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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안전과 번영은 누구의 희생 대가인가?

정규호 생명학연구회 부회장

ecosociet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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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임’에 무감각한 시대, ‘살림’의 정치를 위한 질문

지방선거 주요 관심사서 밀려난 기후생태 문제

생태 파괴는 누가 살고 죽느냐 가르는 정치문제

‘살아 있는 죽은 자’들 세계 만드는 죽임의 정치

타자 대상화·수단화·상품화하는 구조 들춰내야

죽임의 정치 새 차원으로 확장한 기후생태위기

살림의 정치로의 전환은 시대의 필연적 과제

5월 6일, 레바논 베이루트 남부 교외에서 임시 휴전 발효 직전에 발생한 이스라엘 공습으로 무참하게 파괴된 현장을 한 여성이 지나가고 있다. 2026.5.6. 로이터 연합뉴스

선거가 채 한 달이 남지 않은 가운데 ‘정치’ 이야기가 무성하다. 기대와 우려, 열망과 분노가 뒤섞인 가운데 당락의 성패를 가를 표 계산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다. 그런데 이번 선거 역시 후보자별 공약과 자질을 꼼꼼히 살피고 신중하게 선택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지방’ 선거라는 말이 무색하게 ‘중앙’ 권력의 향배를 둘러싼 이슈가 온통 선거판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의 미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기후’ 문제는 선거의 주요 관심사 밖으로 밀려나 있다. 기후 유권자를 찾아내고 후보자별 기후공약을 평가하는 노력들도 있으나 애쓴 만큼 효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은 분위기다. 당장 눈앞의 이해관계가 강하게 작동하는 근시안적 선거 정치 구조가 여전한 상황에서 다가올 선거의 결과가 획기적 변화로 이어지길 기대하기도 어렵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치른 수많은 선거에서처럼 이번 선거 과정에서 표출된 시민적 열망이 실망으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지 않다.

선거를 외면하고 정치로부터 거리를 두자는 말이 아니다. 극단주의가 세력화하는 상황에서 정치의 퇴행을 막는 일은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다. 하지만 선거 정치가 정치의 전부일 순 없다. ‘살맛’ 나는 세상에 대한 희망의 끈을 단단히 붙잡고 제대로 된 정치, 차원이 변화된 정치의 길을 활짝 여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지금이야말로 정치적 전환, 전환의 정치를 위한 과제를 다층적, 심층적으로 제대로 다룰 때다. 더 이상 우물쭈물하면서 시간을 허비할 상황이 아니다.

1일 서울 성동구 서울숲에서 서울시선관위 관계자들이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참여 홍보캠페인을 하고 있다. 2026.5.1. 연합뉴스

우리는 ‘죽임의 문명’ 한복판에서 살아가고 있다

무거운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현실을 보면 ‘죽임의 문명’이라는 진단을 피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모든 생명은 차별 없이 존귀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현실은 생명을 철저하게 위계화, 대상화, 수단화하는 모습이 만연하다. 사람의 생명이라고 예외가 되진 않는다. 그동안 인권, 자유, 평화, 민주주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관련 담론들도 무수히 쏟아냈지만 생명(들)을 함부로 하는 일들이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죽임’의 비참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그저 방관하거나 심지어는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동참하고 있기까지 하다.

일찍이 우리 사회의 선각자들은 현대 산업문명에 깊이 뿌리내린 ‘죽임’의 폭력적 질서를 예민하게 읽어내고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꿔내기 위한 문명전환 운동을 제안한 바 있다. 생명 가치가 존중받는 살림의 세상을 위해 ‘한살림 모임’을 결성하고 그 숭고한 뜻을 담은 <한살림 선언>을 세상에 내놓은 지 40년이 다 되어 간다. 하지만 죽임의 짙은 그림자가 국내는 물론 전 지구적으로 더욱 넓고 깊게 드리워진 것이 오늘의 뼈아픈 현실이다.

