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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9/09

[울산] 한 달 넘긴 예선노동자 파업

9월 3일 울산시청 앞. 예선노동자들은 72시간 노숙농성을 마치고 ‘예선노동자 파업 승리를 위한 울산노동자 총력 결의대회’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제공 울산노동뉴스

부산과 울산항 예선 노동자들의 파업이 한 달을 넘어섰다. 예인선 또는 끌배라고 불리는 예선(tugboat)은 대형 화물선 등을 끌거나 밀면서 항구에 정박시키거나 출항시키는 선박이다. 예선노동자들은 보통 새벽 4~5시면 일어나야 한다. 오전 5시30분에 일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평일 근무는 오후 5시30분까지. 한 달에 일곱 번 있는 당직에는 꼬박 36시간을 예선 안에서 작업해야 한다. 비좁은 예선 휴게실에서 작업 지시가 떨어지는 VHF(초단파 송·수신기)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기 때문에 당직 때 잠을 자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밥 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밥 먹는 시간이 채 5분이 걸리지 않는다. 200톤이 안되는 예선 두 대가 수만 톤급 선박을 앞뒤에서 밀고 끌면서 평행을 맞춰야 하고 조그만 실수도 용납이 안되는 예민한 작업이기 때문에 연속 밤샘작업에 따르는 정신적, 육체적 피로는 가중된다. 따로 명절이나 휴가가 없다. 한 달에 다섯 명이 돌아가면서 5일을 나눠 쉬는 게 전부다. 한 달 350시간 이상을 일하고도 손에 쥐는 임금은 쥐꼬리만하다. 상여금은 기본급에 승무수당을 합친 통상임금의 600%다. 이 상여금도 1998년 IMF 때 300%로 삭감됐다가 최근에야 회복됐다.
예선노동자들은 그동안 선원법도 근로기준법도 적용받지 못한 채 장시간 저임금노동에 내몰려왔다. 그동안 예선사들은 선원법을 근거로 예선이 항내만을 운항하는 선박이므로 선원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며 승선기록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근로기준법을 적용한 것도 아니었다. 2007년 여수·광양항 예선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파업에 들어가자 예선사들은 입장을 바꿔 예선노동자에 대해 선원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왔다. 법제처는 지난 1월 예인선은 항내만을 항행하는 선박이므로 선원법의 적용대상이 아니라고 법령해석을 내렸다. 국토해양부의 관리 아래 지난 6월 치러진 전국 항만 투표에서도 예선노동자들에 대해 근로기준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왔다. 그러나 부산, 울산, 마산항 예선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고 파업에 들어간 뒤 국토해양부는 지난 8월26일 사실상 예선은 선원법 적용 대상이라는 기준을 정해 예선사들의 손을 들어줬다.
노동부도 대법원 판례와 노동위원회 판정을 무시하고 선장은 노동자가 아니라는 질의회신을 해 예선사 편을 들었다. 예선사들이 선장들에게 ‘법(국가)에 도전하지 말고 노조 탈퇴하고 복귀하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서 노조 탈퇴를 강요하고, “민주노총만 탈퇴하면 모든 걸 다 들어주겠다”며 부당노동행위를 일삼아도 노동부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운수노조 공항항만운송본부 항만예선지부 울산지회 노동자 119명은 지난 8월7일 파업에 들어간 뒤 예선사들의 직장폐쇄에 맞서 울산항 매암부두 파업현장을 사수하며 울산노동지청 규탄투쟁, 예선사 순회투쟁, 울산해양항만청과 울산항만공사, 울산시에 대한 중재 촉구투쟁, 9월1~3일 울산시청 앞 72시간 노숙농성 등을 벌여왔다. 운수노조는 예선 파업을 전국화·국제화하겠다며 투쟁 수위를 높여갈 태세다. 노동조합을 인정하라는 소박한 요구를 내걸고 한 달 넘게 파업을 벌이고 있는 예선노동자들은 예선사와 노동부, 국토해양부, 국가정보원이 한통속이 돼 헌법에 보장된 노동자의 단결권을 깡그리 부정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계급적 본질’을 하나씩 온몸으로 자각하고 있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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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충북 중소병원 노동자들의 투쟁선포, 우리 싸움은 정당하다

8월 14일. 현대굿모닝병원 노동자들이 임금체불과0 폐원에 항의하는 집회를 진행하고 있다.

공공노조 의료연대본부는 지역 중소병원 노동자 조직화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중소 병원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은 물론이고 최소한의 법적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다. 이 속에서 보건의료노동자들의 미조직 조직화 사업은 시작부터  치열한 투쟁을 예고한다. 현대굿모닝 병원 역시 마찬가지다.

