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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 간부, 검진 중 사망하자 가는 곳마다 긴장

아래 이어서

미친 놈들 스토리 2

 

 

조폭 간부, 검진 중 사망하자 가는 곳마다 긴장
위 내시경 검사 하다가 심근경색 사망
텍스트만보기   안홍기(anongi) 기자   
 
유력 폭력조직의 간부급 조직원이 정기검진을 받다가 사망했다. 이 조직원의 시신이 가는 곳마다 긴장감이 돌고 있다.

부산에 기반을 둔 칠성파의 간부급 조직원 K씨는 지난 18일 서울의 한 병원에서 건강검진 중 위내시경 검사를 위한 약물을 투여하기 전 호흡곤란 증세를 일으켰다. 병원측은 K씨에게 산소마스크를 씌우고 긴급히 영동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 심폐소생술까지 했지만 결국 숨지고 말았다.

병원에서 밝힌 직접적 사인은 심근경색이었다. 그러나 '위내시경 하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것이 조직원들에게 순순히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칠성파 조직원 10여명이 급히 서울로 와 병원측을 추궁했다.

<한겨레> 관련 보도에 따르면, 건강검진을 한 병원은 19일 오전 '21일까지 휴진한다'는 안내문을 내걸었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휴진을 철회했고, 이에 대해서는 조직원들과 병원 사이에 '모종의 합의가 이뤄진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K씨가 사망한 현장인 영동 세브란스 병원 내의 장례식장은 공사중이어서 K씨의 시신은 곧바로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순천향대 병원 장례식장도 '긴장의 현장'이 됐다. 100 여명의 조직원들이 장례식장 주변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19일 K씨의 시신은 부산으로 이동했다. 이날 오후 6시경 K씨의 시신을 실은 구급차가 동아대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조직원들 50여명이 도열, 시신을 맞이했다.

그러나 조직원들이 도열한 장례식장 입구를 검사, 변호사 등 법조계 인사들이 드나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부산시 변호사회 회장 부친의 빈소가 같은 장례식장에 차려져, 검사와 변호사 등 법조계 인사들의 장례식장 방문이 잦았던 것.

<연합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부산시 변호사회 회장 부친의 빈소를 찾은 법조계 인사들 중 일부가 조직원들을 향해 "병원을 찾는 일반인에게 위압감을 주거나 방해하지 마라"고 경고성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장례식장에 긴장감이 흐르기도 했다.

경찰도 긴장하면서 장례식장 동향을 주시하고 있다. 지난해 1월 부산 영락공원 장례식장에서 부산 폭력조직 연합세력이 칠성파를 습격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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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레쉬·모닥불 집회는?... &quot;하소연은 술 먹고&quot;

미친놈들 스토리 1

 

 

후레쉬·모닥불 집회는?... "하소연은 술 먹고"
[取중眞담] 대권 3수 한나라당의 '트라우마'
텍스트만보기   최경준(235jun) 기자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 주>
 
 
 
▲ 장윤석 한나라당 정치관계법 제개정특위 소위원장은 18일 "텔레비전 및 라디오 방송시설은 정당과 정당 후보자 간 또는 정당과 무소속 후보자 간의 후보자 단일화를 위한 토론 등을 방송할 수 없도록 한다"는 등의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2007년 대선을 앞둔 한나라당의 '오버'가 예사롭지 않다. 대선 예비주자 '빅2'의 지지율 합계가 70%를 육박하는 당 치고는 가볍다. 1997년, 2002년 잇따른 대선 패배의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한 탓이다.

다음은 지난 19일 SBS <김어준의 뉴스앤조이>에 출연한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과 김어준씨의 대화다.

김어준 "한나라당이 내놓은 정치관계법 개정안, 내용이 너무 웃기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웃기시면 저는 어떻게 먹고 삽니까?
홍준표 웃기는 게 아니구요. 지난 대선 때 김대업씨가 온갖 허위사실을 유포해서 후보를 음해했거든요.

김어준 한나라당의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장애)는 알겠는데요. 구체적으로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촛불집회를 금지했는데, 말이 안되는 발상 아닙니까? 후레쉬를 들던 촛불을 들던 사람들의 자유 아닌가요?
홍준표 "지난 대선 때 촛불시위를 이용한 특정 세력의 책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촛불시위 금지…, 그것 좀 이상하네요. 하하

김어준 이상하죠? 그럼, 모닥불 집회는 해도 됩니까?
홍준표 그것 좀 내가 들어봐도 이상하네요. 아마 한나라당 정치관계법특위 위원 일부가…, (한나라당은) 피해의식이 강합니다."

김어준 또 있습니다. 다른 당 후보들이 단일화하는 방송 중계를 (국민들이 궁금해 하는데) 한나라당이 어떻게 막습니까?"
홍준표 그것도 그렇네요. 하하

김어준 개인적으로 가장 웃긴 것은 이겁니다. '포털에서 선거관련 단어를 인기 검색어에 포함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홍준표 누가 그런 법안을 제출했습니까? 그냥 발표만 했겠죠. 그게 웃긴 게 아니고, 지난번에 너무 피해를 많이 봤기 때문에 방어적인 측면으로 나온 것이겠지요. 법안으로 나갈 수 있겠어요?

김어준 그럼, 법안으로 만들지 말아야지요. 하소연을 법으로 만들면 어떻게 합니까. 술 먹고 하소연해야지. 듣고보니까 재미있지 않습니까?
홍준표 듣고 보니까 재미있네요. 그것(선거 관련 단어 인기 검색어 금지)은 좀 심하네요. 하하"


거센 저항에 부딪힌 정치관계법 제·개정안

 
▲ 한나라당은 19일 오후 정책의총을 열고 대북정책 변화에 대해 토론했다.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의총에서 양손을 들고 김형오 원내대표와 전재희 정책위의장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한나라당이 대선을 앞두고 추진중인 정치관계법 제·개정안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선거에 영향 줄 수 있는 촛불집회 등 금지 ▲국가 보조금·지원금을 받는 시민단체 및 대표자의 선거운동 금지 ▲전자개표는 보조, 수개표 의무화 ▲허위사실이 선거 결과에 영향 미쳤다고 인정될 경우 당선 무효, 재선거 실시 ▲보도 금지 등의 요청에 법원이나 선관위는 72시간 내 최종 판단 내리고, 그 전까지 보도 금지 ▲선거 관련 단어 포털 인기 검색어 금지 ▲정당 후보자간 단일화 위한 토론 방송 금지

한나라당 정치관계법 제·개정특위는 이같은 내용을 지난 16일부터 매일 한차례씩 국회 기자실에서 기자회견 형식으로 발표했다. 기자들은 "당론이냐"고 물었고, 특위는 "당론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장윤석 의원은 '선거 관련 인기 검색어 금지'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하기 위해 당내 의원들에게 서명까지 받아놨다.

그러나 정치관계법 제·개정안은 타당의 거센 반발을 샀다. 최재성 열린우리당 대변인은 18일 "한나라당은 제정신이 아니다"며 "대권 편집증환자 한나라당의 광기가 국민의 정치의식과 민주주의와 언론을 향해 계엄령을 선포했고, 군사정권의 후예가 아니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을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이영순 민주노동당 공보부대표는 "사실상 한나라당판 긴급조치 10호에 해당한다"며 "집권하지도 않은 정당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데 집권을 하고 나면 얼마나 더 가혹할 지 벌써부터 몸서리 쳐진다"고 성토했다. 타당도 "주권자는 한나라당 당원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임을 명심해야 할 것"(통합신당모임), "군부독재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형질을 드러냈다"(민주당) 등 목소리를 높였다.

한나라당도 처음에는 "도둑이 제 발 저린 격", "선거법 개정투쟁은 정의를 바로 세우자는 빛의 세력과 불의를 방치하자는 어둠의 세력간의 대결"(박영규 부대변인)이라고 저항했다. 그러나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19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는 "정치관계법 개정안은 어디까지나 특위 차원의 검토되고 있는 안에 불과하다"며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의원총회에서도 "의총을 거쳐서 확실한 당론이 되기 전에 특위에서 오버를 하고 있다"며 "당 지도부와 협의 없이 언론에 발표해 마치 당론인양 언론에 보도됐다"고 질책했다.

"문제는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당내 일각에서도 문제제기가 잇따랐다. 원희룡 의원은 20일 "위헌적 선거법 개정시도는 한나라당의 자살골"이라며 "국민의 기본권 제한을 통해 집권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발상은 원내 제 1당으로서 지난 대선의 패배를 남 탓으로 돌리는 옹졸한 처사로 국민들이 기억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원 의원은 또 "가랑비에 옷 젖듯이 잊을만하면 오만하고 과거로 돌아가려는 정당으로 낙인 찍히는 것은 대선을 앞둔 우리당에게 더 심각한 문제"라며 "문제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장윤석 의원이 발의하려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에 서명했던 의원들이 철회를 요청하고 나섰다. 결국 장 의원측은 당론이 확정된 뒤 발의하려고 했던 법안의 의원 서명인부를 이날 소각하기로 했다.

향후 특위안이 최고위원회의와 의총 등 당론화 과정을 거쳐 위헌성이 있는 조항이 삭제되고 어느 정도 정제될 지 두고 볼 일이다.

"술 한잔 먹고 하소연 할 일"을 법안으로 만들려고 했으니 쉽지 않은 작업이겠지만, '결자해지' 자세가 필요하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한나라당이 대선 패배의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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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희,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quot;

 

 

 

조승희,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
애도 편지 잇따라... 용서, 유족 치유 기원
텍스트만보기   연합뉴스(yonhap)   
 
(블랙스버그=연합뉴스) 이기창 특파원 = "너를 미워하지 않아. 오히려 가슴이 미어진다."

"너를 향한 사람들의 가슴 속 분노가 용서로 변하기를…."

"네가 그렇게도 절실히 필요했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걸 알고 슬펐단다."

버지니아텍 참사의 범인인 조승희(23)씨의 끔찍했던 삶을 용서하고 안식과 평화를 기원하는 내용의 편지들이 캠퍼스 내 추모석 앞에 잇따라 놓여 눈길을 끌고 있다.

버지니아텍 캠퍼스 중앙 잔디밭인 드릴 필드에 타원형으로 놓인 참사 사망자 33명 추모석 중 왼쪽 네 번째 조승희군 추모석에는 학생들로 보이는 바버라, 로라, 데이비드 등의 이름이 적힌 애도 편지가 나란히 놓여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않는' 성숙한 '용서의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추모석은 버니지아텍 상징석인 화강암 덩이로 그 위에는 장미 10송이와 카네이션, 백합, 안개꽃 등이 놓여있고 소형 성조기와 버지니아텍 교기도 앞쪽에 세워져 있다. 21일에는 유리컵에 든 촛불도 놓였다.