지금 우리는 고도화된 과학기술의 발달 덕분에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비극적인 죽임의 현장들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죽임의 그림자를 쉽게 걷어내지 못하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전쟁, 폭력, 재난의 현장을 실시간 영상으로 마주하는 가운데 가상과 현실의 구분 감각은 점점 흐릿해지고, 죽임의 현장에서 발신되는 생명의 절박한 외침은 쉽게 가려지고 금방 잊혀진다는 것이다. 전장에서의 살육 장면은 비디오 게임 속 화면을 떠올리게 하고, 폭격으로 희생되는 사람들 숫자 보다 전시 상황 변화에 따른 주식시장 변동 수치가 사람들의 시선을 더 강력하게 끌어당기고 있다. 생명 존재 자체의 고통과 죽음, 죽임에 대해 사람들이 갈수록 무감각해지고 무책임해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죽임의 문명의 본질이다.

 

5월 1일, 모리타니 누악쇼트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여성 살해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카라마 법(Karama Law)을 지지하는 현수막을 들고 있다. 모리타니의 시민사회 단체들은 한 젊은 여성이 강간 후 살해당한 사건 뒤 정부에 여성 살해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경찰 순찰대는 4월 18일 밤부터 19일 새벽 사이 수도 누악쇼트 외곽에서 파티마타 하마디 바(Fatimata Hamady Ba)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 소식은 보수적인 이슬람 공화국인 모리타니에서 온라인상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모리타니에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성 평등이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2026.5.1.AFP 연합뉴스

대량 살육의 전쟁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죽임의 논리

죽임의 문명은 대규모로 인명 살상을 초래하는 ‘전쟁’을 통해 가장 적나라하게 그 실체를 드러낸다. 지난 5년 사이 세계 곳곳에서 연이어 발생한 대규모 전쟁은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 죽임의 시대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전면적인 침공으로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참혹한 상황을 지금까지 지속시키면서 무려 수십만(20~50만) 명의 군인과 수만(1~2만) 명의 민간인 목숨을 빼앗고, 약 1000만 명에 달하는 막대한 난민을 발생시켰다.

2023년 10월 하마스의 기습 공격으로 벌어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역시 가자지구에서 약 8만 명의 사망자와 17만 명의 부상자를 발생시켰고, 전체 인구의 90%인 약 190만 명의 사람들을 절망적인 이재민 상태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역시 약 2000 명의 사망자와 1만 4000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란의 핵 개발 저지를 명분으로 한 미국·이스라엘의 대이란 '불법' 선제공격과 뒤이은 군사적 충돌은 이란 측에서 약 5000 명의 사망자와 2만 6000 명의 부상자, 3백만 명이 넘는 피란민을, 이스라엘에서 50여 명의 사망자와 9000명의 부상자를 발생시켰다. 이 전쟁은 특히 주변국인 레바논의 민간인 피해를 키웠는데, 2000 명이 넘는 사망자와 함께 전체 인구의 약 20%에 해당하는 100만 명 이상의 피란민을 만들어냈다. 아직 전쟁이 종료되지 않아 상황에 따라 그 피해가 더 커질 수도 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으로 약 8500만에서 1억 명이 목숨을 잃었던 지난 세기를 뒤로하고 새천년을 맞이할 때만 해도 쉽게 상상할 수 없었던 대량 살육의 전쟁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심각한 것은 오늘날 벌어지는 전쟁 양상은 전투원들 사이의 무력 충돌이라는 전통적인 전쟁 양식을 크게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이나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분쟁, 레바논 폭격 사태 등은 비전투원인 민간들을 죽음의 상태에 그대로 노출시킨다. 심지어는 민간인 거주 지역이 보호받기는커녕, 정치·군사적 계산 아래 효과적인 타격과 제거 대상으로 취급해 버리고 있다. 병원, 학교, 전기 및 식수 시설, 도로 등 생존에 필수적인 기반 시설들이 무차별 집중 폭격으로 파괴되면서 현지인들의 생존 기반 자체를 붕괴시키고 있다. 여기에다 국제사회의 인도적 지원마저 차단해 버림으로써, 전쟁 피해지역 인구 집단 전체를 생존이 불확실한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현대 전쟁은 전략적 목표하에 상대국 민중들을 사지로 내몰면서 그동안의 국제적 규범과 질서마저 가볍게 무시해 버린다. 상황이 이러한 데 이를 제대로 견제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인류 보편의 가치나 국제적인 공조보다 ‘자국 이익 중심주의’가 득세하면서, 자국민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타국 민중들의 희생을 불가피한 비용 정도로 취급하고, 이들의 죽음을 철저히 추상화시키고 은폐해버리는 죽임의 논리가 현대 전쟁의 본질로 작동하고 있다.

