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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삼호의 『한국 장애운동의 어제와 오늘』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

윤삼호의 『한국 장애운동의 어제와 오늘』

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

 

 

윤삼호의 이 글은 매우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스타일의 글이다. 스스로가 장애-당사자주의를 표방하는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고 이 글 속에서도 사실상 장애-당사자주의를 두둔하고 있으면서, 글의 전체적인 뉘앙스는 ‘양비론’적이다. 저자의 태도는 글의 말미에서 ‘장애-민중주의’와 ‘장애-당사자주의’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에서 보이듯이, 이 두 진영의 갈등을 해소하고 통합적인 장애운동을 건설할 것을 ‘거국적으로’(?) 제안하는 듯 한 태도를 취한다.

그런데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한국 장애운동의 역사를 개괄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윤삼호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그는 서구와는 다르게 한국에서는 장애-민중주의가 먼저 나타났고 장애-당사자주의가 그에 후속했는데, 이러한 뒤바뀜이 한국의 장애운동을 왜곡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라고 나는 이해했다).

 

※ 마이크 올리버가 설명하는 장애단체의 역사 (M. Oliver, 『장애화의 정치』, 158~161쪽)

 

 

파트너십 / 보호

(장애인을 위한 단체들, 자선단체들)

장애인을 위한 단체

경제 / 의회

(의회 로비 및 연구, 법정 단체들)

소비자주의 / 자조

(장애인 당사자 단체들)

장애인 ‘당사자’ 단체

(신사회운동으로서 장애운동을 주도)

민중주의 / 활동가

(장애인 당사자 단체 및 정치 활동가 단체들, 정치적, 집단적 활동과 의식 함양 목적)

우산 / 통합

(소비자주의 민중주의 조직들을 포함 단체 연합)

 

올리버가 위와 같이 역사를 정리하는데에는 두 가지 배경 사건이 자리잡고 있는데, 하나는 UN의 ‘1981 세계장애인의 해’ 선포계획이다. 장애인 당사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이 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졌고, 이 때를 기점으로 영국장애인단체협의회(British Council of Organization of Disabled People, BCODP)를 결성한다. 두 번째 사건은 ‘장애인을 위한 단체’ 중 하나인 국제재활협회(RI, Rehabilitation International)가 자신의 조직의 ‘장애 헌장’에 “지역사회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장애인의 동등한 참여에 대해 가능한 가장 완전한 통합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들을 취할 것”이라고 명시했으나, 장애인 당사자가 이사회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해야 한다는 요구에는 거절의사를 표하자, 이에 맞서 장애인 당사자들이 DPI(Disabled Peoples’ International)를 결성한 것이다.

즉, 서구에서는 ‘장애인을 위한 단체’에 맞서 ‘장애인 당사자 단체’들이 스스로 조직되는 역사를 통해 장애운동이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80년대 사회변혁운동의 등장과 함께 태동하기 시작한 한국의 장애운동은 울림터, 장애인청년운동연합회 등 민중주의 성향의 단체1)들이 먼저 결성되었고, 당사자주의 및 우산/통합을 지향하는 DPI 등의 단체는 90년대 후반에야 등장했다.

이에 대해 윤삼호는 “서구 장애운동은 흑인운동, 게이운동, 여성운동 등 소수자운동의 맥락에서 출발한 까닭에 인권과 복지이슈 중심으로 발전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 반대로 ‘장애-민중주의’가 압도한 한국의 장애운동은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여타 민중 세력이 종적으로 연대하는 구사회운동적 기획이 인종, 여성, 소수자 등 다양한 운동세력이 횡적으로 연대하는 신사회운동적 기획을 압도하는 양상이다. 이것이 장애인들이 스스로 결정한 선택인지, 아니면 비장애인 운동가들의 ‘과도한’ 개입인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라고 말하면서 장애-민중주의 부정적인 영향을 부각시키고 있다.

