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전의 국방정책 연구에 김성전씨가 올린 글을 허락없이 전재한다. 이 글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립이라는 가면을 쓰고 사실상 평화재향군인회를 비판하는 내용의 며칠 전 중앙일보 사설을 먼저 보아야 할 것이지만, 아니, 재향군인회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 본 블로그가 갑자기 군대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 등을 무엇보다 먼저 이해해야 하겠지만, 명민한 독자들께서는 이 글만 보아도 재향군인회 판에서 지금 돌아가는 일을 이해하시리라. 이 글을 올리는 실질적인 이유는, 내용이 아닌, 형식에 있다, 논리성이라는 것. 그러니까 글이 참 논리적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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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사설을 비판한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중앙일보)

9월 28일자 중앙일보 사설 내용
  9월 28일자 중앙일보 사설은 평화재향군인회 설립과 관련하여 “이념 내세워 재향군인을 분열 말라”라는 제목을 달면서 평군의 출범을 중단하란다.

  중단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나라가 지역, 계층 간의 분열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예비역들마저 이념과 계급별로 편을 갈라 분란을 빚는다면 나라의 장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비역들이 따로 단체를 만드는 일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평군의 주장에는 출범 배경이 무엇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고 한다. 남북한 제대군인 간의 화해 증진, 한국전쟁 때 38선 돌파를 기념해 제정한 국군의 날 변경 주장을 예로 든다.

  더욱이 ‘자주적인 안보관을 국민의식 속에 뿌리 내리겠다’는 주장에는 이 정권과의 코드 맞추기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설익고 치기어린 주장이라는 것이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중앙일보?

  그동안 중앙일보가 조선이나 동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군의 출범에 대해 침묵하기에 평군 측에서는 상당히 호의적인 시각으로 보는 줄 알았었다. 그런데 이 사설을 통해 역시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념이 뭐야?

  평화재향군인회가 내세우는 것 중에 무엇이 이념인지 중앙일보 측에서는 사례를 들어줄 것을 먼저 요구한다. 남북한 제대군인들 간의 화해가 이념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남북이 대치한 상황에서 현역군인들이 화해하랴? 필자가 보기에는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남북관계가 급격히 개선되는 시점에서 다른 분야는 교류 협력이 이어지는데 군사분야도 개선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현역들이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만약 남북한 제대군인들 간의 화해가 이념의 문제라고 본다면 남북교류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는 논리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앞으로 군축단계로 간다면 그것은 제대군인들부터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 평군의 입장인데 여기에다가 이념의 덧칠을 한다면 그것은 중앙일보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진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새로운 쇄국주의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국군의 날 변경요구가 이념적 문제인가?

  중앙일보의 사설을 담당한 자에게 묻고 싶다. 국군의 날에 대해 얼마나 공부했는가?

  국군의 날은 1956년 9월 14일 국무회의에서 "1950년 10월 1일 3사단 23연대 병사들이 강원 양양 지역에서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한 것을 기념하여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공포하였다"라고 국방부는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날은 거의 전투가 없이 돌파했다. 중요한 것은 한국전쟁의 주 전선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서부전선이라는 것이다.

  군인으로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것은 땅을 빼앗긴 것이다. 6.25.전에는 황해도 38도선 이남은 한국의 것이었으나 국군은 이를 지켜내지 못하고 빼앗겼다. 주 전선이 아닌 보조전선에서 전투도 없이 퇴각한 적을 좆아 돌파한 날이 그렇게 기념이 되는 날이라면 차라리 압록강에서 물 떠서  대통령에게 바친 날이 더 기념되지 않을까? 이러한 의미에서 38선을 돌파한 날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더 우스워 보인다. 군인은 지키지 못한 땅을 돌파한 날을 기념하는 것 자체를 더 부끄러워해야 한다. 더욱이 미군의 도움으로 겨우 돌파했다가 주 전선에서 다시 빼앗긴 38선 돌파가 그렇게 자랑스러울까?

  국방부의 다른 자료를 보면 한국국군의 발전을 기념하는 날 이라고 설명하는데 한국전쟁 중 38선을 돌파한 것이 국군의 발전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가?

  따라서 국군의 날 변경을 요구하는 것이 이념적으로 이상하게 본다는 것 자체가 더 이상해 보인다.


대한민국의 국군의 탄생일지

  국방부 홈페이지의 연혁을 위주로 살펴보자.

  1945년 11월 13일에 공표된 군정법령 제28호에 따라 건군 사업의 첫 발걸음으로 국방사령부가 설치되었다. 1946년 1월 15일 남조선 국방경비대를 창설했으며, 1946년 3월 29일 국방부로 개칭했다.

  그런데 같은 해 5월 조선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게 되자 소련쪽이 ‘국방’이 들어간 군사조직의 출현을 문제 삼자 6월 15일 법령 86호 의거 통위부(국내 경비부)로 개칭했고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과 함께 정부조직법에 의거 국방부를 설치했다.