우리의 삶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 있는 죽임의 문명 실체들

수많은 생명을 죽임으로 내모는 일이 비단 전쟁터에서만 벌어질까? 지금 우리가 당면한 ‘죽임의 문명’은 우발적이고 일시적인 사건들 속에서만 존재하진 않는다. 죽임의 문명은 어떤 존재는 살릴 가치가 충분히 있고, 어떤 존재는 희생되어도 무방하다는 냉혹한 기준과 차가운 계산의 논리를 교묘하게 장착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의 생명 위기는 어떤 생명(들)을 보호하고 지켜내는 역량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위계화, 대상화, 수단화 흐름 속에서 특정 생명(들)을 평가절하하고 외면하고 배제하고 억압하는 힘이 강력하게 작동한 결과다. 따라서 윤리에 호소하고 도덕적인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는 죽임의 문명을 지탱하는 견고한 힘을 바꿔내기가 어렵다.

죽임의 문명으로부터의 전환은 외면받고 버려지는 생명 존재들의 의미와 가치를 명확히 읽고 드러내고 구체화하는 데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과 ‘죽임’의 개념부터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죽음’은 모든 생명이 생물학적 존재로서 필연적으로 맞게 되는 현상이다. 생명이 끝나는 과정(dying)과 그 생명이 궁극적으로 종결된 상태(death)가 여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대부분 경우 생명 존재로서 ‘생존’을 기본적인 본능으로 가지고 있지만 결국에는 죽음을 자연의 섭리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인위적 생명 연장과 영생에 대한 추구는 실현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 부작용과 폐해 또한 매우 크다.

그런데 ‘죽임’은 죽음과는 성격이 매우 다르다. 죽임은 강제적 힘과 요인에 의해 어떤 존재(개인 또는 집단)의 자연스런 생명을 파괴하고 빼앗음으로써 인위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killing, murder) 것이다. 죽임의 행위에는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이들 사이의 권력적 인과관계가 자리한다. 그래서 죽임은 문명사회를 지탱하는 핵심 가치인 인권, 자유, 평화,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위협한다. 이런 죽임의 현상이 집단적이고 지속적으로 일어난다면 그곳이 바로 죽임의 사회이자 죽임의 문명이다.

원주 한알마을의 김용우 선생은 지난 4월 생명학연구회 월례 발표회에서 ‘죽음’(死)의 자연적 개념과 대비해서 ‘죽임’의 의미를 ‘살’(殺)과 ‘살’(煞)로 구분해서 깊이 있게 설명했다. 전자가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압박과 타격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나쁜 환경과 기운의 상태를 만들어 본연의 생명성을 해침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인데, 현대 사회가 직면한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죽임의 현상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도록 해준다.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인위적이고 강제적인 요인으로 생명이 억압받고 파괴되는 ‘죽임’이다. 전쟁에서의 직접적인 학살에 내몰린 사람들, 삶터에서 내쫓기거나 생활 환경이 오염되고 파괴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 각종 재난과 위험에 무기력하게 노출된 사람들, 희망을 잃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 모두가 죽임의 사회, 죽임의 문명이 만들어낸 희생자들이다.

