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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는 드릴게"…한국 시사만화가의 행운?

"살려는 드릴게"…한국 시사만화가의 행운?

[기자의 눈] 프랑스 언론사 테러와 시사만화가들의 죽음을 보며

 
손문상 화백 2015.01.09 10:02:31

 

 
“그 손모가지를 자르고 싶다.”, “불 싸질러 죽이고 싶다.”
 
간혹 격 떨어지게 내 이름으로 한자풀이도 한다. 
 
“문상이 문상(問喪)가고 싶다.” 
 
25년간 시사만화를 그리며 고마운 격려의 말을 제외하고 들어왔던 많은 비난의 말 중에 비교적 점잖은 것으로 기억나는 몇 가지다. 최근엔 국가원수를 모독하고 명예를 훼손했다고 고발도 당했다. 이런 피드백이 만성이 돼서 시사만화가 누구나 아무렇지 않다면 새빨간 거짓말일 것이다. 가끔씩 듣는 심하다 싶은 댓글에는 쓰라린 내상을 입는다. 그러다 이내 훌훌 털고 직업적 숙명임을 받아들인다.  
 
시사만화가들은 보수 진보를 떠나 오늘 한국의 언론환경에서 불편한 존재가 된지 오래다. 조중동을 비롯한 우리 사회 주류신문에는 어느새 대부분 시사만화가 없다. 십여 년 사이 일이다. 비판과 풍자의 칼날은 언론 그 자신에게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 역시 <프레시안>에 있기 전 여러 신문사를 거쳤다. 아마도 시사만화 작가가 풍자와 비평에 관해 다른 방식으로 욕먹기를 즐기거나, 그 언론 사주와 동일한 비판정신(?)을 갖고 있다면 지금보다 시사만화는 더 많은 매체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한민국에서 저널리즘이 고전적으로 내게 가르쳐준 비판방식을 고집하며 아직까지 시사만화를 그리고 있다는 행운에 늘 감사하고 있다. 무수한 언어폭력이 가해지지만 적어도 우리 사회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살려는 드릴게!”   
 
여기 시사만화를 그리다 암살과 테러를 당한 두 죽음이 있다.  
 
▲ 이스라엘의 반 팔레스타인 정책에 놀아나는 아랍 세계 지도층을 비판한 나지 앙 알리의 만평. 이를 지켜보는 꼬마 한잘라가 보인다. ⓒ칼디르 알 알리

▲ 이스라엘의 반 팔레스타인 정책에 놀아나는 아랍 세계 지도층을 비판한 나지 앙 알리의 만평. 이를 지켜보는 꼬마 한잘라가 보인다. ⓒ칼디르 알 알리  

 
 
 
1987년 런던 첼시의 이브닝 가에서 총격으로 암살당한 팔레스타인의 양심이자 지성인 시사만화가 나지 알 알리(Naji Al Ali)의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제 2015년 1월 7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중심가 주간지 <샤를리 엡도> 사무실에서 무참히 희생된 시사만화가 4명 스테판 샤르보니에(Stéphane Charbonnier), 카뷔(Cabu), 볼린스키(Wolinski), 티그누스(Tignous)의 죽음이다. 이들은 성역 없는 풍자와 비판으로 표현의 자유를 목숨처럼 아니, 목숨으로 바꾼 이들이다. 개인적으로는 2012년 프랑스 르모쥬에서 열린 ‘세계시사만화축제’에서 인사를 나눈 이들이다. 
 
▲나지 알 아리ⓒ칼리드 알 알리

▲나지 알 아리ⓒ칼리드 알 알리  

뒷짐을 진 채 언제나 만평 속을 응시하는 꼬마 캐릭터 ‘한잘라’로 유명한 만평작가 나지 알 알리는 팔레스타인인으로 무슬림이다. 그가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부터 레바논, 쿠웨이트를 거쳐 영국으로 망명하기까지 성역 없이 비판해온 것은 이스라엘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뿐만이 아니었다. 아라파트를 비롯한 팔레스타인과 아랍세계 지도층들의 부패와 반민중적 정책에도 치명적인 날카로운 펜을 들었다. 종교적 근본주의자와 극단주의도 풍자와 비판에서 예외가 없었다.  
 
