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기: 동동이

17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3/31
    죽어도(4)
    동동이
  2. 2005/03/30
    오늘이 고흐 생일인가?(1)
    동동이
  3. 2005/03/23
    구글 데스크탑 검색
    동동이
  4. 2005/03/22
    시계(5)
    동동이
  5. 2005/03/20
    흔적남기기
    동동이
  6. 2005/03/14
    임시저장 2(4)
    동동이
  7. 2005/03/10
    호칭 문제(8)
    동동이
  8. 2005/03/10
    프라이버시
    동동이
  9. 2005/02/15
    차가운 파도를 봤습니다.(4)
    동동이
  10. 2005/02/15
    또 중얼중얼(2)
    동동이
2005/03/31 15:24

죽어도

* 이 글은 레이님의 [죽어도 '동지'가 될 수 없는 우리.] 에 관련된 글입니다.

'우리'사이에 강이 흐른다. 강이 건널 수 없다거나, 건너기 요원하다거나, 건널 맘이 양안 다 없다거나 하면 서글퍼진다. 그렇다고 했더니 애초에 건널 수 없는 거라고 새초롬한 어투로 말한 선배가 있었다. 그래도 건너고 싶다. 좁혀지면 좋겠다. 난 영영 짝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인가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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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30 16:23

오늘이 고흐 생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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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23 18:25

구글 데스크탑 검색

* 이 글은 진보네님의 [블로그 검색 팁] 에 관련된 글입니다.

너무 편해서 중독되어 버린 것 같다. ㅠ_ㅠ 윈도검색따위와는 비교도 안 된다. 근데 정말, 웹서핑했던 것도 몽땅 검색해서 보여준다. 웹서핑했던 것 기록에 남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래 보여주니 어쩐지 민망. =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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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22 13:51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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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20 01:22

흔적남기기

네트워크에서의 활동은 어차피 다, 기록으로 남는다.

현실사회에서의 활동도, 생체정보인식이 끝도 없이 확장되면서 다, 기록으로 남겠지.

 

이걸 막을 수 있을까?

막는다면 '얼마나' 막을 수 있는걸까?

혹은 남는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쓰도록 강제하는 것을 고민해야 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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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4 16:42

임시저장 2

노무현정권 집권 3년차를 바라보며 노무현정권이 집권 3년차를 맞이하고 있다. 2002년 12월, 뜨거운 논쟁과 지지위에 탄생한 대통령이었다. 그해 가을에 97년에는 함께 진보정당선거운동을 했던 선배와 토론을 했다. 자신의 '개혁(이란 단어 싫지만)에 대한 의지'를 노무현에게 투영하며 그를 지지한다고 했다. 고졸, 사법고시, 인권변호사, 87년 6월 항쟁, 청문회 스타, 당내 지지기반이 거의 없는 그가 노사모와 온라인이라는 당 바깥의 열렬한 지지를 업고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되었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극적인 것을 바라는 것 같다. 사람들은 삶이 세상이 극적으로 뒤바뀌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97년 대선이 끝난 아침에, 집에 배달되어온 신문은 1면 사진으로 보랏빛 수건을 머리에 두른 어머니들에게 둘러싸인 김대중 당선자를 실었다. 그래서 나는 (순진하게도) 김대중 정권때 다른 것은 몰라도 국가보안법은 폐지될 것으로 믿었다. 양심수는 적어도 없어지리라고 생각했다. 98년에는 처음으로 '후배'가 구속되었다. 2002년 노사모의 기억. 노사모의 누구의 얘기인지는 잊어버렸지만, 당시 대통령후보와 함께 지방의 한 소도시에 내려갔는데, 비가 오는 저녁에 노란 비옷을 입은 사람들이 첫 번째 만난 육교에 가득 모여있었다고 했다. 두 번째의 육교에도 노란 비옷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 모여있었다고 한다. 세 번째 육교에도, 네 번째 육교에도. 당시 이 사람들의 열망은 '개혁'으로 모아질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에는 대통령후보가 연설한다면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도 하지만, 이 지지를 업고 노무현은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할까 궁금했다. 그래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기대도 했다. 2003년 2월, 정권을 준비하며 노무현은 강금실법무부장관과 김두관행자부장관과 이창동문화부장관을 준비했다. 2003년 4월, 1월 배달호 열사부터 시작되었던 수많은 노동열사의 행렬에 노무현은 "자살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시대는 지났다"고 말했다. 2003년 4월, 국회에서는 파병동의안 처리에 대한 논의가 한창 분분했다. 국회를 전경차가 빙 둘러싸고 있었고, 그 바깥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2003년 여름, 부안의 기억. 2004년 초봄, 총선을 앞두고 16대 국회는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했고, 한달 동안 다른 아무 얘기도 할 수 없었던 탄핵국면에 접어들었다. '직접 민주주의'를 외쳤던 외침은 기억이나 되고 있을까. 10월에는 뜬금없이 헌법재판소가 '관습헌법' 얘기를 해서 노무현정권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줬고, 겨울로 접어들 무렵에는 노무현과 열우당은 국가보안법폐지안, 사립학교법개정안, 언론개혁법, 과거청산법을 묶어서 4대 개혁입법정국을 연출했다. (이제 화나려고 한다.) 역시 개혁입법정국 동안 다른 아무 얘기도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각 법안이 진보진영의 각 영역에서 오랫동안 싸워왔던 내용인 다음에야. 가끔은 하루하루를 때운다. + 1월쯤 썼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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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0 17:36