  그렇다면 국군의 날은 국방경비대가 창설된 1월 15일이 되거나 8월 15일 이어야 할 것이다.


맞지 않는 국군의 날 환산

  국군의 날 환산과 관련해 국방부의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올해를 국방부는 건군 57주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국군은 1948년에 창군된 것인데 1948년에는 정부가 수립되었던 해이다. 1948년에는 이미 군이 창설되어 있었기 때문에 건군 57주년이라는 근거는 참으로 아리송한 것이다. 만약 정부수립을 근거로 한다면 국군 창설일은 정부가 수립된 8월 15일이 되어야 한다.

  도대체 국군의 날이 왜 이렇게 불분명할까?


현재의 국군의 날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날을 기념하는 날?

  한국사람들은 외국에 비해 매우 특이한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택일이라 할 것이다. 필자가 1956년 9월 14일 국무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았으나 국무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국군의 날을 택일함에 있어서 필자가 나열했던 국방부의 설치와 관련된 역사를 몰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시의 각료들이 쉽게 결정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국군의 날을 국군 탄생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10월 1일을 택하면서 국군발전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한데서 더 의심이 생겨 여러 자료를 찾다 보니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나 이상하게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조인된 날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10월 1일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조인된 날이다.  1953년 한국의 변영태(卞榮泰) 외무장관과 미국 J.F. 덜레스 국무장관이 서명, 양국 대통령이 비준함으로써 체결되어, 1954년 11월 17일부터 발효되었다.  

  한미상호 방위조약은 1953년 10월 1일 조인되었고, 국군의 날 제정은 1956년 9월 14일에 있었기에 솔직히 필자는 국무회의에서 국군의 날을 정하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한 날을 기념했기 때문에 국군이 발전한 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져본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것 아닌가?

  국민들도 모르게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날을 기념해서 국군의 날을 정했으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일인 9월 17일로 변경하자는 주장에 대해 이념의 색칠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역사적 사실과 기념일에 대한 여러 가지 인식의 차이를 가지고 변경하자고 하는 주장자체가 이념적으로 이상해 보인다는 것은 이 국가에 이상한 색안경을 낀 자들이 많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지 묻고 싶다.


중앙일보는 언론사로서 사실을 왜곡하지 말라!

  수많은 전쟁에 수많은 군인을 내보낸 미국의 최대 재향군인조직인 어메리칸 리젼도 회원이 280만 명(100만 명의 부녀회원 포함) 밖에 되지 않는다. 두 번째로 큰 조직인 해외전쟁 참전자회도 210만 명(70만 명의 부녀회원 포함) 밖에 되지 않는다.

  향군 측이 재향군인회법 개정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도 미국에는 3대 재향군인회조직을 포함해서 32개의 의회에 인가된 재향군인회가 있고 112개의 단체가 활동 중이다. 그리고 세계재향군인 연맹에는 65개국에서 165개의 재향군인회가 가입되어 있다. 1국가 당 2내지 3개의 재향군인회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일보가 전 세계적으로 재향군인회가 복수인 사례가 없다고 한다. 이것은 언론의 기본적인 태도인 사실관계도 확인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피해당사자인 평군으로서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평화재향군인회의 탄생이 어떻게 지역 계층 간의 분열인가?

  이 나라가 지역, 계층 간 분열로 몸살을 앓는 이유는 정권을 잡고자 했던 군부 독재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분열의 핵심세력들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 재향군인회다.

  그렇다면 그 분열을 만들었던 세력들이 장악하고서는 병사들을 포함한 전체의 군인들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국가지원을 받기위해 700만 회원이라고 주장하면서 온갖 특혜를 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원들한테는 안내문 한번 보내주지 않고 있다. 젊은 회원들이 활동을 위해 가입하려고 하면 오히려 방해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행동이 더 분열을 조장하는 것 아닌가?

  중앙일보는 재향군인회의 이러한 실정을 취재해 본적이 있는가 묻고 싶다. 중앙일보 기자들 중에 재향군인회로부터 안내문 한번 받아본 사람있는지 파악해 보고 이야기 하기 바란다.

  
향군이 이념적으로 국가를 분열시키고 있다.

  미국이 카스라-테프트 조약을 통해 조선을 일본에 주었기 때문에 조선은 일제 식민지가 되었다. 그 식민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독립을 외치던 3.1절 날 미국의 성조기를 휘날리면서 한미동맹 운운하는 집단이 재향군인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가 더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집단 인가?  

  그러면서 온갖 집회를 통해서 자신들의 주장과 같지 않으면 빨갱이 칠을 하고 다니는 자들이 누구인가? 일당을 주어가면서 제대군인들을 동원하고 향군 여성회라는 단체를 동원하는 것이 재향군인회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안보강연회 한답시고 엄청난 돈 써가면서 특정 정치 세력을 비호하는 것이 이념적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다.
  

재향군인회는 자발적 친목 단체여야 한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재향군인회가 사업체를 가진 나라는 없다. 기본적인 사무실 운영하면서 기념행사를 치르는 정도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할은 국가의 보훈처가 제대군인들의 복지정책을  잘 펴도록 정책대안을 제시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다.

