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5/01

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1/27
    주성치가 축구공을 밟아 터뜨린 이유는?(3)
    불그스레
  2. 2005/01/26
    기분나쁜 새벽...(2)
    불그스레
  3. 2005/01/25
    논리의 비겁함...(9)
    불그스레
  4. 2005/01/23
    만화방이 좋아...
    불그스레
  5. 2005/01/08
    <아기와 나> 나의 옛이야기이기도 한...
    불그스레
  6. 2005/01/06
    뭘 쓸까...?
    불그스레

주성치가 축구공을 밟아 터뜨린 이유는?

제가 모 사이트에서 소설을 하나 연재하고 있습니다. 연재작으로는 세 번 째. 전에 연재하던 것을 조금 안좋은 일로 중간에 그만두는 바람에 반 년 만에 연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전작에 대한 인상이 너무 강해서일까요? 어떻게 된 게 리플마다 전에 쓰던 작품만을 이야기하네요. 그거 언제 연재 다시 할 거냐고. 그 소리 들을 때마다 하드에 저장되어 있는 그 작품의 나머지 부분을 날려버리고 싶더군요. 화가 나서.

마음에 드는 작품입니다. 아주 좋아하구요. 가장 저다운 작품이면서 또한 제가 다시 이렇게 쓸 수 있을까 싶은 작품이었습니다. 중간에 그만두게 된 건 그 무렵 신경이 날카로워있던 터라 리플로 인한 화를 참아내지 못해서였지, 작품 자체의 문제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장기연재를 고려해서 여러가지 많은 준비를 해두었었습니다. 설정이라든가, 캐릭터라든가, 시납시스라든가, 거의 2년 분은 준비해 두었을 겁니다. 그런 걸 한 순간 실수로 중단해버린 거죠.

워낙에 뜻하지 않게 중간에 끝내버린 거라 아쉬움도 많이 남습니다. 그래서 몇 번인가 리메이크를 시도하기도 했었죠. 결국은 중간에 한 번 단절된 것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지만요. 역시 중간에 한 번 리듬이 끊기고 나니 전처럼은 안되더군요. 그래서 나중에 다시 때가 되면 리메이크 하기로 하고 일단은 지금까지의 글과 설정, 캐릭터들을 봉인해두었습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지금 쓰는 것에 전념하려구요.

그런데 정작 새로 연재하고 있는 작품에 달리는 리플이라는 게 바로 그 전에 연재하던 작품에 대한 질문들입니다. 언제 다시 연재하냐고. 그 뒷부분 어디서 볼 수 있느냐고. 지금 쓰고 있는 건 전혀 다른 소설인데 엉뚱하게 이미 연재를 중단해버린 작품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 전부이기라도 한듯 말이죠.

화가 나더군요. 진짜 화가 납니다. 그게 전부가 아닌데. 지금 연재하고 있는 건 그게 아닌데. 그럼에도 자꾸 지나간 것들만 이야기하고 있으니 증오스럽기까지 합니다. 제가 쓴 소설인데 제가 증오하게 되어버립니다.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요. 그러면서 생각했죠. 아, 주성치가 그래서 축구공을 밟아 터뜨렸구나 하구요. 그런 심정이었을 겁니다. "나는 지금 <쿵푸허슬>을 보여주려는 거야! <소림축구>따위는 잊어!" 라는.

창작자에게 있어 전작에 대한 사랑은 영광이면서 또한 굴레입니다. 자신의 작품에 관심과 애정을 보인다는 것은 창작하는 사람에게 있어 더할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그러나 그 관심과 애정이 지금 새로운 창작에까지 집착으로서 작용하게 되면 그것은 굴레가 되어버리죠. 자기가 자기가 아닌게 되어버리는, 오로지 과거의 한 점에 고정되어버리는 그러한 구속입니다. 예전에 게임을 만들 때도 느꼈었죠. 만화를 그릴 때도요.

차라리 제가 전작에 대해 미련이 많은 타입이라면 또 모르겠습니다. 어떤 작가처럼 자기 작품만 죽어라 리메이크하는 완벽주의자라면 또 괜찮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지나간 일에 대해 크게 연연하는 타입이 아닙니다. 저처럼 자기가 그린 그림이나, 원고를 쉽게 태워버리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인터넷에서도 저보다 더 자기 글 잘 지워버리고, 많이 지워버린 사람 별로 없을 겁니다. 몇 년 새 지운 글만 거의 2천 개가 넘으니까요. 남아있는 글과 지운 글의 수가 거의 비슷하죠.

