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중국의 공과 사

2008/07/05 22:08

흔히 서양에 대비되는 동양의 특성을 얘기할 때 등장하는 레퍼토리가 몇 개 있다. 수세기동안 사회에 변화가 없었다고도 하고, 개인주의가 발달하지 않았다고도 하고, 에 또...

뭐 여하튼, 공사 구분이 불분명하다는 얘기도 이런 '근거'들 중에서 한자리 차지 하는 것 같다. 더 정확히, 아니 솔직히 말해보자. 이건 한마디로 동양의 공, 사에 관한 윤리가 '전근대적', 곧 '후진적'이란 얘기다.

 

때문에 저자,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가 이것을 하나의 편견으로 보고, 자신은 이런 편견에 맞서기 위해 중국을 연구소재로 삼았다고, 한국어판 서문에서, 얘기하는 것은 신선한 클리셰로 다가온다. 사이드 이래 서구중심주의 비판이라는 테마는 이제 하나의 클리셰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정통 '동양학' 분야에서 '동양주의'(오리엔탈리즘)를 비판하는, 따라서 말 그대로 정면돌파의 치밀한 실증적 연구일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기대가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신선하게 느끼도록 하였던 것 같다. 기대는 일정부분 충족되었다고 본다. 저자가 수행하는 분석은 칼 만하임 식의 '관념 분석'이다. 이 애매모호한 대상에 대해 적어도 분석이라는, 똑똑 끊고 좍좍 자르는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비교라는 시야가 요청되는데, 저자가 중국 관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비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물론, 서양 관념과, 일본 관념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공[오오야케] 관념은 '큰 집(大宅)'이라고 하는 조정, 군주, 공가(公家)만을 의미했는데 반해, 중국의 공관념에는 여기에 도가적 천(天) 관념이 침투한 결과, 평분, 균등, 연통 등의, 다소 (우위) 가치를 가지는 의미들도 포함되게 되었다는 발견(!) - 이 발견은 꼭 저자만의 것은 아닌 듯하다 - 이나, 같은 천(天)이라 하더라도, 서양 기독교의 천(天)이 인간에게 완전히 외재하며, 불가항력적이었던 나머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자연'의 질서를 지향하는 반역을 꿈꾸도록 하였던 것과 달리 중국의 천(天), 곧 리(理) - 저자의 연구대상은 기본적으로 송학(宋學) 이후이다 - 는 인간자연에 내재하고, 또 비자립적이기 때문에 어느 시대에나 인간자연이 이것과 대항할 필요가 생기지 않았다고 하는 분석 등은 초학자를 전율에 빠뜨린다.(너무 오버인가?)

 

아무튼, 여기까지만 보자면, 특히 서양의 것과 비교할 때 중국의 관념이 역시, 그 '결정적인' 분기점이 없이 정체되어 온 것이 맞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중국의 천(天), 곧 리(理), 다시말해서 천리자연(天理自然)" - 이는 유가의 관념에 도가의 관념이 침투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 은 "어느 시대에나 인간자연이 이것과 대항할 필요가 생기지 않았다"고 하는 분석에서도 느껴지는 바이다. 그러니까 이 책의 진가는 여기서 부터인데, 실상 저자의 본격적인 분석은 중국 관념 내 자기 비교에 대부분이 할애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저자의 박학의 진가가 나타난다. 문제의 제기를 위해 선진시대 문헌을 인용한 부분들은 보면 조금 중복된 감이 많아 보인다. 그러나 송대 이후, 명대, 청대의 관념을 보여줄 대표적인 문헌을 인용하고, 또 그것들 간의 질적 차이 매우 그럴 싸하게 분석해 낸 대목에 이르면 찬탄을 금할 수 없게 된다.

 

아무튼 간에, 이 책에 등장하는 바 중국식 공 관념의 핵심은 천(天)을 매개로 한 확장, 하지만 여전히 인간자연 내부에 침투하는 확장인 것인데, 이 천(天) 관념이 확장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자연 내부에 침투하기 위해서 스스로 인간자연의 역사적 변화에 맞추어 변화하기까지 한다.