왼쪽에서 네 번째에 놓인 높이 20㎝, 가로 30㎝ 정도 크기의 조씨 추모석 앞에는 버지니아텍을 상징하는 VT 모양의 카드가 놓여 있고 여기에 '2007년 4월 16일, 조승희'라고 쓰여 있다.

또 추모석 오른쪽 옆에는 "조승희의 가족에게... 사랑으로(To the family of Cho Seung Hui with love)"라고 쓰인 종이도 있다.

조씨의 추모석에는 특히 "네가 그렇게 절실히 필요로 했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걸 알고 가슴이 아팠단다, 머지않아 너의 가족이 평온을 찾아 치유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느님의 축복을"이라는 등의 편지가 놓여 보는 이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이 학교 학생으로 보이는 편지 작성자는 노트 종이에 손으로 이 같은 글을 쓴 뒤 '바버라'라고 이름을 적었다.

데이비드라는 다른 작성자가 쓴 편지는 "승희, 내가 너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손을 내밀어 그의 삶을 좀 더 좋게 바꿀 수 있는 용기와 힘을 가지기를, 너로 인한 지금 이 고난을 네 가족이 이겨낼 수 있기를, 그 많은 사람들의 생명에 네가 가한 손상이 곧 치유되고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자리한 분노가 용서로 바뀌기를, 33명 희생자 모두의 고난이 아스라한 기억으로 사라지기를 나는 기원한다"고 적었다.

로라는 "승희야,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아, 네가 아무런 도움과 안식을 찾지 못한 게 너무 안 됐고 가슴이 미어진다, 네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하기조차 어렵지만 이제는 평화와 사랑도 조금은 찾기를 빈다, 우리가 너무 이기적이어서 네가 그렇게 분노했다는 생각을 해본다, 네 친구가 되어주지 못해 미안해, 하느님께서 너를 받아주시기를 기도하마"라고 썼다.

이 같은 애도 편지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감을 표시하며, 조승희에게도 다른 희생자들과 똑같은 슬픔을 느낀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교직원은 "이 비극은 너무나 슬픈 일이지만 누구를 미워하거나 분노할 일이 아니다"라며 "조승희에게도 처음부터 다른 32명과 똑같은 슬픔을 느꼈다"고 말했다.

조승희의 추모석 앞에서 한동안 흐느낀 재미교포 임남숙(59)씨는 "어린 나이에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고 힘들었으면 그랬겠느냐"며 "자식이 있는 부모라면 누구든 그를 미워하기보다는 가슴 아프고 불쌍한 마음이 앞설 것"이라고 말했다.

버지니아텍 1996년도 졸업생인 딸과 함께 버지니아주 애난데일에서 블랙스버그까지 찾아온 임씨는 "이민온 한인들은 사는 데 급급해 자식들이 학교에서 얼마나 힘들고 고통받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아이들과 더 많이 대화하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어려움을 이해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고 강조했다.

lkc@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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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얼굴에 침 뱉는 기분 아시나요?

 

 

 

내 얼굴에 침 뱉는 기분 아시나요?
우리는 '조승희 사건'을 이해합니다"
[조승희 그 후 ① - 르포] '국경 없는 마을' 경기 안산 원곡동의 '코시안' 아이들
텍스트만보기   장윤선(sunnijang) 기자   
 
 
국내 체류 외국인 100만 시대. 2000년 이후 급격히 증가한 이주 외국인이 한국 사회의 주인으로 거듭나고 있다. 그럼에도 이주민을 위한 대책은 요원하다. 정부도 '버지니아텍 총기난사사건' 이후 국내 이주민을 위한 다양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나섰다. '한국판 조승희 사건'을 우려한 탓일까.

<오마이뉴스>는 지난 16일 발생한 총기사건 이후 한국 사회가 심도 있게 고민해야 할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우리 안의 인종주의'와 '이주민과 함께 살기 위한 정책 대안'을 다룬 기사를 내보낼 예정이다. 이 기사는 그 첫번째다.
 <편집자 주>
 
 
▲ 경기도 안산 원곡동에 있는 '코시안의 집'. 이곳은 이주노동자 자녀 보육시설이다.
ⓒ 오마이TV 문경미
 

22일 정오 지하철 4호선 안산역 광장.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동남아시아계 청춘남녀들이 삼삼오오 벤치에 앉거나 한 귀퉁이에 서서 밀어를 속삭였다. 안산역 지하차도 안에서는 중국말로 흥정하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눈에 띄었고, 길 건너편 거리에는 베트남 쌀국수집이 현지 음식점인 양 허름한 간판을 달고 있었다.

시화공단과 반월공단의 지리적 요충지인 원곡동은 어느새 '이주민들의 명동'이 돼 있었다. 원곡동은 양고기를 파는 식육점부터 죽순을 파는 야채가게, 본국으로 전화를 걸 수 있는 전화방 등이 이국적 향취를 물씬 풍기는 다문화 거리다. 한글 간판보다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 말들이 이 동네 간판의 주를 이루고 있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도 대다수 한국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코시안(Korean과 Asian의 합성어), 한국에 살고 있는 아시아인들이었다.

'국경 없는 마을' 경기 안산 원곡동에 있는 '코시안의 집'은 이주노동자 자녀들을 돌봐주는 보육시설이다.

코시안의 집을 찾는 데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길을 묻는 기자의 한국말을 알아들은 한 50대 남성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 동네를 몇 차례나 뱅뱅 돌았을 것이다.

코시안의 집엔 담이 없었다. 대신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꽃 사이로 난 계단 길을 올라가니, 마루에서는 많은 다국적 아시아인들이 떡과 음료수를 나눠먹고 있었다. 일자리를 찾아 이역만리 타국에 온 이주민 자녀들. 그들에게 코시안의 집은 안식처였다. 이곳에서 몇몇 아이들과 최근 벌어진 '버지니아텍(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1. 소외감 "조씨 겪었을 고통 짐작돼... 한국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조승희씨 사례는 제가 한국에서 겪은 사정과 참 비슷해서 더 안타까웠어요. 물론 제가 조씨의 범행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건지 이해됩니다. 몽골에서 온 저는 조씨처럼 한국 친구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혼자만의 세계에 빠졌죠. 내성적인 성격에다 말도 안 통해 한국 친구들과 잘 어울려 지내지 못했고, 따돌림을 당하면서 증오심이나 악한 감정이 생기기도 했어요. 피부색이 같은 저도 이 정도인데, 미국에서 조씨가 겪었던 일은 더 심했겠죠."

몽골인 무탕카(21·가명·대학생)의 말이다. 조씨가 겪었을 심적 고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14살에 어머니와 함께 한국에 온 무탕카는 "나와 조씨의 형편이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돈을 벌기 위해 한국행을 선택한 어머니를 따라 무작정 이주한 무탕카와 세탁업을 하며 어렵사리 미국생활을 이어가는 가정에선 자란 조씨의 처지는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학교에서도 이번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에 대해 많이 토론했어요. 저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모두 다니다 말았는데,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참 어려웠기 때문이에요. 선생님들이나 친구들이 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무탕카의 한국살이는 낯설음의 연속이었다. 비자문제로 불법 체류했기 때문에 신분상의 불안함도 무탕카를 억누르는 요인 중 하나였다. 고된 노동에 지쳐있는 어머니도 무탕카의 속사정을 훤히 알기 어려웠다.

"가난한 외국인이 현지에서 돈 벌면서 생활하기도 빠듯하기 때문에 자식을 하나하나 챙기며 돌보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냥 학교에 잘 다니는 줄만 알지, 학교생활이 어떤지 꼼꼼히 체크하기 어렵잖아요. 어머니는 한국말에 익숙지 않고 한국 학교에 대해서도 잘 모르셨거든요. 제가 어머니에게 정확하게 자주 말씀드리지 않으면 잘 모르시죠."

무탕카는 고등학교 시절, 하루하루 못 견딜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두발자유화에 찬성한다고 하면, 일부 교사들이 '너는 자격이 없다, 신분이 불안정한데도 학교 측이 너를 받아줬으면 순순히 학교가 하자는 대로 따르라'는 식이었다. 강한 반발심이 생겼지만 속으로 누를 수밖에 없었다. 한국 사회의 이방인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 다문화가족협회는 22일 경기도 안산 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 오마이뉴스 장윤선
 
#2. 배타적 분위기 "학교서도 한국어만 써라" 강요

우친츠르(17·가명·고등학생)가 겪은 일도 비슷하다. 또래보다 나이가 많은 상태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일도 자존심 상하는데, 한국 학생들이 시비를 거는 것은 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고 했다.

"애들이 욕하고 놀릴 때는 같이 때리고 싶어도 못 때려요. 그냥 참고 지내요. 몽골에 대해 기분 나쁜 말을 많이 해요. 몽골에 건물이 있느냐는 식이에요. 당연히 있다고 해도 잘 믿지 않아요. 학교에서 몽골 아이들끼리 떠들면 선생님이 몽골말을 하지 말라고 해요. 우린 한국말이 서툰데도 학교에서는 한국말만 쓰라고 하죠. 그럼 답답해집니다."

일제 식민지 시절 학교에서 일본말을 강요했던 것처럼, 한국 학교에서는 한국어만 쓰라고 몽골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반발하면, 곧장 공포를 느끼게 하는 말이 날아온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초등학교 때 한 반에 외국인이 한 명 정도였어요. 같이 놀 친구가 없으니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져요. 자연스럽게 내성적인 성격이 되고. 저는 조승희씨가 한 일이 이해가 돼요. 정말 화가 날 때가 있어요. 학교에 무슨 일만 생기면 모두 제 탓을 해요. 하도 놀려서 멱살을 잡았을 뿐인데, 나이 많은 네가 동생뻘인 친구를 때렸다고 야단맞아요. 정말 억울해요. 그래도 학교에서는 제 편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가슴이 콱 막히죠."

아농드(14·가명·중학생)도 평소에 친구들에게 "몽골에서 왜 왔느냐, 한국에 너는 필요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아농드는 참고 참고 또 참다가 폭발하면 친구를 때리고 결국 투석전을 한 판 치르게 된다.

"계속 참아요. 그런데도 계속 약 올리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그땐 주먹이 날아가요. 싸워서 경찰서 가게 되면 부모님과 함께 강제추방되기 때문에 많이 참지만, 그래도 정말 화가 날 때는 물불을 가리기 힘들어요. 내 얘기를 잘 안 들어요. 내가 아무리 제대로 말을 해도 결국 화살이 저한테 돌아오고, '너희 나라로 가!'라는 말만 듣게 돼서 어느 때는 부모님께 몽골로 돌아가자고 애원해보기도 했어요."

아버지는 새벽 5시에 출근해 밤늦게 돌아오기 때문에 아농드의 고민을 들어줄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다. 어머니와 학교생활에 대해 간간이 얘기를 나누지만 솔직하게 말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불편한 학교생활을 자주 얘기하면 가족이 더 힘들어질까봐 속으로 삭이게 된다는 것이다.