그런 성격이다 보니 이미 지난 일은 지난 일이 되어버립니다. 언제고 다시 생각이 다서 새롭게 창작한다면 모를까 이미 쓸 때가 아니라 생각되어 봉인한 거라면 더이상 생각할 것도 없는 지난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지금 쓰고 있는 이것 하나가 중요하죠. 그런데 거기다 대고 과거의 작품만 이야기하고 있으니 돌아버릴 밖에요. 아주 돌아버릴 지경입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요.

그래도 참아야 합니다. 솔직히 성질난다고 날려버리기엔 그 작품을 위해 준비했던 것들이 너무 아까우니까요. 조용히 참고 있다가 나중에 다들 잊을 때가 되었을 때 그때 다시 리메이크 할 겁니다. 지금보다 더 멋지게 말이죠. 그동안 글 쓰면서 느낀 건데 소설은 확실히 나이를 따라가더군요. 경험한 만큼 글이 나옵니다. 아무리 글 잘써도 경험이 일천하면 글도 일천해집니다. 그래서 저는 시간을 믿습니다. 시간이 지금보다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하여튼 자기 작품에 대한 관심과 애정때문에 그 작품을 증오하게 된다는 것이 어이없는 역설입니다. 어떻게 자기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작품을 증오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것이 부모가 자식을 증오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지 않은가 싶기도 합니다. 엇나가는 거죠. 사랑이. 사랑이 엇나가 결국 채워지지 못한 사랑이 증오가 되는 겁니다. 아마도 그렇지 않은가 생각하게 됩니다.

주성치의 심정이 되어 생각해봅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얼까 하고. 그냥 무시하고 계속 쓰느냐. 아니면 요구에 따라 조기 리메이크를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아예 아이디를 바꿔 새로운 사람인 양 새로운 작품을 쓰느냐. 어느쪽이든 전부 바보같습니다. 어쨌든 지금 당장 연재하는 것을 완성해야겠죠. 나머지는 그 다음에 고민할 문제입니다. 스트레스의 시작입니다. 이제부터. 에효.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기분나쁜 새벽...

오늘 우연히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내 뒷담화를 하는 어떤 포스트를 발견했다. 뒷담화 당사자 가운데 한 사람은 나를 무척이나 싫어하던 사람. 다른 한 사람은 무척이나 나에게 친한 척 살갑게 대하던 어떤 누군가. 나를 싫어하던 인간이야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 평소 친한 척 하던 인간이 거기서 그러고 놀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충격이었다. 나 또한 그 사람을 무척이나 좋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어쩌면 이런 것이 온라인에서의 인간관계인지도 모르겠다. 보이는 곳에서는 착한 가면을 쓰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본색을 드러내는, 무한한 인터넷의 바다 만큼이나 수없이 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곳. 그렇지 않아도 온라인에서의 인간관계라는 것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던 차에 다시 한 번 실망을 더한다. 고작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도대체 어디에서 알마나 되는 나에 대한 험담이 돌아다니고 있을까? 나에 대한 조롱과 비아냥이 돌아다니고 있을까? 내가 아는 그 친한 척 하는 사람 가운데 과연 얼마나 되는 사람이 뒤에서 그런 짓을 하고 다니고 있을가? 보이지 않으니 알 수 없다. 들리지 않으니 또한 알 수 없다. 그래서 의심만 깊어진다. 인간에 대한 불신이다.

 

역시 사람이라는 것은 살과 살을 부대껴야 한다. 마음과 마음을 부대껴야 한다. 싸우고 갈등하고 화해해봐야 한다. 울고 웃고 화내고 슬퍼해봐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사람의 관계라 할 수 있다. 고작해야 인터넷 따위. 고작해야 아이디 따위. 고작해야 온라인으로 텍스트나 나누는 따위로 인간관계라 하는 것은 우습다. 진짜 우습다.