가령, 송학의 창시자 정이천이 부자간의 정(情)이라 하더라도 사적 감정이 개입되지 않았다면 그 자체 공적일 수 있다고 말했을 때의 공 관념은 - 당연히 부자간의 정(情)도 천륜이므로 공이 될 수 있다 - 인간관계의 윤리에 한정된 것으로, "통치자의 마음씀씀이가 천륜에 비추어 '공적이어야' 한다"는 류의 주장을 함축한 것이지만, 명대 말이 되면 똑같은 논리가 확장되어 군주의 정(情;욕망!)도 사적인 것으로 치부하게 되는 진전을 보이게 되고, 청대 말이 되면, 드디어 공사 구분의 역전 현상이 일어나서 군주의 욕망(통치욕, 덕욕 등이겠지)보다 민의 욕망(치부욕, 잇속 등)이 '양적으로!' 더 우월하므로 이것이 공이라는 식의 담론이 등장하게 된다는 점 등이 분석되고 있다.

 

이 천(天) 관념의 (자기)변화! - 여기에, 정체하지 않는, 중국식 관념의 특수성이 있다. 그러니까 서구중심주의를 훌륭하게 비판한 것이다.

 

물론, 나는 이 책의 주장을 애써 따라가기만 할 수 있을 뿐, 건설적으로 비판하기엔 역부족이다. 얼핏 얼핏 너무 과감한 주장은 아닌지, 의심가는 부분도 보인다. 또한 저자 스스로도 이 책의 분석은 시대별로 중심 관념만을 분석한 것이고, 기층민중('生民')의 현실 분석에 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인정하고 있다. 이 책이 일본 학계에서는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궁금해지는 이유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이만한, 아니, 이런 류의 과감하고도 '재밌는' 분석을 왜 한국 논문에서는 못발견하는걸까.

 

(미조구치 유조, 중국의 공과 사, 정태섭, 김용천 옮김, 신서원, 2004 ; 원서는 1995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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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5 22:08 2008/07/05 22:08

... (중간생략) ...

 

허구헌날 사랑타령

나이값도 못하는게

골방속에 쳐박혀

뚱땅땅 빠바빠빠

나도 내가 그 누구보다 더

무능하고 비열한 놈이란 걸 잘 알아

 

절룩거리네

 

... (중간생략) ...

 

내 발모가지 분지르고 월드컵 코리아

내 손모가지 잘라내고 박찬호 20승

 

세상도 나를 원치 않아

세상이 왜 날 원하겠어

미친게 아니라면

 

절룩거리네

 

... (생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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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8 10:58 2008/06/18 10:58

<`영장 과격시위자'는 40.50대 서민.노숙자>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8.06.09 23:06


(서울=연합뉴스) 장재은 기자 = 촛불 거리시위에서 폭력을 휘두르다 처음으로 구속영장이 신청된 피의자 3명은 20∼30대 운동권일 것이라는 일각의 선입견과는 달리 모두 40∼50대 저소득층 서민이나 노숙자로 밝혀졌다.

9일 경찰에 따르면 지난 8일 새벽 경찰을 상대로 심각한 폭력을 휘두르다가 구속영장이 신청된 3명 중 쇠파이프를 휘두른 이모(44)씨는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일용직 근로자였다.

또 전경버스 위에 올라가 차량을 훼손한 2명 중 윤모(51)씨는 노숙자였으며 전모(44)씨는 생수판매업을 하는 저소득 자영업자였다.

이 중 8일 오전 1시께 경찰의 해산명령이 떨어지자 제일 먼저 버스 위로 올라가 `과격시위 주동자'로 검거됐던 노숙자 윤씨는 과거에도 대규모 집회를 따라다니면서 폭력을 행사했다가 입건된 전력이 있었다.

서울 영등포경찰서와 도봉경찰서는 영장이 신청된 3명을 포함해 8일 새벽 세종로에서 10명을 연행해 조사했으나 노동계, 학생운동권 등 소위 `배후세력'과의 관련성은 확인하지 못했다.

