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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5/24
    요즘2 -신현림, 공지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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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7/04/27
    무제 -신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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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읽는 책> 안톤체호프 -6호 병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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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6/09/24
    '마키아벨리의 가면' 중에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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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09/13
    시간의 풍화작용- 전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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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08/27
    수선화에게 -정호승(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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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8/09
    <레볼루션>-가네시로 가즈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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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6/07/29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와 하루살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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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6/05/28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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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5/09
    [책]엘리자베스 코스텔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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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가면' 중에서

정세는 다양한 상황을 이루는 요소들 내지는 목록들의 단순한 요약이 아니라

정치적 문제를 제기하고 그 역사적 해법을 제시하는

그에따라 정치적 목표와 실천적 과제를 던져주는 모순적 체계이다.

 

루이 알뛰세르, '마키아벨리의 가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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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풍화작용- 전혜린

시간의 풍화작용

 

 

결별은 쉬운 일, 그러나 그 다음이 항상 문제인 것이다.
사고(思考)는 항상 사실적인 힘임을 믿고 있다.
끊겠다는 의지가 끊는 행위와 같은 것을 뜻하는 셈이다.
  그러나 사실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
한 미소나 한 눈동자, 한 목소리를 기억의 표면에서 말살해 버리는 것은
많은 국가와 시간의 풍화작용의 도움이 필요하다.
잊겠다는 의식만으로는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
관념이 긍정한 행위를 우리의 감성이 받아들이기에는 또 하나의 훈련이 필요하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듯이 완전한 자유의지는 아닌 것 같다.

- 1964년 1월  20일 -

 

 

 

 


암흑의 장막이 하늘을 덮고 비가 그칠 새 없이 창문을 두들긴다.
벽난로의 불은 꺼지고 말았다.
독서에 피곤해진 눈을 쉬게 하려고 책상 앞에 하염없이 앉았노라니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절절한 고독감뿐.
이웃 방에서 도란도란 들려 오는 독일어도 나의 쓸쓸한 심정을 한층 북돋을 뿐이다.
마치 두더쥐가 땅속의 온기(溫器)를 탐내듯,
인간은 한 줌의 친절함과 인정(人情)의 필요를 느끼는 생물이었던가.
모든 것이 나에게 무관심하구나, 하는 생각은 아무래도 견디기 어려운 서러움이다.

따스함을, 이해를, 건강을 갖고 싶다.

살고 싶은 의욕을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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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에게 -정호승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것은 외로움을 견디는일이다.

공연히 오지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있는것도 외로움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있는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연금술사>였던가, 정확한 책 제목이나 구절은 기억이 안난다. 지금 쓰면서도 생각해보니, 나르시즘에 대한 이야기 중 새롭다고 생각했던 그 내용이 소설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이래서 독서감상문이 짤막하게나마 필요한거다.

 

  각설하고, 자신의 모습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호수에 빠져 죽었다는 소년 나르시소스에 관한 이야기를 그의 모습을 비추게 한 호수에게 물었다. 그를 저주에 빠지게 한 에코를 비롯해 모든 요정들도, 자연마저도 사랑했던 그의 외모를 가장 가까이서 들여다보던 호수.   자신도 역시 나르시스의 외모를 사랑했지만, 자신에게 손을 대면 안타까워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게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결국 그의 얼굴을 비추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어 자신의 가장 깊은 곳 까지 이르게 한 것. 가장 비극적인 건 메아리가 되어버린 에코의 목소리도, 죽어서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난 나르시소스도 아닌 호수라고 생각했다.

 

수선화의 꽃말을 찾아보니, 자기자랑, 자존심, 고결이란다.  정호승의 시를 읽다가 외로움 때문에 물가에 앉았다는 너(수선화)를 생각했다. 늘 만족할 수 없는 '자기애'의 운명을 지고 태어난 것 같다. 하긴, '자기애'만 늘 만족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느끼는 외로움이란게, 존재의 고절함까지 이르게 만들때도 있긴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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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볼루션>-가네시로 가즈키

우와! 신기신기!  트랙백이란게 이글루 글에도 되는구나.

