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2006/08/22 18:49

영화 '괴물'을 보았다. 시네큐브에서 보았다. 이미 천만명이나 봤다고 하더니, 그 작은 극장에 관객이 10명도 없는 것이었다. 괴물의 위력이 많이 떨어졌나 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살인의 추억'에서 진일보한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거대한 세상의 시스템들 속에서 초라할 수 밖에 없는 인간, 특히 한국사람들이라는 기본주제에다가, 돈으로 만든 괴물을 별첨부록으로 제시한 형태였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다거나, 돈이 아깝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미 나온 많은 전문적인 영화평들의 한결같은 얘기처럼, 한국사회의 이야기를 하는 한국영화니까 절반은 먹고 들어간 것이다. 나도 절반은 먹혔다.

 

가족의 사투라는 테마도 새로울 건 없다. 이건 IMF 체제 하에서 기다렸다는 듯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사회과학 담론들이 주구장창 떠덜어대던 것이다. 즉, 한국사회의 사회복지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가족체계가 담당하고 있다는 고상한 말들. 다시 말하자면, 한국사회에서는 국가도 사회도 해주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재난통제나 미래를 위한 복지 같은 것은 가족의 부담으로 남는다는 것이겠지.

 

인간의 의지에서 소외되어 나온 거대권력이라는 '큰타자'도 명징성을 획득하지 못했다. 한국에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미국도, 무책임한 한국정부와 언론 및 시민단체들도, 관습화된 이미지에서 더 재밌는 에피소드 하나 못 실은 채, 그냥 나왔다가 들어갔다.

 

인물들이 담고 있는 전형성도 살인의 추억에서 더 나가지 못한 것 같다. 가족의 수장인 변희봉 아저씨는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한 목숨 희생하는 것이 아깝지 않은 우리 부모님들 이야기에서 더 나가지 못했고, 송강호가 연기한 어리버리 애아빠의 이미지도 이전 송강호 이미지에서 더 새로운 것이 추가되지 못했다. 양궁선수 고모 배두나는 마지막에 불화살 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역할이 없다.

 

그런 가운데, 왕년의 '민주투사' 박해일만이 내 눈길을 좀 끌었다. 송강호의 동생, 배두나의 오빠, 변희봉의 아들, 그리고 괴물에게 잡혀간 현서의 삼촌인 박남일은,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백수로 지내는 청년실업자이다. '조국 민주화'를 위해 투신했으나, 우리 사회는 취직도 시켜주지 않는다고, '씨발'을 섞어 가며 말한다. 현서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이동통신사 다니는 대학 선배를 찾아갔는데, '왕년에 데모질만 하더니 언제 그렇게 좋은 회사에 취직했는지' 모를 그 선배는 사실, 포상금에 눈이 어두워 남일을 경찰에 넘기기 위해 그리로 유인한 것이다. 연봉이 6천이냐고 묻는 남일의 질문에, 카드빚이 6천이라고 말하던 선배. 경찰들에게는 '저 새끼 도바리 천재니까 만만하게 보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역시 '도바리' 천재 박남일이 함정을 빠져 나와 쫓겨간 곳은 한강 다리 밑의 거지집. 거기서 그는 거지와 함께 택시를 타고 현서를 찾아 가면서 화염병을 제작한다. 휘발유와 광목과 솜과 나무젓가락, 그리고 역시 2홉들이 소주병, 즉 두꺼비 소주병. 휘발유를 제외한 모든 재료는 거지집에서 가져온 것 같다. 택시 안에서 화염병을 제조하니 택시기사가 짜증을 부리며 승차거부를 한다. 박남일이 '따블'을 준다고 하니 군소리 않고 가는 택시기사. 그러나 목적지인 원효대교 북단은 시위 인파로 교통정체가 심한 곳. 라디오에서는 교통방송이 흘러 나온다.

화염병은 괴물을 퇴치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김영삼 정부의 화염병 및 쇠파이프에 대한 강경조치 이후 자취를 감췄던,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까지도 가끔 시위 현장에 등장하던) 화염병은 거대권력을 닮은 괴물을 향해 날아간다.

 

화염병이 중요한게 아니다. 거기에는 군사독재라는 터널을 지나온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 있는 것이다. 이동통신사 취직한 선배의 연봉이 얼마인지가 중요한게 아니다. 거기에는, 한때 꿈이 있었던 젊은이들이 세상이라는 진정한 거대권력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때로는 당연한 듯이) 삶의 급선회를 감행할 수 밖에 없는 2000년대 후반의 한국사회가 있는 것이다.

 


※ 이 풍자적으로 과장된 자칭 왕년 '민주투사'의 액숀을 보라.(사진은 네이버의 어떤 블로그에서 가져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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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2 18:49 2006/08/22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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