이들을 조사한 경찰 관계자는 "특정 단체에 소속됐거나 지휘를 받아 폭력을 행사했다고 볼 근거는 드러나지 않았다"며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모두 홧김에 우발적으로 나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런 조사 결과는 `시위대 진두에 나서 폭력을 휘두른 이들이 운동권 급진세력의 배후 지휘에 따라 불법시위를 선동했을 것'이라는 일각의 선입견과는 정반대다.

그러나 다른 경찰 관계자는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이들은 경찰의 진압.연행.채증 방식을 잘 알기 때문에 불법행위 뒤에도 체포되지 않고 모두 달아났을 것"이라는 주장을 고집했다.

jangj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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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0 00:18 2008/06/10 00:18

[영화] IL POSTINO

2008/06/04 22:58

네루다 : 은유!

마리오 : 뭐라고 하셨죠?

네루다 : 은유 말이야.

마리오 : 그게 뭔데요?

네루다 : 은유? (자리에서 일어나 집 안으로 들어가며) 은유란 뭐라고 할까...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른

               것에  비유하는 거야.

마리오 : (네루다의 뒤에 대고 황급히) 시 쓰실때도 사용하나요?

네루다 : (돌아서며) 물론이지.

 

               ***

 

우체부가 시를 알아야 할까. 혹은 알아도 될까. 역으로 네루다 같은 지식인이자 권력자가 우편배달부와 친구먹는 것은 또 어떤가. 그래도 되는 걸까? 혹은 그래야 되는걸까? 네루다는 말한다.

 

"나는 감옥에 처넣어지기 위해서 쓰는 것은 아니다 / ... / 나는 쓰는 것이다 소박한 사람들을 위해서 / ... / 학교와 빵과 포도주를 / 기타나 연장류 등을 갖고 싶어 하는 / 소박한 사람들을 위해서 쓰는 것이다 // 나는 민중을 위하여 쓰는 것이다 가령 / 그들이 나의 시를 읽을 수 없다 하더라도 / ... / 언젠가 내 시의 한 줄이 / 그들의 귀에 다다를 때가 올 것이다 / 그때 소박한 눈동자는 눈을 들 것이다 / ... / 그리고 그들은 틀림없이 말할 것이다 / '이것은 동지의 시다'라고"(<커다란 기쁨> 중에서)

 

               ***

 

네루다 같은 재주꾼이야 저런 말을 입에서 나오는대로 내뱉어서 다 '시'로 만들 수 있다 하겠지만, 타이밍을 잘못맞춰 태어난 우체부 마리오(영화 주인공)의 찌질한 인생은 그것을 허락할 리가 없다. 마리오는 노동자 집회에서 그의 데뷔작 시를 읽다가 갑작스런 경찰의 진압을 피해 도망가는 군중들의 발에 깔려 죽는다. 제목은 "파블로 네루다에게 바치는 시"였다. (물론 이건 영화 얘기다.)

 

 

              ***

 

이 영화는 단순히 사회주의 리얼리즘도, 그렇다고 부르주아식 휴머니즘도 결코 아닌 것 같다. 마리오는 강철도 아니고, 뇌봉 같은 혁명의 나사못도 아니다. 운동권 지도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순수' 촛불시위와 철저한 혁명, 의지의 낙관과 지성의 비관, ... 뭐 이런 것들 사이 어디엔가 마리오의 윤리가 있지 않을까?

 

IL POSTINO(1994) 감독 마이클 래드포드 / 이탈리아 / 국내개봉 1996 15세 관람가 / 108분

※ 우체부 마리오 역의 마시모 트로이시는 이 영화를 찍은 직후 지병으로 숨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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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4 22:58 2008/06/04 22:58

조선일보 최보식 부장이란 사람이 작성한 기사이다. 우리는 이런 글에서 "말리는 시누이" 전술의 전형성을 간취할 수 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끊어 읽지 않으면 전체 글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는 애매한 글이지만, 어쨌든 다 읽고 나면 뭔가 독해해냈다는 '느낌'이 새록새록 묻어난다. 글쓰기 공부할 때 도움이 많이 될 듯해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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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참을 수 없는 순정'으로 나왔고…
조선일보 | 기사입력 2008.05.30 03:29 | 최종수정 2008.05.30 10:12