 

물론 모든 관계가 그런 것은 아니다. 온라인에서의 인연으로 지금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많다. 때로 선물도 받는다. 작년엔 그림 그리라고 타블렛도 하나 받았다. 내가 그림 그려서 올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 보내온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그래도 인터넷을 버틴다. 그러나 역시 사람을 믿기가 쉽지 않다.

 

인터넷 대인공포증인 것일까? 아마도 그런 것같다. 요즘은 게시판에도 잘 가지 않는다. 예전엔 그렇게 열심히 토론도 하고 논쟁도 하던 그 곳이 이제는 두려워진 때문이다. 정말 무섭다. 그 사람들이. 그 가면 뒤에 숨은 악의가. 그것이 인격으로 보일 때 그 두려움은 실체가 된다. 숨막힐 정도로 두려운.

 

글 쓰는 건 내 취미생활이다. 내 생각을 정리해서 나만의 글로 풀어내는 것은 내가 갖고 있는 거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글을 쓰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이 두렵다. 그래서 일부러 인터넷에서는 더욱 두터운 가면을 쓰려 한다. 아이디는 단순히 아이디일 뿐이라 여길 수 있는.

 

하여튼 기분나쁜 새벽이다. 왜 하필 거기서 그 아이디를 검색했을까? 왜 하필 그 글을 클릭했던 것일까? 아니었다면 그저 좋은 기억으로만 남을 수 있었을텐데. 아니었다면 그저 좋은 관계로만 남아있을 수 있었을텐데. 후회가 앞선다. 차라리 몰랐다면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라 하는 후회다. 정말 기분나쁜 새벽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논리의 비겁함...

아는 변호사가 그러더군요. 왠만하면 재판같은 거 하지 말라구요. 특히 저같은 사람은 재판하면 안된다구요. 돈 없고 배운 거 없는 놈 재판해봐야 돈만 깨지니까 재판 할 일 있을 거 같으면 그냥 돈 물어주고 말라고 하네요. 그게 재판비용 절약하는 방법이라고. 그러면서 끝에 덧붙이는 말이 "법이니 논리니 하는 건 결국 배우고 가진 놈들 편하게 세상 지배하자는 수작이다."라나요?

예전부터 논리라고 하는 것에 대해 회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성이라는 데 대한 회의죠. 저 자신이 느껴봐서 알거든요. 만화도 그려봤고 게임도 만들어봤고 요즘은 소설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자연히 다양한 캐릭터의 다양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그려내야 하죠. 그를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논리가 필요하구요. 설사 그것이 살인자라 해도 말이죠.

이성으로 변명하고자 하면 변명하지 못할 게 없습니다. 살인도, 강간도, 강도도, 사기도, 부정도, 다 변명이 됩니다. 그럴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것이 어떻게 해서든 만들어집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게 믿으면 됩니다. 그렇게 믿고 그렇다고 여기면 됩니다. 그 다음에 열심히 머리를 굴리죠. 아는 것 모르는 것 있는대로 끌어모아 그 논거로 삼습니다. 그러면 됩니다. 논리 완성이죠.

논리와 비슷한 말로 궤변이라는 게 있습니다. 논리인 것처럼 보이는데 결국은 논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궤변이라고 하는 그 상대 입장에서 그것은 논리입니다. 이쪽에서 논리라 하는 것이 저쪽으로 가면 궤변이 되구요. 누가 옳은 것일까요? 누가 논리이고 누가 궤변인 것일까요? 나는 논리이고 저들은 궤변일까요? 아니면 저들은 논리이고 내가 궤변인 것일까요?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논리의 근거가 되는 가치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에 의해 부여된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애초부터 가치라고 하는 것이 부여되지 않습니다. 도롱뇽이 더 귀중하고 돌덩이는 더 하찮고 하는 그런 가치라는 것은 원래 이 세상에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만들었을 뿐이죠.

가치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발명품에 불과합니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자갈보다 기기묘묘한 모양의 수석이 더 귀중한 것처럼 사람의 생명마저도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얼마든지 계량화하여 측정할 수 있습니다. 누구의 생명은 더 귀하고, 누구의 생명은 덜 귀한 것처럼 말이죠. 민주주의도, 인권도, 자유도, 평등도, 권리도, 의무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은 인간에 의한 것이니까요.