  현재의 향군은 거의 5조원대의 자산을 가지고 있으나 제대군인들에게는 아무런 혜택도 주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시정하고자 자발적인 회비를 내는 제대군인들이 모여서, 기존의 재향군인회가 하지 않던 일을 하겠다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중앙일보는 즉각 사과하라!

  중앙일보는 한국의 거대한 언론매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관계 한번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평화재향군인회에 이념의 색칠을 한 것과 분열조장 집단으로 매도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올바른 길을 걷기위한 단체의 탄생을 축하하지는 못할망정 출범 중단 운운하는 것은 언론에 의한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며 참군인들에 대한 탄압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평화재향군인회는 중앙일보의 행태를 예의주시할 것이다. 빠른 시일 안에 사과기사를 쓰고 관련자를 처벌해 줄 것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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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30 06:32 2005/09/30 06:32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이 오늘자로 의원직을 상실했다고 한다. 선거법 위반에 따른 재판 결과 벌금 150만원의 원심 판결이 대법원에서 오늘 확정 판결되었다는 것이다.(선거법 위반으로 걸려서 벌금 100만원인가 이상의 형을 받으면 당선 무효라지) 아래는 산자위 소속인 조의원이 국정감사를 위해 중소기업청에 도착한 직후 판결 결과를 듣고 신청한 신상발언의 내용이라고 한다. 오마이에서 퍼왔다. 또한 조금 후에 정식 브리핑도 했다고 하는데, 그 아래에 브리핑시 발언 내용을 프레시안에서 퍼왔다. 이때도 준비된 원고는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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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다들 결과를 알고 계시겠지만, 저 개인의 문제로 중기청과 중기특위의 국정감사 진행이 무거워지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재판의 결과를 수용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만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악법도 법이라는 말이 있지만, 입법기관의 국회의원으로서 결과를 수용하겠습니다. 옳고 그름을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결과로 지역 주민들이 겪게될 어려움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과 당원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저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결백하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평가는 역사에 맡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울러 제 문제로 김용갑위원장과 동료 의원들이 격려와 용기를 주신 것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민생을 표방하면서 재래시장 등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제가 평소 위원회에서 다소 다른 이야기, 주장을 제기해 왔습니다. 탄핵이나 재래시장 입주상인들의 권리문제 등을 포함한 진보적 의제들이 그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행정기관이나 다른 의원님들이 다소 곤혹스럽게 생각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 개인의 신념이기도 했고, 민주노동당의 당론이기도 했습니다. 이미 우리 사회는 진보정당을 수용할 만큼 성숙해지고 성장하였습니다. 제 주장과 내용이 다소 생소하고 상이하더라도 넓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17대 국회가 표방해 온 개혁국회, 민생국회를 우리 산자위 위원 모두 임기 마칠때까지 충실해 줄 것을 부탁드립니다. 또 그렇게 믿겠습니다.


2005년 9월 29일


조승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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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핑 내용

 

  "주류와 비주류의 차이가 이번에도 적용된 것인가"
  
  민주노동당 조승수입니다. 오늘 대법원으로부터 의원직 상실에 준하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자랑스럽게 브리핑 할 내용은 아니지만 워낙 여러분에게서 연락이 와서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섰습니다.
  
  대법원 결정은 현실적 결과이기 때문에 수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참으로 납득도, 이해도 하기 힘든 결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습니다. 오늘 묘하게도 열린우리당 두 분과 한나라당 한 분의 대법원 상고심이 함께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 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른바 우리 사회의 메인스트림, 주류와 비주류의 차이가 이번에도 적용된 것인가 하는 의심을 솔직히 지울 수 없습니다.
  
  16대 말 개정된 현행 선거법은 돈 안 드는 깨끗한 선거, 금권선거, 흑색선전을 방지하겠다고 만들어졌습니다. 사법부 역시 기회 있을 때마다 악질적, 고질적 선거사범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처벌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른 세 분의 결과는 잘 됐고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간 40여 명에 이르는 현역 선거법 위반자 중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었습니다. 김맹곤 의원이 그랬고 이철우 의원이 그랬습니다. 사법부가 얘기하는 금권, 흑색선전 선거를 엄단하면서 사법적 진실과 정의가 세워졌는가, 그것에 대해서는 납득하기 힘든 심정을 갖고 있습니다.
  