#3. 피부색 차별 "까맣다고 '아프리카인'이라고 놀려"

 
▲ 뜨구네 가족. 라니는 학교에서 '인도네시아'로 불린다. 자주 들으면 기분좋은 소리는 아니다.
ⓒ 오마이뉴스 장윤선
 
조영철(11·가명·초등학생)군은 베트남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빠가 베트남에 가서 어머니와 결혼한 경우다. 그런데 친구들이 간혹 '왜 한국에 쳐들어왔느냐'고 해서 어리둥절하단다.

김석훈(14·가명·중학생)군도 학교에서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놀림을 받는다. 석훈이는 방글라데시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안산 원곡동이 고향인 셈이다. 아버지의 피부색을 많이 닮은 석훈이는 학교 형들이 '아프리카'라고 놀려서 학교 다니기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학교에 가면 형들이 매일매일 놀려요. 아프리카에서 왔다고. 혼자 지나갈 때는 머리에 침도 뱉어요. 머리에 침 뱉고 아프리카라고 놀려요. 우리 아버지는 방글라데시 사람이라고 해도 형들은 아프리카에서 왔대요. 너무 속상할 때는 선생님께 말씀드려요. 그러면 선생님들이 형들을 불러 혼내주시지만 소용없어요. 계속 놀리고 괴롭혀요. 학교 가기 싫어요."

석훈이는 얼큰한 찌개와 떡볶이, 김치를 좋아한다. 학교 공부에서도 영어보다 한국어가 더 쉽고, 매년 생일인 2월 14일이 되면 어머니가 끓여주는 미역국을 먹는다. 코시안의 집에서는 선생님들의 일을 잘 돕는 착한 학생이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걸 제외하면 놀림 받을 이유가 없다.

"제 고향은 한국이에요. 코시안의 집에 오는 다른 친구들처럼 돌아갈 고향이 없고, 여기가 고향이에요. 그런데도 애들은 저만 보면 자꾸 아프리카로 가래요. 거기가 어딘지 저는 알지도 못해요. 자꾸 형들이 놀려서 공부하기도 싫어요."

남매인 라니(19)와 뜨구(12)는 아버지 수마르또(45)와 어머니 치트라(43)를 따라 2003년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으로 왔다. 1주일 동안 서울을 여행하고 곧바로 안산 원곡동에 둥지를 틀었다. 그 뒤로 어려운 한국살이가 시작됐다.

수마르또는 '버지니아텍 총기난사 사건'에 대해 "매우 끔찍한 일"이라며 "너무 깜짝 놀랐다"고 안타까워했다. 치트라도 "같은 생각"이라면서 "가족생활을 잘 하면 '한국판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 같은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큰딸 라니는 학교에서 '인도네시아'로 통한다. 또래보다 나이가 많은 라니가 복도를 지나다닐 때마다 친구들이 '인도네시아 간다'고 말한다. 다들 나이가 어려서 그냥 지나치지만 기분 좋은 소리는 아니다.

뜨구도 학교에서 차별받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뜨구의 아버지도 "외국인이라서 겪는 차별은 견딜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며 "한국이 좀 더 열린 사회가 된다면 좋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이라고 씁쓸하게 웃었다.

#4. 잘못된 선입견 "남아시아인은 가난하고 게으르다는 오해"

 
▲ 니락샤는 "1950년대 한국이 전쟁 직후 매우 어려웠을 때 스리랑카에서 쌀을 보내줬다"며 "사람은 언제나 처지가 바뀔 수 있다는 점을 한국인들이 인식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 오마이뉴스 장윤선
필리핀인 마리테스(35)는 안산이주민지원센터에서 일하는 활동가다. 마리테스 역시 한국 남자와 결혼해 비자문제를 해결했지만, 아이들의 교육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7살짜리 아들과 6살짜리 딸이 학교에 들어가면 당장 '필리핀 엄마'라고 놀림을 받을텐데 걱정이다. 아이들에게 당당한 엄마가 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참 속상해요. 피부색과 문화가 다를 뿐 똑같은 사람들인데 겉모습으로 차별하고 따돌리는 것은 나쁜 거잖아요. 한국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인권교육'을 했으면 좋겠어요. 모두 같은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아이들을 같이 길러야지요."

니락샤(28)는 지난해 한국 여자와 결혼한 스리랑카 사람이다. 그 역시 안산이주민지원센터에서 활동하고 있다. 니락샤는 최근 스리랑카 아이들이 학교에서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놀림 당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스리랑카 부부 자녀들이 한국인 아이들과 자주 싸워 걱정된다는 게 요지인데, 어떤 대책이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 남아시아 사람들에 대해 잘못 인식하는 게 있어요. 돈 없는 나라, 게으른 나라. 그런데 이걸 기억하는 분들은 거의 없어요. 1950년대 한국이 전쟁 직후 매우 어려웠을 때 스리랑카에서 쌀을 보내줬다는 사실을요. 사람은 언제나 처지가 바뀔 수 있는 거잖아요. 지금 스리랑카나 남아시아 나라들이 가난한 게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에 대해 인종 차별하는 것은 옳지 않지요. 지금은 한국이 잘 살지만, 언제 처지가 또 바뀔지 모르는 거잖아요. 함께 사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찬응 안산이주민센터 대표는 "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은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점이 크다"면서 "우리 안의 인종주의나 인종 소외는 없는지 자성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주 외국인도 '한국인'... 같은 공동체인으로 보듬어야"

1994년부터 13년째 이주노동자 운동을 펼쳐온 박 대표는 "한국에 살고 있는 이주민 자녀들이 모두 조승희씨 같지는 않지만, 주변의 이주가정 아이들이 겪는 사회 문제의 깊이는 비슷할 것"이라며 "한국 사회가 이주민을 인정하고 제도 안에서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빨리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박 대표는 "버지니아공대에서 총기를 난사한 조씨는 개인적인 문제와 사회병리적인 문제가 복합적으로 나타난 경우"라면서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목은 혹시 우리 주변에 소외를 겪고 있는 사람들은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점"이라고 꼽았다.

한국보다 시민사회의 폭이 넓은 미국사회는 다인종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것에 익숙하지만, 한국사회는 미국사회보다 훨씬 폐쇄적이기 때문에 이주민들이 겪는 고통이 훨씬 클 수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특히 박 대표는 국내 거주 외국인 100만 시대에 절대로 방치해서는 안 될 문제가 바로 이주민 자녀들의 인격권과 교육권이라고 밝혔다. 티없이 맑게 자라는 아이들의 눈동자에 시름의 눈물이 맺혀서야 되겠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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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 가족은 이민 성공과 실패 동시에 보여줘&quot;

 

 

 

조씨 가족은 이민 성공과 실패 동시에 보여줘"
텍스트만보기   연합뉴스(yonhap)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장익상 특파원 = 버지니아텍 참사로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조승희 가족은 교육과 성공을 강조하면서 '성공 아니면 실패'의 잣대로 보는 체면 중시의 아시아 이민 사회의 전형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22일 보도했다.

타임스는 '명랑한 딸, 시무룩한 아들: 조씨 가족의 수수께끼'라는 제하의 1면 기사에서 "15년전 한국에서의 힘든 삶을 청산하고 미국으로 이민 온 조승희 부모의 3층짜리 주택은 자녀들의 성공을 기원하며 뼈빠지게 일해 이뤄낸 중산층 성공의 상징으로 보여지지만 지금은 취재진들을 피해 텅 비어있다"며 무엇이 이런 끔찍한 일을 초래했는지 구체적인 동기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단서들은 있다면서 조씨 가족의 과거와 현재를 짚었다.

이 가족에는 명문 아이비리그 출신의 이상적인 딸 조선경(25)씨와 미국 역사상 최악의 캠퍼스 참사를 저지른 닫힌 세계속에 살던 조승희(23)라는 전혀 다른 두 자녀가 있으며 이들은 이민자 성공과 실패라는 두 전형이라고 신문은 지적하며 조승희의 닫힌 세계를 집중 조명했다.

친인척들에 따르면 조승희 부모는 궁핍한 삶속에서도 밤낮으로 일해 이민을 온지 5년만인 1997년 14만5천달러짜리 타운하우스를 구입하는 등 근면하게 생활했지만 조승희의 내성적이고 고립적인 태도는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변함이 없었다는 것.

이웃들은 이 집에 아들이 있는지 조차 잘 모를 정도였고 그가 다닌 웨스트필드고교는 2000년 개교한 이래 뉴스위크가 뽑은 전국 우수 공립고교 랭킹 50위 이내에 드는 명문이었는데, 조승희는 친구들과 거의 말한 적이 없는 이상한 아이였다.

교내 과학클럽에 가입했지만 그냥 앉아있을 뿐이어서 '트럼본 보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벙어리가 아닐까 생각하는가 하면 영어를 못하는 최근의 이민자로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고교시절 식탁에서도 친구들과 거의 얘기를 나누지 않은 조승희의 태도는 대학에 와서도 변하지 않았고 일요일 저녁 가족들과 통화하는 것을 빼고는 거의 말하지 않아 가족들도 늘 말수가 적은 조승희가 근심거리였다.

이처럼 숨어들려는 동생과 달리 선경씨는 돋보였다. 하버드와 프린스턴에서 입학 허가를 받은 선경씨는 장학금 혜택이 더 많은 프린스턴을 선택했고 세계 경제에 흥미를 느껴 개도국의 공장 조건들을 살펴보기 위해 태국-미얀마 국경지역에서 인턴십을 했으며 이 경험을 토대로 이라크재건관리회사에서 일하게 됐다는 것.

매우 겸손한 여성이라는 평가를 받은 선경씨에 대해 지인들은 술과 담배를 안하고 화장도 거의 않는 강건한 여성이라고 칭찬했으며 재학시절 대학도서관에서 일하며 기도 모임이나 성경공부도 열심히 하는 등 이민자 성공의 모델이었다.

선경씨는 최근 발표한 성명에서 "우리는 항상 가깝고 평화롭고 사랑했던 가족이었다. 우리는 한 번도 동생이 그런 엄청난 폭력을 저지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전 세계를 슬픔에 빠뜨렸고 우리는 악몽 속에 살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딸에 대해 그의 모친은 무척 자랑스러워 했지만 "딸보다 아들이 프린스턴을 졸업하기를 원했다"고 밝힐 만큼 딸보다 아들의 성공에 더 무게를 두는 아시아 이민자중 하나였다고 이웃은 전했다.

이런 현상들에 대해 전문가들은 교육과 성공을 강조하는 문화, 실패는 종종 수치스럽다고 여기는 문화가 큰 몫을 했다고 풀이하면서 이런 문화는 주변에서 어떻게 생각할 까를 우선하는 체면에 의해 지배되며 가족 이외에 누군가와 상담한다는게 힘들고 창피해 자신들끼리 해결하려는 문화도 한 원인으로 분석했다.

