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전국 미군기지 자주평화원정단 ‘유엔사 후방기지를 가다’ - 세번째 오키나와평화공원

미군기지를 반대하는 국내 활동가들이 일본 유엔사 후방기지를 탐방하고 있다. 이들 원정단은 9월 22~26일까지 일본 본토 후방기지와 오키나와 후방기지를 둘러보았다. 세번째 방문지는  '오키나와평화공원'이었다.<편집자주>

2024 전국 미군기지 자주평화원정단 넷째 날, 원정단은 오키나와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오키나와평화공원’과 ‘쓰시마마루기념관’에 방문했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곳 ‘오키나와평화기원공원’
 
원정단은 오키나와 전쟁에서 가장 희생자가 많았던 남쪽 끝에 위치한 오키나와평화기원공원에 방문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조선인 위령탑, 자료관, 평화의 광장, 평화의 비 등을 찾았다.
 
1992년에 만들어진 오키나와평화기원공원은 전쟁 당시 희생된 적군, 아군, 주민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기리는 마음에서 건립되었다고 한다.

한국인위령탑

 

한국인위령탑(사진제공: 원정단)
한국인위령탑(사진제공: 원정단)

 우리는 제일 먼저 한국인위령탑으로 이동했다. 위령탑은 1975년에 세워졌으며,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 본토로 복귀된 지 3년 만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오키나와에서 희생된 조선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라면 ‘조선인위령탑’이라고 명명해야 하는 게 아닌가?
 
현장에서 전해 들은 바, 오키나와가 일본 본토로 복귀되면서 본토에 있는 교포, 변호사, 시민단체, 그리고 조총련에서 오키나와 전쟁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위령탑을 세우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일본 정부와 한국의 박정희 정부가 이에 관여하게 되면서 ‘한국인위령탑’이 되었고, 매년 재일한국인단체인 ‘민단’이 이곳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위령탑에 새겨진 필체 역시 박정희의 필체라고 한다.

위령탑 앞에서 해설하는 오키미토 후키코 선생(사진제공: 원정단)
위령탑 앞에서 해설하는 오키미토 후키코 선생(사진제공: 원정단)

 ‘한국인위령탑’을 둘러보던 중, 원정단에서는 오키나와 전쟁에서 조선인 희생자들에 대한 조사가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오키나와평화기원공원의 해설을 맡았던 오키모토 후키코(오키나와 시민단체인 恨(한)의 碑(비) 모임 회원이자 향토사학자) 선생은 일본에서 학생운동하고 오키나와 반환될 무렵에 평화운동에 나섰다고 한다. 한국 정부조차 노력하지 않은 오키나와의 조선인 유골을 발굴을 사비로 진행하고 희생자의 호적과 유족을 찾아다니셨다고 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생생하고도 자세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전쟁에서 희생된 조선인을 420명 사망으로 발표했다. 동굴에 숨어있다가 죽고, 길가에서 죽는 등 무차별적 학살로 남겨진 유골은 밭일하다가도 발견된다고 한다. 그렇게 각 지역에서 발견된 유골은 화장시켜 버린 탓에 유전자 검사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전해 들었다. 현재 화장하지 않은 유골은 700구가 존재하고, 지금도 유골은 계속 발견되고 있어 조사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흐른 탓에 원활한 검사가 이루어지기에는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자료관
 
원정단은 다음으로 오키나와평화공원 자료관을 들렀다. 입구에서부터 오키나와 전쟁의 생생한 흔적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전쟁 당시에 폭발하지 못한 불발탄이 바닥에 전시되어 있었다. 현재도 오키나와에서 발견되고 있어 경찰에 신고하는 일이 다수 존재한다고 한다.

 
자료관에 전시된 오키나와 전쟁 당시의 불발탄(사진제공: 원정단)
자료관에 전시된 오키나와 전쟁 당시의 불발탄(사진제공: 원정단)

이 밖에도 자료관에는 잔인했던 전쟁 당시 현장의 사진과 영상이 전시되어 있었고, 오키나와 전쟁의 포로였던 사람들(당시 어린이~청소년)의 증언자료가 비치되어 있었다. 전후 사람들의 생활과 미군정의 모습, 미군정이 끝나고 일본 본토에 복귀되는 과정이 담겨 있었다.
 
자료관에서는 미군정 이후를 광복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우리는 오키나와 주민들이 여전히 미군기지 반대를 외치고 모습을 지난 이틀간 지켜보았다. 오키나와에서 미군기지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현실이 안타까움을 가지게 했다.
 
한국은 광복 80년을 앞두고도 ‘미완의 해방’이라 표현한다. 아직 한국 땅에도 전쟁을 몰아붙이는 미군기지가 들어서 있고, 분단과 갈등, 한미·한미일 동맹으로부터 평화와 외교 주권을 침해받고 있다. 신냉전 대결에 앞장서있는 미국에게서 받는 고통의 시간은 이로 다 말할 수 없다.
 
 쓰시마마루 기념관
 

쓰시마마루 기념관에 오르는 원정단(사진제공: 원정단)
쓰시마마루 기념관에 오르는 원정단(사진제공: 원정단)

쓰시마마루 기념관은 1944년 8월 21일, 오키나와에서 출항한 ‘쓰시마마루호’가 미군의 격침으로 수장된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이 오키나와를 향해 압박해 오자 일본 정부에서는 본도(규슈)와 대만으로 노약자, 여성, 어린이들을 소개(疏開)하던 상황이었다. 승무원과 대부분이 학생들인 승객 1,788명을 태운 쓰시마마루호는 나하항을 출항하였지만 결국 8월 22일 밤, 미군의 어뢰공격으로 수많은 승선자들이 수장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와 함께 가라앉아 사망했고 생존자는 단 280명뿐이었다. 현재 해저 887m에 쓰시마마루호가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당시 유족들은 쓰시마마루호가 격침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다. 일본 정부가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감추고자 사건에 대해 발설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 사건을 접하고서 원정단은 일제히 우키시마호 사건을 떠올렸다. 올 9월 일본 정부가 우키시마호 사건 79년 만에 승선자 명부 일부를 한국에 전달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침몰원인 조사와 희생자 유족에 대한 구제, 일본 정부에 대한 사죄배상 요구 등 그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 상황이다. 쓰시마마루호의 비극이 조선의 비극과 너무나 겹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