  결과는 내려졌고 이번 대법원의 결과로 인해서 무엇보다도 상심에 빠져 계실 지역 주민들에게 또 다시 선거를 해야하는 어려움을 드린 데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많은 격려했던 당원과 당에도 적지 않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느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노당 의원 10명에게 붙여졌던 '10인의 전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원직 상실로 제가 국회를 떠나게 되고 9명의 의원으로 앞으로 힘겹게 의정활동을 해야 하지만 다음달 재선거를 통해 '또 다른 조승수', 새로운 전사가 보충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이미 우리 사회가 양극화되고 노동자 서민들의 생활은 파탄 나 있어 진보정당은 상당기간 집권을 두고 급성장할 것으로 봅니다. 이를 현실화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민노당의 잘못입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를 해주신 언론 종사자에게 감사 드리고 당장은 10월 재선거에 공식적인 역할을 할 수도 없겠지만 허용하는 범위 내 할 수 있는 모든 역할을 다해 반드시 내가 빠진 자리를 채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민노당에 대해 보여주신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 진보정당은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지만 이보다 더 어려운 일 많았습니다. 꿋꿋이 가겠습니다. 많은 격려와 도움을 주십시오.
  
  개인적으로는 세웠던 목표가 있었습니다. 10명의 의원이 대단한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민노당이 입법 발의를 하고 의정활동 통해 진보적 의제를 공론화하는 것이 목표였다고 생각합니다.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으나 일천한 경험, 교섭단체 같은 특권적 구조 때문에 이루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에너지 문제와 관련해 많은 대안을 제시하고 정부에 대한 비판도 많이 했습니다. 세간의 관심인 방폐장 문제와 관련해서는 12월 주민투표를 통해 4곳 중 한 곳이 선정될 가능성 많습니다. 비록 선정된다 하더라도 정부가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절차를 공개하지도 않고 공무원들을 동원했다는 의혹도 있습니다. 방폐장은 우리가 핵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두고 '핵 마피아'라 불리는 이익 그룹들과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습니다. 이 부분을 다 하지 못하고 떠나게 돼 안타깝습니다.
  
  오늘도 대전에서 재래시장에 들렀는데 정말 어려운 상황입니다. 재래시장 특별법 제정 과정은 철저하게 점포 상인들을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어려운 사람들이 더 힘들어지는 상황이라 우려됩니다.
  
  제가 오늘 의원직을 상실하지만 민주노동당 당원직은 누구도 상실시킬 수 없는 자랑스러운 자리입니다.

임경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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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9 18:21 2005/09/29 18:21

 

"이 못난 사람아! 왜 먼저 죽어!" 

정운영 선생 추도사 

  

김수행(서울대교수)  

 

당신은 너무나 깨끗하고 완벽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병이었습니다. 이 어려운 세상에서 대강 이러쿵 저러쿵 하면서 살아 보지 왜 그렇게 칼날을 세웠습니까. 당신은 위암에도 걸렸는데 언제 또 신장병을 ‘지병’으로 가졌습니까.



내가 1977년 가족을 모두 데리고 루벵의 당신 집을 방문했지요. 나도 당신도 모두 박사논문 쓰느라고 정신이 없었는데, 당신 집의 책꽂이를 보고는 놀랐소이다. 나는 마르크스의 공황이론에 관해 논문을 쓰고 있었고 당신은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이 최근 100년의 미국 역사에서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실증분석하고 있었소.



마르크스의 공황이론의 핵심이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이기 때문에 당신과 나는 사실상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요. 그날 나는 당신이 모아놓은 책이며 논문들을 보면서 정말 탄복했소. 당신은 지나치게 완벽하려고 노력했고 그렇기 때문에 남들에게 분노를 느끼고 남들로부터 욕도 먹은 것이요.



우리가 박영호 박사와 함께 유럽에서도 만나고 한신대학에 와서 한신경제과학연구소를 만들어 마르크스경제학을 보급하는 데 얼마나 노력하였소. 당신이 소장이 되어 한 달에 한번씩 우리가 마르크스경제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각 대학의 대학원생들이 우리 세미나에 많이 참석하고 한국경제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지 않았소.



이것이 해방 이후 마르크스경제학의 부활이었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소. 그러나 그 바람에 당신과 나는 한신대학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오. 그리고 쫓겨난 덕택에 당신과 나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이오.



당신은 경제학자보다는 신문기자에 더욱 적성과 소질이 맞다는 생각을 나는 계속하고 있었소. 실제로 당신은 한국일보와 중앙일보 기자 생활을 한 뒤에 박사학위를 받았던 것이오. 당신은 문학청년의 소질을 매우 많이 가지고 있어 쓰는 글마다 독자들을 감동시켰소.



감성이 풍부해 소련혁명사를 인간의 해방이란 관점에서 줄줄 외우고 있었죠. 그렇기에 스탈린을 그렇게 싫어했고 고르바초프에게 상당한 기대를 걸지 않았던가요. 그리고 당신이 한겨레신문이나 중앙일보에 쓰는 글마다 대학생들이 얼마나 즐겨했던가를 기억해 보세요. 모두가 당신의 문학적 상상력 덕택이었습니다.