호칭 문제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 대한 호칭이 고민이어요. 고등학교다닐때는 선배들을 모두 언니라고 불렀는데요. 대학에 들어가서 남자선배가 처음 생기면서 어떻게 부를까 고민하다가 선배님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오빠라는 말을 듣고 싶어했던 선배들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해=ㅂ= 한학기만에 남자선배들을 모두 오빠라고 불렀거든요. 호칭에 대해 고민하기 귀찮으니까; 80년대 학번 선배들도 모두 오빠라고 불러서; 학교다닐때는 꽤나 귀여움받는 후배노릇을 하면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단지 오빠라고 부른다는 이유만으로.. 음. 그러나 정말 귀여웠을까) 이것은 진보넷에 있을때도 이어져 진보넷에서 만난 저보다 나이많은 분들은 모두 오빠라고 불렀어요. 그때 있던 다른 여성활동가들은 다들 형이라고 했는데 저만 혼자 오빠. =ㅂ= 저보다 나이어린 사람에 대한 호칭은, 2000년 겨울을 경계로 ~씨와 존대말로 바뀌었습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암튼 그때가 경계에요. 그래서 그 경계전에 만난 정우는 아직도 저에게 정우라고 불리고 있지요. 하지만 그 후에 만난 정우친구인 회승씨나 대식씨에게는 존대말인데 정우에게는 반말이어요. ( '') + 정우야, 억울하면 너에게도 정우씨라고 불러줄께. ^^ 근데 암튼;; 오빠라는 호칭도 20대 중반에서 20대 후반으로 넘어가는 2002년쯤 되면서부터 애매해져서; 그때부터는 저보다 나이많은 사람을 새로 만나는 일도 줄어들고(저두 나이를 먹었으니까 ^^ ) 이제는 새로 만나는 나이많은 사람들을 부르는 호칭이 고민이어요. 언니라는 호칭과 달리 오빠라는 호칭은 참 애매해지는군요. (어째서 애매한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없음;) 약간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씨, 라고 부르는데요. (인권활동가들은 나이를 별로 안 밝히니까 편함) 사실은 제가 진보넷에 들어왔던 초창기부터 고민이 되었던 사람은 인권운동사랑방의 모님입니다. ^ㅁ^ 학교 선배들에게는 79학번선배까지 오빠라고 불러봤지만, 모님은 아무리 봐도 그보다도 더 나이가 들어보여서; 게다가 당시에는 저에게도 가까스로 사회의식;;이라는 것이 생기던 터라; 다른 단체 활동가에게 오빠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이상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직도 모님에 대한 호칭을 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ㅂ= 부를 일이 있어도 굉장히 어줍게 부르고 있습니다. ;; 다들 형이라고 부르던데.. 저도 형이라고 버릇을 바꿔볼까요? (그러면 사실 많은 문제가 해결되지만) 아아 어려워요. =ㅂ= 그리고 암튼, 나이가 어중간하게 많은 다른 활동가들. ~씨라고 부르는 것을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구요. 어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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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0 17:16

