. 일본의 이러한 속셈을 생각하지 않고, 군사적으로 일본 밑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이러는 것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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