그냥 나중에 쓰려고 했는데, 선배 블로그에 흔적이 남길래 계속 쓰기로 했다. ㅠ.ㅠ

-우울씨 블로그 http://trust01.egloos.com/1386578와 관련된 글

 

엊그제 아는 사람의 소개로 읽게 된 책이 있었는데,

가네시로 가즈키의 <레볼루션>이라는 책이다.

차를 타고 가는 길에 읽은지라, 반 정도 밖에 읽지를 못해서 제대로 된 서평을 쓸 수는 없고

그냥 읽으면서 느꼈던 생각들을 몇 글자 써 나갈 생각이다.


 

  작가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세지는 비교적 명료한데,

그건 초반에 등장하는 닥터 모로를 통해서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번밖에 안 읽은거라, 정확한 구문은 잘 기억이 안나고 내가 기억하는대로 표현하면

작가는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나타내고 싶었다고 생각했다.

기준미달인 자에게는 인간다운 삶이 허락되지 않는 세상에서.



조세희의 '뫼비우스의 띠'에서 보면 모로와 비슷한 역할을 담당하는 수학교사가 등장한다.

굴뚝청소를 하는 아이의 일화를 통해 교훈을 주려는 수학교사는 닥터 모로와같은 역할이지만

그보다는 부드러운 느낌을 받아서 소설의 시작이 맘에 들었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비인간성을 습득하는 아이들.

그것이 일상적이고 상식적이 되어버리는 순간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

주인공(a)은 그 또래 아이들처럼 평범하면서도, 닥터 모로의 말에 공감하고 있는 그런 아이였다. 

 

 

 a를 비롯해 좀비스의 일원인 b.c.d (이름이 기억 안나서  ㅡ.ㅡa, 하지만 좀비스는 참 맘에 드는 명칭이었다.)

모두 평범한 소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생각한 평범은 실제로 주변에 존재할 말한 인물이라는 의미에서다.

제 각기 가정환경에서나 주변에서 고민과 문제가 존재했고, 문제가 없는 아이가 없었다.

특히 주인공 a는 겉으로만 보면 좋은 대학을 나온 부모님 밑에서 별 문제 없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이었는데, 한번의 탈선과 부모님의 이혼으로 이제는 문제아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친구의 죽음. 평범하지 않으면서도 평범한 그런 아이들이었다.

 

 

내가 읽은 중간은 바로 친구 하나가 죽음을 맞이 하기까지,

그리고 새로 시작된 삶- 작년과는 다른 땡땡땡 여고의 축제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는 계획-이

시작되는 부분까지이다.

 

 

 

 

책을 읽으면서 처음엔 조금 불쾌했는데,

그건 내가 잘 이해할 수 없는 남고문화가 가져오는 낯설음 때문이었다.

닥터 모로가 말하는 사람답게 사는 방식-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의 이면은 앞서 말한 것이겠지만

 그것을 실현해나가는 과정이 초반까지는 주변의 여고 축제에서 여학생에게 성공적으로 접근해 가는 것이었다.

 

(그 방식이 조금은 신선하게 표현되긴 했는데

예를 들면 여학생에게 접근하면서 "아무렴 어때, 아무렴 어때" 외쳐대는 모습들.

생각해보라. 기준 미달인 것 같은 남학생이 와서는 고개를 흔들며

"아무렴 어때 아무렴 어때"를 외치면서 주변을 얼쩡거리는 모습을.ㅋ 

 하지만 이 방법은 실패였다.)

 

아직은 정확하게 평을 내릴 수는 없는데, 책을 읽는 내내 자신을 찾아가는 방법이

지극히 남성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책을 권해준 사람에게 조금 불쾌했다고 말했다.

그게 나만 느낀건지. 잘못 느낀건지 아직 판단 못했는데,

암튼 내가 고등학교 때 친구따라 남고 축제에 한번 따라갔다가,

운동장을 몇 바퀴 정신없이 끌려다닌 기억까지 나서 별로였다.

그랬더니 권해 준 사람은 한면만 보라고 했나, 한면을 보라고 했나 암튼 충고를 해줬다.

 

이런게 가즈키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보통인지,

아니면 플라이 대디인가...그 영화에서만 느껴지는 감독의 미숙함인지 잘 모르겠다.

 

대신 재일작가이긴 하지만 역시 일본의 문화를 많이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소설을 읽으면서 GTO에서의 오니즈카의 모습이라든지,

<드래곤 사쿠라>류의 분위기를 함께 느꼈기 때문이다. 잉...너무 오버인가?