장태한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주립대(UC리버사이드) 인류학 교수는 "누나는 이민자 성공 스토리의 전형인 반면에 아들은 실패의 전형이자 도움이 필요한 정신병자였다"며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이를 주시하지 않았고 사회 역시 실패했다"고 전했다.

isjang@yna.co.kr

<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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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항쟁' 27주년, 이젠 화해만 남았다

 

 

 

'사북항쟁' 27주년, 이젠 화해만 남았다
모두가 피해자... 끔찍한 기억털고 재평가돼야
텍스트만보기   강기희(gihi307) 기자   
 
 
 
 
▲ 사북항쟁 당시 경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안경다리. 광부들은 안경다리 입구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경찰의 접근을 막았다. 광부들은 최루탄을 쏘며 기어오르는 경찰들을 향해 철로에 있는 돌을 던졌다.
ⓒ 강기희
 

검은 땅, 검은 산이었던 시절 사북에 사는 사람들도 검은 차림이었다. 검은 얼굴, 검은 손을 하고서 탄광을 나선 이들은 탄을 캐는 산업 전사. 그들은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의 광부들이었다.

산업전사라는 이름으로 국가 에너지를 생산하던 이들의 손은 1970년대 석유파동 이후 더 바빠졌다. 당시 정부는 '제7광구'라는 노래까지 유행시키며 석유파동을 넘어서려 했지만 이 나라에서 석탄 외의 에너지를 확보하는데는 실패했다.

당시 사북 동원탄좌에서 캐 내는 석탄은 전국 생산량의 9%. 생산량만으로도 동원탄좌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지 짐작할 수 있다. 그 많은 석탄을 캐 내는 것은 광부들의 몫이었다. 광부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3교대로 개미집 같은 막장을 드나들었다.

어용노조와 회사가 광부들 분노케 해

광부들은 스스로를 '막장인생'이라 했다.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인 탄광에서 일하는 그들에게 한 밑천 잡아보겠다는 욕심은 애초 없었다. 갈 곳 없어 밀려난 인생들이라는 자조가 그들 스스로를 막장인생으로 내 몰았다.

동원탄좌는 타 업체에 비해 정년도 빨랐다. 정년 45세로 묶여있는 동원탄좌에서 밀려나면 그들은 하청 탄광으로 몸을 옮겼다. 그들이 선택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탄을 캐고 나르는 일 밖에 없었다.

일을 그만두라고 할까 싶어 진폐증에 걸렸어도 애써 병증을 숨기며 일을 했다. 살아남는 일이 절박한 시절. 대형 탄광인 동원탄좌에 다니는 것만 해도 영광이라 여겼다. 그런 이유로 목욕탕 시설은 언감생심, 먹을 물도 나오지 않는 성냥갑 같은 사택에서 견뎌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광부들은 미래를 품고 살아갔다. 그러던 탄광노동자들이 떨쳐 일어났다. 1980년 4월 21일이었고, 신군부의 총칼이 서늘하게 빛나던 봄날이었다. 이른 바 '사북사태'다. 세상 사람들에게 각인된 '사북사태'의 배경엔 억눌린 노동자들의 분노가 있었다.

어느 회사를 막론하고 당시만 해도 어용노조가 판을 치고 있었다. 어용노조는 회사와 권력의 비호아래 노동자들 위에 군림했다. 노동자들 편에 서야 할 노조는 회사와 권력의 편에 있었다. 신군부인 합동수사본부도 그들을 용인했다.

사북사태는 계엄상황에서 터졌다. 서울의 봄은 왔다지만 모두들 숨죽이고 있던 때였다. 해발 700m가 넘는 사북에도 봄이 오고 있었다. 날은 포근했고 비도 오지 않았다. 따스한 봄날 광부들이 채탄을 거부하고 경찰과 마주쳤다.

사건의 발단은 동원탄좌 노조지부장인 이재기씨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이미 광부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어용노조의 지부장이었다. 광부들은 사북사태 이전부터 노조 지부장 이재기의 사퇴를 촉구했다.

21일 경찰과 사북읍사무소가 약속한 집회 허가를 내주지 않자 광부들이 농성을 하기 시작했다. 지부장인 이재기는 경찰 개입을 요청했고 경찰 50여명이 동원탄좌로 출동했다. 하지만 숫적으로 밀린 경찰들이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달아나려던 경찰 지프를 광부들이 가로막았다. 다급했던 경찰은 앞을 가로막은 광부들을 치고 달아났다. 광부 네 명이 차에 치여 큰 사고를 당했다. 일부 광부들은 경찰이 광부를 죽였다며 흥분했고, 사태는 폭력적인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사북사태의 발단은 동원탄좌와 노조지부장인 이재기였지만 불은 경찰이 질렀다. 21일 오후 시위 해산을 위해 사북을 찾았던 장성경찰서장이 몰매를 맞는 일이 생기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갔다. 노동자민중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사북항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북항쟁, 경찰이 도화선에 불 지펴

 
▲ 동원탄좌의 마지막 근무조. 동원탄좌는 2004년 11월 1일자로 문을 닫았다.
ⓒ 강기희
 

 
▲ 수직갱으로 들어가는 입구. 엘리베이터를 타고 350 미터를 내려가 그곳에서 각자의 일터로 간다. 멀게는 4km나 간다.
ⓒ 강기희
 

지난 19일 사북항쟁 27주기를 앞두고 사북을 찾았다. 사북은 예전 모습을 찾아 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해 있었다. 강원랜드가 들어서고 난 이후 사북은 급속도로 변해갔다. 광부들이 살던 사택은 철거 되었으며 광부들의 거리는 유흥가로 변모해 있었다. 안경다리와 진달래꽃을 활짝 피운 산자락만이 80년 4월의 사북을, 그리고 지난 27년의 세월을 굽어보고 있는 듯 했다.

광부들의 분노케 했던 동원탄좌 건물을 둘러보았다. 수직갱은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었으나 광부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건물 안에는 당시 사용하던 각종 물건들이 유물로 보관되어 있었다. 당시 사북항쟁 지도부를 이끌었던 이원갑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에게 경찰과 광부들간에 전투가 벌어졌던 안경다리에서 만나자고 했다.

당시 이재기 노조지부장의 부인인 김순이씨가 광부들에 의해 묶였던 기둥도 사라지고 광부들의 분노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던 동원탄좌 건물은 폐허로 변했다. 항쟁이 있은 21일부터 24일 아침까지 노조지부장 부인은 광부들과 가족들에게 큰 곤욕을 치렀다.

남편 이재기씨가 받아야 할 죄를 홀로 감당한 김순이씨는 아직 당시의 치욕을 잊지 못하고 있다. 광부들과 가족들이 겪었던 어용노조에 대한 불만과 회사에 대한 분노가 얼마나 컸던지는 21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된 회사 관계자들에 대한 폭력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회사 관계자들은 마치 해방 후 떠나는 일본인과 친일파인 듯 했고, 광부들은 해방된 민중과도 같았다. 해방구인 사북거리에 약탈이나 방화는 전혀 없었다. 광부들 먹으라고 내어놓는 막걸리와 국수는 주민들의 뜨거운 애정이었다. 심지어 낼 것 없는 다방에서는 커피를 대야로 타주었다.

어용노조와 회사를 상대로 한 싸움이 경찰과의 싸움으로 전이 되면서 많은 부상자와 구속자를 냈다. 22일 '안경다리 전투'에서는 경찰의 사망자도 나왔다. 최루탄을 쏘며 동원탄좌로 진입하던 경찰에 맞서 광부들은 사북역 태백선 철로 위에서 돌을 던지며 극렬하게 저항했다.

대패하고 철수한 진압 경찰들

 
▲ 당시 지도부를 이끌었던 이원갑(사진 우측)씨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좌측은 전호덕(사북항쟁동지회 회원)씨다.
ⓒ 강기희
 

22일 오후 칼빈총으로 무장을 한 경찰은 광부들에게 대패했다. 경찰은 사북을 떠났고 지서 건물은 광부들이 접수했다. 그때부터 24일까지 사흘 동안 사북은 광부들의 해방구였다. 이때 시위에 참가했던 인원은 6000여명에 이른다. 그때 광부들이 3000여명이었으니 그 가족과 주민이 시위에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광부들은 고한과 증산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막고 경찰의 진입을 막았다. 기자들이 취재를 했으나 합수부에서는 기사조차 내보내지 않았다. 23일 급기야 공수부대가 사북에 투입된다는 정보가 항쟁 지도부에 들어왔다.

절대절명의 시간. 당시 강원도지사와 도경국장이 지도부와 협상을 시작했다. 그 시간 공수부대는 원주에 있었으며 투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광주의 경우를 보더라도 작전권이 있는 미국의 승인 없이도 공수부대는 투입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문제는 대통령의 재가였으나 당시의 권력 구도로 미루어보면 그것 또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항쟁 지도부는 동원탄좌에 1000여점의 소총과 사북 전체를 날리고도 남을 다이너마이트 60여톤이 있다며 공수부대가 투입되면 모두가 공멸할 것이라고 협상단에게 알렸다.

합수부에서 공수부대 투입을 주저한 것은 광부들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화력이었다. 광주처럼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고보면 소총과 다이너마이트까지 확보한 광부들을 자극할 경우 자신들의 피해도 클 것이라는 계산을 했을 것 같다.

당시 사북에 공수부대가 투입되었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사상자와 피해가 났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었다면 많은 양민을 학살한 광주민주화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협상단은 그러한 정황을 잘 알고 있었고 23일 낮부터 시작된 협상은 다음날 새벽1시가 되어서야 끝을 맺었다.

지도부는 억류해 놓았던 김순이씨를 경찰에 인도하고 사태 수습에 나섰다. 24일 오전이었다. 상황은 그렇게 끝나는 듯 싶었다. 광부들은 다시 일터로 돌아갔으며 사북거리는 평상시의 모습으로 수습되었다.

책임 묻지 않겠다던 경찰의 검거작전

경찰은 일체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합의를 어기고 항쟁 지도부들을 하나씩 파악해 나갔다. 정선경찰서에 수사본부를 차린 경찰은 비밀리에 항쟁 가담자들을 확보해나갔다. 당시의 일에 대해 지도부를 이끌었던 이원갑(68·사북항쟁동지회 회장)씨에게 물었다.

"24일날 모든 게 끝났잖아요. 책임소재를 전혀 묻지 않겠다고 철썩같이 약속했으니 우리도 그런 줄 알았지요. 평상시처럼 근무 나가고 근무 끝나면 사태 수습도 하고 그랬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경찰은 이미 주동자들을 파악해놓고 잡아 들일 기회만 보고 있었던 겁니다. 열흘쯤 지나니 기분이 이상합디다.