반면 그는 장애-당사자주의에 대해서는 이 그룹에게 던지는 첫 번째 질문에서도 드러나듯이, 당사자주의의 악용을 문제삼을 뿐, 그것을 장애운동의 지도이념으로 견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글에 나와 있는 내용만으로는 저자가 주장하는 당사자주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터넷을 좀 뒤져봤다. 윤삼호는 「장애인 당사자주의 소고」라는 글에서 당사자주의의 구체적인 맥락을 이야기하고 있다. 당사자주의에는 크게 영국의 당사자주의와 미국의 당사자주의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영국의 ‘분리에 저항하는 신체장애인 연맹’(UPIAS)은 손상(impairment)과 장애(disability)를 명확히 구분하고 장애의 원인을 손상이라는 의학적 원인이 아닌 사회적 배제나 불이익과 같은 사회적 문제로 보고 있는데, 이런 관점에서 사회적 결정과 권력으로부터의 배제 극복을 추구하는 ‘정치 참여형’ 장애인운동이 등장한다. 한편 미국의 당사자주의는 <Nothing About Us Without Us>라는 말로 표현되는데, 즉 장애인이 겪는 독특한 장애 경험과 문화에 기반해 자기 몸과 삶에 대한 자기 통제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으로 대리주의에 반대하는 의미로 당사자주의를 주장하는 것이다.

나의 이해로는 이러한 당사자주의의 두 경향이 교집합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드는데, 일단 그것은 아무렴 어떻겠냐 싶으니 일단 넘어가자. 그런데 이러한 두 경향은 일반적으로 ‘신사회운동’이라고 일컬어지는 운동의 특징들을 일정하게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사회운동은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우선 편한대로 (구)사회운동이라 일컬어지는 노동운동과 같은 주류 운동 담론에서 배제되었던 주체 및 의제들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 전반을 가리키는 것으로, 거시적인 사회변혁에 치중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삶에 기반한 변화들을 추구하는 경향을 띤다(라고 이해해 보자).

그런데 이 신사회운동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두 가지가 거론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원동원’과 ‘정체성지향’이다.2)쉽게 말하면 ‘자원동원’은 운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운동조직의 다양한 자원을 활용하여 목표에 도달하는 정치적 과정을 중요시하는 것이고, ‘정체성지향’은 억압에 저항하는 이들의 정체성을 계급이라는 단일한 표상에 두지 않고 성, 인종, 지역, 장애 등 억압받는 이의 삶과 문화를 구성하는 다양한 정체성에 기반하고자 하는 것이다.

윤삼호의 장애-민중주의 비판도 어떤 면에서 보면 바로 이 ‘자원동원’과 ‘정체성지향’에서 장애-민중주의가 오류를 낳았다고 비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최초로 장애-민중주의를 표방한 울림터는 장애 문제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자본주의적 모순의 결과라는 급진적 주장을 내놓는데, 이를 두고 “따지고 보면 이 주장은 독창적인 장애이론이 아니라 당시 민중운동의 논리를 장애운동에 ‘기계적으로’ 대입한 것”이라고 평가하거나, 이동권 투쟁 당시 비장애인-운동권 활동가들을 두고 “투쟁 지원에 그치지 않고 투쟁을 기획하고 주도하거나 ‘프락션’을 하기도 했다.”는 등의 평가를 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장애운동이 장애인 정체성에 기반한 이념과 방식을 따르지 않고, 비장애인 운동권들에 의해 자원과 이념을 외부수혈 하다보니 왜곡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더해 장애-민중주의 진영이 노조와 연대해 정립회관 투쟁으로 마찰을 일으킴으로써 “청소년 시절 정립동산을 뛰놀던 숱한 장애인들의 ‘마음 속 고향’도 사라졌다”고 말하면서 장애인의 독자적인 장애경험과 문화적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Q1) 누가 ‘장애인’인가? - ‘정체성지향’으로서의 당사자주의에 대한 의문.