 

GO라는 책을 추천해줬는데, 그것도 한 번 제대로 읽어보고 생각해봐야할 듯.

 

 

 

어쨌든, 나머지 반을 읽어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각기 다른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가진 좀비스의 일원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 나갈것인지, 작가는 어떻게 그려나갈것인지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꽤 읽어볼만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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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코스텔로와 하루살이씨

 

초보좌파님의 [모기죽이기] 를 읽고.

길거리를 배회하다, 우연히 빠져든 한 모양의 목구멍에서

고통스럽게 미끄러져내려가 끝내 사망한 하모씨를 기억하며.

 

 

평소에 입을 벌리고 다니지는 않는데, 그 날따라 유난히 하품을 자주 했다.

여러마리 있던 것도 아닌데, 절묘한 타이밍으로 목구멍으로 들어온 하루살이씨.

인간보다 길지도 않은 삶으로 매 순간 삶을 위해 고난과 도전을 겪었을 하루살이씨는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끝끝내 생을 마감했다.

그 순간 한모양은 목구멍이 이상해 계속 구역질을 하다가 완전히 넘긴 다음 순간

'단백질 섭취인가'라고만 하고는 유유히 사라지고 말았다는...슬.픈.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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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에 얼마전에 읽은 책이 있어서 몇 줄 끄적거린다.

요즘에 머리를 식히려고, 외국소설부터 다른분야의 책들을 읽고 있는 중인데,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고 (내가) 평가하는 책이 있다.

존 쿠시의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처음엔 이 책을 선택했던 이유가, 인간은 왜 자신에게 피해가 되는지 알면서도

이타적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에 대한 해답을 알고자 했으나,

애석하게도 이 책에서는 그런 내용이 명시되지는 않았다.

다만 몇 가지 물음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던져주고 있었다.

 

존 쿠시가 이 작품으로 노밸평화 문학상을 탔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이 전해주는

주요 명제들은 전쟁(정확하게는 유대인 학살문제), 그리고 그것을 방관한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에 대한 내용이다. (물론 그 외에도 몇 가지가 있다)

나이든 여성 원로작가가 연설의 형식으로 말하는 소설의 형식은 지금도 지구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문제에 대해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읽어볼만 하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의 의의를  다른 것에서 찾았다.

전쟁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를 위한 전제-인간의 이성은 과연 합리적인가-에 대해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증명하는 방식이 꽤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채식주의자로서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방식으로 진행해나갔다.

 

 

 



증명방식으로는 여러 방법이 나오는데, 그 중 하나는 이거였다.

인간의 이성을 증명하려는 심리학자들의 여러 실험 가운데 유명한 것 중 하나가

쾰러의 통찰설이다.

원숭이가 매달아진 바나나를 먹기 위해 사고를 하고(아하!) 도구를 이용해서 먹이를

찾을 수 있다는 실험을 통해 인간의 지능(이성)이 증명된 것이다.

이건 심리학 수업에도 행동주의와 다르게 인지이론의 기본으로 등장하는 실험내용이다.

 

 

그런데 엘리자베스는 이 실험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이 생각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이 과연 옳은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과 같다.

 

늘 먹이를 주던 사람이 바나나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상자를 던져 주는 순간 원숭이가 생각한다.

왜 저 사람이 저런 행동을 하지?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게 된 걸까?

우리는 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지? 나는 왜 계속 굶어야만 하는걸까?

나는 예전처럼 돌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하지만 이런 생각은 틀렸다.

 

원숭이는 바나나만 생각하고, 상자를 이용해 먹이를 얻을 생각을 한다.

이 생각은 옳은 것이다.

 

이것이 과연 합리적이고 의심할 수 없는 이성의 정당성인가.

 

뭐, 이런 내용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까 별 내용 아닌 것 같은데,

책을 읽는 순간에는 신선했던 것 같다. 난 한번도 쾰러의 통찰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못 해봤으니까. 그냥 실험 그 자체에만 집중해왔던 것 같은데,

작가는 그러한 인간의 이성에 대한 모든 것에 의문을 품었던 것이다.

 

 

 

 

동물의 생각을 인간이 생각해본다는 것.