당신은 중앙일보로 간 뒤부터 점점 한국사회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오. 나는 당신이 중앙일보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멀어졌으며 나도 놀랐지만 금년도 나의 연락망에 당신의 전화번호는 사라져 버린 것이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중국을 다니고 세계를 누비더라도 우리의 민중을 잊어버리면 마르크스주의자로서는 자격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지요. 당신은 이런 것을 개의하지 않고 “나는 옳다”고 외치지만 민중은 당신이 삼성재벌에 포섭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키만큼이나 높은 인격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꼼꼼하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려는 정성을 높이 삽니다. 당신은 한국 마르크스경제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좀 더 살았더라면 당신의 현실적 경험을 중심으로 큰 토론을 벌릴 수 있었을 것인데, 이렇게 일찍 가버리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분명히 당신은 하늘에 있으면서도 우리를 향해 소리칠 것입니다. “바보들! 그것도 제대로 못해.” 죄송합니다. 우리 힘껏 노력하겠습니다. 당신이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있던 ‘새로운 세상’ ‘참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당신에게 외치네. 이 못난 사람아! 왜 먼저 죽고 야단이야!  

  

  

2005년09월25일 23시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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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시 김수행 선생님 marishin /2005.09.26 09:47    

보통 분이 아니시군요. 이 땅에서 추모 글에 비판을 쓰는 건 금기처럼 되어있는데요. 여러 사람에게 애증을 남긴 정 선생님이 이제라도 편히 쉬시길 빕니다. 

 

2. 윤소영 교수 말하길... 데카르트 /2005.09.29 11:05    

김수행 교수처럼 정 선생을 추모한답시고 변절 운운하는 것은 김 교수의 생각(저는 김 교수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이나 두 분의 관계(자신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이고 정 선생은 저널리스트일 따름이라는 단정은 명예훼손급의 망언입니다)를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정말이지 어처구니 없는 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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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9 14:56 2005/09/29 14:56

子曰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때때로 그 배운 것을 익히면 무척 기쁘지 않겠는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위와 같이 배우는 모습에 탄복하여- 이 먼 데서 찾아온다면 또한 무척 즐겁지 않겠는가?)

 

人不知而不온(성낼 온) 不亦君子乎?

(-위와 같이 배우는 모습을 설사 - 남들이 알아 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무척 군자답지 않겠는가?)

 

 

     # 성낼 온 字, windows가 지원을 안한다.#

 

 

많이들 알고 계시듯, 논어(論語)의 첫부분인데, 공부하는 자세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서로 통하는 무엇이 있는 것인가, 해서 한 번 적어 보았다. 별로 안그런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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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9 03:02 2005/09/29 03:02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부활을 위하여 

  정운영선생 추모…아카데미즘-저널리즘의 조화도

  2005-09-25 오후 5:46:01     


  추석 며칠 전날 한밤중에 정운영 선생의 전화를 받았는데, 느닷없이 자신의 책들을 내게 맡기겠다는 말씀이셨다. 어림잡아도 2만 권쯤 되는 장서는 선생이 유학 시절부터 모아오신 것으로 그 규모와 범위는 경제학계에서도 아주 유명한 것이었다. 그런데 애지중지하던 그 책들을 내게 맡기시겠다니….

 

  지난 봄에 뵐 때 신장에 이상이 생겨 고생하신다는 말씀은 들었지만, 그냥 잔병치레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터에 갑자기 그런 말씀을 듣고 불안하기는 했지만, 추석쯤 퇴원할 수 있을 것이니 그 때 다시 의논하자는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고 싶었다. 그러나 추석을 넘기고도 퇴원하지 못하신 선생을 찾아뵈니 힘겹게 단 두 마디 말씀만 하셨다. "돌아가야겠어", "이번 생에서 너와의 인연은 여기까진가봐". 내일쯤 다시 찾아뵈면 더 하실 말씀이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무엇이 그리 급하셨는지 그만 오늘 아침 훌쩍 떠나버리셨다.

 

  어느덧 나도 50줄에 접어들다 보니 사람이란 결코 단순치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누구나 자신의 기질에 따라 나름대로 몇 가지 상이한 면모를 갖고 있겠지만, 선생의 경우처럼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을 조화시킨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일반 시민들은 <한겨레신문>이나 <중앙일보>에 실린 칼럼이나 선생이 사회를 보던 텔레비전 시사토론을 더 기억할 것이다. 하기야 1850년대의 마르크스에게도 저널리즘이 단지 호구지책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마르크스나 정 선생이나 모두 경제학자로 기억해야 할 것 같다.

 

  1944년 아산에서 태어난 선생은 경북중학교와 온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셨다. 64학번으로 이른바 6·3 세대에 속하는 선생은 <상대신문>을 매개로 학생운동에 투신하셨고, 이 때문에 학부를 '5학년'까지 다니셨다. 석사 과정에 진학하신 후에도 선생은 학생운동을 정리하지 않으셨는데, 그 시절 상대와 문리대 후배들을 아우르는 한국사회연구회(한사)를 조직하신 것은 아주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아직도 노동자운동의 일각을 지키고 있는 김승호 선배는 선생이 아끼시던 한사 성원 중 하나였다.

