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서=신앙고백 2011/12/01 15:23

여성가족부 앞 농성장 철거 도발에 대한 혁명기도원 성명서

 

혁명기도원은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새 나라에 연대하게 된 온 세상의 교회와 함께또한 앞서간 모든 순교자들과 함께, 2011년 9월 2일 여성가족부 앞 농성장 철거의 주범들을 규탄한다.

 

우리가 물려받은 거룩한 복음은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가 나자렛의 난민이요노숙인 랍비였다고 전하고 있다우리가 주님으로 부르는 그는 강함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려 하지 않으시고힘이 없어 빼앗긴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셨다그러므로 우리는 일자리를 빼앗겨 길거리로까지 내쫓긴 이들 안에서 우리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고그들이 받은 고통이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고통임을 발견한다교회는 이 고통을 통해 다시 한 번예수를 십자가의 길로 내 몬 자본과 권력의 밀월관계가 여전히 세상에 편만함을 발견한다그리고 십자가 위의 예수를 통해 하느님을 본 우리가 어느 곳누구 편에 있어야 하는 지를 다시 깨닫는다.

 

위의 깨달음을 바탕으로혁명기도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자신들의 사무실 앞 길거리에 나앉은 노동자를 귀찮게 여기며그들에게 행사되는 폭력을 방조한 여성가족부는 당장 회개하고 보상하라.

2. 더 큰 피해 상황이 생긴다면 그것은 현대자동차의 책임이다당장 피해자 원직복직 시행하라.

3. 경찰은 자본의 노예 노릇을 당장 그치고 회개하고용역의 사적 폭력을 방지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리는 새 나라를 맞이하라.

 

 

하느님이여그들을 벌하소서제 꾀에 걸려 넘어지게 하소서수없이 범죄하는 자들주님께 반역하는 무리들을 쫓아내소서 (시편 5).

 

구주강생 2011년 9월 4혁명기도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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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1 15:23 2011/12/0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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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드려요! 2011/12/01 15:13

혁명기도원 모임 안내

정기 예배:

 

매주 수요일 7시, 청계광장 근처 여성가족부 건물 앞,

현대차 사내하청 성희롱 부당해고 피해 노동자 농성장

http://blog.jinbo.net/bokjik/

 

 

 

특별 예배:

 

2011. 12. 1.

재능교육 대책위 연합예배,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앞. 오후 7시.

 

2011. 12. 3.

뉴타운 간첩파티 행사중 기도회 인도, 대한문 앞. 오후 5시.

 

2011. 12. 25.

성탄절 저녁송. 오후 5시(?)  재능 농성장, 여가부 농성장과 명동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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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1 15:13 2011/12/0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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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칼럼 2011/12/01 11:09

성무일과, 혁명적 일상으로의 초대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까요. 저는 성무일과에 대한 글을 쓰고싶습니다만, 그것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서는 A.G. 마르티모의 『시간전례』(가톨릭대학교출판부)를 따라잡을 수 없고, 성무일과를 전염시키는 효과에 있어서는 로버트 벤슨의 『중단 없는 기도』(IVF)를 따라잡을 수 없을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는 이유는 제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 위의 역사적 명저 두 권을 꼭 읽어주셨으면 하는 생각에서 입니다.

 

저의 관심은 앞의 두 저자분들과는 조금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 관심은 2009년 말 성모송 묵상인 「마리아의 도전」을 쓰던 때의 관심과 같습니다. 그것은 다른 세계를 꿈꾸는 친구들에 대한 관심입니다. 이 관심이 시작된 것은 고등학교때부터 였던것 같습니다만, 결정적 순간은 2008년에 찾아왔습니다. 촛불의 밤은 꿈들의 향연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세상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 권력의 형태 곧 인간관계의 방식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꿈들이 현실을 압도하는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노래와 춤과 촛불. 그것은 가히 현실을 무시하고 나타난 천국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춤을 가르쳐 주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나누고, 다른 세계의 파편을 옆사람의 초에 옮겨주었습니다. 그 날의 우리는 '마치 꿈 꾸는 것 같지'(시편 126:1) 않았던가요!