충북 음성군에 위치한 현대굿모닝병원 노동자들이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절박해서 올해 7월 31일에 전체 직원 82명중 관리직 11명을 제외한 71명이 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길게는 7개월에서 짧게는 3개월의 임금체불이 이 노동자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습니다. 300병상 규모의 이 병원은 병상가동률도 80%이상으로 운영이 잘 되고 있던 병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임금체불은 반복적으로 계속되었고, 정근희(실질 경영주)를 포함한 경영진은 장기간 임금체불에 대해 납득할 만한 이유를 단 한번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2009년 6월 노동부 특별근로감독의 결과 정근희는 4개사업장(음성현대굿모닝병원, 큰바위얼굴조각공원, 음성정신병원, 음성현대정신병원) 315명의 노동자에게 임금 24억원을 체불했습니다. 현재는 38억원의 임금체불이 있는 상황입니다. 
임금체불로 힘들어하는 노동자들의 고통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홀로 지병이 있는 아들의 치료비를 대면서 11살 된 손녀를 키우는 장○○할머니는 임금체불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정근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말하고 싶지 않은 속사정까지 얘기하면서 임금을 달라고 말했습니다. 돌아오는 것은 “노동부에 고소했으니, 노동부에 가서 받으면 돼지 왜, 나한테 달라고 하냐”며 일언지하의 거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정근희는 음성현대정신병원과 음성정신병원으로부터 매달 1천4백여만원 상당의 임금을 한번의 체불 없이 수령해 갔고, 그의 처 양경순도 음성현대굿모닝병원 이사장으로서 매달 3백여만원의 급여를 꼬박꼬박 수령해 갔습니다. 1백건이 넘는 각종 법위반을 하면서 직원들의 아픔을 아랑곳하지 않는 정근희는 사람의 인두껍을 썼다고는 도저히 얘기할 수 없는 나쁜 사람입니다.   
힘들게 일한 댓가는 지급을 요구하지 않아도 당연히 받을 수 있는 노동자들의 권리입니다. 음성현대굿모닝병원 노동자들은 체불임금 지급과 정근희를 구속하라는 요구를 걸고 2달째 힘찬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정근희는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지명수배가 떨어진 상태입니다. 우리노동자들의 요구는 너무도 정당하고 분명합니다. 정근희가 직접 얘기한 임금체불에 대한 법적책임을 달게 지겠다는 그의 약속을 지키길 바라며 조속한 시일내에 자수할 것을 요구하고, 정근희 일가가 교섭단을 구성하여 노동조합과 교섭을 진행하면서 체불임금 사태를 책임 있게 해결하길 바랍니다. 음성현대굿모닝병원이 현재 폐원이 되었지만 조속한 시일내에 제대로 된 인수자가 나타나 병원의 정상운영과 노동자들의 고용승계, 노동조합 인정이 되는 그날까지 힘차게 투쟁을 전개할 것입니다.  
 

최은예┃공공노조 의료연대 충북지역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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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치활동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서울준비모임은 지역정치활동에 대한 5차례의 토론을 통해 2개의 토론안을 정리하였다. 서울준비모임은 이 토론안으로 지역모임들과의 순회토론을 통해 의견을 더 모아나가고 정리할 예정이다. 사노준 안밖의 활발한 토론을 위해 두 개의 토론안의 문제의식을 정리해서 싣는다. 적극적인 토론을 부탁드린다.




우리에게 지역정치 활동은 무엇인가

지역은 생산과 재생산이 복합적으로 존재하고, 생활의 습성과 인식을 형성하는 곳이다. 어떤 이에게는 생산현장이지만, 동시에 어떤 이에게는 소비의 공간이고, 재생산의 현장이기도 하다. 지역은 공간적 의미를 넘는 삶의 환경이며 토대다. 생산/재생산, 소비의 유형을 규정하고 삶의 양태와 질을 확정하기까지도 하는 지역은 직접적인 정치투쟁의 장이다. 
우리가 상정하는 지역에서의 정치활동은 삶의 양태와 질을 반자본/사회주의로 전화하려는 것이다. 삶의 양태와 질을 반자본/사회주의적 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와 노력에 대한 장애와 탄압을 제거하는 것이 우리가 상정하는 지역운동이다. 이를 통해 능동적이고 민주적인 주체가 형성될 것이다.
반자본/사회주의적 지역 활동은 인민의 보편적 욕구를 기반 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넘는 욕구를 형성하는 것이다. 현재의 보편적 욕구는 지극히 정당하나, 이 요구는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형성된 것이며, 이것이 보편적 욕구의 확정을 제한하고 있다. 예컨대 안정된 삶의 욕구 - 안정된 직장, 공공교육, 공공의료, 공공주택, 공공교통 등에 대한 욕구는 지극히 정당하나, 이 욕구 속에는 있는 경쟁에서의 승리, 소유 또는 투기적 욕구가 같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보편적 욕구에 부흥하면서도 자본주의 질서가 이식한 욕구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다. 
지역의 삶이 생산과 재생산의 총체적 삶으로 구성되고 인식되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다. 직장 따로, 일상 따로 인 삶의 방식과 인식은 자본이 의도하는 구도이다. 노동과 일상의 종합적인 인식이 지역에서 노동현장을 분리시키지 않을 것이다. 
지역민의 건강한 노동이, 안락한 노동이 지역 전체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임은 너무도 자명한 것이다. 지역민이 노동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야만 지역의 현안에 관심을 가질 수 있고, 개입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생산현장의 문제는 지역에서 고립된 섬이고, 지역의 문제는 재생산 영역으로 정식화되고, 지역의 일은 주부나 자영업자의 문제로 협소화된다.
생산영역과 재생산의 영역이 통일적으로 합치되지 않으면 지역활동은 제한적인 자족이거나, 스스로를 기망할 가능성이 높다. 권력은 생산과 재생산영역을 통일적으로 관리하고, 계획하고 있다.
우리의 우군은 어떻게 형성될 것인가? 우리의 우군은 현재 자본주의가 진저리처지거나, 아니면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이 아니더라도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존재여야 한다. 자본주의 발전으로 인한 배제와 양극화가 존재한다하여 앞의 의식과 희망이 저절로 형성될 것인가? 단언하건데 아니다. 계급의 가능성은 가능성일 뿐이다.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와 노동력의 매매, 상품시장을 극복하는 현재의 노력과 조직화가 동반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모든 지역에서 동일한 양식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해당 지역에서의 가장 절실한 보편적 욕구가 무엇인가를 우선 민감하게 파악해야 하고, 실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도 살펴야 한다.
목표는 지역에서 반자본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는 생산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의 과제이다)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은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그 양태가 대부분의 생활 방식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노동이건, 소비문제이건, 환경/교육/의료/이동의 문제이건 간에 연결된 고리에서 상호작용하고 인식과 행위를 상승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과정과 운영의 민주주의다. 지역의 어떠한 시도를 하건 운영과 활동에 있어서 성원의 자기표현을 확대하는 기제를 확보해야 한다. ‘최대한의 직접민주주의, 최소한의 간접민주주의’는 매우 중요하다.
지역활동을 한다는 것은 현장운동에 대한 반작용이 아니라, 변혁을 향한 삶에 대한 총체적 접근임을 잊지 말자.