 

  1972년 석사 과정을 수료하신 후에 선생은 한국일보사를 거쳐 중앙일보사에 입사하셨는데, 입사 동기생 중 한 분이 나중에 <이론> 동인으로 함께 활동하신 지기 정춘수 선생이었다. 가톨릭 노동사목이나 학생운동과도 관련이 깊었던 선생은 그런 인연으로 벨기에 루뱅대학교에서 장학금을 얻어 유학을 떠나시게 되었다. 유학을 떠나기 직전 피아노 전공의 박양선 여사와 결혼하신 선생은 곧 연년생으로 유경·유신 두 딸을 얻으셨다. 1973년 루뱅에 도착하신 선생은 학부 과정부터 경제학 공부를 새로 시작하여 1981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핵심 중의 핵심인 이윤율 저하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셨다.

 

  학위를 끝낸 후 루뱅대학교 경제사회연구소에 남을 수도 있었던 선생은 귀국을 결심하셨다. 알다시피 5공 군부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80년대 초는 너도 나도 도피성 유학을 떠날 때였고 학위를 끝낸 사람은 망명객을 자임하면서 귀국을 꺼릴 때였다.

 

  그러나 1982년에 선생은 영국에서 학위를 끝낸 김수행 선생과 함께 한신대학교 경상학부 교수로 부임하셨다. 나와의 인연도 그때쯤 시작된 것인데, 1984년에 이영훈·강남훈 두 교수와 함께 교수진의 일원으로 선발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창설된 한신대 경상학부는 남한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부활을 상징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인가, 1986년 말 학내 민주화 투쟁에 연루되어 김수행·정운영 두 선생이 해임되면서 한신대 경상학부는 실질적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사실 김수행·정운영 두 선생이 한신대에서 해임된 것은 경상학부 교수 10명 전체가 연대로 져야 할 책임을 도맡으신 것이었다.

 

  그 후 김수행 선생은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로 초빙되어 해임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지만, 그런 행운이 없었던 선생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저널리즘에 몸을 담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경제학과 출신인 박현채 선생의 선례에 따라 경제평론가를 자처하신 선생은 1988년 창간 시절부터 1990년대 내내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을 지내셨다. 그 때의 성과가 바로 1989년부터 매해 한 권씩 묶어낸 <광대의 경제학>,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경제학을 위한 변명>인데, 2002년까지 거의 격년에 한 권씩 나온 경제평론집은 모두 8권에 이르렀다. 그리고 2001년에는 이른바 개혁·개방 이후 중국 사회주의의 자본주의적 변질을 고발하는 <중국경제 산책>을 쓰기도 하셨다.

 

  그러나 한신대학교에서 해임된 후에도 선생은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강의하셨는데, 강의실은 언제나 열정과 토론으로 후끈 달아오르곤 했다. 1987-89년에는 당시 학생들의 주요 관심사였던 한국사회 성격 논쟁의 이론적인 쟁점을 해명하기 위해 <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 4권을 편역하셨다. 이는 1984년에 나온 2권의 편저 <한국자본주의론> 및 <세계자본주의론>의 후속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게다가 1992-93년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마르크스주의의 변화의 계기로 삼자는 동인지 <이론>의 초대 편집위원장으로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혼란에 빠져 있던 이론 진영의 맏형 역할을 맡기도 하셨다. <노동가치이론 연구>가 출판된 것도 바로 1993년이었는데, 이윤율 저하를 통해 1929년 대공황 이후 미국 자본주의를 분석한 박사 논문을 중심으로 <자본> 전체의 이론적 구조를 설명한 이 책은 아직까지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기본 문헌으로 남아 있다.

 

  1997년 <이론>이 폐간되고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게다가 서울대와 고대의 강의도 없어지면서 선생은 부쩍 쓸쓸해하시는 것 같았다. 텔레비전 덕분에 길거리나 산행길에서 아니면 심지어 목욕탕에서도 선생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것이 속 모르는 이들 생각처럼 마냥 신나는 일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1999년 경기대학교 교수로 임명되기도 하셨지만, 그것도 그리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그런 중에도 선생은 <노동가치이론 연구>의 후속작을 구상하여 2년 전쯤 원고를 거의 완성하셨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결국 출판이 미루어지고 말았는데, 아마 마지막까지도 못내 아쉬워하셨을 것이다.

 

  정운영 선생에 대한 평가는 물론 역사의 몫으로 남겨두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선생처럼 오해를 받아온 분도 그리 흔치만은 않기에 한두 마디 사족을 달고자 한다. 나도 처음에는 몰랐지만, 정운영 선생의 부친은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민족자본의 하나로 꼽히던 조흥은행 창업주의 동생이었다. 아산에서 태어난 선생이 경북중학교를 졸업한 것은 가족이 대구로 피난했던 때문인데, 그러나 일본 유학생 출신의 '한량'이신 부친은 곧 가산을 탕진하셨다.

 

  기울어진 가세를 상징하는 일화로 선생의 '식탐'을 들 수 있겠다. 한창 자랄 나이인 선생은 식은 밥이든 묵은 김치든 눈에 띠는 대로 입에 움켜 넣고 모친의 매를 피해 뒷간으로 달아나셨다고 한다. 선생의 집 여기저기에 사탕이나 과자 그릇이 널려 있는 것을 보고 놀려대곤 하던 나에게 변명 아닌 변명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을 때 철없이 깔깔 웃었다.