 

성서는 하느님의 백성의 역사가 꿈과 같은 순간으로부터 시작했다고 증언합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유목민의 후손들은 어느날 갑자기 현재와 미래/현실과 꿈이 뒤섞이는 사건들을 목도합니다. 그들의 숨통을 죄던 지배체제가 미증유의 사건들로 인해 삽시간에 마비되어 버렸습니다(이것은 출애굽기 7-13장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책은 그 일을 일으킨 힘은 바로 '주님의 손(15:6)' 이었다고 선포합니다. 이집트는 그들에게 현실이었고 그것이 극복된 세상인 하느님 나라는 이들에게 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꿈이 현실을 압도하며 나타났습니다. 잠시이지만 꿈이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느껴지는 순간 속으로 하느님의 손이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는-꿈의 클라이막스!- 사건 이후 이들은 다시 현실 속으로 던져집니다. 마치 촛불의 밤들 이후 다시 '이명박 정부'라는 현실 속으로 내동댕이 쳐진 우리처럼 말이죠. 하느님의 백성들은 다시 '현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의해서는 무효하다고 선언되었으나 그들의 몸과 마음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이집트라는 현실이었습니다.

 

성무일과는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새로운 현실인 하느님의 통치 아래에 살게 되었지만 제국의 '현실'에 의해 형성된 몸과 마음을 갖고 있는 우리를 위하 것입니다. 신명기 저자는 이스라엘에게 계명들이 주어진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신명기 6:24)".

 

그가 말하는 '오늘'은 현실을 압도하고 나타는 하느님의 손이 역사하는 꿈의 시간입니다. 그 꿈의 시간 속에 계속 살기 위해 하느님의 백성은 무언가를 할 필요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저자가 제안하는 것은 일단 그 꿈의 시간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것(6:21-25)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말로만 전해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삶의 주기를 그 이야기에 비추어 재구성할 것을 요구 받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의 계절절기들을 혁명적으로 재구성하여 출애굽이라는 꿈의 시간 안에서 정합성을 갖는 일년 주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이 과월절(유월절), 추수절(칠칠절), 초막절 등의 절기입니다. 이 절기들은 상징적 예전들과 함께 지켜지고, 예전들은 출애굽 이야기와 연결되어 설명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들은 이집트가 아닌 하느님의 나라를 자신들의 현실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적 유산을 물려받은 초대교회 역시 비슷한 작업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오늘'이 출애굽과 관련된 꿈의 시간이었다면 초대교회에게 '오늘'은 예수와 함께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질병, 배고픔, 사회적 장벽등이 사라지는 꿈의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의 선조들처럼 이 꿈의 시간이 로마제국이라는 현실을 압도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시간을 재구성 했습니다. 그것이 대림절에서 부활절로 이어지는 교회력입니다. 그 시간 안에서 원래 존재했던 축제일들이 예수의 생애라는 꿈의 시간 안에서 정합성을 갖는 축일들로 재구성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태양신 축제와 관련되었던 동지는 이제 빛이신 예수의 오심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그리스도를 예배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재사회화 전략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이미 우리를 둘러싼 것들에 의해 사회화 되었습니다. 이 사회화의 내용은 스스로를 누구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권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등의 항목을 포함합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경쟁을 통해 성공을 쟁취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살아왔던 사람이 협력하는 것을 기뻐하고 함께 사는 삶을 기뻐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또 통장의 잔고가 자신의 행복을 보장해 준다고 믿던 사람이 그런 것 없이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제국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기여했던 사람이 이제 그것을 파괴하는 데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무일과는 메시야 예수를 통해 재구성된 시간질서의 가장 작은 단위 입니다. 우리의 1년은 그의 탄생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일생을 경축하는 하나의 큰 단위이고, 매주 금요일에서 주일에 이르는 시간은 수난과 부활을 찬양하는 작은 단위이며, 주일로부터 시작되는 일주일은 그분의 부활과 함께 시작된 새 삶을 의미합니다. 성무일과는 이것을 더 철저화 하여 하루의 삶까지도 우리의 주님이시며 세상의 통치자이신 '죽임 당하신 어린양'에게 집중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아침기도에서 우리는 '주여 우리 입을 열어 주소서'하고 간청합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주님을 찬미하리이다' 라는 말로 화답합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생명의 근원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께 있음을 상기합니다. 그 후에 우리는 '하느님, 우리를 어서 구원하소서'하고 간구합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잠을 깨는 순간 '현실'속으로 내던져진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이 이 현실을 압도하고 구원하는 능력으로 나타나시기를 희망합니다. 그 후에 아침기도는 기쁨의 찬양인 시편 95편 혹은 100편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기쁨은 두려움을 내쫓는 힘이 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두려워 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이 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는 메시지를 넘겨 주엇습니다. 그 기쁨으로 인해 우리는 현실에 압도당하지 않고 꿈의 시간 안에서 계속 살 수 있습니다.