그러더니 5월 6일부터 잡아들이기 시작하는데 정신 없었습니다. 졸지에 지도부가 합수부에 잡혀 들어가니 광부들도 정신이 없었지요. 대책이라고는 세울 수도 없었고요. 항쟁의 기운을 이어가긴 무리였거든요. 당시가 거리에 군인들이 총들고 돌아치던 계엄령 상태 아니었습니까. 무서운 시절이었지요. 5월 20일까지 많은 사람이 잡혀 들어갔습니다."

- 어디로 갔나요.
"처음엔 정선경찰서에 갔지요. 취조실을 급조해 만들었는데 옆에서 때리고 고문하는 소리가 다 들려요. 물고문, 전기고문 안 받아본 게 없어요.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데 이래도 되는 건가 오히려 화가 나더군요. 이유 없이 붙잡혀 온 이들도 많아요. 며칠씩 고문당하고는 나가고 다른 이가 들어오고 여자들은 성고문까지 당했지요. 말도 말아요.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리네요."

- 몇 분이나 군법회의에 넘어갔나요.
"처음에 구속된 사람이 140명이나 되는데 재판에 회부된 이는 28명입니다. 집행유예로 나간 사람도 있고 실형을 선고 받은 이도 있지요. 저는 그때 10년 구형을 받았는데 1심 재판에서 5년형을 선고 받았어요.

그랬는데 웬일인지 계엄사령관이 2년을 깎아주데요. 고등군법회의에 항소를 했더니 서울고등법원으로 넘어가더군요. 거기 가니 그때서야 민간인들이 보이더군요. 거기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어요. 그때 이미 1년 5개월을 구치소에서 살았으니 무죄라고 선고할 수는 없었겠지요."

지난 해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사북항쟁에 대한 조사를 했다. 곧 결과가 나올 테지만 사북사람들은 적어도 '사북사태'라는 오명만은 벗어지길 기대한다. 당시 항쟁 지도부를 이끌었던 이원갑씨와 신경씨는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어 사북사태로 인한 명예회복을 했다. 아직 18명이 명예회복 신청 계류중이다.

사북항쟁 상처, 이젠 화해해야

 
▲ 광부들이 떠난 건물엔 옷을 수선하던 미싱만이 덩그러이 남아있다.
ⓒ 강기희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나오는 결과가 그들을 폭도란 이름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건져낼 수 있을 지 주목된다. 현재의 명예회복 기준은 당시 판결문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에 개인적 신청이 받아 들여지기는 쉽지 않다. 반면에 '사북사태'가 '사북항쟁'으로 인정된다면 명예회복은 쉽게 이루어지게 된다.

"당시의 판결문은 고문에 의한 조작입니다. 살아서 나갈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다고 말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러니 그때의 판결문으로 명예회복을 심사하면 안되는 것이지요."

이원갑씨는 판결문 자체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여타 사건이 그러하듯 계엄령 하에서 치러진 군사재판이 정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출감한지 3년 이내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한 이가 3명이나 된다고 하니 당시의 고문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27년이 흘렀습니다. 이젠 화해와 상생을 할 때가 아닙니까?
"그때의 일로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살았습니다. 모진 고문을 받은 광부들과 가족들이 그러했고, 경찰들도 죽거나 많이 다쳤습니다. 정작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엉뚱한 사람들이 다치고 죽고 했지요. 이젠 화해 해야지요. 함께 가야하는 세상 아닙니까. 화해하기 위해 동지회에서는 사망한 경찰관의 묘소에도 다녀왔습니다."

- 지부장 부인인 김순이씨와는 화해가 가능하겠습니까.
"어렵더라도 해야지요. 다들 도망치고 혼자 남아 있었기에 욕을 봤던 겁니다. 따지고보면 그 분은 큰 잘못 없어요. 남편 때문에 곤욕을 치른 것이지요. 당시야 죽일 놈 살릴 놈 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지부장인 이재기씨도 회사로부터 이용만 당했더군요. 광부들과 경찰, 이재기씨, 그리고 부인까지 다들 피해자입니다. 피해자들만 남아 있는 셈입니다. 이젠 화해 해야지요. 그러고 싶어요."

광풍이 불었던 그해 4월 이후 27년이 흘렀다. 사북항쟁이 어느 누구로부터 발화되었던 간에 그 책임은 민중이 아니라 정권과 권력을 쫒는 광산재벌들에게 있다. 그러한 당시의 사회적 구조를 만든 것은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였고 그것과 결탁한 광산재벌에게 무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화창한 사북거리에서 화해와 상생을 약속하는 그날이 어서와 지난 날 훌훌 털고 손잡고 살아갈 날 있었으면 하는 바람 가져본다. 아울러 사북사태는 아직 '사북사태'로 남아있다. 사북사태가 '사북항쟁'으로 평가 받는 날 상생의 춤을 추며 화해의 깃발이 하늘 높이 나부끼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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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라걸>서 80년 사북사태를 떠올리다

 

 

 

훌라걸>서 80년 사북사태를 떠올리다
1965년 일본 탄광 내리막 시절 배경, 절망 속 희망 그려
텍스트만보기   김대홍(bugulbugul) 기자   
 
 
 
▲ 80년대 사북사태를 다룬 동아일보 기사
ⓒ PDF파일(캡처)
 
 
▲ 동아일보에 실린 사북사태 내용
ⓒ PDF파일(캡처)
"건설정부는 현재 30개에 이르는 탄광을 오는 99년까지 10개만 남기고 폐쇄하고, 주요 탄광지역을 개발촉진지구로 지정해 스키장·골프장 등 위락시설이 들어설 수 있게 할 방침이다. 통상산업부는 5일 현재 7백40여만t인 연간 석탄생산량을 99년까지 4백30만t으로 줄이기로 하고 이러한 석탄산업 종합대책을 확정했다. 이 대책에 따르면 전국 30개 탄광 가운데 99년까지 △장성 도계 화순 등 석공 탄광 3개 △동원 삼척 경동 한보 등 민영대탄광 4개 △의령 만호 등 민영중소탄광 3개 등 10개를 제외한 20개 탄광이 폐쇄된다. 정부는 내년부터 가격보조, 발전용탄 배정 등 지원을 이들 10개 탄광에 집중할 계획이다." - 한겨레(1995년 4월 6일)

1989년 석탄합리화계획이 시행되면서 석탄산업은 대규모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1988년 347개이던 탄광 중 93년말 이후 살아남은 탄광은 44개에 불과했다. 6만2천여명이던 광원도 94년말엔 1만5천여명으로 줄어들었다.

강원도 속초 태생이던 영화감독 박광수가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을 극장에 내건 게 이듬해인 1990년이다. 지금은 농업이 죽니 사니 하지만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넘어오는 기간 그 몫은 석탄산업의 것이었다.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강원 정선군 사북읍에서 벌어진 '사북사태'는 그런 갈등의 시발점이었다. 어용노조와 임금 소폭 인상에 대한 항의로 일으킨 이 사태에서 경찰관 1명이 숨지고 160여명의 민간인과 경찰이 부상을 당했다. 당시 계엄사령부는 관련 인물 31명을 구속하고, 50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등 총 81명을 군법회의에 넘겼다.

흔히 '막장인생'이라는 말로 표현되듯 이들은 도저히 물러설 곳이 없는 삶을 살았다.

"스물한 살 때부터 27년째 광산 일을 해온 중앙개발 광원 김정경씨의 얘기는 그런 처지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배운 기술이라고는 땅 파는 것밖에 없어 도시로 나가 날품이라도 팔아보려 해도 당장 방 한 칸 얻을 돈이 없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서 어떻게 먹고 살란 말입니까." - 한겨레신문(1994년 12월31일)

불과 10여년 전 일이다. 하지만 벌써 탄광산업은 추억이 됐다. 우리나라에 남은 연탄공장 몇 개, 폐철로를 활용한 관광열차 등이 가끔씩 뉴스가 될 뿐이다. 그 와중에 얼마 전 큰 칼을 목에 쓰고 죽비로 자신을 수백대씩 때리는 시위를 하는 전 강원랜드 복지재단 상임이사 성희직(50)씨의 사연이 뉴스면을 장식해, 그 때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성씨는 광부 출신으로 3선의 강원도의원(민중당)을 지냈다. 1991년 당시 지자체 선거에서 민중당 출신으로 유일하게 광역의원을 지내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80년대에서부터 90년대 그렇게 강원도 탄광지역은 진보세력의 주요 거점이었다.

내리막 석탄사업, '지키느냐' '활용하느냐'

 
▲ <훌라걸> 1965년 혼슈 지방의 최대 탄광촌 토키와 탄광이 배경이다.
ⓒ 미디어2.0
<훌라걸>(시라이시 마미 글, 민경욱 옮김)은 1965년 혼슈 지방의 최대 탄광촌 토키와 탄광이 배경이다. 당시 일본에선 이미 대규모 석탄산업 구조조정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다시 아들에게 곡괭이를 쥐어주며 석탄산업을 숙명이라 생각하며 일해 온 이들에게 석탄산업 폐쇄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이 지역에서 일하다 이미 석탄산업은 내리막길이라고 생각하고, 살 길을 찾아 떠난 뒤, 하와이안센터라는 구상을 갖고 다시 찾아온 요시모토는 지역민들에게 배신자다. 그가 데리고 온 하와이안댄서 강사 도모카도 지역민들에게 망측한 존재일 뿐이다.

주민들은 하와이안 댄서가 벌거벗고 추는 스트립 댄서나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요시모토의 구상은 당연히 벽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책에서 모든 어른들은 선탄산업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은 책이 끝날 때까지 변함이 없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이 확고한 광부 요지로가 하와이안 댄서 강사 마도카를 사랑한다. 광부의 딸인 사나에는 이 지긋지긋한 삶을 벗어나고 싶어 하고, 기미코는 사나에의 가장 절친한 친구다.

이 중 가족을 부양하며 학교조차 다닐 수 없었던 사나에는 하와이안 댄서에 가장 큰 매력을 느낀다.

"일단 손톱에 석탄이 들어가면 아무리 씻어도 안 지워져. 비누로 씻어도 소용없어. 이런 손을 가진 열여덟 살짜리가 세상에 어디 있겠니?…이 기회를 잡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여기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누구는 전통을 유지하고자 하고, 누구는 새로운 삶을 꿈꾼다. 결국은 삶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이 던지는 것은 화두는 '어떠한 삶이냐'다. 또한 이 책은 전통과 현대문명의 충돌과 조화를 다루면서, 여성의 숙명과 진보를 다룬다. 이 점에서 책에서 가장 주목해서 봐야 할 인물은 탄광을 지키는데 있어선 가장 강경파이면서 여자의 숙명을 말없이 받아들이는 지요의 행동이다.

