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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는 미녀만 욕망 한다?

에로스는 미녀만 욕망 한다?
[문화 속 욕망읽기⑧] 근원적인 시선(視線)을 찾아서
텍스트만보기   조영해(lacan66) 기자   
▲ <화양연화>, 어긋난 에로스는 인간을 절망과 고통에 빠지게 한다.
ⓒ 블록 2 픽쳐스
도대체 에로스가 무엇이기에 인간을 눈멀게 하고, 때로는 벼랑 끝으로, 때로는 스토커라는 타자에 대한 테러(?)로 나타나는 것일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왜, 이토록 인간실존을 절망과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일까?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반문들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이란 자신의 반려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말하는 모양이다. 사랑에 울고, 사랑에 아파하고. 사랑에 목숨 거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니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기에? 한탄이 나올만하다.

그래서 떠나려는 것이다. 어디로? 사랑의 기원을 찾으러 말이다. 병의 원인을 알아야 무슨 처방이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인간은 왜 사랑을 하게 되었으며 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지, 그리고 그 누군가를 부단히 소유하려고 하는 것인지 그 근원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떠날 수는 없는 일. 여기서 잠시 종교학자 엘리아데의 혜안을 빌리자면, 신화가 인간에게 사물의 기원을 알려주고 있다고 하니 그의 말에 따라 먼저 신화 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남아메리카 부족의 창조신화에 나타난 '섹스의 기원'

아주 멀고 먼 남아메리카 테네테하라 부족의 창조신화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창조신이 최초의 남녀 인간을 만들었는데, 남자는 동정(童貞)이라서 항상 성기가 발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성기가 발기되어 있으니 얼마나 불편(?) 했겠는가?

그래서 그것을 죽이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초의 그녀가 물의 정령에서 성기를 죽이는 비법을 배웠단다. 그리곤 그 난처해하는 남성의 성기를 죽였단다. 남자의 입장에서는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항상 난처했던 것을 죽여주었으니.

그런데 창조신은 그게 보기에 안 좋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노발대발하면서 벌을 내렸단다. 앞으로 성교를 통해서 성기를 죽일 수는 있지만, 그래서 아이를 잉태하게 되겠지만 본인은 죽을 것이라는 거다.

이게 섹스의 기원이란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의 이 절묘한 관계, 어딘지 낯이 익다고 생각했는데 다름 아닌 바로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열심히 설교했던 프로이드에게까지 이 얘기가 흘러 들어간 모양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발기돼 난처한 성기를 죽이려고 여성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게 사랑이 되었다는 건데, 굳이 오늘의 현실을 들먹이지 않아도 너무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라 보통 설득력이 있는 얘기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남성의 발기된 성기만을 죽이려고 사랑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 삭막하고 동물적인 것인 같지 않은가? 그래도 명색이 만물의 영장이고, 생각하는 동물인데 그래서 하나 더 찾아보았다.

제우스가 신에 도전한 인간을 반으로 쪼개버렸다?

▲ 플라톤
ⓒ 문학과지성사
이번엔 플라톤의 <향연>으로 들어갔다. 이 책에서는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 사람이 한 주제를 놓고 심포지엄의 형식을 빌려서 논하고 있다. 그들 중 아리스토파네스가 사랑의 기원을 논하면서 신화 속의 얘기를 끌어오는데 그의 얘기는 이렇다.

최초의 인간은 성(性)이 세 종류였는데 <남자+남자>, 그리고 <여자+여자>와 마지막으로 <남자+여자>의 양성으로 이루어졌다는 거다. 좀 더 설명을 하면 팔이 네 개, 다리가 네 개, 머리는 하나에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얼굴이 둘이었단다.

그런데 이 최초의 인간들이 작당을 해서 감히 신에게 도전을 했고 결과는 참혹한 패배였다. 그 벌로 제우스가 인간을 반으로 쪼개버렸다는 거다. 그런데 허걱! 이렇게 반으로 나누어진 인간들이 하나 둘씩 죽어 가는 것이 아닌가.

이유인즉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란다. 그래서 제우스는 고민 끝에 일정기간 동안만 그 반쪽을 만나게 허락을 했는데 그게 바로 에로스와 섹스의 기원이었단다. 그나마 이 얘기가 앞서의 얘기보다 좀 더 인간적인 것 같지 않은가?

