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② "민족경제론은 난센스다"
2. 세계경제에 대한 긍정
사회적 대타협론은 국민경제와 세계경제 간의 연관성을 적극적으로 긍정했다. 이에 따라 전통적 진보담론에서는 자본가의 당파적 주장으로 간주되었던 국제경쟁력 개념까지 수용했다.
전통적 진보담론에서 이른바 제국주의 국가들이 주도하는 세계경제는, 심하게 말하자면 절대악'이었다. 박현채 선생의 사유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경제론의 입장에서는 무역도, 기술 수입도, 외자도 악이었다. 참다운 민족경제를 건설하려면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이탈해야 했다.
이런 식의 생각을 극단적으로 전개한 사람이 있다. 바로 중국의 마오쩌둥이다.
1958년 마오쩌둥은 모스크바를 방문한 후 중국으로 돌아와 급진적인 경제발전 계획을 발표한다. 그 목표인즉슨 중국이 "15년 안에 미국과 영국을 따라잡아" 경제 및 군사 부문에서 세계 최강대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오는 중국을 정치대국으로 키우겠다는 야무진 꿈도 가지고 있었다. "지구통제위를 설치하여 지구의 통일 계획을 수립하겠다!" 로보트 태권V의 카프 박사나 마징가 Z의 헬 박사, 007 시리즈의 블로펠트 등 지구정복 야망에 불타는 악당 계보의 원형이 여기 있다.
아무튼 이렇게 대약진운동은 시작되었다.
◇ 마오쩌둥의 민족경제론
그런데 중국이 15년(대내적으로는 10년) 안에 미국과 영국을 따라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했나.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제조업 및 농업 부문의 생산력을 발전시켜야 했다. 무엇보다 '산업의 씨앗'인 강철의 생산량을 대폭 늘려야 했다.
결국 문제는 '어떻게 강철 산업을 육성할 것인가'로 집약된다. 개발도상국의 입장에서 가장 일반적인 산업육성 방법은 어떻게든 (빌려오든, 식량이나 원자재 수출로 벌어들이든) '외국 돈'을 만들어서, 해외의 노하우와 기술, 설비를 사들이고, 이를 통해 대규모 플랜트를 세우는 것이다. 이는 남한이 포항제철을 키운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족경제론의 관점에서 외자와 무역과 기술 수입은 악이다. 그래서 마오는 '외자에 의존하는' 사악한 방식을 거부하고 그야말로 '민족자본'과 '민족기술'에 의존하기로 한다. 어떻게?
그는 전 중국 인민들에게 '뒷마당 용광로'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집집마다, 학교마다, 직장마다 작은 용광로를 설치해놓고, 이곳에 인민들이 소유하고 있는 거의 모든 금속제품들을 무조건 기부하도록 강요했다.
중국 출신 영국 작가인 장융에 따르면 "조리기구, 쇠로 된 문손잡이, 여성의 머리핀은 물론이고 농기구와 심지어는 물탱크마저 용광로 속으로 들어갔다." 이 용광로의 연료를 대기 위해 농민들의 집이 헐렸고, 인근의 산과 언덕들은 벌목으로 민둥산이 돼 버렸다.
그러나 이렇게 만든 강철은 당연히 산업발전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거의 전량이 폐기되었다.
식량생산에서도 마오는 상식을 심하게 비켜갔다. 인민공사를 설립해, 농민들의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을 집중시킨 극좌적 노선은 차치하고라도, 공상에 가까운 생산량 증대 선전을 벌였던 것이다. 당은 곤봉과 총으로 생산 책임자에게 말도 안 되는 증산 목표를 강요했다.
중국공산당의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정상 산출량의 수백 배에 달하는 식량을 생산한다는 모범 지역을 날조해 선전했다. 이 신문은 무게가 200kg인 양배추, 트럭의 절반 크기인 오이, 암소만한 돼지가 생산되었다고 '사기'를 쳤고 인민들은 이를 모두 믿는 척했다. 안데르센의 '벌거벗은 임금님'이 당대의 중국 현실에서 그대로 구현되었다.
이 시기 중국의 농촌에 가면 농민들이 빗자루를 들고 논두렁을 뛰어다니며 굉음을 내지르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식량을 좀먹는 참새를 박멸하라는 마오 주석의 지시에 따른 행동이었다. 참새가 논밭에 앉지 못해 지쳐 떨어지면 그것을 '박멸'한다는 기막힌 전술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성공'으로 참새가 박멸되자 해충들이 번성하는 파멸적 결과가 초래되었다. 중국 정부는 '극비'로 소련에 서한을 보내 "참새 20만 마리만 보내 달라"고 애원해야 했다.
대약진운동의 결과는 굶주림과 과도한 노동으로 인한 3800만 명의 아사였다. 이 같은 광란 어디에도 '계급투쟁을 통한 사회발전'이라는 사회주의 원리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대약진운동의 참상은 마오쩌둥이라는 광적인 지도자가 '인민의 독재'를 '인민에 대한 당의 독재'로 대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국민경제가 세계경제 혹은 세계시장과 유리된 채 독자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었던 '마오식 민족경제론'의 결과이기도 했다.
북한의 목탄 자동차, 비닐론 등도 중국의 '뒷마당 제철소'와 같은 발상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 스웨덴의 사민주의
중국의 마오쩌둥과는 상반되게, 자국의 국민경제와 세계경제와의 연관 관계를 슬기롭게 이해하고 이를 노동자와 민중의 이해에 적합한 정책으로 승화시킨 사례도 있다. 바로 스웨덴의 사회민주당이다.