오늘날 문제가 되는 죽임의 문제는 전장의 총탄이나 폭격과 같은 물리적 타격과 살해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구조적인 빈곤과 굶주림을 방치하는 것, 필수적인 의료와 돌봄의 체계로부터 특정 집단을 외면하고 소외시키는 것, 인간다운 생존에 필요한 기본 시설을 외면하고 심지어 파괴하는 것, 위험한 노동 환경과 유해한 생태 환경에서 무방비 상태로 살아가도록 방치하는 것들 모두가 은밀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죽임’이다. ‘죽임’의 의미를 이러하게 확장해 보면 우리의 삶 곳곳에 스며든 죽임의 문명의 실체가 보다 구체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2022년 1월 15일, 남극 반도 북쪽에서 과학자들이 남극 펭귄 서식지에 미치는 기후 변화의 영향을 조사하는 동안 펭귄들이 빙산 위에 있는 모습이 보인다. 2022.1.15. 로이터 연합뉴스

‘살아 있는 죽은 자’들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죽임의 정치(necropolitics)

지금의 문명과 사회의 근본 바탕에 ‘죽임의 정치’가 자리하고 있다. 카메룬 출신 정치철학자 아쉴 음벰베(Achille Mbembe)는 살릴 가치가 있는 생명과 죽게 내버려도 되는 생명으로 구분해 판단과 실행에 옮기도록 하는 제도화된 권력을 ‘네크로폴리틱스’(necropolitics) 즉 ‘죽임의 정치’라고 부른다. 죽임의 정치는 타자를 보호로부터 배제한 채 지속적으로 죽임의 상태에 노출시키는 배타적 폭력성을 가지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이런 죽임의 정치는 가시적이고 직접적인 폭력 못지않게 은밀하면서도 강력하게 자동하면서 생명의 존엄성 자체를 훼손시킨다.

죽임의 정치는 특정 국면이나 사건들이 아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음벰베는 이것을 ‘살아있는 죽은 자’(living dead)들이 존재하는 ‘죽음의 세계’(death-worlds)로 불렀다. 죽임의 정치는 비록 생물학적으로 목숨이 붙어 생존을 이어가고 있지만 정치 사회적으로는 이미 죽은 존재처럼 특정 집단을 ‘살아 있는 죽은 자’로 만들어 ‘죽음의 세계’ 속에 가둬버린다. 기본권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채 인간다운 존엄과 자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 언제 죽어도 아무런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고 뉴스가 될 가치조차 상실한 ‘살아있는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곳이 바로 ‘죽음의 세계’다. 이곳은 식량, 의료, 물, 전기 등 생존을 위한 필수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거나 또는 심각하게 붕괴된 상태이며, 감시, 통제, 구금 등 노골적인 억압 없이도 언제든 죽임으로 내모는 폭력이 작동한다. 이러한 곳에서는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기가 어렵고 장기간 무기력한 상태로 방치된 채 미래에 대한 희망 자체를 꿈꿀 수 없는 절망의 상태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영국의 방송인이자 환경운동가인 데이비드 애튼버러가 2020년 2월 4일 런던 중심부에서 열린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 출범 행사에서 지구 이미지를 향해 손짓하고 있다.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손실에 대한 목소리를 높여온 애튼버러는 그의 획기적인 다큐멘터리를 통해 전 세계 시청자들의 자연에 대한 이해를 바꿔놓았다. 2020.2.4. AFP 연합뉴스

죽임의 정치를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기후·생태 위기 문제

인간은 물론 비인간 존재들도 죽임의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인간 사회를 향한 억압과 차별의 죽임의 정치 논리는 비인간 생명과 자연 생태계로 확장되어 끔찍한 ‘생태적 죽임’ 상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숲과 산, 강과 바다를 맹목적 개발을 위한 자원이나 폐기물 처리장으로 전락시키고, 수많은 동식물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철저히 이용, 소비하고 처리, 폐기해 사실상의 ‘희생 구역’을 만들어버리는 현실은 전쟁과 식민지를 통해 작동하던 죽임의 정치 논리와 매우 닮았다.