 

  부친과 사별한 후 선생은 모친의 고향인 아산으로 돌아와 온양고등학교를 다니셨다. 그 시절 선생은 1등을 도맡긴 했지만 모범생은 결코 아니었고 오히려 온양역 근처에서 아주 유명하셨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마도 그 때문에 재수를 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선생은 경제학과 선배인 신영복 선생을 만나면서 인생의 행로를 크게 바꾸셨다. 그래서 철없을 시절 나는 이문열 씨의 <영웅시대>를 흉내내어 선생을 '회개한 부르주아'라고 놀려대곤 했다.

 

  선생의 생애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이 아마 말년에 <한겨레신문>에서 <중앙일보>로 옮기신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을 사임하신 것은 결코 선생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 국외자인 내가 자세히 알 수는 없겠지만, 창간 시절부터 복잡했던 <한겨레신문>의 내부사정이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더욱 악화되었던 것이 무시할 수만은 없는 요인이었다는 생각이다.

 

  왜 하필 <중앙일보>냐는 힐난에 대해서는 적어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한겨레신문>과 <중앙일보>의 차이를 그리 과장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한겨레신문>에 그대로 계셨더라도 선생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이나 이른바 386세대의 포퓰리즘적 행태에 대해 비판하셨을 것이다.

 

  물론 50대 말에도 전세집을 구해야만 했던 선생의 경제사정도 무시할 수만은 없다고 본다. <한겨레신문>을 그만두시고 나서 정춘수 선생을 비롯한 몇몇 지기들의 주선으로 <중앙일보>로 옮기시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사유들을 짐작하고 있었던 나는 별다른 말씀을 드릴 수 없었고, 김승호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지사에 대해 가정을 세우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지만,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을 사임하면서 선생이 저널리즘을 아주 떠나실 수도 있었다. 신영복 선생을 중심으로 선생과 나를 성공회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초빙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신대, 성공회대, 상지대가 이른바 진보대학 네크워크를 구상하던 중이어서 세 대학 사이의 역학구도가 아주 미묘해졌고, 그 때문에 신영복 선생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그렇지만 않았더라면, 한신대 경상학부에 걸었던 선생이나 나의 꿈이 성공회대 경제학과에서 실현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윤소영/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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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9 02:25 2005/09/29 02:25

치열했던 시기, 그에게 빚지지 않은 자 있는가

정운영 영면에 바치는 추도사


    장제형(berliner) 기자    


"솔직히 고백하건데 나는 알튀세르의 이론과 실천을 정리해내는 데에 결코 적임자가 아니지만…."


정운영이 90년 10월에 타계한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에 대한 추도사를 <말>지 12월호에 발표한 것을 기억한다. 24일 오전, 이 경제평론가의 영면 소식을 듣고 하필이면 왜 제일 처음 그가 쓴 추도사가 생각났을까. 나 또한 고백하건데 정운영의 공과 과에 대해 정리해내는 데에 결코 적임자가 아니지만, 그가 알튀세르에게 그랬을 것이라고 헤아리듯이 그에 대한 과거 어느 한 순간의 애정과 존경의 념에 의거해서 이 추도사를 바친다.


 

정운영식의 글쓰기가 가져온 '변화'


1988년 5월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을 때, 당시 보도기관의 찌라시에 염증을 느끼던 사람들은 일종의 해갈의 느낌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 해갈은 저 후안무치한 보도기관 종사자들에 의한 왜곡과 굴절이 아닌,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문공부 허가필증을 득한 신문 지면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는 데에서 연유할 것이다.


하지만 반벙어리가 비로소 말을 그럭저럭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은 잠시일 뿐, 더 나아간 의문이 제기된다. 어떻게 하면 세련되고 정치한 사고와 언어를 구사할 것인가. 둔탁하고 건조한 투쟁의 언어도 아니고, 내면의 넋두리에만 머물러 있는 사적인 잠꼬대도 아닌, 비판적 사고가 결합된 문체의 고양된 에세이적 경지를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랬기에 바로 이 새로운 정운영식의 문체에 독자들을 열광하지 않았던가. 정운영의 '전망대'는 우리에게 독보적인 글쓰기의 경지를 통해 새로운 '전망'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 '전망대'에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에서 우리는 생경한 즐거움을 맛보았고, 광주와 파리코뮌이라는 100여년 시차를 둔 사건의 세계사적 공통점을 충혈된 눈으로 배웠으며, 1500명의 교직원 노조원을 일거에 잘라버린 한 교수에게 선사한 학생들의 밀가루 달걀 반죽 메이크업이 결코 '패륜'이라는 한마디 말 따위로 치지도외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69년 아도르노가 학생들에게 당한 "황홀한 봉변"이 '스승'에 대한 패륜이라는 말로 간단히 기각될 수 없는 것처럼-이 분명하게 되었다.