김수
 



지역정치활동에 대한 테제

지역정치활동은 무엇보다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조직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역정치활동은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하에 민중들과 역사적블럭을 형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기존의 지배적인 상식을 뒤짚어 우리의 방식으로 재전유하며 대중의 언어로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에 전면적으로 도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이 표를 던지는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정치의 주체로 자신의 일상 삶의 모든 문제에 발생하는 의제들에 대해 발언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지역정치활동은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근본적으로 문제제기하고 공격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그것은 비록 최초의 출발점은 조야한 조합주의적 경제적 이해에서 근거하나 점진적 혹은 극적 계기가 상호 복합적으로 작동하면서 자본주의 생산관계 특히 생산수단에 대한 배타적 독점적 사적소유에 대한 문제제기로 진전시킬 수 있는 끈질긴 정치활동을 요구한다.
지역정치활동은 생산영역과 함께 재생산의 영역에 대해 개입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진정한 힘은 재생산의 영역에 있다. 임금은 노동자가 생계를 유지하는 재생산 비용이나 그 대부분은 다시 자본의 이윤추구의 대상이 된다. 때문에 의식주 는 물론 교육, 의료, 성, 환경, 물, 에너지 등 일상적인 모든 것이 곧 자본과 노동이 충돌하는 계급투쟁의 영역이다. 생산영역에서의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 것이야 말로 위력적인 무기이다. 그러나 동시에 재생산 영역에서의 전투가 요구된다. 더욱이 혁명은 다수자 혁명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보편적 권리를 둘러싼 공동투쟁은 그 자체로 계급동맹이다. 때문에 노동자, 학생, 청년, 실업자, 하층 농민 모두가 공통으로 절감하고 요구하는 것 바로 보편적인 권리를 중심으로 단결해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지역정치활동은 기존의 게토화된 제도영역을 넘어서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당은 착취의 결과에 맞서는 조직인 노동조합 등 자본주의안에서 게토화된 영역으로부터 선진적인 활동가들을 탈출시켜야 하며, 동시에 그들이 다시 게토안으로 들어가 게토를 허무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훈련하고 안내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제도화되고 안락한 국가안의 국가가 된 조합주의적이며 관료주의적 일상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며, 작업장 안에서 계급적대를 조직하는 것과 동시에 노동자대중의 일상의 공간 즉 삶의 전반에서 부딪치는 계급적대의 지점들에서 투쟁을 조직하는 운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지역정치활동은 의제에서 형식에서 모두 우리의 프레임을 만들어야 한다. 자본주의 대중문화에 찌든 계급대중을 바꾸기 위해서는 생존권투쟁 등 경제적 물질적 이해관계에 근거하는 투쟁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생존권적인 투쟁 그 자체가 승리하기 위해서도 이제는 이데올로기투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우리는 자본의 언어, 자본의 논리가 아닌 우리의 언어와 논리를 제출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며, 맞대응의 논리를 넘어서 반자본주의 대안의 전망을 내용적으로 담을 수 있는 의제와 프레임들을 제시해야 한다.
지역정치활동에 있어 실제적인 생활단위에 주목하고 진지와 참호를 구축해야 한다. 현재의 지방자치는 소수의 기득권세력(토호, 지방언론 등)이 이른바 지역여론을 조작하고 그들끼리 이익을 나누어 갖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대중으로 하여금 정치에 대해 냉소적으로 만든다. 이제 지역을 노동자 민중의 자치의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계급대중의 일상속에서 가장 절실히 부딪치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부르주아 지방자치를 넘어서는 다차원적인 실천을 조직해야 한다. 이를 위해 진지와 참호의 구축에 매진해야 한다. 지방의회나 자치단체장에 이른바 좌파가 당선되었다 하더라도, 그 한계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만일 그것이 전술적 의미를 가지려면 바로 노동자 민중의 개입과 투쟁이 동력이 되어야 한다. 또한 결정적인 국면에서의 최종적인 승리를 위해 중간지대를 재구조화해야 한다. 즉 기존의 것을 재구성하는 것과 전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실험정신이 동시에 요구된다. 특히 계급대중을 향해 직접적인 선전과 선동 그리고 접촉면을 확대하기 위한 연단(매체)의 확보에 착수해야 한다.    

김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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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도전하기도 힘든 로또 보금자리주택