결국 환경 오염과 생태계 파괴는 누가 살 만한 환경을 누리고 누가 죽음에 가까운 상태를 떠안는가를 가르는 치열한 정치적 문제다. 음벰베의 논리를 빌리면, 오늘날 전 지구를 위협하는 기후 및 생태 위기는 단순한 환경 악화가 아닌 생명을 차등적으로 구분하고 관리하는 권력과 정치의 문제로 재해석 되어야 마땅하다. 지금의 기후·생태 위기 문제는 죽임의 정치가 만들어낸 새로운 전선이다. 이런 인식이 불분명하면 기후 위기와 생태학적 재난의 시대에 ‘행성적 구원’을 명분으로 불평등과 차별적 폭력을 방치하는 소위 ‘기후 죽임의 정치’(climate necropolitics)를 불러들일 수 있다.

실제로 폭염, 홍수, 산불, 가뭄과 같은 치명적인 기후 재난은 모든 이들에게 결코 공평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는 늘 사회·경제·생태적으로 더 취약한 지역과 집단, 열악한 처지의 노동자와 농민, 주변화된 공동체, 정치적 발언권이 취약한 집단에게 더 많은 피해를 떠넘긴다. 오염된 물을 마시게 하고, 폭염 속에서의 위험 노동을 전가하며, 농지 황폐화와 식량난, 해수면 상승 등으로 삶의 터전을 잃게 만들고, 재난 복구에서 특정 집단을 후순위로 미루는 일 등은 직접적인 살해 행위는 아니더라도 생존 조건 자체를 무너뜨리는 ‘느린 형태의 죽임’임이 명백하다. 현대 전쟁의 폐해가 여성·아동·노인·난민 등 취약한 민간인을 향해 집중되듯이, 기후·생태 위기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기후·생태 위기는 식량·물·에너지 공급망과 보건·의료·주거·돌봄 체계의 붕괴와 연결될 때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세계은행의 그라운드스웰(Groundswell) 보고서에 따르면, 기후 변화로 2050년까지 최대 2억 1600만 명의 국내 기후 이주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하며, 극심한 기후 위험에 직면하는 국가의 수가 2040년까지 3개국에서 65개국으로 증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기후·생태 위기로 삶터가 거주 불가능한 곳으로 급속히 바뀌고 환경 난민, 기후 이주민이 급증함으로써 죽임의 정치는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상황에서 위기에 대한 적응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계층과 지역, 국가는 집중적인 피해와 함께 심각한 불평등 상태에 빠지게 된다. 죽임의 정치 방식은 생태학적 재난 상황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만큼 오늘날 기후·생태 위기는 죽임의 정치가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되는 뼈아픈 문제이자 인류의 지혜와 역량을 가늠하는 중요한 시험대다.

‘살림의 정치’로의 전환이야말로 시대의 필연적 과제

세상을 어둠으로 뒤덮고 있는 죽임의 정치를 극복하려면 생명과 정치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전환과 함께 새로운 대안적 비전이 절실하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출생률이나 공중 보건, 위생 등을 매개로 인구 집단을 통제하는 지배의 기술을 ‘생명정치’(bio-politics)라 불렀다면,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생존과 권리 확보의 차원을 넘어서 정체성과 삶의 가치 및 방향에 대한 개인의 실존적 선택으로서의 ‘삶의 정치’(life-politics)를 강조했는데, 이제는 현대 사회 전반에서 작동하는 ‘죽임의 정치’(necropolitics)에 대응해 생명 본연의 가치를 온전히 되살리는 차원에서 ‘살림의 정치’(salim-politics)를 대안으로 과감히 제안할 필요가 있다.

순우리말 ‘살림’(salim)에는 생명을 죽임으로부터 구해내어 ‘살리다’, 생명이 가진 고유한 본성에 맞게 스스로 ‘살아가다’, 그리고 생명 공동체의 공동 번영을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내려 놓고 양보하는 ‘사르다’라는 세 가지의 심오한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다. 따라서 ‘살림의 정치’는 단지 개체 생명의 생물학적 생존을 유지, 존속하는 차원을 넘어서, 소외된 채 죽어가는 생명 존재들에 대한 ‘치유와 돌봄의 정치’와, 생명 본성에 맞게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살아가는 ‘자립과 자치의 정치’, 그리고 생명공동체 모두의 안녕을 바라는 공공의 마음으로 공동의 선을 실현해 가는 '책임과 상생의 정치' 차원을 모두 가지고 있다.