20대 여성, 서울지역 인기기사

 

최보식 사회부장이 본 촛불시위 현장 절박하지만 놀이처럼… 경찰차에서 '닭장 투어' 기념사진 일부에선 배후 의심… 중앙통제식이 아닌 인터넷 정보로 움직여 "광우병 위험 없다해도 국민이 불안해하는데 무조건 밀어붙이나"

 

 

 

시위 인파 300여명은 도로 한복판을 점거한 채 서울 을지로에서 퇴계로를 지났다. 동대문운동장 앞에서, 앞장서던 한 여성이 "오늘은 이만. 여기서 헤어지고 내일 다시 만납시다" 하고 외쳤다. 밤 11시40분이었다.

 

↑ 29일 밤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촛불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조건 고시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그때 군중 속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당신이 뭔데 해산하자 말자 하느냐" "우릴 갖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여기까지 와서 그냥 흩어지자는 거냐"….

그러자 다른 쪽에서 "그러는 당신은 뭐냐. 왜 자꾸 사람들을 선동해. 우리가 다 연행됐으면 좋겠다는 거냐"고 받아쳤다. 시위대 안에서 옥신각신 언쟁이 벌어졌고, 결국 행진은 29일 새벽 1시쯤 끝났다.

지금 촛불시위는 이전의 시위와는 다른 뭔가 새롭고 혼잡스러운 양상을 띠고 있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 조직에 몸담았던 한 젊은이는 "지금 이 시위대가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지켜야 할 '선(線)'을 넘어선 촛불시위에 과연 '조직적 배후'가 있는 것일까. 이번 시위에는 참여연대, 민주노동당 , 민변, 민노총,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나눔문화, 다함께, 한총련 등 1700여개 단체가 가담했다. 이들 단체는 현장에서 촛불과 종이 피켓, 유인물 등을 배포하며 독려하고 있다. 시위의 '군불'을 때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26일에는 '반란에 동참하라'는 제목의 유인물 4만장이 집회 현장에 뿌려졌다. 다음날 밤 을지로와 퇴계로를 점거했을 때는 시위대를 이끄는 승합차도 있었다. 앰프를 실은 승합차에서 마이크로 구호를 외치는 '프로들'이 목격됐다. 이들 단체는 광우병에 대한 '공포(恐怖)'를 이용해 다른 '정치·이념적 목적'까지 계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장에서 그 의도가 일사불란하게 먹혀드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시위 인파가 합법(合法)의 선을 넘어 도로를 점거한 지 이틀째 날인 25일 밤, 청계광장 촛불집회 인파 속에서 50대 남자와 젊은 여성 간에 도로로 나가는 문제를 놓고 입씨름이 벌어졌다.

"오늘 새벽에 연행된 사람들을 못 봤나. 평화 집회하는 사람들을 경찰이 방패로 찍었다."
"그래도 여기를 떠나면 안 된다. 경찰이 용인한 것은 광장에서의 평화적인 촛불문화제다."
"아기 업은 엄마까지도 전경들이 방패로 밀쳤다. 그걸 보고도 광장에 머물자고 할 수 있나."

"경찰만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나라면 아기를 업은 채 새벽에 전경들 사이에 둘러싸일 상황은 만들지 않겠다." 결국 한쪽은 도로로 뛰쳐나갔고, 다른 쪽은 청계광장에 남아 밤늦게까지 촛불을 들고 있었다.

새벽 시각, 경찰이 촛불집회 주최측인 '국민대책회의' 관계자를 불러 시위대 해산을 설득해 달라고 주문했다. 대책회의 관계자는 이를 받아들여 해산하자고 했지만, 시위대가 따르지 않았다.

이번 촛불시위의 뚜렷한 특징이라면, 아직은 '중앙통제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설령 시위를 '주도'하는 단체들이 있다 해도, 시위 인파를 한 방향으로 몰아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만난 대부분 참가자는 인터넷 등에서 돌아다니는 정보를 신봉하고 '참을 수 없는 순정(純情)'으로 나온 것 같았다.