세곡보금자리 조감도

이명박 정부는 8월 27일 ‘서민주택정책’으로 2012년까지 수도권 그린벨트 지역을 해제 해 32만호의 보금자리주택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최근의 전세값 폭등과 아파트가격 상승에 대한 대책으로 내놓은 ‘친서민’ 정책이라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에 대해 “서민들에게 값싼 주택을 공급하는 정책이자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경기부양대책이고 일자리 창출 대책이기도 해 이른바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맞춤형 정책”이라고 설명했다. 과연 그러한가?
첫째, 보금자리주택은 절대 서민용이 아니다. 정부는 세곡동과 우면동의 경우 전용면적 85㎡ 기준으로 3.3㎡에 1,150만원이라고 했는데, 3억 정도 된다. 은행대출을 감안하더라도 상식적으로 이 돈을 마련할 수 있는 무주택자(2억원 이상의 보증금 세입자)는 전체의 1%도 안된다. 정말 주택문제로 고통받고 있는 서민들을 고려했다면 분양이 아니라 임대주택을 공급하는 게 맞다.
둘째, 보금자리주택은 주택투기로 변질 될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투기과열을 우려해 전매제한 기한을 7~10년으로 늘린다고 한다. 하지만 낮은 분양가에 대한 시세차익 때문에 청약은 과열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아무런 제한 없이 소수의 당첨된 사람들에게만 이익을 가져다줄 뿐이다.
셋째, 보금자리주택으로 지정한 지역의 비닐하우스 등에 사는 빈곤주거층들의 주거권이 심각하게 위협받는다. 언론 발표에 따르면 개발예정지에서 비닐하우스나 지하방 등에 살고 있는 사람은 7,278가구 1만 8,314명으로 전체 가구의 23%에 이른다. 재개발과정에서 아무런 대책 없이 밀려난 이들의 보금자리 파괴로 제2의 용산참사마저 우려된다.
넷째, 심각한 환경파괴가 우려된다. 정부는 “그린벨트로서의 기능이 상실한 보전가치가 낮은 지역에 짓는다”고 한다. 이는 이명박 정부의 ‘저탄소녹색성장’의 철학이 얼마나 저열한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훼손되었으니 개발해도 된다는 것인가. 훼손된 녹지는 개발이 아니라 복원되고 관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다섯째, 보금자리주택과 함께 지어질 12만 6,000가구의 중대형 아파트가 문제다. 정부는 보금자리주택 건설 계획 발표 후 이틀 만에 거기다가 중대형 아파트도 함께 짓겠다고 밝혔다. 이정도 규모면 서민용아파트 건설과 맞먹는 규모다. 이는 고분양가를 통해 민간건설사의 수익을 늘려주고, 투기세력에게 투자처를 제공함으로써 집값 폭등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동할 것이 분명하다.
간단히 살펴봐도 보금자리주택은 대부분의 집 없는 노동자민중에게 안정된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한나라당의 이한구 의원조차 “돈을 그동안 너무 풀어서 실물경제는 안좋은데도 부동산 시장에는 투기 움직임이 굉장히 왕성한 상황에서, 여기에 잘못 자극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보금자리주택 정책을 비판했다. 이 의원은 “아예 개인 간 전매를 금지하고, 되팔아야 할 경우 토지공사나 주택공사에 도로 되팔도록 하든지”해서 투기 억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세값이 상승하고 주택가격이 상승하는 것은 주택공급이 부족해서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정부가 그동안 추진해온 주택공급 정책들이 임대보다는 개인분양 위주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 정부 들어와서 무분별하게 부동산 관련 규제를 풀어준 결과가 전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인 경기가 않좋은 상황에서도 부동산 가격이 뛰는 기이한 상황을 낳고 있는 것이다.
보금자리주택은 처음부터 전면 재검토되어야 한다. 조금 돈 있는 소수의 무주택자들의 로또가 되어서는 안된다. 정말 돈이 없어 주택문제로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민중이 우선적으로 혜택을 볼 수 있는 정책은 불가능한 것인가. 충분히 가능하다. 무엇보다 정부가 막대한 돈을 들여서 시행하는 개발정책들부터 투기를 억제하고, 주택의 공공적 소유를 높여가는 방향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한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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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문제와 사회주의

주택사회화와 민주참여적 계획경제가 답이다



투기와 수탈의 공간이 된 주택
주택은 ‘주거공간’이다. 즉 주택(집)이 없으면 사람은 죽거나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 주택은 안정된 주거공간이 아니다. 자본과 소수 땅(집)부자에게 주택은 황금알을 낳는 이윤창출처이자 앉아서 떼돈버는 투기수단이다.
이에 반해 대다수 노동자민중에게 주택은 뼈빠지게 일해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자가 소유 노동자민중들은 뼈빠지게 일해 주택융자를 갚는데 허덕인다. 주택값이 폭락하거나 실업(반실업) 상태에 처하면 융자금을 못 갚아 파산한다. 이도 안되는 사람들은 치솟는 전월세값에 신음한다. 우리사회에서 지하집·비닐집 등에 사는 빈곤층은 68만 가구나 되고, 재개발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거대건설자본의 이윤욕에 노동자민중은 졸지에 철거민신세로 내몰린다. 한국은 주택(을 포함한 부동산)을 매개로 거대한 이윤창출 및 수탈구조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주택문제가 워낙 심각하긴 하지만, 이는 한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사태가 보여주듯이, 자본은 노동자민중의 내집 마련에 대한 열망마저 자신의 수탈구조 아래 깊숙이 편입시켰다. 주택거품을 형성시키며, 주택마저 수탈의 매개로 삼는 것, 이것이 21세기 자본주의의 현주소이다. 땅과 주택에 대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금지하지 않는 한, 불로소득을 0으로 만들지 않는 한, 한국에서만도 800조원에 이르며 투기처를 찾아 떠도는 막대한 유동자금을 제어할 힘은 없으며, 자본과 가진자들의 수탈을 멈출 수 없다.

주택문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만약 공기와 물을 누군가 사적으로 소유하고 독점하여, 만인의 숨쉴 자유와 물 마실 자유가 없어진다면? 사람들은 부당하다 외칠 것이다. 그런데 땅과 주거공간(집)이 ‘사적 소유’라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도 당연시한다. 그러나 공기나 물과 마찬가지로, 집과 땅도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가 아니라 만인의 소유(사회적 소유)로 만들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에 대한 이용권을 줄 수 있다면, 집없는 설움도 없을 것이요, 집을 마련하기 위해 뼈빠지게 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소수 투기꾼들의 불로소득도 가진자들의 수탈도 없어질 것이다.
그것은 가능한가? 가능하다. 역사적으로 이미 시도되었다.