당연히 논리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가치를 따라가게 됩니다. 즉 사람의 생명을 민주주의와 같은 이념보다 하찮은 것으로 여기게 되면 그러한 전제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정당화되기도 합니다. 국익이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면 쓸데없이 남의 나라 가서 죽을 짓 자초한 인간에게 잘못이 있다는 논리로까지 발전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 전제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논리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논리라는 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 전제입니다. 이성이니 논리니 하는 것으로 판단하기 이전에, 그 본질적인 감성이 느끼고 판단한 무엇이 옳고, 무엇이 소중한가에 대한 직관적인 가치부여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논리는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한 것은 그러한 전제에 대한 동의여부를 결정하고 따질 문제인 것이죠.

가끔 논리적인 글이라고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자신의 논리에 도취되는 사람들도 보죠. 그 논리에 도취되어 어느새 사람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된 사람들을 봅니다. 전제가 되어야 할 가치가 논리에 종속되어 오로지 논리에 의해 그 옳고 그름이, 그 소중하고 하찮음이 결정되어버리는 모습을 보면 때때로 서글프기도 합니다. 도대체 뭘 위한 논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은 논리가 아닙니다. 소중하고 하찮고를 결정하는 것도 논리가 아닙니다. 직관입니다. 감성입니다. 그렇다고 믿는 그 본질적 마음입니다. 논리는 그것을 설명해 풀어낼 뿐입니다. 그러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다른 이를 납득시키는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기 위한 논리이지, 논리에 의해 옳고 그름이, 소중하고 하찮음이 결정되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그 직관적인 믿음을 배제한 논리란 얼마나 비겁하고 저열한 것일까요? 자신의 진심어린 감성을 이성으로 억누르고 합리와 논리에 이끌려 판단한다는 것이란 얼마나 비겁하고 저열한 것일까요? 모르겠습니다. 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저만 그러한 것들에 대해 그렇게 예민하게 느끼고 고민하는 것인지.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이성이니 논리니 하는 것만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살아있지 않은 황량한 사막과도 같은 세계 뿐이라는 것을요.

예전에 알고 지내던 방송관계자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연기자가 연기를 잘 할수록 그것은 가식이 되어간다."구요. 무슨 뜻이냐면 원래 현실에서 그렇게 멋드러지고 깔끔하게 감정표현을 하고 대사처리를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겁니다. 오히려 더 어색하고 더 서툴죠. 그럼에도 연기자가 멋드러지고 능숙하게 연기해내면 사실같다고 말하곤 합니다. 환상이죠. 연기라는 것에 대한.

논리도 그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원래 논리로 정해지지 않은 부정형의 가치가 혼재되어 있습니다. 논리라 하는 것은 그것을 정형화해서 끄집어내는 과정일 뿐이죠. 그런데 그것을 전부라 여겨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근거로 세상을 정형화시키려 합니다. 일부 진식인들이 말하는 "일관된 철학을 갖지 못한 어리석은 국민"이라는 말과 같이 말이죠.

요즘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그런 논리의 환상을 봅니다. 논리에 취해 논리만으로 모든 것을 보려는, 그 논리로 모든 것을 결정지으려는 사람들을 봅니다. 논리적인 사람들입니다. 저따위보다는 훨씬 많이 배우고, 훨씬 많이 알고, 훨씬 논리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동의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무엇보다 그 전제가 다르기 때문이죠. 그 믿음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세상을 살아도 결국 사람은 같은 세상을 살 수 없는 법인 모양입니다. 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느끼는 것도 모두 다르니 결국은 다른 세상인 셈이죠. 그것을 느낍니다. 서로 섞일 수 없는 거대하고도 절대적인 층위를요. 저같은 주제로는 어쩔 수 없는 강고하고도 높은 벽입니다. 한낱 글 몇 줄로 어찌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요즘 그것을 더욱 절실히 느낍니다.

넋두리입니다. 그냥. 논쟁이라도 할까 몇몇 게시판에서 끼어들었다가 끝내 포기하고 다 털고 나와버렸습니다. 왠지 피곤해서요. 게시판 하나 분량의 글로 그 전제까지 모드 설명하고 설득하고 납득시킨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무익한 일인가를 느끼게 되니 엄청 피곤해지더군요. 남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넋두리 하나. 역시 나는 그냥 돈이나 벌어야겠습니다. 제게는 무리에요. 이런 건. 훗.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만화방이 좋아...