살림의 정치는 생명 존재를 구획·위계화하고 관리·통제하던 낡은 죽임의 질서를 단호히 거부하고, 인간과 자연, 개인과 공동체, 인간과 비인간 존재 등을 생명공동체 전체 차원에서 창조적으로 재연결해 서로를 살림으로서 공존과 공생의 가능성을 확장해 가는데 초점을 맞춘다.

나는 이러한 살림의 정치가 기후 위기와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한국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정치 모델로 자리 잡기를 희망한다. 이런 마음으로 살림의 정치가 담고 있는 숭고한 가치를 현실화하는 방안 몇 가지를 제안해 본다.

첫째, 기후정의를 중심에 세우자. 배출량 총량 감축만이 아니라, 누가 더 많이 배출하고 누가 더 큰 피해를 입는지, 누가 적응 능력이 부족한지 등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가장 취약한 생명을 보호하는 것에 정책 목표를 둠으로써 기후 위기 대응 노력이 죽임의 정치 논리에 포섭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둘째, 생존 기반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인프라의 공공성을 강화하자. 민영화에 따른 파편화를 경계하면서, 에너지, 식량, 주거, 의료와 돌봄 체계를 강화하고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높여 나가자. 특히 재난 취약 지역을 중심으로 물·전기·이동·주거·의료·식량 같은 생존 기반 체계를 공고히 하자.

셋째, 편협한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윤리적 대전환을 이끌어 내자. 살림의 정치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 미래세대를 전체적으로 균형있게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오만한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숲·강·토양·동물·해양 등을 공동 세계의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인정하고 공존의 기반을 책임있게 만들어 나가자.

넷째, 연대의 범위를 심화, 확장하자. 기후위기는 국경을 넘어선 전지구적 문제로, 계층, 지역, 국가 단위를 넘어선 협력 없이는 해결이 어렵다. 국가와 세대, 계층 간 경계를 넘어 공존 공생을 위한 폭넓은 연대를 구체적으로 설계하고 실천해 나가자.

죽임의 참상이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점점 단편적인 기삿거리로 소비되고, 그만큼 사람들은 점점 타자의 고통과 죽음에 둔감해진다. 일상화된 죽임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는 죽음의 사회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생명을 차별적으로 다루는 죽임의 정치가 은밀하게 작동한다. 오늘날 죽임의 정치는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일상 속에 상시적으로 작동한다. 전쟁, 경제 제재, 국경 봉쇄, 난민화 문제는 물론이고, 기후 위기와 생태계 파괴, 일상에서의 고립과 배제, 억압의 문제들은 각각 별개의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어떤 생명(집단)을 우선순위에서 밀어내고 방치하고 함부로 해도 된다는 죽임의 정치 논리가 공통적으로 작동한다.

결국 생명 살림 세상으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이 죽임의 정치 논리를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생명을 존중하자’는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자기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을 대상화·수단화·상품화하는 현실의 구조적 문제를 들춰내고 해결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대안으로서 살림의 정치가 타자의 고통을 추상적 통계가 아닌 구체적인 삶의 문제로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를 기본으로 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살림의 정치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한다. “우리의 안전과 번영은 누구의 희생을 대가로 하는가?”, “우리는 누구를 위험 집단으로 낙인찍고 처벌하는데 동의하는가?”, “우리는 어떤 생명을 함부로 대하고 방치하고 포기해 버리는가?”

정규호 생명학연구회 부회장, '녹색국가' 저자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려 하지 않으면 죽임을 향한 질주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죽임의 문명을 멈춘다’는 것은 단지 전쟁을 반대하고 살상 행위를 멈추게 하는 것을 넘어선다. 이것은 어떤 생명도 함부로 다루고 버리고 죽임의 상태로 방치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자 선언이며, 새로운 문명의 기준을 세우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살림의 정치’는 선택이 아니라 시대적 필연이며, 우리가 미래를 희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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