사회주의국가가 추진한 주택사회화의 의미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에서는 토지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소유를 사회화시켰다. 그리고 이에 기반해 주택사회화를 실시하였다. 즉 국가(지역소비에트, 국영기업 등)가 국민에게 집을 제공하고, 주택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였다. 국가 주택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관리비에도 못미치는 저렴한 임대료(월수입의 5% 정도)를 내고 주거권을 얻었다.
그렇다고 소련의 주택 소유와 관리권이 모두 국가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소련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private ownership)와 구별되는 개인적 소유권(persnal ownership) 개념을 통해, 주거와 사적 농업생산에 할당된 소규모 토지에 대한 개인소유를 허용했다. 개인소유는 자신의 사용만을 위한 것에 한정시켰고, 수익을 불러올 수 있는 처분권을 주지 않았다. 주거의 임대는 법적으로 보장받았지만, 그 수준은 강력히 제한되었다. 즉 구소련은 사회적 소유를 기본바탕으로 해 개인적 소유권을 결합시켜, 토지와 주택을 매개로 한 착취·수탈의 구조를 없앤 것이다. 다른 몰락한 구사회주의국가와 쿠바 역시 주택문제에서 소련과 유사한 방식의 사회화정책을 펼쳤다.

사회주의 국가의 주택사회화 정책의 한계
물론 소련의 주택 사회화정책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직장에 다녔을 때 주택이 제공됨으로써, 주택제공이 노동자의 안정적 거주공간 제공의 의미를 갖기 보다는 국영기업의 노동력 확보의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1930년대 스탈린의 중화학공업 우선투자정책, 2차대전, 1970년대 이후 경제성장 둔화 등으로 국가가 책임지고 국민에게 안정적 주거권을 보장한다는 원칙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주택부족’으로 한 집에 두 가구가 산다든지, 열악한 주거환경 문제가 생겼다. 다른 사회주의국가도 비슷했다. 북한은 계층에 따라 주택이 차별배정되는 문제가 나타났다. 예를 들어 지방기관 간부급 이상의 주택보급율은 100%이나 일반노동자의 경우 한 집에 두 가구가 동거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온전한 주택사회화만이 주택문제 해결의 길
사회주의 국가의 주택문제는 주택사회화 정책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주택사회화를 ‘온전’하게 실현하지 못함으로써 나타난 문제다. 사회주의국가가 관료적·명령적 계획경제가 아닌 민주적·참여적 계획경제로 운영되었다면, 직업(노동)과 상관없이 모든 국민에게 안정적인 주거권을 보장한다는 ‘인권’ 개념으로 주택문제에 접근하였다면, 국방비 증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사회구성원의 기본권이라는 관점을 가졌다면, 국가관료층이라는 새로운 지배계급의 등장을 막아내고 노동자민중이 국가의 실질적 주인이 되었다면, 국가(사회)가 책임지고 전체국민의 주거권을 보장한다는 주택사회화의 원칙은 보다 실질화됐을 것이다.
어느덧 투기와 수탈의 거점이 되어 버린 주택을 모든 사회구성원의 안정적인 주거공간이라는 본래적 의미를 갖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현자본주의가 낳은 주택문제를 해결하는 길이자 사회주의국가의 실패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다.
 

장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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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대란과 집값 폭등에 맞서 싸우자

불과 몇달 전 많은 전문가들은 부동산 거품 붕괴로 인한 부동산폭락과 그로 인한 건설사의 대규모 부도사태 등을 우려했었다. 건설사 회장 출신 이명박 대통령의 건설경기를 살리겠다는 강한 의지덕분인지 부동산 거품은 여전히 꺼지지 않은 듯하다. 이명박 정부는 19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부동산 규제완화를 통해 제한적이나마 존재했던 부동산투기 억제 정책들을 대부분 제거했다.
그 결과 재개발, 뉴타운 사업의 무분별한 동시다발 추진이 이어졌고, 전세값 폭등으로 인한 전세대란을 피할 수 없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아파트 가격도 서울 강남 3구 등 투기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다시 급등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실물경기 회복과는 상관없는 투기로 인한 거품이라는 점이다.
여전히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의 미분양 물량은 잘 줄지 않고 있다. 따라서 78조 9,000억원에 달하는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의 부실화는 여전히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태풍의 눈이 되고 있다. 이러한 위험에도 이명박정부는 부동산 올인 정책으로 건설경기 부양에 온 힘을 쏟고 있을 뿐이다.
주택건설로 장사하는 것을 막아야
이러한 사태의 책임은 무엇보다 정부의 주택공급 정책에 문제가 있었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선분양제를 통해 건설사가 아파트를 짓기도 전에 선금을 받고 아파트를 팔 수 있게 함으로써 땅만 사놓고 짓지도 않은 아파트를 분양을 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주택건설에 민간건설업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확대했고, 재벌들은 앞다투어 아파트 건설에 뛰어들게 된다. 그동안 건설업체들은 분양원가와 상관없이 가격을 부풀려 폭리를 취해왔다. 또한 수익이 더 많이 나는 중대형 아파트 공급에 건설사들이 열을 올려왔다. 해마다 공급된 주택 중 중대형 비중은 해마다 늘어 2007년에는 37%까지 증가하였다.
정부가 주택건설을 민간건설 업체에 맡긴 결과 정작 집 없는 국민들이 자기 집을 갖는 것은 더욱 힘들어졌다. 주택가격의 거품상승으로 인해 가계대출부담과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지는 결과만 초래되고 있다. 이는 모두 정부의 주택건설 정책이 건설사와 고소득층, 고가주택 소유자, 다주택 소유자들에게 유리한 정책들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주택이 없는 사람에게 주택이 공급돼야
주택이 더 이상 투기의 대상이 될 수 없도록 하는 조처들이 필요하다. 첫째로 1가구 1주택 원칙을 바로 세워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공공택지에서 지어지는 모든 주택은 무주택자에게만 공급되어야 하며, 개인 간 거래를 금지해서 국가에 다시 되팔도록 해야 한다. 또한 1가구 다주택자에 대해서는 보유세를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1가구 다주택자의 경우 주택담보 대출 요건을 강화하고 비율을 제한하며, 금리를 차등 적용해야 한다.
둘째로 재건축, 재개발 등은 국가가 직접 시행하여, 개발로 인한 혜택을 공공의 이익으로 환원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현재 뉴타운 등을 비롯한 각종 재개발과 재건축은 원주민들에게 혜택이 거의 돌아가지 않는 방식이다. 막대한 개발 수익도 건설사나 투기세력만이 챙기고 있다. 무분별한 재건축, 재개발을 금지해서 철저하게 원주민이 재입주할 수 있도록 특히 세입자들이 공공임대주택단지로 입주할 수 있는 재건축 재개발만이 허용되어야 한다.
셋째로, 건설사들이 무분별하게 주택건설사업에 나설 수 없도록 국가가 강력한 통제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해 현재 미분양 비율이나, PF대출 규모 등이 큰 건설사에 대해서는 주택건설 사업자 등록을 취소해야 한다. 현재 가장 문제로 지적받고 있는 선분양제도도 폐지해야 한다. 후분양제도로 주택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분양가 상한제를 더욱 철저하게 적용해야 한다.