대단히 관념적이면서도 동시에 그건 인간중심적 사고의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앞에 써 놓은 슬픈 하루살이씨의 삶은 나의 생각이다.

그런데 길지도 않은 짧은 하루살이의 생이란 결국 내 삶의 기준에서 짧은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들이 중요한 것은

인간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작. 뭐 그런걸로 의미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뭐, 꼭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p.s)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에 대한 덧붙임.

 

서평을 따로 쓸까 하다가 이왕 쓴 김에 몇 자 더 붙여 놓는다.

이 책에서 또 눈여겨 봤던 점 중 하나는 등장인물이 여성작가로 설정되었다는 것이었다.

여성소설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들.

요즘 생각하는게 이런고 하니, 눈에 띄는 것도 그렇지.ㅋ

 

엘리자베스 그녀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고,

글을 쓰는 동안 그녀의 두 아이들은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야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가 글을 쓰는 동안 집 문을 잠가버렸고,

그 동안 아이들은 문 앞에서 쭈그리고 기다리고만 있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엄마의 글쓰기가 마무리되기를 기다렸다.

 

이게 통쾌하다고 느꼈던 까닭은 이런 내용의 소설을 우리나라에서는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90년대 이후 여성작가들의 글쓰기가 가시화되고,

여성들의 자아찾기가 점차 주류를 형성해 가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내용은 자아를 찾고 싶어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와 일탈을 꿈꾸는 그녀들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의 여성작가들은 자신을 옭아매는 가부장제도의 억압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번도 엘리자베스와 같이 자신의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잠그고 자신의 글쓰기를

진행했던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아이와 남편, 친정과 시댁 식구간의 굴레 안에서

벗어나고 싶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이 책이 신선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작가가 남성이였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우리와는 정말 다른 서양문화와 사고방식 때문이었을까?

분명한 건 우리나라의 다양한 여성작가의 개성 가운데에서도 그녀들을 지배하는 관습과 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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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 할머니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인가.

 

 

  공지영의 소설을 오랜만에 손에 집었다. 난 공지영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공지영 뿐 아니라 은희경, 신경숙, 하성란 등으로 이어지는 90년대를 풍미한 여류 작가들의 소설을 그닥 즐겨읽지 않는 편이라 해두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진보의 물결에 잠깐 발을 담갔던 것 처럼 묘사되는 공지영의 글이나, 중년 여성의 사랑과 삶을 그려내 읽는 이로 하여금 허무를 느끼게 하는 은희경이나, 따라 잡을 수 없는 생각의 묘사로 문장과 문장의 사이에 존재하는 사고의 간격을 허벌나게 따라 잡아야 하는 신경숙도 싫었다.

 

 더 사실대로 말하면 그녀들이 그려내는 자신의 일부인 그녀들의 삶이 싫었던 것 같다.

그녀들의 모습은 내 어머니의 모습이었고, 미래의 나의 모습인 것도 같았으며, 현재의 내 모습이기도 했다. 그래서인가, 나 역시 그녀들의 삶이 그려진 소설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푸념을 늘어놓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동조하는 남성이 있으면 이상하게 벨이 꼴렸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점점 아해가 가는 표현들이 생기는 것이 진절머리가 났다. 정말 이상한 심보다.

 

 

[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는 소설은 내게는 너무나도 공지영스러운 소설이었다. 짧은 단편 소설이라 내용의 긴밀도는 좀 떨어지는 편이지만, 그래도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대략 말해놓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골똘히 생각했다. 과연 죽지 않는 할머니를 위해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완벽한 살해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이 할머니를 과연 죽여야 할까?

나는 이 할머니를 과연 죽일 수 있을까?

 

 

  주인공 '나'는 현재의 나에게 짧은 편지 형식으로 조언을 구하고 있다. 나는 17세의 소녀인데, 스스로의 표현에 의하면 강남에서 좀 놀았다는 정도로 순순한 성격은 아니다. 나에게는 몇 해 전부터 죽을 것 처럼 앓고 있으면서 죽지 않는 할머니가 있다. 가족 모두는 할머니의 유산을 탐내며 할머니를 정성껏 간호하는 척 나서지만, 나는 할머니를 증오한다.