박재동의 만평, 고종석의 문학기사, 정성일의 영화평 등과 더불어 정운영의 '전망대' 칼럼은 90년대 초반까지 당시 <한겨레신문>을 집어들게 만드는 데에 일조했고, 우리 세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학술 문화적 대표 아이콘이었다. 그의 글은 메마르고 딱딱한 글이 칼럼인 것처럼 오해하게끔 했던 척박한 한국 언론역사의 풍토에서 고유한 문체 구사의 확립을 통한 칼럼쓰기의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교수로서의 '정운영'


나의 경우 더더욱 행운이었던 것은 글뿐만 아니라 강의로도 그를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던 이들에게 당시 정운영 '교수'의 강의는 암묵적인 필수 과목이 되었다. 강의실에서는 애시당초 찾는 것이 불가능했고, 기껏해야 집회나 거리위에서나 보았던 얼굴들을 강의실에서도 서로 확인할 수 있게 했었던 거의 유일한 강좌였으며, 대형 강의실이 입추의 여지가 없이 꽉꽉 들어찼던 그의 '가치론'과 '공황론' 수업을 추억해 보자.


논전이 과열되어, 그의 말에 의하면 백묵이 날아다니고 멱살잡기 직전까지 가는 살벌한 상황이 빈번히 연출되었다지만, 그럼에도 그는 매우 행복한 선생이었으리라. 열띤 논쟁은 거의 매 수업시간마다 빼놓을 수 없는 백미였으며, 그는 수백명 학생들 앞에서 그들의 격렬한 이론적 반론과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거의 자신의 논점을 관철시켰다.


학기 마지막 시간은 항상 그의 '덕담'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중 하나.


"내가 젊었을 때는 20대 면장, 30대 시장, 40대 군수, 50대 장관… 뭐 이런 식으로 출세욕이 있었는데, 그걸 신영복 선생을 다시 만나면서 모두 깼어."


자신의 지나간 허욕 한 자락을 청중들 앞에서 털어놓을 수 있는 그 진솔함이 그에 대한 인간적 매력을 불러일으켰던 점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고엽'과 '인터내셔널'이 18번 레퍼토리로 동거하는 여유 또한 그 매력을 배가시키는 데에 일조한다.


현존 사회주의 붕괴 이후 "때로는 질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라는 비장한 하이네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론>지의 창간을 주도하던 그가 싸워야 할 대상은 유감스럽게도 남한의 천민자본주의와 분단 체제만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80년대 중반 "민중신학"의 아성 한신대에서 그가 김수행 교수와 함께 쫓겨났을 때, 그가 느꼈던 씁쓸함과 환멸의 정조는 그의 글에서나 스쳐지나가듯이 언급했던 말들에서나 누누이 확인된다. "운동권"에도 개념정리가 필요하다고.

 

 

편히 잠드소서

 

<한겨레신문> 창간멤버이자 비정규직 "비상임 논설위원" 정운영이 그곳을 떠났을 때, 눈 밝은 독자들은 정권교체 후 정부출연 언론기관의 최고책임자로 임명되어 간 그 신문 출신의 몇몇 소위 논설위원과 남은 이들을 명확히 구분해 판단했을 것이다. 당시 할 말은 많지만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던 그가 영영 떠난 지금, 이제는 결코 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겠지만 그가 느꼈을 감정의 편린들을 그럭저럭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소위 일부 "운동권"들에 대한 환멸이 컸던 탓인지, 첫 직장으로의 30년만의 재취업의 차원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2000년, 그가 <중앙일보>로 이직했을 때의 독자들의 어리둥절함이나 당혹감 또한 적지 않았으리라. 더구나 공론장의 영역에서 민망하게도 자신의 대학 동창이라는 사실을 인연으로 현직 공정거래위원장을 겨냥해 "나라 위해 우리 변절합시다"라며 마치 요정에서 정치꾼들이 의기투합하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요상한 제목을 단 칼럼은 충격이었다. 공정거래법 개정에 대한 힘겨루기가 한창일 때 나온 그 칼럼 내용의 문제적 성격을 고려하면 더더욱 독자들의 당혹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의 당혹감은 망자 앞에서 잠시 유보하도록 하고, 애초에 이 추도사를 쓰게끔 한 그에게 품었던 회억의 감정으로 돌아가 그에 충실하자. 그럴 만큼 우리는 어느새 지나가버렸는지도 몰랐던 그 시기, 그에게 빚진 것 또한 많았으니까.


91년 우리의 벗들이 맞아 죽고, 밟혀 죽고, 의문사 당하고, 자신의 몸에 불꽃을 달고는 그들의 곁으로 갔을 때, 정운영은 또한 어느 글에서 짤막한 추도문을 낭독한 일이 있다. 이제는 우리가 그를 위해 추도문을 짤막하게 읽을 차례이다.


'편히 잠드소서.'


Requiescant in pace 

 

 

  2005-09-25 16:50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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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5 19:01 2005/09/25 1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