사실 위와 같은 조처들도 제한적이고 한계적인지만, 이정도도 이명박정부가 할리 만무하다. 무엇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노동자민중의 스스로가 주택문제에 대한 관심을 갖고 전사회적인 운동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주택문제에 불만 있는 모든 사람들의 행동을 모아 보자. 어떤 요구라도 가능하다. “노숙자에게 지붕아래 살 수 있는 집을 달라” “전/월세 자금 대출 이자를 탕감하라” “세입자와 원주민이 입주할 수 없는 재개발/재건축을 중단하라” “종부세와 보유세를 강화하라” “1가구 1주택 이상 주택소유를 금지하라” “무주택자에게 무상으로 집을 공급하라”
 

안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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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는 쌍용차 투쟁

6쌍용자동차 정특위 사무실. 와신상담이란 말이 떠오른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77일간의 옥쇄파업이 끝난 지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각계각층에서 토론회와 입장으로 쌍용자동차 투쟁에 대한 여러 가지 평가가 나오고 있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지부에서도 투쟁백서를 만들고 있다. 어느 누구도 77일간의 옥쇄파업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부르주아 언론과 광고에서도 쌍용자동차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과대 선동하는 것으로 77일간의 옥쇄파업의 위력이 장난 아니었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77일간의 옥쇄파업이 한 달 만에 헤라클레스의 이야기 같은 신화와 전설의 영역이 될 순 없다. 바라든 바라지 않든, 투쟁한 자와 투항한 자를 가리지 않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현실의 구체적인 고통에 압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에 그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는 있지만, 신음조차 낼 수 없는 고통이 언제 자신의 것이 될 지 알 수 없는 것이 노동자의 운명이다.

분노와 고통
가대위에 열심히 활동했던 이씨의 이야기다.
지금 겉으로 보기엔 일상으로 돌아가서 다들 잘 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남편이 돌아와 있지만 돌아와 있음으로 인해 더 힘든 거죠. 지금 이 복직투쟁이 1년이 걸릴지 2년이 걸릴지 알 수도 없는 거고. 한다 한들 복직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는 상태인데, 하지 마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라 할 수도 없고. 이런 상황이니까 오히려 부부관계가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아요. 파업 끝나고 나서 어떤 사람은 차라리 남편이 구속되서 들어갔으면 좋겠다, 집에 같이 있는 게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도 하고. 그러니까 다들 평범하게 보이지만 모든 사람이 스트레스를 엄청 받고 있는 거 같아요. 지금은 파업 때보다 더 힘들어요. 파업 때는 그래도 희망이라도 있었는데,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게 있었잖아요. 아, 여기 남편 일자리를,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하루 더 버티면 이 일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는데, 지금은 희망이 정말 안 보여요. 지금은 뭘 어떻게 무슨 끈을 붙잡고 살아야 하나? 뭘 붙잡고 하루하루를 버텨가야 되나? 하루하루 버틴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아, 오늘도 하루가 저무는구나. 다음날 아침이 되면, 아, 또 오늘은 하루를 어떻게 뭘하며 버텨야 되나? 이렇게 막막하고 패배감도 들고, 무기력증에... 평택을 떠나고 싶어요. 이사하고 싶어요. 뭔가 새롭게 다시 딱 시작하는 발판이나 계기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끝없는 공작에 맞서
9월 8일, 사측이 조직하는 민주노총 탈퇴 찬반 투표를 위한 조합원 총회에 대한 쌍용차 지부의 대응은 조합원 투표의 법적 무효를 주장하는 한편, 공장 안에 있는 조합원들이 투표를 거부하거나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도록 개별적으로 조직하는 것이었다. 이에 사측은 9월 4일 파업 참가자들이 개별 작성해 지부가 단체로 노동부에 접수시킨 부당해고 구제신청서를 철회하도록 개별적으로 조직했다. 사측은 부당해고 구제신청서를 철회시키기 위해 파업참가자들에게 전화로, “지금 구제신청을 빼야 무급전환을 해 주겠다, 9월 8일 총회 재적 인원에 넣어 주겠다”고 했다. 옥쇄파업을 풀고서 아무런 약속도 지키지 않은 회사측의 새로운 공갈이었다. 이 공갈로 파업참가자들 중 20% 정도가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철회했다. 사측이 이처럼 파업 참가자들에게 개별적으로 연락하기 때문에, 쌍차 지부의 대응은 그보다 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77일간의 옥쇄파업 이후로 회사측과 쌍차 지부의 관계는 지금까지 이런 식이었다. 대타협은 없고 회사의 일방적 기만만 있었다. 8일 사측이 조직한 조합원 총회는 끝내 민주노총 탈퇴 건을 처리했다.
한편 경찰은 아직까지 파업참가자들을 소환조사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한두마디의 실수로 구속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어, 쌍차 지부와 파업참가자들의 어려움을 더하고 있다.