만화책이 보고 싶을 때 나는 만화방을 찾는다. 대여점이 아니다. 만화방이다. 만화책과 무협지, 판타지 소설이 빼곡이 놓여져있는 공간. 오로지 만화책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만의 공간. 나는 만화책을 보기 위해 그 만화방을 찾는다. 만화방을 찾기 위해 서점보다 멀고 불편한 거리를 일부러 걷기도 한다.

만화책을 사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분명 뭐라 할 것이다. 왜 빌려서 보느냐고. 거기에 대해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처음 만난 만화는 빌려서 보는 만화였다고. 허름한 가게, 유리창 너머로 보이던 누렇고 두꺼운 종이에 그려진, 빌려보는 데 30원 하던 만화들이 내 만화인생의 시작이었다고. 그래서 빌려보는 것은 내가 만화를 보는 일상적인 방법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물론 만화책은 기본적으로 사서 봐야 한다. 그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도 많은 만화책을 사서 보았고, 지금도 수십권의 만화책을 방안 한구석에 쌓아두고 있기도 하다. 최소한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작가의, 스스로 감탄할 수 있는 만화는 경제력이 허락하는 한 반드시 사서 봤었다. 최소한 일상에서 나는 만화책을 사야 함을 절대 동의하며 실천에 옮기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서 읽는 만화에서는 알 수 없는 부족함을 느낀다. 무언가 빠져버린 듯한 공허함과 허전함마저 느낀다. 집에서 편안히 누워 읽는 만화에서는, 시시때때로 손만 뻗으면 읽을 수 있는 만화에서는, 내가 처음 만화를 읽던 5살 무렵의 그 흥분이 느껴지지 않는다. 풍요속의 빈곤이라고나 할까? 그토록 갖고 싶은 만화를 수없이 모아두고 있음에도 정작 내가 바라는 최고의 재미는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좁은 공간. 어두컴컴한 조명. 때때로 난방이나 냉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손이 곱기도 하고 땀으로 온 몸이 범벅이 되기도 한다. 만화책 한 권을 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다 읽기를 기다려야 하고, 읽다가도 다른 사람을 위해 빨리 읽고 넘겨줘야 하기도 한다. 더구나 볼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 빌려보기 위해 낸 돈 300원에 만큼 단 한 번에 모든 내용을 파악하고 재미를 느껴야 하는 공간. 그곳이 만화방이다.

더없이 불편한 환경이다. 여러사람과 책을 공유하며 부대껴야 하는 부자유스러운 환경이다. 주어진 기회도 제한되고, 집에서 만화책을 볼 때와 같은 여유도 없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만화를 보는 최고의 재미를 느낀다. 만화 삼매경에 빠져 주위조차 둘러보지 못하는 사람들 틈에서 불편한 의자에 앉아 낸 돈 만큼의 기회동안 만화의 모든 것을 읽기를 강요당할 때 만화를 읽으며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을 경험한다. 나에게 있어 만화를 보는 최고의 경험은 만화방에서 빌려보는 만화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만화방에는 수많은 만화가 있다. 내가 살 수 없는 정말 많은 만화가 있다. 어떤 것들은 지금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것들이다. 어떤 것들은 나와 있었는지도 모르는 것들이다. 어떤 것들은 인쇄가 형편없어 보는 것 자체가 고문이고, 어떤 것들은 번역이 엉망이라 읽으면서도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페이지를 찢거나 오려간 만화에서부터, 오물이 묻어 읽을 수 없게 된 만화도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만화가 그곳에 있는 것이다.

거기에 만화방에 몰려드는 사람들은 모두 만화를 보고자 모인 사람들이다. 집에서 만화책을 볼 때와는 달리 만화방에서는 만화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화책을 본다. 테이블 위에 쌓인 만화에서 그들이 좋아하는 만화를 슬쩍 알 수 있다. 가끔 키득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이 보는 만화를 흘끔 훔쳐보기도 한다. 나와 같은 만화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의 만화를 공유할 수 있다.