거기다가 보너스로 동성애에 대한 의문도 말끔히 해결해 주고 있으니 금상첨화다. 동성끼리 붙어 있었던 인간에게 잃어버린 반쪽은 같은 동성이니 동성에 대한 사랑의 기원 또한 풀리지 않는가.

그래서 인간은 그 반쪽에 필(?)이 꽂히면 반가움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돌진해서 온 몸을 불태우는 모양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애초에 반쪽이 아닌 것 같으면 포기하면 될 터. 그렇게 하면 서로의 사랑의 주파수가 어긋나서 이별과 배신의 고통도 당하지 않을 것인데 왜, 미련을 못 버리고 끝을 보려는 것일까?

인간의 욕망은 무엇인가를 남기려는 것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좀 더 깊이<향연>으로 들어가야 될 것 같다. 이번에는 소크라테스가 사랑에 대해서 논할 차례인데 그는 자신의 얘기보다는 '디오티마'라는 여사제의 사랑에 대한 혜안을 끌어 와서 논한다. 그녀의 얘기는 이렇다.

인간이 에로스를 추구하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행복을 가져다주는 대상을 소유하려는 것이 에로스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에로스가 욕망 하는 대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아름다움'을 욕망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욕망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아리스토파네스가 주장한 반쪽을 찾는 게 에로스가 아니라 '좋은 것'을 욕망 하는 게 진짜 에로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우린 그 '좋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그토록 살벌한 경쟁을, 죽어도 미련을 못 버리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 '좋은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녀의 얘기를 좀 더 들어보자. 에로스에는 육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대한 에로스도 있는데 이 둘은 모두 '좋은 것'을 영원히 소유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영원히? 어떻게? 그래서 인간은 무엇인가를 남기려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육적으로는 후손을 남기는 일이든, 아니면 정신적인 위대한 지혜를 남기는 일이든 그 무엇이든, 무엇인가를 생산(잉태)하려는 욕망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바로 이 생산을 통해서 인간은 '좋은 것'을 영원히 소유했다는 만족을 얻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아름다움'이며 그로 인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게 그녀의 에로스에 대한 정의이다. 아니 사실은 소크라테스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수소와 수간한 파시바 왕비... 성욕이 주체가 된 인간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애욕에 눈이 먼 것일까? 어긋난 에로스가 죽음을 부른다.
ⓒ 동아수출공사
그렇다면, 에로스가 '행복'하기 위해서 '좋은 것'을 욕망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어떤 대상에 지나칠 정도로 일방적으로 집착하는 것은 '좋은 것'도 아니면, 그 '좋은 것'을 낳을 수도 없을뿐더러 그것을 '행복', 또는 '에로스'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보자면 외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에로스는 '좋은 것'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발기된 성기만을 죽이기 위해서 에로스를 추구하는 것 또한 '행복'을 주는 가져다주는 에로스는 아닐 것 같다.

그 좋은 예가 바로 포세이돈의 저주로 수소를 사랑하게 된 파시파 왕비의 얘기일 것이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애욕을 참지 못하고 암소로 위장(?)해서 그 수소와 수간(獸姦)을 한다. 그 결과 그녀가 낳은 것은 영원히 소유하고픈 '좋은 것'이 아닌, 무시무시한 반수반인의 괴물 미노타우로스였다.

물론, 포세이돈의 저주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시선이 문제였다. 그녀에게 아름다움은 '좋은 것'을 남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욕정을 한 순간이라도 풀어주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소유하고자 한 그 욕망에 있었다.

그러니 인간이 주체가 아니라 성욕이 주체가 되고, 인간은 대상이 되니 수소가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상관없게 되는 것이다.

또 있다. 그러니까 기원전 4세기경쯤 그리스 아테네에 아프로디테(고대 그리스의 미의 여신)신상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는 '프리네'라는 아름다운 여성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름다움에는 항상 고통과 질투가 따르는 법.