조합원들은 평택이 그리 넓지 않다는 말을 강조한다. 회사에 과잉충성했던 악랄한 관리자들에 대한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새로운 거점
민주노총 경기본부 평택안성 지구협의회 사무실에 임시로 쌍용자동차 지부가 들어가 있다. 노조는 물론이고 공장 출입까지 불가능해진 쌍용차 파업 참가자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지구협과 같은 건물 1층에 정특위(정리해고자복귀 특별위원회) 사무실도 마련되었다. 조합원들은 이 두 곳에 삼삼오오 모여 77일간의 옥쇄파업 이야기도 하고, 회사 욕과 함께 앞으로의 투쟁방향에 대한 의견과 지금 공장이 돌아가는 상황, 동지들의 근황, 당장의 생계를 위해 나가는 노가다 정보 등을 공유하고 있다.

한 조합원은, “하루에 50여명 정도가 할 일 없이 이곳을 왔다갔다 한다”고 말하고, 다른 조합원은 “여기서, 우리는 이제 시작이다”라고 말한다. 파업 참가자들의 새로운 거점에 대한 상이한 판단은 앞으로의 투쟁 방향에 대한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공장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서도, “당해도 싸다”와 “안에서도 폭발 일보직전이다”는 반응이 공존하고 있다. 한편 일하다 화장실 갈 때 손들고 가고, 경조사에 월차는 물론 야근도 못 빠지는 공장 안의 산자들 사이에서 “조합이 그립다”는 이야기도 이 새로운 거점으로 모이고 있다.

정특위는 8월 3째주에 1차 준비모임을 가지고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9월 2일 정특위 의장이 임명되었고, 9월 말에 정특위를 공식 출범하며 거점과 상근자를 재정비할 계획을 대의원대회에서 인준 받았다. 정특위의 이후 사업은 정리해고자들 생계지원투쟁, 연대사업투쟁, 재정사업투쟁, 구속자지원투쟁 등을 통해 실천 투쟁을 전개할 계획이다.

77일간의 옥쇄파업이 패배로 일단락되었지만, 쌍용차 노동자들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있다. 왔다갔다 한다던 조합원도 “정특위가 빨리 방향을 잡고, 사람들을 모아서 출근투쟁도 하고 산적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민주노조진영은 부르주아 언론이 다시 ‘외부세력’ 운운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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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를 뒤흔든 77일] 쌍용차 투쟁과 변혁운동의 과제 토론회 열려

8월 27일 토론회, 쌍용자동차 투쟁과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과제. 투쟁이 뜨거웠던 만큼 토론회 자리도 꽉 찼다.



자본에 위기전가에 맞서 싸우는 공동투쟁본부(이하 맞선 공투본)는 지난 8월 27일 서강대 다산관에서 ‘한국을 뒤흔든 77일, 쌍용차 노동자투쟁과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과제’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는 160여명이 참석하는 등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맞선 공투본은 이번 토론회를 시작으로 공투본 활동 평가 토론을 비롯해 향후 이어지는 노동자투쟁 전망과 과제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낼 계획이다.

강력한 투쟁만이 투쟁을 확대할 수 있었다
일각에서 점거파업 전술이 오류였다는 평가가 제기된바 있다. 이에 대해 토론회 발제자들은 ‘비정규직-중소사업장은 속수무책, 공공은 양보교섭과 노사담합이 횡횡하는 등 노동자 투쟁이 벌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강력한 사회적 투쟁을 통해 공론화를 해야 했다’는 평가다. 점거파업은 당연했다는 것. 실제 파업은 당시는 물론이고 현장에 복귀한 지금까지도 자본과 MB정권은 어떤 타협도 허용하지 않은 채 자본의 계획을 무조건 관철하는 것에 혈안이 돼있다. 심지어 노조 존립자체를 부정하면서 민주노조운동 씨말리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일부에서는 점거파업 전술의 문제라거나, 정리해고 철회는 비현실적 요구고 사회안전망 확대 요구가 마치 현실적인 요구였던 것처럼 평가한다. 그것이야말로 자본에 대한 헛된 기대와 환상이라는 것을 쌍용차 현실이 웅변해주고 있는 대도 말이다.

반MB전선의 한계, 노동자민중투쟁 위한 연대질서 구축
토론회 발제자들은 ‘반MB 전선의 한계’를 지적했다. 의회정치내의 입지만을 고려했던 야4당 연대, 5월 열사투쟁 한 가운데서 이뤄진 교섭위한 냉각기간 설정, 노무현 애도국면에서 보여 준 대중추수적 반MB 공조 등은 민주노총을 비롯한 진보정당이 주도한 반MB전선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지적이다. 
실제 쌍용차 투쟁에서 반MB 공조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이는 신자유주의 10년을 진두지휘했던 민주당세력과의 반MB투쟁이 실제 노동자민중 투쟁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투쟁을 조직해야 할 시점을 놓치고 전선을 교란시키기만 했다는 것. 하지만 과제 설정은 서로 달랐다. 다함께는 ‘개혁세력이 주도하는 전선에 개입해 사회주의 세력이 대안적 지도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에 강조점을 뒀다면 사노준을 비롯한 다른 발제자들은 ‘노동자민중운동의 독자적 투쟁과 전선구축’을 강조했다.