25일 밤 경찰이 시위대의 도로 진출을 봉쇄하자, 딸아이를 업은 30대 여성이 방패를 들고 있는 경찰에게 다가가 "아저씨들도 곧 결혼할 텐데, 애한테 미국산 쇠고기 먹이고 싶겠어요" 하고 말했다. 그녀는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며 울먹였다.

새벽 1시쯤에는 중학생 5명이 집회 현장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할지, 집에 돌아가야 할지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한 여학생이 "이제 집에 돌아가는 건 절대 비겁한 게 아니에요. 어차피 우린 또 내일 나와야 하잖아요" 하며 다른 남학생을 설득하기도 했다. 이 감성적 '순수함'에 어떠한 논리적 설득도 쉽게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대다수 시위 참여자는 광우병에 대한 불안(不安)과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실망감에서 제 발로 뛰쳐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이 때문에 '배후론'을 비웃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외부적으로는 '배후론'에 화를 내면서도, 내부에서는 '어떤 세력에 의해 이용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불안감도 내비쳤다. 27일 밤 10시30분쯤, 청계광장에서 남은 200여명은 "프락치를 쫓아내자"며 서로를 확인하기 위해 주민등록증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들에게 도로 점거는 '불법'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 같았다. 정당한 자신들의 요구와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는 현 정권에 비하면, 도로 점거는 별것 아니었다. 또 월드컵 당시 '광장' 경험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도로를 행진하는 몇몇 직장인이 "우리나라가 이래서 참 좋아. 월드컵 때도 그랬고, 국민들이 뭐 하나 있으면 집 밖으로 다 나오잖아" 하며 주고받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25일 오후 6시쯤 광화문 앞 대로를 점거한 뒤 대학생들은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으며 "내가 언제 여기 걸어보겠냐"고 말하기도 했다. 이들에게서 이번 시위는 '뭔가 절박한 것 같으면서도 놀이(娛樂)'였다. 속칭 '닭장차'라는 경찰버스에 태워진 뒤 "닭장투어 기념"이라면서 사진을 찍어 교환하기도 했다.

경찰 관계자는 "이번 시위에는 대화 채널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노조나 대학 운동권 등의 불법시위와 달리 높은 굽에 미니스커트 입은 여성들, 청소년, 퇴근길 직장인 등 일반 시민을 상대로 강제 해산해야 한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다음날 출근해야 할 직장인들이 새벽까지 시위를 하는 것은 인상적이었다. 회사원 김모(31)씨는 27일 새벽 2시30분까지 시위대 속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지난 대선 때 이명박 대통령을 찍었다는 김씨는 " 미국 산 쇠고기를 먹어서 광우병 걸린 확률이 매우 낮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며 "하지만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겁내고 있고 국민이 이토록 불안해하는 걸 대통령은 국민에게 한 마디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처리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는 국민을, CEO인 자신의 결정에 무조건 따라야 할 '회사원'으로 보고 있는 증거"라며 "내가 왜 이명박을 찍었을까 하는 후회를 매일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게 현 정권이 직시하지 못한, '놀이판' 같은 시위 현장의 '민심(民心)'인지 모른다.

 

농림수산식품부 정운천 장관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 위생조건 고시를 발표한 29일 서울 도심에서는 1만명(경찰추산)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사진부 VJ 민봉기 기자 [최보식 사회부장 congchi@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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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31 00:46 2008/05/31 00:46

근대교육?

2008/05/28 16:10

예를 들어보자. 대한제국기에 철도학교, 광산학교 같은 것이 근대적인 학교제도 수립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졌다. 나는 이것을 알고 있고, 또한 그 역사적인 의미를 연구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학교들은 의식적이든 비의식적이든 18세기 독일 광산학교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근대교육의 초창기에는 광산학교가 인기가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광산학교도 없고, 또 실업학교란 것도 별로 인기가 없다. 이렇게 된데는 어떤 정신적 기저의 흐름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일까? 대한제국기에 최초로, 그것도 중요하게 설립한 몇 안되는 학교 중에 하필 광산학교가 있었고, 이곳에 당시의 엘리트들, 기술적으로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엘리트들이 입학하고, 또 졸업과 동시에 사회적 자본의 순환적 축적을 기대받고 있었던 것일까?