서비스로 뽑아주는 커피는 만화를 읽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별미다. 한여름 얼음을 띄워 갖다주는 커피나 음료수는 만화를 읽는 지루함을 달래준다. 가끔 친해진 만화방 주인이 먹으라며 주는 과자나 과일 등의 간식거리는 심심해하는 입을 분주하게 만든다. 만화방에서 알게 된 사람과의 수다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인터넷과는 다른 오프라인의 생생한 만화이야기는 만화를 읽는 이상의 만화에 대한 재미가 된다.

만화방이란 이런 곳이다. 벽으로 빽빽이 들어선 서가와 그 서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만화책들.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들리는 침묵속에 만화에 정심없이 빠져든 사람들. 가끔 연인끼리 서로의 만화를 넘겨보며 재미를 공유하기도 하는 만화가 살아있는 공간. 그곳에서 만화를 본다고 생각해보라. 어찌 만화가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화를 읽는데 이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을 것이다.


아니 사실 이런 이유 따위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다. 나의 만화 경험이 만화방에서 시작되었으며, 한참 만화의 재미를 느낄 때 만화책을 볼 수 있는 곳은 만화방 뿐이었다는 것이 만화방에서 읽는 만화가 더 재미있는 근본이유일 것이다. 단지 나의 습관에 의한 재미에 불과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내세우는 이유라 하는 것은 "빌려보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자기변명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만화방에서 읽는 만화에서 더 큰 재미를 느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만화방의 불편하고 제한된 환경에서 보다 만화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별로 대단할 것 없는, 오히려 집보다 불편한 그곳에서, 주어진 시간동안 읽는 만화에서 더 충족감을 느끼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내가 가장 재미있게 만화를 읽을 수 있는 곳은 집이 아닌 만화방인 것이다.

그래서일게다. 만화책을 사서 모으면서도 여전히 만화방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솔직히 만화가나 출판사에는 미안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습관적으로 마약에 취한 듯 지금도 만화방을 찾아 만화책을 읽고 있는 것이다. 가끔 만화방 주인에게 주문해서 사는 만화책은 그에 대한 속죄의 의미일 것이고. 만화가들에게는 다시 한 번 미안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만화방에서 읽는 만화는 너무 재미있으니까.

만화방을 그대로 두면서 출판사와 만화가들에게 이익이 돌아가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런 방법이 있다면 빌려보는 값이 조금 더 비싸지더라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텐데. 만화방이 좋은 것은 빌려보는 값이 싸서가 아니라 만화방이라는 환경을 좋아하기 때문이니까. 그런 방법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만화방이나 만화가나 어느 하나도 포기하기에는 아깝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아기와 나> 나의 옛이야기이기도 한...

 

우리집 막내가 태어난 것이 내가 국민학교 1학년 때. 1학년의 거의 마친 겨울의 어느날이었다. 그리고 그 막내는 이후 나의 책임이 되었다. 원래부터 몸이 약하셨던 어머니께서 요양 겸 치료를 받으셔야 했던데다, 조금 건강이 나아지고서는 일하러 다니시느라 막내를 돌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골에서 몸조리하고 오셨을 때 막내가 무섭다며 가까이 가지도 않았던 경우마저 있었다.

막내 분유를 타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업어주고, 놀아주느라 국민학교 3년까지의 시간은 정말 빨리도 갔다. 학교에서 갔다오면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어두컴컴한 단칸방에 앉아 막내가 어디 다치기라도 할까 걱정하며 보살피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책을 읽으며 문지방을 넘어 부엌에라도 구르지 않을까, 어디서 넘어지거나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하루를 보내곤 했다. 나는 맏오빠였으니까.



그때의 감정이란 쉽게 설명할 수 없다. 동생에 대한 사랑스러움과 함께 나를 구속하는 동생에 대한 미움이 있었다. 동생에 대한 책임감과 더물어 동생을 버리고 나가 놀고 싶은 도피의 욕구도 있었다. 차라리 이 녀석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고, 그러면서도 껴안으면 따뜻하고 보드라운 그 몸이 정말 좋았다. 오빠라며 졸졸 쫓아오는 귀여운 강아지같은 모습을 보고 있으면 왠지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아직 어렸던 내게는 버거웠던 감정들이었다.