  나에겐 할머니를 증오할만한 이유가 존재하는데, 그건 내가 지켜야만 하는 존재인 -어린 나이에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스스로도 어리둥절하다고 말하는데- 장애를 가진 동생이 할머니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우리집 상황에 대해 알아야 한다.

할머니가 아플 때마다 이상하게 누군가가 죽어나간다. 처음엔 갓 결혼한 막내 외삼촌이었다.

외삼촌이 죽자 식도암 말기로 죽어가던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 미음을 가져오라고 소리친다. 그걸로 성이 차지 않는 할머니는 비쩍마른 손마디로 기름기 뚝뚝 떨어지는 갈비살을 뜯어먹는다.

 

 그 다음 해 되찾은 할머니의 건강이 다시 시들해질 무렵, 큰 외숙모가 죽자 할머니는 다시 일어난다. 그 다음 차례는 우리집에서 10년간 일하신 불쌍한 가정부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가 죽자 자리에서 일어난 할머니는 그녀가 그렇게 죽은 건 지탓이라며 보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가족들 모두 할머니의 의견에 동조했지만, 나는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무슨 주문을 외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탐욕과 몰인정함에 치를 떤다.

 

  죽을 것 같으면서도 죽지 않으면서 이젠 내 생명과 내가 지켜야할 동생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할머니. 사실 할머니에게는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 뱃속에 아이를 가졌어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지경을 넘어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먹어야 했던 과거가 있다. 그래서 부뚜막에서 발견한 새끼를 배고 있는 고양이를 삶아 먹었던 이야기를 우연히 털어놓는다.

어쨌든 지금의 할머니가 죽어갈 때마다 이웃집 개, 쥐, 참새들 무언가가 죽어나가는 것을 발견한 나는 할머니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안다면 가르쳐 달라며 끝을 맺는다.

 

 

 

할머니는 누구일까? 작가는 끝끝내 밝히지 않고, 이상한 분위기만 풍긴 채 독자의 몫으로 돌린다. 보다 정확하게는 할머니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으며, 할머니가 보이는 행동과 이것을 막을 방법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할머니가 죽지 않기 위해 했던 행동들의 원인을 따라가면 그건 환경에 따른 것이었다. 악착같이 보존하려는 재물에 대한 탐욕 이전에 살기 위한 본능을 따랐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고민이 들었다. 할머니는 죽어야만 할까.

 

처음엔 할머니의 존재를 자본가라고 생각했었다. 생각하는게 늘 이런식이라, 바라보는 시각도 한정되어 있다. 본질을 분명하게 파악하는 것과 편협한 생각으로 다양하게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요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하면서 느끼는 건 내가 후자에 더욱 가깝다는 사실이다.

 

이 소설에 대한 평론을 잠깐 읽어보니, 그 평론가는 할머니의 존재를 탐욕이라고 해석했다. 틀린 해석은 아닌 것 같다. 할머니는 죽을 것 같으면서도 식지 않는 탐욕스러운 모습이니까 말이다. 탐욕은 과연 죽어야만 하는 존재일까? 내가 지켜야할 그 무언가의 존재를 위해서?

그렇다면 과연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해답이 없는 것 같은 소설하나를 읽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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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지은이 존 쿳시 지음  | 왕은철 옮김
출판사 들녘
책 소개

노벨문학상 수상자 존 쿳시의 2003년 작품. 기존에 국내에 소개된 『야만인을 기다리며』『철의 시대』『마이클 K』와 같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안고 있는 문제, 즉 흑백 갈등을 그 모티브로 삼고 있는 작품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우선 그의 작품의 중심 배경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동했다. 또한 작품은 기존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형식이다. 즉, ‘여덟 가지 강연’이라는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여덟 가지 주제를 담은 강연 내용이 큰 기둥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비록 형식과 내용에서 어떤 변화가 있든지 간에, 여전히 강렬한 이미지의 표상과 노련한 글솜씨는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소설과 비소설(강연, 에세이)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포스트모던한 기법의 작품

(하략)

 

 

<목차>

Lesson 1. 리얼리즘
Lesson 2. 아프리카에서의 소설
Lesson 3. 동물들의 삶 I - 철학자들과 동물들
Lesson 4. 동물들의 삶 II - 시인들과 동물들
Lesson 5. 아프리카에서의 인문학
Lesson 6. 악의 문제
Lesson 7. 에로스
Lesson 8. 문에서
후기 - 레이디 찬도스, 엘리자베스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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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서핑하다가 궁금해진 질문.