이런 것은 근대교육을 고민하면서 한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다. 그저 근대교육 하면 보통교육만 생각했던 것. 그러나 실제로 근대교육의 본고장인 서유럽에서 이런 학교들이 더 인기가 있었던 것 아닐까? 나는 제대로 공부를 하고 있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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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8 16:10 2008/05/28 16:10

&quot;3층도식&quot;

2008/05/24 14:20

역사학의 비켜갈 수 없는 고민은 사료를 연결하여 '말'로 만들어줄 모델을 설정해야한다는 것이리라. 모델로는 브로델의 3층도식이 제일 모범적이라고 생각된다. 물질문명-경제-자본주의가 각자의 사료들을 흡수한다. 이러니 어마어마한 사료가 수집될 수 있었을 것이다.

 

브로델의 관심은 '경제적인 것'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물질문명, 경제, 자본주의, 모두 오늘날 우리가 경제학의 영역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똑같은 방식으로 역사학의 대상, 따라서 사료 자체가 3층도식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 맨 윗층에 정치가 있다. 인간의 가장 의식적 활동이 엄선된 사료를 생산한다. 이 사료들은 모두가 진지한 사료라고 믿어도 좋다. 중간에 경제가 있다. 역사 속의 인물들은 조금 덜 엄밀한 사료를 흘리고 다닌다. 이것들은 진지함의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적어도 손해는 볼 수 없으므로 이들이 흘린 이 사료 자체가 많은 경우 '솔직함'을 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맨 아래 일상생활. 여기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가지 헛소리, 농담, 의미없는 사료들을 뿌리고 다닌다. 이 사료의 방대한 바다에 빠져서는 헤어나오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 군데군데 우리가 '대상'이라고 부를 것들도 많이 빠져 있으므로 연구할 여지는 많다고 생각된다. 사회학의 대상은 바로 이곳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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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4 14:20 2008/05/24 14:20

블로그 개설 3주년

2008/05/19 20:32
세월이 가는 줄도 모르게 달려와 버렸다. 본 블로그는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 2005년 5월에 개설되었다. 순전히 심심파적을 위한 것만도, 그렇다고 거창한 구라적 실천, 혹은 앙가주망 같은 걸 기대한 것도 아니다. 느린 컴으로 연애편지 쓰듯 지웠다 썼다 여러번 끝에 글 하나를 올리게 되지만, 특출난 미문도 아니고 한 번즘 정곡을 찌를 만한 예리함도 갖추지 못한 글이라 읽는 이 하나 없는 무위의 실천을 심심파적 명분만으로 버티기엔 인생이 너무 아깝다. 그렇다고 꼭 누가 봐주길, 누군가와 소통하길 기대한 것만도 아니다. 그래, 아니다, 사실은 연습으로서의 글쓰기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독자를 상정함으로써 아주 약간의 긴장을 부여하고 싶었달까... 그러니까 순전히 심심파적만을 위한 것도, 거창한 앙가주망을 위한 것도 아닌, 그 중간 어디 쯤에 내 불질의 의미가 있었다. 의미는 분명히 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불질은 계속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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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9 20:32 2008/05/19 20:32

김약국의 추억

2008/05/05 21:58

내 고향 중앙시장 입구에는 시장에 오는 사람이 한 번씩 들리게 되는 약국이 있다. 주인 약사 아저씨 이름이 김모였다. 아마도 그 소도시에서 장사가 제일 잘되는 약국이었을 것이다. 장사가 제일 잘되는 시장의 장사가 제일 잘될만한 목에 위치해 있었으니까.