 

장애-당사자주의도 장애가 사회적 차별에 의해 생긴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사회적 차별과 억압의 결과라면 피해의 당사자가 문제 해결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것은, 장애운동에서 뿐만 아니라 여성운동, 노동운동 등 여타의 운동에서도 기본적인 ‘원칙’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사회적’이라는 전제를 중심에 놓고 보면, 사실 ‘장애인 당사자’라는 것도 선험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편하게 복지카드 소지자를 장애인 당사자로 볼 수도 있겠지만, 손가락 절단으로 장애등급을 갖게 된 우리 아버지는 솔직히 ‘장애’ 때문에 차별 받은 적은 없는 것 같다. 학벌이 낮고 가진 게 없어서 차별을 받았으면 받았지, 아버지의 복지카드가 장애인으로서 차별 받았음을 증명해 주지는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차별이라는 구체적인 작용이 어떤 사회적 장벽과 억압기제에 의해 벌어졌는가를 묻는다면, 신체적(또는 법적)으로 장애인 당사자로 규정되고 아니고는 운동에 있어서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선험적인 장애인 당사자를 규정하고자 하는 시도는 상당히 모순적이다.

예를 들면 법적으로 장애 등급을 받을 수 없지만, 활자 중심의 사회에서 엄청난 제약과 차별을 겪을 수밖에 없는 난독증을 가진 사람들을 보자. 사실 이들은 복지부 기준으로는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지만, 특수교육 대상자로 선정되서 각종 교육 서비스를 받기도 한다(고 들었다. 아닌가?). 선험적인 장애인 당사자를 규정하여 이들의 정치적 결정권 확대를 요구하는 방식의 운동은 이런 ‘비장애인’의 장애를 해결할 어떤 이념과 원칙을 갖고 있는가?

또 하나. (내가 몇 번 페이스북에 올린 내용이기도 한데) 예전에 검찰이 용산 철거민과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에 대해 DNA를 채취한 일이 있었다. 그들은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한 것, 그리고 강제철거에 반대한 행위를 일종의 ‘범죄’라고 보는 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유전적 질병’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신체적 ‘손상’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강제적으로 의학적 형태의 권력에 의해 집행되는 현상은 어찌보면 장애인에게 가해지던 의학적 시선이 확대된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명권력의 횡포가 확대되면 장애인 수용시설처럼 해고자 수용시설, 철거민 수용시설이 생기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을까?

이런 상황에서 장애인의 정체성은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 나아가 누가 ‘장애인’인가? 윤삼호는 장애-민중주의를 향해 던지는 첫 번째 질문에서 “장애인들이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경험하는 모든 문제를 국가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다면 개인이 손상 그 자체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비통함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했는데, 나는 이것이 질문으로서 성립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손상 그 자체는 언제나 고통과 비통함을 수반하는가? 이 질문 자체가 장애를 사회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개인의 손상이 고통과 비통함으로 옮아가게 되는 것은 ‘손상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조건들 때문이다. 이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 바로 사회모형에 기반한 장애인운동이 해야 할 역할 아닌가? 혹여나 ‘손상 그 자체’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비통함(예를 들면 교통사고나 천재지변에 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장애인운동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의학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장애인 정체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버릴 필요는 없지만, 선험적인 장애인 정체성 개념은 버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장애인 정체성은 끊임없이 재구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Q2) ‘구매력 행사’가 당사자의 권력을 강화하는가? - ‘자원동원’으로서의 당사자주의에 대한 의문

 

앞에서 신사회운동의 맥락에서 제기되는 당사자주의는 두 가지의 특징, 즉 ‘자원동원’과 ‘정체성지향’이라는 특징을 갖는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정체성지향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야기했으니 자원동원과 관련해서 이야기해보자.