더 끔찍한 것은 이모들이 내 동생을 기점으로 줄줄이 매년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내 동생 한 살 아래서부터 네 명이 한 살 터울로 태어났다. 뭐 이모네 집에 있을 때야 나와는 상관없다. 문제는 이모들이 서울로 올라올 경우. 당시 외할머니를 모시고 살던 터라 이모들이 서울로 자주 올라오게 되었는데 그때면 나의 지옥은 시작된다. 이제 좀 자라 마음이 놓이던 막내 아래로 아직 어리던 줄줄이 꼬맹이들은 나 혼자 책임지고 보살피려면 그건 차라리 지옥이다. 오죽하면 지금도 그 녀석들은 나를 보면 "무서운 형아"로 기억한다. 감당하지 못한 짐에 치여 그 아이들에게 꽤나 상처를 주었던 모양이다. 

지금도 나는 누군가를 책임지는 일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누군가를 배려하고 보살피라고 하면 일단 도망부터 치고 본다. 아마도 그 때의 너무 무거웠던 책임들이 일찌감치 나를 지치게 만든 모양이다. 누군가를 책임지고 보살핀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를 너무 어려서 깨달은 탓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아직도 아이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면 머리가 아파오고 유난히 피곤해지는 것은. 아이들과 어울리는 자체도 공포로 여기는 것은 그 지옥과도 같은 어린시절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아기와 나를 읽으면서 내가 느낀 감정은 아련한 추억과 함께 주인공 "진"이에 대한 동정이었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부모를 대신해서 부모의 역할을 대신해야 했던, 아직 부모가 되기에는 너무 어린 시절이 있었는데. 그 시절을 떠올리며 진이에게 나를 일치시킨다. 신이에게 막내를 일치시킨다. 그리고 그 시절로 돌아간다. 역시 추억은 좋은 모양이다. 그래도 좋은 기억이 더 많이 더오르는 것을 보니.

아기와 나에서 진이는 동생 신이를 보육원에 맡긴다. 진이 말고 철수와 장수도 동생들을 보육원에 맡기고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을 찾아온다. 하지만 그 때 우리 동네에는 보육원이 없었다. 아니 있었다 하더라도 사설 보육원에 아이들을 맡길만한 돈은 없었을 것이다. 가난한, 너무 가난해서 가난조차 일상이 되어버린 그런 동네였으니까. 내가 동생을 떠맡아야 했던 것도 그 가난 때문이었으니까.

1980년대 초반 그때를 살았던 많은 집들이 그랬다. 아마 지금도 많은 집들이 그럴 것이다. 부모는 한 푼이라도 돈을 벌기 위해 모두 일을 나가고 아이들만 집을 지켜야 했고, 또 지금도 지키고 있다. 살아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아이들은 스스로를 책임져야 했고 부모 대신 동생들을 보살펴야 했다. 그런 집에서 유아원이 있다 해서 맡길 돈인들 있었을까? 결국 나이 많은 아이가 소년소녀가장 아닌 가장이 되어 동생들을 책임지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그렇게 크게 달라지지 않은 우리네 가난한 이웃들의 일상이다.

그러나 그때 우리에게는 동네가 있었다. 옆집 아줌마, 끝방 아줌마, 저기 파란대문집 아줌마, 도사견집 아줌마 등등... 수많은 동네 아줌마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그 모든 아줌마들의 공동의 아이들이었다. 그 아줌마들로 인해 동네는 하나의 커다란 보육원이 되었다. 학교에 가면서 옆집 아줌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그 아이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노는 내내 다른 아줌마들이 그 아이를 살피고 보호한다. 아이가 어디로 갔는지, 아이가 어디에서 다쳤는지, 누구와 싸우고, 누구와 친한 지 아르고스의 눈과도 같은 아줌마들의 눈에 의해 감시되어진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 험한 동네에서도 안전하게 자라날 수 있었다.