그녀에게 잠자리를 요구한 고관대작들 중 거절당한 맛이 간 X맨이 홧김에서인지, 암튼 그녀를 신성모독 죄로 고발을 한 것이다. 당시 신성 모독죄는 사형이었다고 하니 애욕을 거절한 대가치고는 너무 혹독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녀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것 같다. 그녀의 소식을 전해들은 전 애인(?) '히페레이데스'가 그녀를 구명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한 배심원들 앞에서 '프리네'의 알몸을 공개한다. 그리고 그는 배심원에게 말한다. "신상(神像)에 자기의 형상을 빌려줄 만큼 아름다운 이 여인을 꼭 죽여야 하는가?"

▲ 장 레옹 제롬의 <배심원 앞의 프리네>1861. 에르미타주 미술관, 러시아
ⓒ 에르미타주 미술관
진정한 아름다움은 '숭고함'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의 벗은 알몸을 본 배심원들이 만장일치(?)로 판결을 번복한 것이다. 판결문은 이랬단다. "저 아름다움은 신의 의지로 받아들여야만 할 정도로 완벽하다. 따라서 그녀 앞에선 사람이 만들어낸 법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무죄를 선고한다."

외적 아름다움의 승리인가? 아니면, 배심원들의 일그러진 아름다움에 대한 음흉한 욕망의 승리인가? 신성하고 공정해야 할 판결마저도 번복하게 만든 배심원들의 눈에 비친 아름다움은 분명 '좋은 것'에 대한 욕망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파시파 왕비의 눈에 비친 수소와 다를 바 없는 애욕에 눈먼 아름다움일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들이 욕망 하는 일그러진 에로스의 대상이자 겉모습에만 집착하는 애욕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정한 에로스의 대상은 무엇이며 어떤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인가? 그 질문에 칸트가 명쾌한 답을 주고 있다. 그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숭고함'의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숭고함'? 그것은 질리거나 지루하지 않으며 오랫동안 즐길 수 있고, 또 도덕적으로 고무되기도 하는 그런 감정이다. 그렇다고 종교적 의미의 경건한 감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숭고함에는 공포도, 전율도, 화려함도, 고상함도, 웅장함도, 떨림도, 모두 포함하는 그런 감정이다. 만약, 에로스의 대상에서 이런 '숭고함'의 감정을 느꼈다면 그것은 분명 겉모습에만 집착하는 애욕에 눈먼 에로스의 감정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 '숭고함'의 감정이 바로 우리가 찾는, 근원적인 본래의 우리가 욕망 해야 할 '좋은 것'에 대한 시선이 아닐까?
2006-07-28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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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목에 진주목걸이

돼지목에 진주목걸이
     글쓴이 : 巨志 (vpsxkrhs) 조회 : 3070  점수 : 306  날짜 : 2006년7월26일 10시08분 
   
 

이제 노무현대통령의 퇴임도 1년 남짓 남았다.


말 많고 탈도 많았던 고졸출신의 대통령을 바라보며 국민들의 편 가르기 또한 가관의 정점으로 치달았던 4년여 기간이었던 거 같다.


원칙과 상식의 기치 아래 출범한 참여정부는 초기부터 탄핵의 돌풍에 휘말리더니, 무능한 대통령으로 낙인찍고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 저 오만한 한나라당부터 그나마 남은 지역 확보하여 다시 일어서보려는 민주당, 그리고 그들의 장단에 부화뇌동하는 국민들까지 누구하나 대통령의 의지에 힘을 실어준 적이 있었던가싶다.


차떼기에 발목잡기에 협박에 온갖 지저분한 성추행에 별 일이 많아도 요지부동인 한나라당인 것을 보면, 국민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난 노무현 대통령이 강압적으로 국정운영을 해서 국민들에게 엔돌핀이 팍팍 돌게 하는 정치를 펼쳐 나갔으면, 지금 같은 상황까진 안 왔을 것 같은 솔직한 심정이다.


사람들 셋만 모이면 정치얘기로 편을 가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역사는 지나온 역사를 통해 과거를 공부하고,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바라보고 미래를 창출해 나가는 것이다.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거쳐 김영삼, 김대중 정권을 거치기까지 국민들은 각 정권을 어떻게 평가하는 것일까?


왜 지역 편 가르기가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국민들은 진실을 외면하는 것일까?