 
실제로 나지 알 알리는 아라파트의 팔레스타인판 용비어천가를 쓴 터키출신 여성작가문제를 조롱한 만평을 그린 후 협박전화를 받았고, 3일 뒤 출근길 거리에서 암살당했다. 물론 아라파트 일파의 짓인지 혹은 평소 수없이 암살의 위협을 암시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소행인지 오늘까지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다. 
 
 
이번 프랑스 <샤를리 엡도> 테러도 과거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테러의 악몽을 되살린다. 1995년 파리의 지하철역에 폭탄을 터뜨려 8명이 사망하고 119명이 부상당한 생미셸 역 사건과 2012년 남부도시 툴루즈에서 알카에다 연계조직에 몸담았던 모하메드 메라가 총기를 난사해 4명의 유대인 학생들과 3명의 프랑스 군인을 사살한 사건 등이다.  
 
20세기 이후 유럽사회는 식민지의 이슬람 유입인구가 2,3세대로 늘면서 프랑스만 해도 무슬림은 전체 인구의 7.7%에 이른다. 그만큼 프랑스 사회의 주요 의제와 문화적 담론들이 큰 이슈가 되어 있다. 당장 이들의 죽음으로 프랑스 사회에서 르펜이 이끄는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이 가장 큰 반사이익을 볼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유럽 전역에서 나오고 있다. 프랑스의 중요한 사회문제이나 여전히 일상의 차별과 사회적 약자인 이슬람 이민사회를 증오의 대상으로 설정해 세력을 확장하는 극우주의 정당은 과거 나치의 모델을 연상시킨다.
 
샤르보니에르는 평소 이슬람종교도 성역에 두지 않았지만 테러와 살해 협박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그들(이슬람 극단주의자)은 프랑스 이슬람교도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말해왔다. 여기에 조응하는 프랑스의 보편적 이슬람 사회의 발 빠른 반응도 보인다. 보르도 지역의 이슬람지도자 ‘타레크 오우브로우’는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난 후 “우리는 지금 전쟁행위를 보고 있는 것"이라며 9·11 테러에 빗대 무슬림에게 이번 테러를 비난하는 시위에 합류할 것을 촉구했다. 
 
나지 알 알리나 <샤를리 엡도>의 편집국에서 살해된 4명의 시사만화가들의 죽음도 표현의 자유나 시민사회의 비판을 수용할 수 없는 극단주의자들의 방식이다. 이슬람이나 기독교 등 모든 종교적 근본주의나 좌우의 정치적 극단주의는 무한대처럼 서로 멀지만 실상은 가까이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거울이다. 결국 극단주의의 문제지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사회라면 테러가 일어났다 해서 혐오와 증오를 더욱 부추기거나 또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라 가르치진 않는다. 그렇다고 테러에 굴복할 것을 용납하지도 않는 사회일 것이다. 
 
나는 오늘 대한민국을 살면서 또다시 의심하고 우려하며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 사회가 프랑스 <샤를리 엡도> 테러 사건을 뉴스로 소비하는 방식은 어떤가? 아직도 반인권과 차별로 얼룩진 이주 노동자 문제를 덮어버리는, 혐오와 증오의 극단적 반 이슬람 정서의 거울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 다른 한 편의 거울엔 무엇이 있을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증오의 종북몰이, 혐오의 폭식투쟁, 유신을 넘어 서북청년단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내 점점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다 터지는 황산 냄비폭탄을 본다. 
 
이런 사유와 허망한 상상의 끝은 언제나 한없이 우울하고 착잡하지만 복잡한 생각을 뒤로하고 오늘부터 당분간은 이번 테러로 죽은 이들과 같은 시사만화가로서 <샤를리 엡도>의 4명의 시사만화가들에 대한 조의 기간을 가질 생각이다.  
 
그런데 또 꼬리를 물며 떠오르는 생각 하나. 
 
나는 언제까지 “살려는 드릴게!”라는 환청으로 들으며 이 땅에서 안심하고 살 수 있을까?   
 
▲ 2015년 1월 7일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엡도>에서 희생당한 4명의 시사만화가. 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스테판 샤르보니에(Stéphane Charbonnier), 볼린스키(Wolinski), 카뷔(Cabu),  티그누스(Tignous) ⓒwww.europe1.fr

▲ 2015년 1월 7일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엡도>에서 희생당한 4명의 시사만화가. 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스테판 샤르보니에(Stéphane Charbonnier), 볼린스키(Wolinski), 카뷔(Cabu), 티그누스(Tignous) ⓒwww.europe1.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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