 

낮기도는 지속적인 인도와 보호에 관한 시편으로 시작되어 감사의 찬양으로 끝납니다. 이것은 아침기도를 통해 대안적 현실로 나타난 하느님 나라 안에서 우리의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성공회 기도서가 낮기도용 성서 본문으로 제안하는 구절중 하나인 말라기 1:11은 하느님의 통치를 현재형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무일과의 심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장차 임할 하느님 나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 예수 안에서 이미 현실이 된 '다른 세계'에 대해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질 녘에 드리는 저녁기도는 아침기도와 같은 시작송가로 시작하지만, 시편으로 들어가기 전에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유산인 '은혜로운 빛이여(Phos Hilaron)'라는 찬양시를 낭송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희망을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대개 저녁을 빛이 사라지는 시간으로 체험하지만,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그 어둠 속에서도 참 빛이신 예수가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고백 안에서 루가(누가)복음의 찬양시들이 이어집니다. 가난한 여성 마리아는 자신을 통해 세상에 나타날 다른 미래를 기대하며 기쁨의 탄성을 외치고, 노쇠한 시므온은 '주님의 길을 밝히는 빛'의 등장을 보며 타는 목마름으로 버텨온 수십년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녁기도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도가 아니라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기도가 됩니다. 우리는 성서를 우리에게 물려준 이들이 해 지는 시간을 하루의 시작으로 보았다는 점(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창세기 1:5)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밤기도는 우리가 여전히 한계를 가진 존재임을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느님이 그 한계를 탓하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한순간 스쳐지나간 빛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지만 어둠의 습관을 온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체험한 꿈의 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자주 현실을 지배하는 권력에 굴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빛으로, 세계의 미래를 위한 모델로 부름받았다는 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은혜'일 것입니다. 그래서 밤기도는 우리를 책망하는 대신 위로합니다.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우리를 가리우소서'라고 기도할 때에 우리는 새로운 삶을 위한 기회를 부여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혁명을 꿈꾸던 많은 사람들이 현실의 벽과 싸우다 지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괜찮아, 완벽하지 않아도 좋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다시 눈을 떴을 때의 우리는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 볼까 합니다. 우리는 촛불의 밤들을 통해 앞서 간 성도들과 연결되었습니다. 출애굽, 예수와의 만남, 촛불의 밤들은 안병무의 은유를 빌리자면 한 화산맥의 다른 분화구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의 두 사건들을 거친 사람들은 꿈이 현실을 압도하는 순간들을 보았고, 그 순간을 항구적 현실로 만들기 위한 시도들을 했으며, 그 시도의 결과인 성무일과를 우리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저는 지금 2008년 봄 어느 날 밤에 옆사람의 양초에 불꽃을 옮겨주던 저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무일과는 그 촛불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출애굽의 증인들과 예수의 증인들로부터 그것을 넘겨 받았습니다. 그 촛불을 넘겨 받을 때에 우리는 계속 꿈꿀 수 있는 힘 또한 함께 넘겨 받았습니다. 그 힘으로 우리는 새로운 일상을 살게 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것이야말로 가히 혁명적 일상이 아닙니까?

 

 

2010.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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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1 11:09 2011/12/01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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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칼럼 2011/12/01 11:08

후기: 마리아의 도전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마리아께 나신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하느님의 모친 되신 마리아여

이제와 임종시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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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의 마리얌이 당신에게 문안합니다.

"살람 알레이꿈."