이 모든 것들이 난 노무현정권의 실패라고 단정 짓는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대중정권의 실패를 거울삼아 국민들에게 좀 더 혹독하게 했어야 하고, 한나라당은 제1야당일 뿐이니 무시하고 독단적인 국정운영을 하였어야 했다. 그래서 써글 한나라당을 코너까지 몰아붙여 숨통을 끊어야지 국민들은 광분하고 지지율은 올라갔을 듯싶다.


내가 대통령이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더러운 기득권세력들을 검찰에게 무소불위의 힘을 부여하여 정치공황 상태로까지 몰아붙였으면 한나라당의 저 더러운 작태도, 국민들의 질 떨어진 의식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니…. 이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기분 좋은 일 아니던가.


이승만처럼 박정희처럼 전두환처럼 강하게 국민들을, 야당을 밀어붙였을 것이다. 때론 한나라당과 거침없는 싸움도 하고, 지역주의에 기대기도 하고….


나라면 그랬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칙과 상식이 실종된 나라에선 민주주의란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일 뿐이므로….


비오는 수요일 기분 좋은 상상을 해봤다…. ㅎㅎ


                                                                                                ⓒ 巨志



끔찍한 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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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의 건설경기부양론은 '망국론'이다

동아>의 건설경기부양론은 '망국론'이다
[주장] 도대체 누굴 위한 투기 부추기인가
텍스트만보기   토지정의시민연대(justland)   
▲ 공사가 한창인 아파트 건설 현장.
ⓒ 오마이뉴스 남소연
지난 7월 22일과 26일 <동아일보>는 '땡처리 아파트', '건설경기 침체가 성장발목 잡았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두 기사가 말하는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정부의 부동산 (금융과 재건축)규제정책과 세금정책이 지방의 미분양 아파트 폭증을 초래했고(7월 22일), 건설경기 침체를 낳았으며 그것이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7월 26일)이다.

이런 논조의 기사는 <중앙일보>와 <조선일보>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 기사들이 궁극적으로 주장하려는 바는 무엇일까? 한 마디로 '금융규제 풀어서 담보대출 자율화 해라', '과거처럼 재건축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해라', 그리고 '보유세와 양도세를 내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지방의 아파트도 제 가격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불티나게 팔리게 될 것이고, 건설경기도 살아나 고용도 증가하고 경제가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결국 부동산 불로소득 장려를 통한 '건설경기부양론'이다. 이 기사의 논리적 허구성과 위험성, 그리고 극복 대안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땡처리 아파트' 발생이 규제정책 탓?

<동아일보>는 7월 22일 기사에서 의류 유통과정에나 있을 법한 '땡처리'가 분양시장에 나타날 정도로 지방에는 심각한 미분양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그 원인을 정부의 각종 금융규제 및 부동산 관련 과세에서 찾고 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기사의 어디에서도 미분양 아파트 적체와 각종 금융규제 및 부동산 관련 세제 사이의 인과관계가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아일보>의 주장과는 달리 최근에 미분양 아파트가 증가하고 있는 원인은, '부동산 불패신화'를 낙관해 수요예측에 오류를 범한 건설업체들의 과도한 분양 추진에서 찾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동아일보>가 그렇게 중요시 하는 시장경제론에 따른다면, 공급과잉은 시장에 참여한 건설업체가 수요예측을 잘못한 것이며 그에 따른 가격하락도 공급자가 감수하는 것이 마땅하다.

물론 경제 주체의 하나인 기업이 위험에 처해 있고 이에 따른 파급효과가 심각하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면 국가적 논의를 통해 다양한 원조를 신중히 고려해 볼 수는 있겠으나, 적어도 이러한 개별 업체들의 수요예측 오류까지도 정부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할 것이다.

지방에 아파트가 과잉공급된 원인은, 건설사들이 불로소득을 노리는 투기적 가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공급을 무리하게 확대한 데 있다. 그런데 정부의 각종 정책으로 불로소득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자 매수세가 위축돼 미분양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경제원리에 따르면 가격이 떨어져야 공급과잉이 해소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투기적 가수요자가 아닌 실수요자 중심으로 주택시장이 재편될 수 있다. 모쪼록 <동아일보>는 시장경제 원리에 충실하길 바란다.

보유세와 양도세 강화가 '세금폭탄'?