신사회운동의 특징으로서 ‘자원동원’이 앞서 이야기했듯 “운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운동조직의 다양한 자원을 활용하여 목표에 도달하는 정치적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장애인운동에서는 이것이 주로 공급자 중심의 서비스체계를 비판하고 장애인 당사자의 ‘서비스 통제권 확보’라는 방식으로 이야기 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의 주요한 실현을 장애인 당사자 조직이 복지전달체계를 독점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중증장애인, 지적/발달장애인이 주로 이용하는 복지서비스 전달체계를 경증장애인이 차지하는 것이 당사자주의라면 이것은 코미디이다.3)

 

그런데 사실 내 고민의 핵심은 당사자주의를 이야기하는 이들이 서비스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비자주의’, 즉 장애인 당사자의 구매력 행사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윤삼호도 이 글에서 소비자주권이라는 개념이 자립생활운동의 주요한 이념이라고 언급하는데, 이것은 당사자주의를 주장하는 진영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개념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 ‘소비자주의’니 ‘소비자주권’ 같은 개념이 매우 불편하다.

소비자주의가 주장되는 배경에는 “장애인복지서비스에 관하여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전달과정에서 장애인 자신들의 경험 및 다양한 욕구가 반영하지 못하고 전문가 및 정책담당자들에 의하여 공급자 위주로 전달되었다는 것”4)이라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그래서 서비스 제공과정에 장애인 당사자가 자기결정의 주체로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구매력을 갖춰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내에서도 활동보조서비스에 서비스 그 자체가 아니라 현금을 지급하는 직접지불제(Direct Payment) 도입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일단 장애인 의제를 떠나서 생각해 보면, 일반적으로 ‘시장’에서 구매력을 갖춘 소비자는 얼마나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 설령 그가 고소득자로서 상당한 구매력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생산을 통제할 수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 돈이 수십억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생산과정을 통제해 생산품의 질을 높이는가 하는 문제는 완전 별개의 사안이다. 그는 그 수십억의 돈으로 더 값 비싼 상품, 더 많은 상품을 구매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일정 정도 이상의 구매력은 질 낮은 상품이 시장에서 선택받지 못해 퇴출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할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공급자간의 경쟁구조 속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이윤을 뽑아내기 위해 예산절감 노력(노동자 착취 등)만 행해질 뿐이다.

이것을 장애인 복지영역에 적용하게 되면 어떨까? 장애인이 활동보조서비스를 통해 이용하는 것들, 예를 들면, 용변 처리, 식사 보조, 이동 보조, 옷 갈아입기 등... 이런 것들을 비장애인은 돈을 내고 이용하나? 화장실 한 번 갈 때 100원, 외출 전에 옷 갈아입을 때는 200원, 길을 걸어갈 때 300원... 뭐 이렇게 돈을 내나? 아니면 밥 먹을 때 밥 값 이외에 추가로 내는 비용이 있나? 이런 것들은 비장애인에게는 굳이 ‘권리’라고 인식할 필요도 없는 공기 같은 것들이다. 그러니 돈을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장애인은 돈을 내야 하나? 설령 그 돈을 국가에서 지급해 준다 하더라도, 이런 기본적인 일상생활의 영위와 관련된 것들을 상품화, 화폐화 시킨다면 활동보조서비스의 권리로서의 성격은 완전히 탈각될 것이다. 그 결과는 당사자의 결정권 강화가 아니라 장애인의 경제력에 따라 권리 향유가 계급화되는 것으로 될 것이다.

이러한 소비자주의는 고립된 개인으로서의 당사자를 전제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활동보조’를 서비스로서 ‘구매’하여 ‘소비’해 버리는 것으로 이해되는, 소비자주의에 기반한 자립생활운동은 얼마나 우리 사회를 장애인이 살기에 적합한 사회로 바꾸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활동보조와 자립생활을 화폐적 관계를 넘어선 어떤 삶의 재구성의 한 형태로 바라보는 아래와 같은 관점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세상 누구도 사회에 등장할 때 혼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말이죠. 사회란 말 자체가 그런 뜻을 담고 있습니다. 제가 사회 속에서 등장할 때, 옆에 이미 다른 사람, 두 사람, 세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이지요. 저는 활동보조인이 사회에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서로를 이미 활동보조인으로 삼고 있습니다.

