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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시골집에는 12월 31일이 되면
모든 식구가 모여서 하는 조촐한 송년회 자리가 있습니다.
다섯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고
오는 해의 소원을 비는 그런 자리가 아니고
12시 땡 치면 보신각에서 종 33번 칠 때
한 사람이 '오징어땅콩' 한 봉지씩 잡고
종 한 번에 과자 하나, 또 한 번에 또 과자 하나
이런 식으로 과자를 33개 먹는 행사입니다.
이거 처음 한 게
80년대 중반쯤이었습니다.
"야~우리도 한 해를 보내면서 뭔가 함께 하는 일을 만들어보자~"
"맛있는 거 사 먹어요~~!!!"
"맛있는 거 뭐~~?"
"과자 같은 거...짜장면은 배달 안 할테니까.."
"과자? 어떤 거?"
그때 아버지와 우리 3형제가
이런 대화를 나눴던 것 같습니다.
하나씩 집어 먹기 편하고
한 10년이 지나도 안 없어질 것 같은 과자를 골랐습니다.
그게 '오징어땅콩'이었습니다.
이 과자 때문에
실제로 우리 식구는
다른 동네에 가서 살면서도
매년 마지막 날엔 꼭 모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모임은
우리 식구끼리의 굳은 약속 같은 게 됐습니다.
95년을 빼면
재작년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95년엔 제가 학생운동 한다고 덤벙대다가
집에 갈 수 없게 됐었는데
나중에 6개월쯤 지나서 집에 가보니까
제 책상 위에 오징어땅콩 한 봉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야~!! 올해는 아예 내려 올 생각을 안 한 거냐?"
오늘 아침에 아버지가 전화를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니까 오늘이 12월 31일입니다.
육아휴직하고 집에만 있다 보니까
휴일도 까먹고, 이제는 해 바뀌는 날도 생각 못하고 있었습니다.
"너, 진짜...너무 하는 거 아냐?"
"인제 혼자가 아니고 세명이라서 움직이기도 어렵고..."
"약속을 했으면 끝까지 지켜야지..."
그냥 웃으면서 통화하고 끊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아버지한테는 좀 서운한 일일 것 같긴 합니다.
결혼하고 미루도 생겨서
전혀 내려갈 생각을 안 했었습니다.
이제 혼자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오징어땅콩이 옛날처럼 맛있지도 않고 해서
별 의미를 안 뒀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옛날일이
생각납니다.
새해 첫날 0시가 지나면
우리 3형제는 막 이리저리 다니면서
'올해 처음!'을 외치곤 했었습니다.
"이야~내가 올해 처음으로 물 마셨다.."
"올해 처음으로 오줌 싼 건 나다~~!!"
"나는 문 열었다 닫았다~"
"나는 트림했다~~~!!"
이런 게 부모님한테는 모두
아이들과의 추억입니다.
이제 저한테는 미루가 생겨서
새롭게 아이와의 추억이 가능해졌고
부모님은 3형제가 모두 결혼해서
옛날같은 '아이들과의 추억'이 더는 없을 듯 합니다.
평소 저답지 않게
오늘 밤엔 생각이 좀 많아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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