보유세와 양도세 강화가 '세금폭탄'이라는 지적도, 그동안 어마어마한 토지불로소득이 발생해 그 폐해가 극심한 한국적 현실을 고려할 때 대단히 악의적이다.

8·31 대책의 입법화에 따른 종부세 대상자의 보유세 실효세율은 2009년에 가서야 0.89%에 이르고 전체 부동산 소유자의 보유세 실효세율은 2017년에 가서야 0.61%에 달해, 선진국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선진국의 절반 수준밖에 안 되는 것을 '세금폭탄'이라고 한다면 선진국의 보유세는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보유세는 투기꾼을 지목해 그들에게 부과하는 징벌적 세금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동산 과다 보유를 억제하기 위해 누진세율구조를 채택했기 때문에 보유세가 벌금처럼 느껴지는 것인데, 본래 부동산 보유세(특히 토지보유세)는 부동산 보유자가 국가와 사회로부터 받는 혜택에 상응해 납부하는 대가에 불과하다. 그리고 보유세 강화가 토지불로소득을 환수해 지가를 (하향)안정화 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양도소득세도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좋은 수단이다. 물론 양도소득세는 거래를 제한하는 '동결효과'가 발생한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보유세 강화와 같이 실시하게 되면 동결효과는 약해지고, 더 나아가 보유세 강화를 지속적으로 실시하게 되면 부동산가격이 하향안정화 되기 때문에 양도차액이 거의 발생하지 않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결국 양도세의 존재 의의까지 상실되게 된다.

<동아일보>가 양도소득세의 동결효과를 걱정한다면 (토지)보유세의 지속적인 강화를 주장해야 할 것이다.

보유세와 양도세를 내리게 되면 시장에는 또 다시 불로소득을 노리는 투기적 가수요가 창궐할 것이 불을 보듯 뻔 한 일이다. 그렇게 되면 실수요 대비 공급 과잉이 지금보다 더욱 심각해져 건설 경기와 경제 전반에 큰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이것이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는가? <동아일보>는 어떻게 하는 것이 언론의 공익적 임무를 감당하는 길인지 자문해 보기 바란다.

재건축법안은 '규제정책' 아닌 '정상화 정책'

▲ 서울 송파구 잠실아파트 단지.
ⓒ 오마이뉴스 권우성
<동아일보>는 현재의 재건축법안이 규제정책이라며, 이것도 건설경기 악화의 원인 중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재건축법안은 엄밀하게 말하면 '재건축 정상화 조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용적율 변경과 같은 단순한 행정행위로 발생하는 개발이익(불로소득)을 최고 40~45% 정도까지 환수하겠다고 하는 정책도 옳은 방향이다.

그동안 아파트 재건축 과정에서 온갖 비리와 범죄가 저질러져 왔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우리는 막대한 불로소득을 얻기 위해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아파트를 부수고 다시 짓는 자원의 낭비를 너무나 많이 목격해왔다. 그렇다면 정부가 나서서 재건축의 절차적 투명성과 합리성을 제고해 범죄와 비리를 막고, 불로소득을 환수해 투기를 진정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현재와 같은 재건축법안은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이다. 따라서 <동아일보>가 재건축법안이 규제라고 계속 공격하는 것은 정부더러 재건축에서 발생하는 범죄와 비리를 계속 방관하고 자원의 낭비와 투기를 장려하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동아일보> 등의 일간지는 강남권에 주택이 부족하기 때문에 재건축법안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강남권에 공급이 부족하지 않다는 사실을 많은 통계가 입증해주고 있다는 점만 지적하겠다.

<동아일보>는 투기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던 각종 부동산 담보대출에 대한 규제도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일정부분 옳은 측면이 있다. 필요한 사람이 돈을 대출해가는 것이 시장경제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하려면 불로소득에 대한 기대를 꺾을 수 있는 보유세와 양도세를 지속적으로 강화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생산적인 부문에 투자돼야 할 금융권의 자금이 토지투기에 몰리게 되고 그것은 다시 부동산 가격을 앙등시키는 악순환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보유세와 양도세도 완화하라고 하면서 대출규제도 풀라고 하고 있다. 한 마디로 금융권의 자금이 부동산 투기에 몰리도록 놔두라고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가?