박경석과 고병권의 대담, 『부커진R – 소수성의 정치학』 (그린비) 中

 

 

앞으로 우리는 이렇게 ‘고립’된 ‘자립’ 개념을 깨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런 고민 속에서 얼마 전 비마이너에 실린 일본 푸른잔디회 회원 중 한 명의 발언은 왠지 눈길이 갔다.

 

토오루 씨는 “하지만 푸른잔디회의 중심사상 중의 하나는 지역 안에서 생활하면서 근처에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 내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나는 공적 보조인 개호서비스(활동지원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다”라면서 “이번에 한국에 함께 온 이들도 제가 사는 지역 사람들과 제가 강사로 일하고 있는 국학원대학(國學阮大學)에서 만난 인연으로 동행한 사람들”이라고 밝혔다.

“일본 푸른잔디회, 노들야학을 만나다” (비마이너 6/26)

 

 

‘자립생활’이라는 것이 단지 한 개인이 홀로 살아갈 능력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관계 맺고 살아가는 방식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활동보조서비스 등 장애인복지의 전달체계의 문제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대충 글을 마치며

 

갑자기 나보고 발제를 하라길래, 처음엔 그냥 요약이나 대충 해가면 되겠지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길어졌다. ‘당사자주의’라는 주제를 접하게 되니 별별 생각들이 다 들었고 결국엔, ‘나는 왜 하고많은 운동들 중에 굳이 장애인운동을 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에 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내가 ‘장애’라는 것을 삶 속에서 확인하고 느낄 수 있었던 첫 번째 계기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이 절단된 아버지를 보면서 항상 ‘불쌍한 우리 아버지’라는 이미지를 머릿속에 박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집에 놀러온 아버지 동료를 보니 그 분은 아예 손목이 잘려나갔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 “내 주변엔 다 불쌍한 사람들 밖에 없구나. 불쌍한 사람들 속에서 사는 나도 너무 불쌍해.” (따지고 보면 이런 생각은 우리 엄마가 항상 주입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20대 중반까지 마음속으로 끝도 없이 불쌍하다고 자기 무덤을 파대는, 진짜 ‘불쌍한’ 짓을 하며 살았던 것 같다. 어떤 구체적인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내가 장애인운동을 하게 된 것은 이 ‘불쌍함’의 낡은 순환에서 스스로 빠져나오고 싶어서였던 것이 아닐까?

 

“장애를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장애인을 결핍된 인간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장애인을 차별하는 자나 장애인을 동정하는 자나 차이가 없다. 차별하는 자와 동정하는 자는 그 이유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장애인은 부족한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이다. 장애인들은 의학적․공학적․정치적 기술을 간절히 원하지만, 그것은 어떤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그 자리에서 자유롭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다.”

- 박경석과 고병권의 대담, 『부커진R – 소수성의 정치학』 (그린비) 中

 

 

생각해보면 저 굵은 글씨의 문장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게 아닐까 싶다. 노동‘해방’이든 장애‘해방’이든, 그것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구렁텅이, (또는 불교식으로 말하면) 번뇌의 사바세계를 벗어나 극락왕생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유롭고 건강하게 살겠다는 선언 아니겠나!? 그런 삶이 나 혼자 정신수양 한다고 될게 아니고, 속도와 효율 중심의 이 사회를 함께 바꿔나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이미 장애‘해방’운동의 당사자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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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동운동 등 소위 ‘주류’ 사회운동 진영과 밀접한 인적, 이념적, 조직적 관계를 맺고 있는 단체들(이라고 윤삼호는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2) 이인영, 「신사회운동으로서의 장애인운동에 관한 고찰」, 중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년.

 

3) 유동철, 「당사자주의는 대안인가?」, 『소비자주의? 당사자주의? : 비판과 대안』, 2006년 한국장애인복지학회 춘계학술대회.

 

4) 이성규, 「소비자주의는 있는가?」, 같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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