전쟁의 소식으로 흉흉하던 2007년 어느 날, 노트에 끄적인 그림.

 

 

 

 

1. 개신교 형제자매들께

  사실 우리 개신교인들에게 성모송은 친숙하지 않은 텍스트 입니다. 어떨 때는 '천주교가 이단인 이유'의 대표적 증거가 되기도 하는 것이 성모송이지요. 저도 기독교인으로 산 시간의 대부분을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던것 같습니다. 천주교를 '우상숭배 이단'으로 부르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부를 수록 제가 개신교인인 것이 자랑스러워 졌으니까요.

 

  그랬던 저의 앞에 갑자기 막시밀리아노 콜베라는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보며 저는 제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를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걸림돌이 있었지요. 콜베가 바로 성모신앙으로 유명한 사람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두가지 정도의 선택가능한 문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콜베가 '성모신앙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멋지게 따랐다고 생각하는 쪽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성모신앙으로 인하여' 예수의 충실한 제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쪽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열심히 웹서핑으로 콜베에 대한 자료들을 살펴보고 천주교 서점에서 책들을 뒤졌습니다. 그러고서 내린 결론은 후자였습니다. 콜베가 건강상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선교를 향항 열정을 포기 하지 않게 한 힘, 그가 수용소에서 예수처럼 남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게 한 힘…. 그 모든 것이 성모신앙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개신교인의 프라이드보다 중요한 것은 콜베를 통해 말씀하시는 예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저는 이것이 '내려놓음'의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서, 저는 여전히 일말의 회의를 가진 채로 성모송 묵상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콜베가 느낀 그것을 조금이나마 맛보고 싶었던 거지요. 묵상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성모송은 옛 성도들과의 연대로 저를 초청했고, 그 연대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희망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바로 그 체험 안에서 콜베신부 또한 기쁨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줄 수 있었던것 아닐까요.

 

  연대와 기쁨, 이것이 성모송이 개신교인의 정체성을 가진 저에게 던져준 도전이었습니다. 제 글을 통해 여러분들도 이 도전의 목소리를 들으셨는지요. 못 들으셨다면 그것은 성모송의 문제가 아니라, 제 글의 문제였을 것입니다.

 

 

2. 가톨릭 형제자매들께

  동방과 서방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가톨릭 전통(정교회, 천주교, 앵글로-가톨릭 성공회)에서 성모송은 가장 보편적인 기도문 중 하나입니다. 특별히 서방교회 전통에 속한 천주교와 성공회는 매일 반복하는 묵주기도에서 성모송을 암송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모송은 마치 '밥'과도 같습니다. 그 밥을 먹고 막시밀리아노 콜베도, 로메로 주교도, 도로시 데이도, 테레사 수녀도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자랐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밥이란게 그렇지요. 소중한 만큼 그 소중함을 잊기도 쉬운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왜 같은 밥을 먹고 있으면서 우리는 콜베만큼, 로메로만큼, 테레사만큼 자라지 못하는 걸까요. 밥이 부족했던 걸까요 아니면 밥을 먹는 방법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요. 저는 성모송 묵상을 통해 이런 고민을 여러분과 나눠 보고 싶었습니다. 밥 비유를 계속 써 보자면, 밥을 요리하는 다른 방법을 한번 시도해 봤다고 하면 될까요. 누구든 저의 요리를 맛있게 드셔 주셨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3. 다른세계를 꿈꾸는 '동지'들께

   세상의 높은 곳에 서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참 자주 절망을 경험하는것 같습니다. 몇년 전 대추리에서, 광화문 사거리에서, 그리고 얼마전 용산에서 우리는 국가의 권력이란 것이 실재하는 것이고, 또한 그것의 물리력이 아주 강하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런 현장에서 우리는 무력감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무력감의 반복은 우리의 동지들을 '전향'의 길로 이끌기도 합니다.