토지 불로소득 환수, 건설경기 활성화의 지름길

부동산 투기를 막으면서 건설경기를 활성화하는 방안이 있다. 토지보유세를 강화시키는 동시에 건물분 보유세를 내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투기목적의 유휴토지나 저사용 토지가 효율적으로 이용된다. 토지가 효율적으로 이용된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건물을 짓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의 효과는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피츠버그에서 확인된 바 있다.

피츠버그에서는 1979년부터 토지분 보유세와 건물분 보유세를 분리해 전자는 높이고 후자는 낮추는 '차등세율(two-rate taxes)정책'을 추진했다. 피츠버그시는 1979년에 토지세율은 높이고 건물세율은 낮추는 방법으로 토지와 건물에 적용되는 세율의 비가 3대 1이 되도록 했고, 곧이어 (시는) 토지세율을 더욱 높여 건물세율의 거의 6배가 되도록 했다. 이 정책으로 피츠버그는 건축·건설 활동이 활발해져 경제가 살아나고 실업문제는 상당 부분 극복되었다.

토지보유세를 높이면서 건물분 보유세를 내리는 것은 토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견인하는 동시에 건물의 신축·증축·개조 등의 생산 활동을 더 장려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불로소득을 줄이면서 건설경기를 위축시키지 않는 가장 좋은 대안이다.

따라서 <동아일보>가 진정 건설경기를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토지보유세는 강화하고 건물분 보유세는 내리자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동아일보>는 이런 대안은 말하고 있지 않다.

너무 많이 겪은 건설경기 부양의 폐해

앞서 언급했듯이 <동아일보>가 주장하는 것은 간단하다. 금융규제를 풀어 은행이 담보대출을 자유롭게 하게 하고, 개발이익환수율 완화와 더불어 재건축허가도 과거처럼 해주어야 하며, 투기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인 보유세와 양도세 강화도 포기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건설경기가 살아나고 경제전체가 활기를 띠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요구대로 하면 어떻게 될까? 불로소득을 환수할 수 있는 장치인 보유세·양도세·개발부담금를 내리고 금융자금이 부동산 투기에 투입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부동산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투기적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건설업이 활황을 띠어 경제가 살아난다고 마냥 좋아해야 할까? 가격이 거품처럼 계속 부풀어 오르는 동안에는 괜찮아 보이지만, 거품이 꺼지고 나면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 <동아일보>는 정말 모른단 말인가?

'건설경기부양책'은 한국경제가 침체할 때마다 정부가 꺼내들었던 카드였다. 멀게는 박정희 정권 때 그랬고 가깝게는 김대중 정부 때도 역시 그랬다. 하지만 우리는 건설경기부양의 폐해를 너무나 많이 겪었다.

이것은 결국 일부의 부동산 부자들에게 엄청난 불로소득을 안겨주는 대신 다수의 국민들에게는 엄청난 고통만 주었다. 또한 건설경기부양책으로 발생한 주택과 토지가격의 앙등이 한국경제에 얼마나 큰 부담이 되어왔는지에 대해서도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그리고 이로 인한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심화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데, <동아일보>가 이런 정책을 또 쓰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동아일보>는 도대체 무슨 배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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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부동산 투기로 자본 유출 막자굽쇼?
(사)민주언론시민연합과 토지정의시민연대는 지난 7월6일 '부동산보도모니터팀'을 구성해 총 9개(경향, 국민, 동아, 서울, 세계, 조선, 중앙, 한겨레, 한국) 일간신문의 부동산 관련 보도를 모니터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일부 언론들은 집값이 폭등할 때는 강력한 부동산 대책을 요구하다가 막상 부동산 대책이 나오면 '세금 폭탄' 등의 자극적인 용어를 사용하며 부동산 대책을 흔드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 시장경제논리를 가장한 반(反)시장경제논리로 부동산 투기를 잠재우는 데 반드시 필요한 정책을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언론의 보도태도는 실효성 있는 부동산 정책 수립과 '집값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합니다.

이에 민언련과 토지정의시민연대는 주요 일간지들의 부동산 관련 보도를 지속적으로 분석·비판해 그 문제점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올바른 부동산 정책이 마련되고 시행될 수 있도록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논평은 두 단체의 홈페이지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민언련 www.ccdm.or.kr/ 토지정의시민연대 www.landjustic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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