 
▲ 영화 <훌라걸스> 흥행과 평단 양쪽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 훌라걸스
 
"탄광의 여자는 아이를 낳아 기르고 탄광에서 일하는 남편을 돕는다. 실실 웃으면서 남자들에게 교태나 부리고 엉덩이를 흔들거나 다리나 벌리는 게 아냐!" - 지요의 말 중에서

 
 
  영화 <훌라걸스>에 대해  
 
 
소설 <훌라걸>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바로 최근 개봉한 영화 <훌라걸스>다. 요즘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배우 아오이 유우(타나카와 키미코역)가 출연해 관심을 끈 이 작품은 지난해 9월 일본에서 개봉해 흥행에 성공했다.

연말 영화상에서 5개 작품상을 수상한 <훌라걸스>는 '키네마준보' 2005년 최고 영화 선정, 2007년엔 일본 아카데미 11개 부문 수상 등 흥행과 작품성 양 부문에서 평가를 받았다.

또 하나 화제가 된 대목은 제작자(이봉우)와 감독(이상일)이 모두 한국인이었다는 점. 주인공 아오이 유우의 고향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후쿠오카 지방이었다는 점도 이와 함께 주목을 끌었다. / 김대홍
 
 
결론적으로 탄광을 가장 떠나고 싶어 했던 사나에는 꿈을 이루지 못한다. 그리고 딸의 댄서일을 적극 막고자 했던 지요도 뜻을 이루지 못한다. 최고 댄서를 꿈꾸었던 마도카는 결국 이 시골마을의 댄스 교사로 눌러앉는다. 그렇다면 과연 꿈을 이룬 사람은 누구일까.

또 하나, 책엔 '프로'에 대해 논쟁하는 대목이 나온다. 탄광작업 도중 한 댄서의 아버지가 갱이 무너지면서 돌아가시는데, 그 날은 중요한 공연이 있는 날이다. 과연 '프로'라면 공연을 그만둬야 하는가, 웃음을 흘리면서 공연을 마무리해야 하는가. 1차산업인 석탄산업에선 필요 없었던 이 질문이 하와이안센터로 상징되는 서비스산업에선 필요하다.

그래서 과연 전통과 현대는 어떻게 결별하고 손을 맞잡았는지 궁금했다.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야 했던 그 용감하고 어린 주인공들은 과연 그 뒤 어떻게 됐을까. 다행히 지은이는 독자의 그런 마음을 안 모양이다.

"기미코는 조반하와이안센터의 대성공으로 도쿄 연예계로부터 수많은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그 제의를 모두 거절하고 자신이 자란 토호쿠의 하와이에서 춤을 추다가 서른에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 현재는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기미코의 오빠 요지로는 조반하와이안센터가 문을 연 10년 뒤인 1976년, 조반 탄광의 마지막 갱이 폐쇄될 때까지 자긍심을 가지고 광부로 계속 일했다. 그리고 마도카는 하와이안센터의 개장 이후 35년 동안, 이 도호쿠에서 댄스 교사를 계속하며 일흔을 넘긴 지금도 훌라댄스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전하고 있다. 1976년, 탄광은 명실상부한 '하와이'가 되었다" - 에필로그
 
 
2007-04-16 09:49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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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중도정치'를 아느냐?

 

 

 

너희가 '중도정치'를 아느냐?
"그들의 '중도'... 사이비 개혁세력의 '우익투항'일 뿐"
텍스트만보기   심상정(713sim) 기자   
 
 
▲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
ⓒ 오마이뉴스 이종호
요즘 '중도'라는 말이 인기를 끌고 있다. 사실 요즘이랄 것도 없이 선거철만 되면 우리 정치권은 마치 마술에라도 걸린 듯 '중도'의 스펙트럼으로 자신을 치장하기에 바쁘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도 중도를 자임했고, 정운찬 전 총장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중도로 규정했다. 손학규 전 지사 역시 마찬가지다. 아울러 실패한 정치세력인 범여권은 '중도개혁세력 대통합'을 명분으로 패자부활전을 모색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을 빼고는 우리나라 정치인 가운데 자신을 중도로 포장하지 않는 이를 찾기 어려운 형편이다.

중도정치의 역사적 기원

중도정치란 역사적으로 좌파정치세력의 노선변화를 가리키는 게 대부분이었다. 근래의 대표적 사례로는 영국노동당의 '신노동당' 선언의 이념적 근간이었던 '제3의 길'(the third way), 독일사민당의 '새로운 중도'(Neue Mitte)를 들 수 있다.

이들의 중도노선은 좌우세력의 비판 속에서도 최소한 당대의 논쟁을 담고 있었다. 서구 복지국가의 한계, 사민주의냐-신자유주의냐,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혁신, 근대와 탈근대 즉 노동 대 자본의 근대적 정치구도에서 탈피해 성찰적 탈근대 정치로 이동 따위가 그것이다.

그러나 한국정치에서 '중도'는 철학도, 실체도 없는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한국정치에서 중도는 좌파가 아닌 우파가 제기하고 있는 것도 이채롭다. 사실 이는 '중산층과 서민을 지지기반으로 한다'고 떠벌이는 보수야당의 선거전략에 불가하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집권 냉전세력의 '좌익용공' 공세를 피하기 위해, 최근엔 실정의 면피용으로 중도가 이용되고 있다.

평화개혁, 중도실용, 중도개혁 등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쓰는 '중도'는 그 자체로 완결적일 수 없는 불구의 개념이다. '무엇에 대한 중도인지'가 분명해야 하는데 그와 관련한 차별성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사이비 개혁세력이 그냥 좋은 개념, 절충적 개념으로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정치적 실패자, 정치적으로 방황하는 미아들의 정치노선, 그것이 한국정치에서 중도의 실체다.

"무엇을 하겠다는 중도인지" 답하라

책임정치, 정치철학, 정치노선 차원에서 중도를 들먹이려면 적어도 '시대정신'과 부합하는 논리적 전제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무엇을 하겠다는 중도냐'라는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의 핵심의제인 'IMF 경제위기 10년의 한국이 나아가야 할 길',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의 대안'을 내놓은 것이다. 그러나 중도를 부르짖는 정치세력은 바로 그 이름으로 '양극화 강화정책'과 '신자유주의'에 순응하거나 밀어붙여왔다. 그것이 바로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실패한 근본원인이다.

눈여겨 볼 것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실패한 정책에서 둘 사이에 어떠한 긴장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정책에서는 같은 방향을 지향하면서도 정작 서로 달라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 유지된 것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관계다. 이런 상황에서 제기되는 중도론은 이러한 허구적 긴장관계마저 해소해 보자는 것이다.

범여권에서 나오는 중도론은 한마디로 말해 '우익편승론'일 뿐이다. 장사 되는 곳에 좌판을 벌이겠다는 발상, 나는 이것을 '떠돌이 약장사 정치'로 규정한 바 있다. 국민이 개혁을 요구할 때는 개혁장터에 좌판을 벌이고, 국민이 잇따른 실정에 절망하고 한나라당 쪽으로 옮겨가자 이제는 재빨리 중도란 이름으로 좌판을 벌이고 우익편승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한미FTA와 원포인트 개헌 등의 의제는 "나도 괜찮은 보수다"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다. 한나라당, 보수언론 등 우파 헤게모니에 편승하기 위한 적극적 구애행위인 것이다.

실체없는 말의 성찬이자 정략적 알리바이

한국의 중도주의는 전통적인 좌표를 수정한 게 결코 아니다. 무엇에 대한 중도란 말인가. 평화개혁, 중도개혁, 중도실용은 말의 성찬일 뿐 개념도 아니고,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지난 반세기의 한국정치에서 끊임없이 중도론이 제기되었지만 현실정치에서 그것은 존재한 적이 없다. 실체가 없으니 당연히 좌표에도 없다.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는 지점을 찾아가다 보면 길 잃은 부랑아가 될 수밖에 없다. 한미FTA 추진, 비정규직 개악법안 강행통과, 부동산정책 실패 등 정치와 정책에서 실패한 세력이 선거승리라는 정략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알리바이가 곧 중도론이다.

중도정치가 성립하려면 좌우의 균형이 전제돼야 한다. 하지만 한국정치는 보수독점 구조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가 '극우-중도-극좌'로 재편될 가능성은 없다. 이 점에서 '보수-중도-진보'는 추상적 이념 속에서나 가능할 뿐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구도다. 오로지 선거공학적 레토릭으로서 기능할 뿐이다.

참여정부의 실정을 경험한 국민은 이제 레토릭을 넘어 정치의 실질적 내용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말뿐인 중도주의는 더 이상 한국에서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사이비 개혁세력의 우익투항, 정치개혁 실패를 고백하는 과정일 뿐이다.

"한미FTA 찬성이냐 반대냐" 대선 핵심쟁점

한미FTA 추진 과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무현-한나라당-보수언론의 3각동맹 체제는 우익편승론을 본질로 하는 중도의 귀결점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한미FTA는 올해 대선의 핵심쟁점이 될 것이고, 따라서 나는 FTA를 둘러싼 정치구도 재편에 주목한다. 개혁세력이니 평화개혁이니 하는 지난날의 어정쩡한 정치 슬로건은 한미FTA 전선에서 설자리를 잃게 될 것이고, 오직 찬성이냐 반대냐 하는 분명한 태도를 요구받게 될 것이다.

나는 한미FTA를 일관되게 반대해왔고, 무효화해야 함을 역설해왔다. 그것은 졸속으로 시작해 미국 퍼주기로 끝난 협상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자동차 세제개편이라든가 투자자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보장하는 독소조항에서 볼 수 있듯 서민의 삶을 희생양으로 대기업과 소수 기득권층의 이해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한미FTA는 결코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는 3각동맹체 내부의 자리바꿈일 뿐인 정권교체를 뛰어 넘어야 한다. 부자들의 시대에서 서민의 시대로, 냉전의 시대에서 평화와 통일의 시대로, 신자유주의 약육강식 시대에서 호혜협력의 시대로, 보수정치시대에서 진보정치의 시대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이번 대선에서 우리가 찾아가야 할 좌표이자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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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가 대선구도 흔들 다크호스?

 

 

 

'개인주의'가 대선구도 흔들 다크호스?
[여의도통신] '블런델-고스초크 모델' 한국적용 가능할까
텍스트만보기   여의도통신(ytong)   
 
 
 
ⓒ 여의도통신
 

진보-보수-중도 등 이념적 척도를 가지고 유권자의 성향을 분석하는 방법론은 서구에서 이미 그 한계가 드러났다.

한국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레드 콤플렉스 등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볼 때 이념적 성향에 따른 유권자 분석 방법론은 서구보다 도리어 한국에서 유권자 분석틀로 한계가 많다고 할 것이다.