스웨덴 사민당은 1930년대에 일찌감치 세계 좌파의 교리나 다름없었던 '산업 국유화'를 포기하고, '국제경쟁력 키우기'에 천착한다. 인구 1000만 명이 안 되는 작은 산업국가 스웨덴의 운명은 국제경쟁력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스웨덴 좌파가 인정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국제경쟁력 키우기'란 의제는 자본과 우파 정치세력의 요구이다. 경쟁국에 뒤지지 않도록 자국의 산업을 합리화해야 하고, 이는 정리해고를 수반하는 구조조정으로 이어져 결국 자국의 노동자와 서민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웨덴 좌파는 '국제 경쟁력 높이기'란 우파의 의제를 과감히 수용해 우파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한 방법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그러면서도 고용안전을 지켰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무엇보다도 사민당은 '국제경쟁력 높이기'와 '고용안정'을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반된 목표로 규정하지 않았다. 사민당은 이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내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 결과 사민당이 찾아낸 획기적인 방법은 바로 실업위원회를 노총(LO)의 통제 하에 두게 한 것이었다.
스웨덴 좌파는 국제경쟁력을 높이려면 '노동자들이 노동의 유연화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러면서도 고용안정을 지키려면 '노동자들이 산업 합리화에 따른 실업을 당해도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는 기간 동안 견딜 수 있는 수준의 보험금이 제공돼야 한다'는 점도 인식했다.
그러나 당시 스웨덴의 실업 제도는 이런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우파가 지배하고 있던 실업위원회는 실업보험금을 지나치게 낮게 설정했을 뿐 아니라 파업 시엔 대체 노동력을 제공하고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에겐 새 일자리 소개를 제한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스웨덴 사민당은 1930년대 실업대책사업과 실업보험을 실시하는 실업위원회를 우파에서 노총(LO)의 통제 하로 옮기는 '업적'을 남긴다. 노총이 실업위원회를 통제해 실업보험금 인상 등을 실시하도록 함으로써 노동 유연화를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미야모토 타로의 <복지국가 전략> 참조)
이 같은 정치경제적 테크닉은 스웨덴 사민당의 대표적 정책인 '연대임금 정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연대임금 정책은 동종 산업의 노동자에게 동일한 수준의 임금을 제공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노동의 대가를 균등하게 함으로써 노동자들의 동류의식, 즉 노동자계급의식을 높이는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기아 사태나 코스콤 사태를 보면, 한국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같은 계급이 아닌 것 같다.)
연대임금 정책은 노동자 계급을 형성하기위한 정책일 뿐만 아니라, 저효율 기업을 퇴출시키고 고효율 기업을 강화하는 산업구조조정 정책이기도 했다.
예컨대 A라는 업종의 모든 기업들이 자사의 노동자들에게 같은 임금을 줘야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저효율 기업은 이 업종에서 퇴출당할 가능성이 크지만, 고효율 기업은 연대임금 정책이 실시되지 않은 경우보다 더 많은 잉여를 남겨 재투자까지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연대임금 정책은 저효율 기업은 퇴출시키고 고효율 기업만 남기는 정책적 효과를 낳는다. 물론 퇴출당한 기업의 노동자에 대해서는 강력한 복지정책과 재교육, 재취업을 국가가 책임지고 수행했다.
유토피아는 없다
스웨덴 사민주의의 이 같은 '성공'에서 배울 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스웨덴 사민주의가 마치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장점만을 복합한 유토피아처럼 여겨지는 경향도 있어, 여기에는 반론을 제기하고 싶다.
어떻게 보면 스웨덴 사민주의는 '국가와 노동자계급의 이해'라는 추상적 주체를 내세워 개별 노동자와 개별 노조의 자주성을 침해하는 것이다. 그 유명한 잘츠요바덴 협약 당시 스웨덴 국가는 거의 강압적으로 노총(LO)과 경총(SAF)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또한 1930년대 당시 스웨덴 노총은 경총과의 협상을 위해 이 나라에서 가장 전투적이었던 건설노조의 파업을 억압해 이 부문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률을 대폭 낮추기도 했다.
수익엔 비용이 따르고, 즐거움은 고통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개인들이 완벽한 자유를 누리면서 사회적인 조화가 동시에 성취되는 유토피아는 이 세상에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위기타개형 정당'이 필요하다
스웨덴은 스웨덴이고 한국은 한국이다. 1930년대의 스웨덴과 2007년의 한국은 시공간적으로 너무나 멀고 아득하다.
또한 스웨덴 사민당의 정책 역시 1930년대부터 20년 동안 피땀을 흘린 결과 1950년대 이후부터 비로소 20~30년 정도의 선순환을 성취한데 불과하다. 영원한 것은 없고 상황은 언제나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스웨덴의 진보세력이 당대의 세계경제 속에서 자국의 위치를 똑바로 인식하고, 여기에 슬기롭고 담대하게 대처한 과정을 한국의 진보세력은 해석학적 입장에서 철저히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민주노동당이 청와대보다 허술하고 심지어 반동적으로까지 보이는 이른바 '코리아연방공화국'이나 외쳐대는 정당이 아니라, 상황 인식과 대안의 개연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위기타개형 정당'이었다면 대선을 2달 여 앞둔 지금 시민들은 얼마나 행복할 수 있었겠는가.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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