 

내가 언젠가 집에 내려가서 할 일 없어서 시간때우려고 시립도서관에서 빌려다 본 소설 <<김약국의 딸들>>을 처음 서가에서 보았을 때 시장통의 그 약국을 떠올렸다. 아니, 전국에 무수히 존재할 약사 김모씨들의 약국을 떠올렸던 건지도 모른다. 소도시에서 가장 부유하고, 게다가 주유소 사장과는 달리 저명하기까지 하였던 김모 약사 아저씨, 선거바람이 불 때 국회의원 나갔다가 기성 정치인의 텃세에 눌려 여당 공천도 못받고 무소속 출마하고, 떨어진 일로 재산만 축내었을 테지. 그러나 여전히 한동안 지역사회에서 명성은 유지하고 있었다.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 약국과 함께 약사 아저씨도 세월의 저편으로 퇴장하시겠지. 나는 한동안 김모 약사 아저씨와 그의 약국을 떠올릴 때마다 쇠락해 가는 내 고향 소도시 전체의 모습을 함께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박경리 선생의 이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 등장하는 김약국은 양약을 파는 약국이 아니라 한약을 파는 약국이다. 또 김약국이란 약사 이름이 김씨라서 사람들이 그 약사를 일상적으로 부를 때 쓰는 호칭이기도 하다. 김약국, 김약국 어른, 김약국 나리, 김약국 나리 계신가 여쭙게... 이런 식으로.

 

파는 물건이 양약이냐 한약이냐를 차치하고 보면 김약국과 내 고향 시장통의 그 약국은 꽤나 닮아 있다. 할아버지한테 약국을 물려받은 김약국은 통영지방의 지주이자 유지이다. 대부의 말론브란도가 그러듯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약만 사러 오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일어날 각종 문제들에 대해 상담을 요청하러 오고, 돈을 뜯어가기도 한다. 김약국은 약만 팔지 않고 상담을 해주고, 돈을 주고, 대신에 위신(prestige)을 받는다. 지역사회에서 사람들의 삶은 이와 같이 경제적, 상징적 교환의 그물망으로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다. 소설은 이런 그물망이 기계적으로 평등한 것만도 아니요, 중심에 현저히 많은 역할을 하는 존재가 있음을 숨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중심이 곧 인생에 있어 좋은 것은 다 차지하는 절대권력은 아니다. 그물의 연결된 올이 더 많을 수록 신경써야할 인생의 프로젝트가 더 많아서 피곤에 쩔어 있을 수밖에 없는 보스의 모습을 소설은 그리고 있다.

 

이런 촘촘한 공동체, 그러나 쇠락해 가는 그물망을 그리기에 일제시대 통영이라는 소도시가 제격이었을 것이다. 통영이 바닷가를 끼고 있는 소도시였단 점도 읽는 내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미지에 내 고향을 대입했던 것에 한몫했다.

 

저자 박경리 선생이 오늘 돌아가셨다고 한다. 내일 강의 가서는 토지문화관에 꼭 한번 들러보아야겠다. 벌써 몇주째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내 삶은 곧 사소한 번뇌들의 그물망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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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5 21:58 2008/05/05 21:58

오늘자 한겨레 기사에 하와이 여행 갔던 사람이 공항에서 마약운반책이란 혐의로 잡혀서 봉변을 당한 이야기가 실려있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84289.html) 선배한테 주려고 가져간 미꾸라지 아이스박스가 화근이었던 것. 미국입국 문제가 항상 그렇듯 문제는 미국 마약경찰, 한국영사 등이 우리의 주인공을 대한 태도였다. 마약이 어디서 나왔는지 보여달라는 씨의 항의도 들은척 만척했다는 미국 마약경찰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결국 나오지 않았던 대량살상무기를 찾아 이라크를 초토화시켰던 부시의 '신'앞에서만 경건한 미소를 읽는다.