한국 사회는 분단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현실적으로 이념지형 자체가 형성되지 못했는데도 이념 지표를 사용하는 것은 그 출발부터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진보 vs 보수 이념 지표의 한계

한국전쟁 이후 한국 사회는 '좌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탄압해 왔다. 198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진영에서 발생한 자생적 좌파세력 역시 사회주의 국가 붕괴 이후 소멸되다시피 하면서 이념지형 자체가 거의 형성되지 못했다.

용어적으로도 '좌파'라는 말이 금기시되면서 '진보'나 '개혁' 등을 혼용함으로써, 이념지형 형성에 있어 많은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실제로 민주노동당 등은 '좌파'로 분류할 수 있으나 이들 역시 '진보' 라는 용어를 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인은 이념적 태도에 의한 정당선택 경험도 없다. 1970~1990년대 한국의 사회운동은 민주주의 세력, 자유주의 세력, 사회주의 세력 등이 당면과제인 '민주화'를 성취하기 위해 보수정당(민주당 등)과 연대하는 양상이었다. 사회주의 세력의 독자정당 창당 시도는 현실법의 한계에 부딪혀 좌초했다.

이에 따라 일반 국민들은 좌파정당 vs 우파정당의 대립을 경험해 본적이 없으며, 정당 지지 역시 우파들의 보수정당 중에서 선택해 왔던 것이다. 다만,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은 이념적 선택을 하는 측면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이념지형이 거의 형성되지 못한 한국사회에 진보 vs 보수라는 이념적 분석틀을 적용하는 것은 매우 한계가 많다는 지적이다. 예를 들어 보수주의자라 할 수 있는 이명박 전 시장이 유권자들에게 '진보적'이라고 평가받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의 이념분석틀의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서구에선 새로운 이념지표 사용

서구 사회는 뚜렷한 이념 대립 구도를 가지고 있다. 특히 유럽은 경제에 대한 태도로서 좌파 vs 우파의 기본 대립 구도를 형성해 왔다. 유럽의 정당들은 이러한 이념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유권자도 이념에 따라 정치적 태도를 갖거나 지지 정당을 결정해 왔다. (그림1 참조)

 
ⓒ 여의도통신
 

이러한 대립 구도는 맑스의 '공산주의' 제창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공산주의 운동 경험이 척박한 미국의 경우는 민주당과 공화당이라는 보수정당의 대립구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유럽은 계급구성 변화 및 '개인주의' 신장에 따른 정치지형 변화에 조응하고자 전통적 좌우 구분을 뛰어넘는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해 왔다.

1997년, 영국의 존 블런델(John Blundell)과 브라이언 고스초크(Brian Gosschalk)는 전통적 좌우대립 축(경제적 태도)에 개인주의 축을 추가한 모델을 적용했으며, 이후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다. 블레어의 노동당 현대화 프로젝트, 기든스의 제3의 길, 독일 사민당의 신중도 노선, 전통적 가치관 붕괴에 주목한 잉글하트 모델 등은 기존의 좌우 구분을 뛰어넘고 '개인주의'를 적극적으로 수렴하고자 하는 노력으로서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블런델과 고스초크는 영국에서 사회적․정치적 태도에 따라 보수주의적, 자유지상주의적, 사민주의적, 권위주의적이라고 일컫는 네 집단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림2 참조)

 
ⓒ 여의도통신
 

경제적 자유, 즉 자유시장에 대한 신념이 한 축에서, 그리고 개인적 자유가 다른 한 축에서 측정되는데 기존의 좌파 우파 구분에서는 드러나지 않던 유권자 태도 변화나 현실 설명이 가능하게 됐다. 위 모델에 따른 각 유형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보수주의적(conservative)] 신자유주의적인 것으로 시장의 자유에 찬성하지만 가족, 마약, 낙태와 같은 쟁점에서는 강력한 국가 통제를 원한다.

[자유지상주의적(libertarians)] 모든 방면에서 개인주의와 낮은 수준의 국가 관여를 원한다.

[사민주의적(socialists)] 보수주의자들과 반대로 경제생활에서 더 많은 국가 관여를 바라고 시장을 불신하고 있으나 도덕적 쟁점에 관한 한 정부관여에 회의적이다.

[권위주의적(authoritarian)] 경제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양자를 포함하여 모든 영역에서 정부가 강력한 통제를 유지하기를 희망한다.

핵심은 '개인주의'의 급속한 신장

블런델-고스초크의 조사 및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정의에 따라 영국 인구의 약 3분의 1이 보수주의자이며, 20%에 약간 못 미치는 사람들이 자유주의자이며, 18%가 진보주의자, 13%가 권위주의자, 그리고 기타가 15%인 것으로 나타났다.

1997년 선거 직전에 토니 블레어에 의해 재건된 노동당은 보수주의적 집단을 제외한 다른 집단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보수당에 투표하겠다는 사람들 가운데 84%가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집단에 속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새로운 방법론 도입의 핵심에는 '개인주의'의 급속한 신장이 자리 잡고 있다. 개인주의란 집단적인 삶의 방식 우위라는 전통적 관념 대신에 개인의 자유와 권리 신장을 추구하는 흐름을 말한다. 2차 대전 이후 베이비 붐업 세대가 주도하고 있는데 그 분포를 보면 젊고, 교육수준이 높으며, 소득도 높은 층에 집중되어 있다.

미국의 경우 이러한 개인주의 세력은 42% 수준이며(2006년 갤럽 조사결과), 영국은 38% 수준(1997년 IEA 조사결과)을 보이고 있다. 인용한 영국의 수치 38%는 1997년 자료이기에 현재는 미국의 경우처럼 40% 수준으로 확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개인주의의 신장에 주목하면서 새로운 사회분석틀을 주창한 사람으로 미국의 데이비드 놀란(David Nolan)이 있다. 놀란은 1971년, 기존의 단선적인 좌우 이념축에 개인주의 축을 추가한 '놀란 차트'를 만들었다. 놀란 차트는 이후 많은 변형과 개념이 추가되기도 했으나 개인주의 축을 유지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고 있으며, 위의 블런델-고스초크 모델 역시 놀란 차트의 변형이다.

한국 사회 역시 '개인주의'가 매우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는 것을 감안할 때 개인주의적 성향의 국민이 상당수에 놓여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에 대한 사회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어 구체적인 수치는 확인된 바가 없지만 말이다.

한국 사회 적용할 경우 주목할 것들

그렇다면 이러한 '블런델-고스초크 모델'이 한국 사회 적용될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현재의 이념대립 구도는 한나라당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경제에 대한 태도로서 진보 vs 보수의 이념 구분에 따라 한국의 유권자 및 정당의 지형을 추정해 보면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림3 참조)

 
ⓒ 여의도통신
 

자본주의 발달 및 세계화에 따라 시장자유적 측면이 강조되면서(이는 전 세계적 흐름이기도 하다) 국가관여의 표현인 '규제' '분배' '복지국가' 등은 소수의 위치로 몰리고 있다. 유럽 등 복지국가들조차 이러한 흐름을 받아들여 복지규모를 줄이는 추세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참여정부가 복지를 늘리겠다고 하는 것은 세계적 흐름에 역행하는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복지수준이 서구의 복지국가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기에 이를 확충해야 한다는 논리는 '맞는 말'이지만 현재의 이념구도 속에서는 '좌파적' 혹은 '사회주의적'이라는 공격을 당할 수밖에 없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이명박 전 시장과 한나라당 후보들의 시장자유 주장이 마치 '개인적 자유'를 포함하는 듯한 착시효과를 일으키면서 '개인주의적' 유권자 다수를 포섭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2007 대선 역시 이념대립 구도로 치러질 경우 한나라당 승리 가능성이 높다. 현재 대선구도는 이념적 프레임에 의해 각종 담론이 생산, 유지, 강화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한나라당과 이명박 전 시장 등 한나라당 후보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을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사례1] 시장자유를 주장하는 한나라당 및 한나라당 후보들에 비해 국가관여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 그리고 범여권 대선주자들은 마치 반시장주의자로 인식되고 있다.

[사례2] 시장자유에 대한 주장은 개인자유까지 옹호하는 듯한 착시효과를 일으키면서 시장자유에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참여정부 및 열린우리당 그리고 대선주자들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세력으로 인식되고 있다.

[사례3]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이라는 구분법 역시 이념적 대립축의 변형으로 경제발전을 주도한 산업화세력에게 다시 한국경제 재건을 맡겨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지고 있다. (이명박 전 시장이 가장 큰 수혜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도에서 범여권이 '반한나라당 연대'를 말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소수자'를 자임하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며, 결국 이러한 구도가 유지되는 한 한나라당의 승리가 예상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적용되면 대선구도 아성 흔들릴 수도

그러나 새로운 분석틀을 적용할 경우 선거구도에 변화가 예상된다. 실제로 블런델-고스초크 모델에 따른 한국의 유권자 및 정당의 지형을 예측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림4 참조)

 
ⓒ 여의도통신
 
이념적 대립구도 축에 '개인자유' 축을 추가해서 펼쳐보면 각 정치세력의 입장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우선 한나라당은 보수주의자로 시장의 자유에 찬성하지만 개인적 자유 옹호보다 국가규제를 선호하는 지형에 위치하게 된다.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 역시 개인자유 측면에서는 뚜렷한 입장을 갖고 있지 못했으며, 국민을 계도하려는 권위주의적 요소가 다분한 지형에 위치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개인주의적 성향의 유권자 다수가 위치하고 있는 상단 지형에 적합한 정당 또는 대선후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지금까지는 탈정치화 되어 있는 이명박 전 시장이 이들을 흡수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마땅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범여권의 입장에서 이러한 블런델-고스초크 모델을 차용할 경우 실천적으로 적지 않은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블런델-고스초크 연구보고서는?  
 
 
영어로 쓰여진 이 연구보고서의 원제는 이다. 기존의 이념적 방법론 대신 개인주의 축을 추가한 새로운 프레임을 적용, 영국 국민의 의식을 새롭게 규정한 여론조사 결과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기든스의 유명한 저작, <제3의 길>에 인용되었는데, 그 조사결과 및 분석내용이 매우 강렬한 인상을 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P&C리포트(pncreport.com) 홈페지에서 영어 원본을 다운받아 볼 수 있는데, 주요 목차는 다음과 같다.