 

   기독교의 역사도 어쩌면 무력감과의 긴 싸움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때, 자신의 동료가 사자의 먹이로 사라져 갈 때, 불타오르는 가족의 신체를 보았을 때 예수의 추종자들은 말할 수 없는 무력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배자들이 원했던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지배자들이 원하는 반응을 거부하기 위한 시도들로 가득합니다. 그것들이 성공적이었든 아니든 간에 그런 과거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를 외롭지 않게 해 줍니다. 저의 묵상 글에는 우리가 어떻게 현재의 투쟁(글을 쓰던 당시에는 용산이 '현재'의 사건이었습니다)에 임할 때에 무력감과 절망감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저의 고민은 짧고 엉성합니다. 그러나 저의 신앙이 여러분의 싸움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저는 행복합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독자분들께 주님의 평화가 넘치시기를 기도합니다.

 

요한 드림.

 

 

200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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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1 11:08 2011/12/0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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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칼럼 2011/12/01 11:04

성모송 묵상 7-"아멘"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마리아께 나신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하느님의 모친 되신 마리아여

이제와 임종시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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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몸을 던져 '아멘'을 보여준 사람,

순교자 막시밀리아노 콜베.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그는 아마도 현대의 기독교인 중에, 아니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성모신심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알고있는 것처럼 그는 성모의 이름으로 된 공동체를 세운 사람이다.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그는 '사랑의 순교자'로 알려진 사람이다. 나치 정부는 유태인을 보호했다는 혐의로 그의 몸을 감옥에 가두었다. 콜베는 그 곳에서 다른 수감자를 대신하여 '아사(餓死)'형을 선택했고 그 곳에서 길지 않던 삶을 끝냈다.

 

  나는 콜베신부에게서 일종의 '자유'를 본다. 이 자유는 사자굴에 같힌 다니엘의 자유이고 용광로에 던져진 그의 친구들의 자유이며 로마의 감옥에 같힌 바오로와 실라의 자유이다. 나아가 이 자유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건드리지 못하는 이들을 두려워 말라!"고 외치던 예수의 자유이다. 나치는 콜베의 몸을 가두었으나 콜베는 그를 가둔 나치의 권세를 없는 것으로 여겼다. 페르시아 제국의 짙은 먹구름을 뚫고 나타난 하느님의 임재(현존) 앞에 무릎 꿇은 다니엘처럼, 로마제국의 어둠을 헤치고 나타난 하느님의 말씀 앞에 무릎 꿇은 마리아치럼, 콜베는 나치의 권세를 '없는 것'으로 여기시는 하느님의 전능하신 사랑 앞에 굴복했다.

 

  이것이야말로 "아멘"이다. 성모송에 '아멘'으로 응답한다는 것은 가브리엘을 향한 마리아의 '아멘'에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는 일이어야 한다. 성서는 교과서의 지식을 밑줄 쳐가며 외우는 식의 아멘을 말한 적이 없다. 성서에 등장하는 최초의 아멘은 "네! 그렇게 살겠습니다!"라는 결단의 표현이었다(신명 27). 이것은 예수의 말씀에서도 마찬가지다. '네'라고 말하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은 첫째 아들과 '싫다'고 말한 후 아버지의 뜻을 행한 둘째 아들의 비유에서 예수는 둘째아들이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 '아멘'으로 응답했다고 말씀하신다(마태 21:28-31).

 

  성모송을 지속적으로 암송하는것, 그렇게 함으로써 마리아의 결단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고난받는 하느님의 백성들을 축복하는 것. 그것은 하느님을 향한 '아멘'을 연습하는 것이다. TV의 소음과 세상의 지혜들에 길들어버린 우리가 '아멘'을 살기 위해서는 이 연습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수의 길은 마치 오랫동안 걷지 않아 잡초에 가려진 샛길과 같아서, 앞서간 이들을 따라 계속 걸어갈 때에야 다시 세상에 알려질 것이다.

 

 

 

 

p.s.

 

콜베 신부와 더불어 다음의 앞서간 이들을 '아멘'의 모범으로 함께 기억해 본다.

 

성모송에 평생 아멘으로 응답하고 살았던 사람들

: 마틴 루터, 울리히 쯔빙글리, 로메로 주교.

 

성모송을 몰랐으나 아멘은 누구보다 잘 알았던 사람들

: 더크 빌렘스, 마틴루터 킹.

 

 

200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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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1 11:04 2011/12/01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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