아이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집안에 가두어 두어 문제가 되었다는 뉴스를 보면 가슴이 아프다. 쓰레기통같은 방안에 과자 몇 개와 함께 아이들을 방치해두었다는 부모를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우리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우리 때는 그렇게 아이들을 방치해둘 새가 없었는데. 방치하고 싶어도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극성스런 동네 사람들이 아이들의 보모가 되어주어 그렇게 외롭고 슬프게 자라지 않아도 되었는데. 흙투성이 상처투성이일망정 최소한 그곳에서 아이들은 즐겁고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재개발로 파괴되어지는 수많은 동네를 보고 있으면 힘겹고 가난한 사람들을 감싸주던 가장 든든한 보호막이 사라진 듯한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져온다. 그로 인해 멀리 흩어지는 동네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마지막 의지처조차 파괴된 사람들의 슬픔이 먹먹하니 가슴을 매어온다. 서로를 감싸고 서로를 위로하던 그 끈끈한 인정이 자본에 의해 해체되어가고 있음에 울컥 가슴 저 밑에서 뜨거운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그 기억. 그 가난하던 시절의 사라진 기억들이 부숴진 건물의 잔해 속에 처절하게 투쟁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투영되어 그 분노는 더욱 뜨겁게 젖어온다. 이 땅의 민중들은 왜 이리 슬픈 것일까? 그 작고 하찮은 공동체조차도 스스로를 위해 지키지 못할 정도로 왜 이리 무력하고 슬픈 것일까?  

그렇게 모든 것을 부숴놓은 위에 제대로 된 보육시설이라도 지어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라리 그렇게라도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유럽처럼 국영 보육시설을 갖추자고까지 주장하지는 않는다. 최소한 일본과 같은 수준의 사설보육원이라도 충분히 확보되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현실에선 꿈에 불과하다. 

시설은 부족하고, 있는 시설조차도 제대로 관리가 되어지지 않고 있다. 정부의 관심과 지원은 미미하기 이를데 없어 그나마의 보육시설들마저도 운영자의 사익을 위해 이용되어지도록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해체된 공동체의 보육원 대신 주어진 아이를 기르기 위한 환경이라는 것은 고작 이 정도다. 이 나라의 자본이, 이 나라의 권력이 해놓은 일이라는 것은 고작 이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면서도 아이를 낳으라 떠들어대고 있다. 어이없고 한심할 뿐이다. 도대체 아이를 낳으면 누구더러 키우라는 것일까?

진이가 동생을 돌보게 된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셔서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으면서 진이는 본의아니게 어머니의 역할을 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에는 부모가 있어도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지 않으면 안되는 수많은 아이들이 존재한다. 어디 의지할 곳 없는 현실 속의 외롭고 고단한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이 만화의 환상 저편에 존재하는 우리의 현실이다. 언제쯤 그 아이들이 아무 걱정없이 아이로서의 일상을 누릴 수 있게 될까? 그 아득하기만 한 현실이 이 만화를 불편하게 만든다.

 

아기와 나는 진이와 신이의 성장 이야기다. 동시에 진이와 신이의 현실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진이와 신이 같은 수많은 아이들, 그와 같은 경험을 가진 수많은 성인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현실이며 현실이었던 이야기다. 과거이며 현재이고, 또한 미래일 지도 모르는 이야기들. 그래서 이 만화는 그냥 만화로만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감상을 쓰더라도 만화 감상문이 아닌 현실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이 만화 자체가 현실이니까. 역시나 좋은 만화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뭘 쓸까...?

이것까지 블로그 여섯 개 째. 하나는 폐쇄했으니 다섯개 째다. 솔직히 다섯개나 운영하는 건 무리다. 글 하나 써서 똑같이 복사해서 올린다고 해도 그 시간이 장난이 아니다. 더구나 나처럼 다작하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이번에는 왠지 특화된 블로그를 만들고 싶어졌다. 하나의 주제만을 다루는. 어떤 게 좋을까...? 음...

 

만화?

애니?

일본드라마?

역사?

정치?

시사?

소설을 써볼까?

야한 사진을?

군사에 대한 거?

프라모델?

피규어?

게임?

 

음...

고민... 고민... 고민...

 

그렇다고 다른 블로그랑 똑같이 이것저것 잡탕으로 다루는 것도 문제일테고... 그건 또 꽤 사람 질리게 만들거든. 뭔가 하나를 정해야 할텐데... 음... 역시 저작권이 걸릴만한 걸 쓰는 게 나을까? 어딘가에서 괜히 멋대로 인용하면 곤란해질 것같은 것들... 음...

 

뭐 오늘은... 블로그 만든 걸로 만족하고... 나중에... 천천히... 시간이야... 별로 없으니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