-Foreword by Robert M. Worcester
-The authors
-Introduction
-Beyond Left and Right
-Voting Intentions by Ideology
-Party Vote by Ideologies
-Ideologies by Social Characteristics
-Questions by Social Characteristics
-Where do you fit?
-Appendix I: Summary Data 21 Questions
-Appendix II: Grouping by Voting Intention
-Appendix III: Group Classification
-Technical Note
-Endnotes / 여의도통신
 
 
 
 
정리=여의도통신 정지환 기자 ssal@ytongsin.com

- 이 기사는 국내의 가장 권위 있는 정치분석기구 중 하나인 P&C글로벌네트웍스가 제공한 < P&C리포트 >를 여의도통신이 가공한 것이며 입법전문 정치주간지 <여의도통신> 6호(4월 9일자)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2007-04-10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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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혹은 지루한 스톡홀름

 

 

 

연재기사 | 무작정 떠난 러시아-유럽여행 + 종합
 
조용한 혹은 지루한 스톡홀름
[무작정 떠난 러시아-유럽여행 26] 스웨덴 스톡홀름 1
텍스트만보기   강병구(kbk81) 기자   
 
 
준비 없는 도착이 가져다준 당황스러움

 
▲ 도착해서 처음 본 스톡홀름 시내의 한가로운 모습.
ⓒ 강병구
 
머무는 내내 한기가 충분히 느껴지던, 바다 밑에 잠긴 공짜 방은 결국 나에게 감기 기운을 선물해 주었다. 심포니호에서 얻은 마지막 선물이랄까? 으슬으슬 추워지는 몸에 더해주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도착한 스웨덴은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 아침시간이 지난 오전 10시쯤, 배는 스톡홀름에 도착했다. 몸이 괜찮은 것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곳에 도착함에서 오는 막연한 즐거움은 이곳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문제가 생겼다. 막상 배에서 내리고 보니 내 수중에 단 한 푼의 스웨덴 돈이 없는 관계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배가 도착한 여객터미널에는 현금인출기도 없었고, 터미널의 위치도 스톡홀름 시내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가지고 있는 유로는 적어도 터미널의 빠져나가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너무나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다행스러운 도움을 찾을 수 있었다. 어제 심포니호에서 만난 분들과는 다른, 단체관광객들을 만나 그분들이 사용하시는 버스를 얻어탈 수 있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출발하려는 버스에 올라타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잠시 뒤 스톡홀름 시내까지 태워주시겠다고들 대답해주셔서 버스를 얻어 타게 되었다.

 
▲ 스톡홀름 중앙역의 모습, 중앙역 근처에 주요시설이 몰려있다.
ⓒ 강병구
 
하지만 현지에 와서 구하려고 한 숙소는 더 문제였다. 으슬으슬한 감기 기운이 느껴지는 상태에서 마음 놓고 푹 쉴 수 있는 숙소를 찾고 싶었지만, 연고도 아무것도 없는 스톡홀름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고민 끝에 택한 방법이 한국에 연락해 인터넷으로 이곳 민박집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우선 도시의 중심이라 할만한 중앙역을 찾아가 전화카드를 구매하여 한국에 전화를 걸었다. 한국으로의 몇 번 통화 끝에 알아본 민박집 전화번호로 한인민박집에 방을 구할 수 있었다.

통화를 해서 위치를 안내받고, 그곳까지 찾아가고 보니 어느덧 오후 3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답답하고 불안하기만 하던 상황에서 말이 통하는 주인 아주머니를 만나고 나니 마음이 푹 놓였다. 새삼 준비 없이 떠나온 내 여행이 너무 힘들게만 느껴졌다.

조용하고 여유로운 스톡홀름의 풍경

 
▲ 중앙역 앞에서 본 반가운 한국차의 모습.
ⓒ 강병구
 
짐을 풀고, 씻고, 간편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나니 본격적으로 내가 도착한 스톡홀름이란 곳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여태껏 스웨덴의 수도라는 객관적인 사실과, 어릴 적 즐기던 부르마블 게임에 등장하던 도시였다는 것 이외에 특별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오래된 도시로서 왕궁 같은 건축물이 유명하겠지만, 지금껏, 그리고 앞으로도 보게 될 다른 유럽의 오래된 도시와 특별히 다르지 않을 듯했고, 스톡홀름만의 특별한 무엇인가가 떠오르지 않았다.

사전지식 없는, 제목처럼 무작정하게 도착한 스톡홀름의 첫인상은 참으로 조용하고, 차분하다는 느낌이었다. 여객터미널에서 고생하다가 스톡홀름 중심가에 도착하여 시내를 돌아다니던 시간이 한참 점심때쯤인 낮 12시였다. 서울 같았다면 1시간이라는 쫓기는 시간 안에 점심을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과 시민들로 매우 분주해야 할 시간이었다.

 
▲ 중앙역 인근의 쇼핑거리의 붐비는 모습.
ⓒ 강병구
 
하지만 스톡홀름의 점심시간은 그런 종류의 분주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쫓기듯이 어딘가로 향하는 직장인들도, 정신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는 시민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그보다는 여유롭고 느긋한 모습의 점심시간이었다.

물론 이런 느낌이 스톡홀름에서만 느낀 것은 아니다. 유럽의 도시들이 대부분 이런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스톡홀름 시내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북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만큼 백화점과 쇼핑가가 주를 이루는 중심가에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여행자로서 느끼는 여행지의 주된 느낌이란 것이 있다. 그런 점에서 스톡홀름의 그것은 조용함과 여유로움이었다. 러시아의 모스크바가 서울과 비슷한 분주한 느낌을 주었고,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고풍스러움을, 에스토니아의 탈린이 중세풍의 만화 같은 젊은 느낌(영화 <기사 윌리엄> 같은 느낌이랄까?)이었고, 헬싱키가 평화로움을 주었듯이 말이다.

아마도 스톡홀름에서 겪은 몇 가지 경험들이 이런 인상에 쐐기를 박았을지도 모르겠다. 스톡홀름 여행 둘째 날 국립미술관에서 점심을 먹었을 때의 일이다. 민박집에서 같이 묵고 있던 부부와 함께 그곳을 둘러보다 점심시간이 되어 미술관 안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점심시간이 조금은 넘은, 오후 1시가 조금 덜되었을 시간이었다.

 
▲ 너무나 여유로운 스톡홀름 모습.
ⓒ 강병구
 
같은 시각의 서울이었다면 서둘러 점심을 마치고 직장으로 혹은 다른 곳으로 돌아가려고 분주했을 것이다. 하지만 식사를 여전히 여유롭게 하고 있었고, 식사를 마치고는 차 한 잔을 두고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테이블도 있었다(이 테이블 사람들은 우리가 밥을 다 먹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야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급한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 모두 같이 온 사람들과 재미있게 이야기하며 식사를 하고 있었고, 시계를 보아가며 서둘러 먹는 사람은 시간도 여유로운 여행자인 우리가 유일했다.

물론 그들 대부분이 미술관 관람객일 수도 있다. 혹은 종업원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건 다들 미소를 머금고 식사상대들과 이야기하는데 시끄럽지 않았으며, 그런 그들 누구도 시간에 쫓기듯 먹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다음날 시내의 다른 식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유롭다 못해 지루하다면?

 
▲ 가장 번화한 세르옐 광장의 붐비는 모습 - 이 날 저녁 이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었을까?
ⓒ 강병구
 
하지만 지나치면 모자른만 못한 것인지 정신없는 한국인의 삶에 너무 익숙한 때문이었는지, 너무나 조용하고 여유로운 스톡홀름의 풍경은 차츰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지루하다 못해 신물이 났다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그것도 3일 만에 말이다.

술을 좋아하고 밤에 노는 전형적인 한국인으로서, 황금 같은 주말 저녁 시내중심가 술집도 밤 9시가 넘은 시간에 열려있는 곳이 눈 씻고 찾기 힘든 점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금요일 저녁 민박집에 같이 머물던 다큐멘터리 촬영팀 형님들과 함께 술을 한잔 먹으로 시내 중심가로 나왔지만, 밤 9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임에도 시내에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여행서에 소개된 몇 안되는 술집들도 한산하거나 영업이 끝났었다. 스웨덴 사람들은 주말저녁 술도 안 마신다는 건가? 그런 것에 비하면 새벽 3시까지 운행하는 지하철은 너무 생뚱맞았다.

민박집이 있던 곳은 시스타(Kista)라는 스톡홀름 외각의 신도시였다. 그곳에 위치한 30년된 아파트가 민박집이었는데, 어찌나 동네가 조용한지 조금 늦은 시각 길거리에서 떠들기라도 하면 주민들이 밖을 내다볼 지경이었다.

조용하고, 여유로운 스톡홀름. 마음 한 쪽에서는 이런 곳에서 편히 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지만, 다른 한편 이런 곳에서 살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하는 의문도 들었다. 아무래도 나에겐 스톡홀름에 살기엔 부적당한, 음주가무를 즐기는 동이족의 피가 너무 많은 듯했다.

 
  [여행팁 19] 스톡홀름에서  
 
 
 
▲ 너무나 조용했던 민박집 아파트 모습
ⓒ강병구
작년 5월 필자가 도착했을 당시 스톡홀름의 한인민박은 두 곳이 있었다. 사전정보 없이 유스호스텔 숙박을 생각하고 도착한 곳이라 한인민박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여행에 따른 피치 못 할 사정으로 급히 한국에 연락을 하면서까지 알아보니 한인민박이 있기는 있었다.

혹여 스톡홀름을 가시려는데 한인민박의 존재를 궁금해하실 분이 있을지 몰라서 필자가 묵었던 민박의 홈피 주소를 남긴다. 민박집은 깔끔했고 머물기에 불편함은 없었지만, 필자가 있었던 기간이 비수기라 성수기에는 어떨지 모르겠다. 한인 아주머니와 스웨덴인이신 아저씨 두 분 다 매우 친절하셨고, 한국말을 잘하는 아들분이 인상적이었다.

민박집 홈페이지 : http://www.stockholmminbak.se

환전에 관한 팁 : 유로권을 여행하다 북유럽에 와서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점이 환전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너무나 편하게 유로가 통용되던 곳을 여행하다가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덴마크에 도착하면 환전을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또 나중에 소개할 비유로권 동유럽과는 달리 시내에서 유로가 통용이 거의 되지 않는다. 유로로 지불하려고 하면 환전소에서 바꿔오라고 한다.

시기마다 환율이 어떻게 다를지 모르니, 북유럽에서 쓸 돈을 모두 미리 환전할 필요는 없지만, 도착해서 수고롭지 않을 정도의 돈은 미리 환전해오자. 적어도 교통비를 지불할 50유로 안팎의 돈은 미리 환전해 오는 것이 좋다.

그리고 동유럽과 또 다른 점은 북유럽 화폐가 남아도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동유럽화폐가 남으면 서유럽에서는 거의 재환전이 불가능한 것에 비해, 북유럽 화폐는 그럴 걱정은 없으니 남는다고 다 쓰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환전을 여러 번 하는 것에 따른 손해는 있지만 말이다. / 강병구
 
 
 
 
개인적인 사정으로 예고된 날짜에 기사를 올리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지난 2006년 4월 21일부터 7월 28일까지 러시아와, 에스토니아, 유럽 여러 국가를 여행했습니다. 약 3개월간의 즐거운 여행 경험을 함께 나누고자 올립니다. 다음 기사는 4월 16일(월요일)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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