프라이버시

어제 시설조사하러 가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캠코더 촬영을 맡았는데, 시설의 내외부 모습이나 면담하고 있는 모습을 찍었거든요. 자료와 증거확보를 위해 필요하다고 하지만, 프라이버시 침해겠지요. 보도할 생각으로 찍은 것은 아니지만, 사생활을 침해당했다는 생각이 들테니까요. 생활하고 있는 공간을 촬영하는 것은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이기도 하구요. 예전에 진보넷의 어떤 술자리에서, 취재할때 취재원의 프라이버시를 완전하게 보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실 취재원의 프라이버시를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는 취재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프라이버시권이라는 것은 어느정도 상대적인 것이라서, 다른 인권이 그러한 것처럼,,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 법률로 제한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부득이한 조사라든가, 취재라든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명쾌한 기준이 있다기보다는 사실 사안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상대적이다, 라는 생각이 상당히 위험한 것은 알고 있지만, 명쾌한 기준이 생각나지 않네요. 그리고 진정서류를 꾸밀때도 진정하시는 분께 서명을 하시라고 했더니 지장을 찍으시겠다고 하시더군요. 제가 우물우물(ㅠ_ㅠ)하며 지장을 찍는 것보다는 서명하시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했는데 글씨를 잘 못 쓰신답니다. 그 분은 저에게 이런 고민거리를 안겨주신 것을 모르시겠지만; 얼마전에 신문에 보니 청송감호소에 계신 분들이 모두 장기기증서약서를 작성했는데, 서명이 아닌 날인을 해서 그 엄숙함이 더해졌다고; 합니다. 에휴, 참. 고민이어요,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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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5 16:35

차가운 파도를 봤습니다.

* 이 글은 노란리본님의 [못다한 이야기] 에 관련된 글입니다.

2월 첫째주에 인권교육네트워크 엠티를 갔습니다. (엠티 준비팀이기도 했는데 어디로 갔던 것이었는지 잘 기억이 안나요;; 엠티 준비팀은 준비부족으로 엠티 내내 지탄을 받았습니다. ^^ 그래서 내려오는 길에 해체했다, 고도 말했지요.;;) 가서 차가운 파도를 봤습니다. 사진은 토리가 찍어주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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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5 15:34

또 중얼중얼

* 이 글은 레이님의 [짜증나는 구글 이미지.] 에 관련된 글입니다.

예전에 엠티가다가 차 안에서 담배얘기와 패스트푸드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 즈음 나왔던 담배산업과 패스트푸드를 비판하는 내용의 책을 읽은 언니가 얘기를 해 줬는데, 비판의 요지는 두 산업이 다 지역농업을 단조롭게 만들어서 생태계를 해치고, 농민들을 수탈구조에 편입하고, 만드는 과정에 3세계와 어린이 노동력을 착취하고, 판매에 있어서도 '문화'를 이용한 공세로 3세계를 1세계에 종속시킨다는 (옛날이라서 기억이 조금 가물거린다. 그새 주워들은 얘기들이 덧붙여졌을 수도 있고. 그래도 대강 이정도 얘기였던 듯) 암튼 대략 이정도 얘기였던 듯. 역시 담배얘기때는 맞아요맞아요 하면서 얘기를 했지만 패스트푸드 얘기때는 별로 그럴 수가 없었다. 파파이스 치킨을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이다. =ㅂ= (흑흑 불쌍한 나.. 그런 걸 좋아하지 말던지, 그런 얘기를 듣지 말고 살던지.) 그후로 오래 시간이 지나서 지금은 예전만큼 파파이스 치킨이 맛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쩐지 두어달에 한번은 패스트푸드가 먹고 싶어진다. 두어달에 한번이 아닐지도. 걸어다니는 길이면 길마다 저렇게 금방 만든 햄버거사진을 커다랗게 붙여두었는데, 역시 배고플때면 쳐다보게 된다. (어쩐지 더 불쌍한 듯;;) + 사실 이 얘기, 옛날에 갈월동이야기에서도 한적이 있다. 제목이 기억이 안나서 검색은 못하겠지만;; 암튼 그 글을 읽고 김진균선생님이 파파이스 치킨을 사주신다고 학교로 부르신적이 있었다. 지희언니랑 학교에 같이 가서 연구실 구경도 하고, 학교에서 팥빙수먹고, 선생님이랑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파파이스 치킨집을 못 찾아서 찜닭을 먹고, 지리산에 혼자 가는 이상한 녀석이란 얘기도 듣고, 그러면서 내내 내일은 이 모임의 후기를 갈월동 이야기에 올려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압력도 받고, ,그랬다. 나는 할아버지들이랑 잘 못 지낸다. 대학다닐때 교수님들과도 잘 못 지냈고(아니 그 이전에 우리 과에는 할아버지 교수님은 없었지만) 통일운동하면서 이상한 할아버지들도 너무나 많이 만났고(서명부스차리면 꼭 달려와서 마구마구 시비하는 무서운 할아버지들. 시비는 걸지만 내 얘기는 절대 듣지 않는다.) 김진균선생님은 내가 최초로 잘 지낸 할아버지다. 선생님 몇번 뵈면서 나두 이제 나이도 먹었으니 할아버지들과도 잘 지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했다. 하지만 왠걸, 나이들면서 더 고집불통이 되어 정말 할아버지들과는 절대 친하게 지낼 수가 없었다. 김진균선생님은 참 특별한 할아버지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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