" 사람들은 왜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을 알면서도 이타적인 행동을 할까. "

이에 대한 생각을 써놨다길래, 한번 읽어보고 싶어졌다.

 

책 읽을 여유도 없고-책 읽으러 갈 시간이 없고, 책 사볼 돈도 없다 ㅠ.ㅠ-

읽고 싶은 책만 쌓여간다.

8월부터는 좀 가능해지려나? ㅜ.ㅜ

철학과 관련된 내용이라 대단히 관념적일 것 같긴 한데,

언제 시간내서 읽어볼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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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아내가 결혼했다.

   

 

 

책 소개

남자와 결혼해 버린 발칙한 아내!

‘결혼’이라는 결정적 한 골을 희망한 남자와
2명의 골키퍼를 동시에 기용한 한 여자의 유쾌한 반칙 플레이


제2회 세계문학상 당선작 『아내가 결혼했다』가 출간되었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이중(二重) 결혼을 하려는 아내와 그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남편의 심리를 역동적인 축구 이야기와 절묘하게 결합시켜 오늘날의 독점적 사랑과 결혼제도의 통념에 대해 발랄하게 문제 제기를 하는 소설이다. 작가는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의 결혼관을 거침없이 소설로 끌고 들어와 시종일관 밀고 나가며 일처다부의 상황을 수용하게 만드는 도발적인 서사를 만들어 감으로써 일부일처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솔직하고도 대담한 판타지를 전개한다. 『아내가 결혼했다』의 서사가 갖고 있는 “배수진 없는 무모한 탈주는 일부일처제나 절대적 사랑의 시효가 만료되어 가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소유욕과 독점적 연애, 배타적 결혼관이 우리의 행복을 억압하는 방식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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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뉴스를 보다가 책소개를 하는 것을 보면서 찾아 봄.

엊그제인가 선배 블로그의 글을 우연히 읽다가 생각한 내용이 떠올랐다.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선배의 대답은 기억이 안나고. ㅡ.ㅡa

 

내 대답은 '소유욕'

 

결혼제도이든 연애관계이든 사람과 사람사이의 알량한 소유욕과 힘의 관계가

작용해 여러가지 요인과 함께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내용들을 과연 이책에서 끌어낼 수 있을까란 생각과 과연 재미있을까란 생각에 궁금해짐.

에이...서점에 가야 하는데, 요즘 시간이 없는 관계로...

당분간 보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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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에서-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선운사에서, 최영미

 

 

봄이다.

한참 만개한 꽃들을 보면서 좋다,좋다하면서 지나치다가 

문득 최영미의 시가 떠올랐다.

시를 처음 읽었을 때에는 그저 사랑과 관련된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자연에 대한 시인의 세심한 관찰을 바탕으로한 인생에 대한 이야기같다는 생각이다.

 

꽃은 정말 순간에 피었다가도 금세 영락의 순간을 맞이하고 만다.

봄은 정말 한 순간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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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선 &quot;사랑을 위한 서시&quot;

송하선 "사랑을 위한 서시"

사랑한다는 것은
햇빛의 미소를 배우는 일이다.
스산한 가을날 아침 무렵
나뭇잎새의 이슬방울들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며 잠재우는
햇빛의 미소를 배우는 일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햇빛의 손길을 배우는 일이다.
스산한 가을날 저녁 무렵
알몸이 된 나무들의 간절한 기도를
차마 떨치지 못하고 쓰다듬어 주는
황혼빛의 손길을 배우는 일이다.

아, 우리네 고단한 인생살이에
사랑을 한다는 것
사랑이라는 이름의 꽃을 피우는 일은
물처럼 그러나 잔잔한 호수처럼
모두 다 끌어안으며
아름다운 동화의 나라를 꿈꾸는 일

사랑한다는 것은
저 높은 산의 마음을 배우는 일이다.
하늘 아래 큰어른처럼 우뚝히 서서
손 아래 무릎 아래 형제들을 거느리고
묵묵히 묵묵히 미래를 명상하는
저 높은 산의 마음을 배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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