최소 10년인데, 배후를 불면 5년으로 감해주겠다는 마약경찰의 제안은 흔히 플리 바게닝인지 하는 수사기법으로, 그 근본 아이디어에는 합리적 선택이론이라는 미국 토종 이론이 도사리고 있다. 자유와 민주를 사랑하는 미국인들은 그러나 자유와 민주에 눈감는 법도 잘 알고 있다. 한국 영사관 직원이야 뭐, 수없이 발생하는 동일 종류의 사건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는, 무죄는 어려우니 감형을 노리자는 류의, 다시 말해, 제발 솔직히 말해 보라는 류의 얘길 했다고 한다. 당연한 거다. 그리고 그렇게 말한지 며칠 후에 미국 경찰이 아무 설명도 없이 '집에 가라'(you going home)고 말했을 때도, 한국 영사관 직원들은 괜히 미국 직원을 건드려서야 좋을게 하나도 없다고 문제제기 안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똥개도 자기 동네에서는 반쯤 먹고 들어가는데, 상대가 천하의 미국이래서야, 라는 거겠지.

 

혹자는 이 사태를 우연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언제나 그렇듯 아무리 완벽한 시스템에도 실수는 있는 거라고. 특히, 미국 한번도 안가본 내가 하는 말이니까 별로 아무도 신빙성을 안가지겠다. 그러나 바로 우연이라고 하는 이 말에 치명적 함정이 숨어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우연이 규칙적으로 발생하는지를 아무도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설명도 못하면서 그냥 우연이라고, 잊으라고만 하는 것이다.

이런 유사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특히 비굴한 웃음, 즉 교양있는 채 하는, 나는 당신들의 사고방식을 100% 지지하며, 당신들이 하는 일이라면 절대로 안티걸 생각이 없어요,라고 하는 표정을 이마에 써붙이지 않는 이상 누가 알몸 투시기 검문의 샘플로 선출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라는, 이 분통터지는 사실을 앞에 두고서랴.

 

지금 장차 미국 학회에 발표하러 갈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는 마누라가 다행히 애기는 안데리고 갈 생각이겠지만, 마누라가 마약운반책으로 걸려서 10년형 받으면 나는 10년동안 엄마없는 자식을 키우면서 옥바라지를 해야한단 말인가? 더우기 죄도없이?

 

좀 오버인가?

미국은 그런 실수하는 사람보다는 따뜻하고도 치밀한 경찰이 훨씬 많은가? 세상은 밝기만 한데, 한갓 나무그늘을 어두운 음지로 생각하여 호들갑 뜨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미국이 어떤 억지로 자신들과 다르게 생긴 사람, 다시 말해서 마음에 안들게 생긴 사람들을 손쉽게 초토화시키고 있는지를 목도하고 있다.

 

미국에 그런 깡패같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요, 양심을 가진 평범한 소시민, 혹은 이들의 지적 대표자인 학자가 많다는 얘기도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미국 학자라는 사람들은 미국에 살면서 항상 부쉬를 닮아서 정신이 좀 이상해지는 법이다. 마이클 왈처 같은, 미국에서 진보입네 설치는 사람도 이라크 전쟁을 지지했다고 한다. 국제적 범죄를 관용하면 안된다나 뭐래나. 너네 나라 전범이나 처단해라 이 xx야. 이런 사람 글을 수업교재라는 이유만으로 읽고 있어야 하다니, 정말 몸에 힘이 쭉 빠진다. 내용도 난해해서 어제, 오늘 종일 보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미국의 학회와 학자의 글을 읽어야만 하도록 운명지어진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나랏말싸미 중국에 다르면서도 중국의 논리로 사유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의 조상님들처럼.

답답하면 영어공부하지 마라, 아쉬우면 미국 사람이 쓴 논문 읽지마라, 라고 말하는 얄미운 사람들도 눈앞에 떠오른다. 그러나 누구나 인정하듯이, 이 세상은, 특히 학문은 미국이 지배하고 있다. 세상은 이미 수백년 전에 중국 유행을 받아서 새로운 사유를 전개시켰던 조상님들처럼만큼도 못하도록 단순하면서도 복잡하게 엉기고 있다.

 

그러고 보면 학문이란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힘이 세면 진리도 바꿀 수 있다. 150년 정도 전에 맑스가 한 말처럼 모든 지배적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일 뿐이다. 모든 언어가 지배계급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군대 가느라 3년. 말배우느라 몇년 쓰고나면 나보다 어린 애들이 벌써 나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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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7 00:09 2008/04/27 0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