‘외부세력’이데올로기 공세와 연대파업 실패, 변혁운동세력은?
쌍용차 노동자파업에 ‘최선을 다한 투쟁’이라는 점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쌍용차 노동자들은 치열하게 투쟁한데 비해 이를 엄호하는 투쟁이 너무 미약했다는 평가다. 발제자들은 민주노조운동을 계급적으로 복원하기 위한 현장활동가들의 실천 조직화, 정치적 대안을 갖는 투쟁 조직 등을 과제로 제기했다. 실제로 연대투쟁은 언론과 자본에 의해 ‘외부세력’으로 호명되면서 저들의 분리타격, 고립 공세를 뛰어넘지 못했다. 또한 민주노조운동의 상층지도부의 관료주의, 동력 부재론을 핑계로 현장/지역 차원의 활발한 연대파업 조직화는 이뤄지지 못했다. 국유화 및 노동자통제 문제는 공투본 내 논란을 거듭하면서 좀 더 과감한 주장과 대안적 논의로 발전하지 못했다. 이처럼 발제자들의 발언 속에서 변혁세력들의 실천은 냉정하게 평가됐다.
쌍용차 투쟁 평가는 결코 쉽지 않다. 어쩌면 점거파업 77일 보다 더 오랜 기간동안 심도깊게 논의할 문제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쌍용차 노동자 파업은 추락하고 있었던 민주노조운동의 잠을 깨웠고 많은 활동가들을 부끄럽게 했으며 변혁운동세력에게는 노동계급에 기반한 자본과의 투쟁의 중요성을 다시금 확인시켜줬다. 더불어 ‘해고는 살인’이라는 진실을 온 몸을 바쳐 전체 노동자민중에게 알렸다.  현재 자본이 벌이고 있는 노조탄압이 극에 달하고 있다. 변혁운동의 과제는 바로 끝나지 않은 쌍용차 투쟁을 다시금 엄호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 같다.
윤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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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투쟁, 다시 연대를 조직해야 한다

“쌍용자동차는 더 이상 흔들릴 자격이 없다”
사측의 광고 카피 문구다. 맞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측과 이명박 정권은 최소한 최종 ‘협상안’만이라도 일단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 그러나 회사와 이명박 정권은 지금 가장 앞장서, 가장 치졸하고 악랄하게 쌍용차 노조와 노동자를 마구 뒤흔들고 있다.
점거(옥쇄)투쟁의 피로와 살인진압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노동자에게 그 어떤 위로나 조금의 쉴 틈은 주지 못할망정 오히려 마지막 숨통마저 끊어 놓으려는 압박과 탄압을 거세게 가하고 있다. 최종 ‘협상안’은 그나마 이미 휴지 조각이 되어가고 있다.
 
쌍용차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점거(옥쇄)파업을 하고 있는 중에는 몸은 힘들어도 투쟁에 대한 기대가 있었으며 노동자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투쟁이 한창일 때는 전국이 흔들렸으며, 사측과 이명박 정권을 압박할 수 있었다. 그렇다. 쌍용차 투쟁 때문에 참으로 오랜만에 전국의 노동자대중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투쟁의 위력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동안 노동자투쟁에 실망했던 다수의 민중들에게도 노동자투쟁의 가능성과 기개를 보여주었다. 이것만으로도 쌍용차 투쟁이 남긴 성과는 차고 넘친다.
바로 사측과 이명박 정권이 가장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도 이것이다. 비록 살인진압으로 간신히 투쟁을 돌려세우긴 했지만 자본가계급과 정권, 보수수구언론을 비롯한 지배계급이 겪었을 공포는 겉으로 드러난 것 이상이다. 그 증거가 바로 지금 자행되고 있는 압박과 탄압이다. 저들이 자신감이 있다면, 노동자투쟁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쌍용차 투쟁이 미칠 여파가 크지 않을 걸로 판단한다면, 쌍용차 투쟁이 단지 일회적인 것에서 그칠 거라고 진단한다면 무엇 때문에 그토록 발악을 하겠는가?
민주노조운동 진영, 모든 ‘진보적’ 정치사회단체는 다시 연대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마침 민주노총은 운동진영을 향해 ‘이명박 정권 퇴진 투쟁본부’ 결성을 제안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실천은 바로 쌍용자동차 투쟁에 대한 연대투쟁을 조직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쌍용차 투쟁이 남긴 성과를 무화시키거나 도로 빼앗아가려는 자본과 정권의 의도를 그대로 놔둔 채 ‘대타협’ 정신을 아무리 외쳐도, ‘퇴진 본부’를 결성하겠다고 나서도 실질적인 연대투쟁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실효를 거둘 수 없다. 쌍용차 투쟁/노조/노동자를 방어하지 않고는, 쌍용차 투쟁을 살려내지 않고 어디서, 어떻게 이명박 정권 퇴진 투쟁의 동력을 확보할 수 있겠는가? 연대투쟁전선을 조직해야 할 긴급한 이유는 이미 수 없이 널려 있으며 바로 코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금은 작은 연대라도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지금 당장 힘 있는 연대투쟁을 조직하기에는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투쟁에 나섰던 주체들에게도 정비할 시간과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아예 손 놓고 기다려서는 안 된다. 작은 연대라도 다시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이후 벌어질 매각 등의 문제를 비롯해 새로운 국면이 펼쳐질 때 제대로 대처할 수 있다. 지금은 연대투쟁이 먼저 준비되고 시작되어야 하는 국면이다
 

고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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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논리 넘지 못하면, 성폭력 근절 없다

7월 22일, 민주노총 김○○성폭력사건 피해자 지지모임 기자회견



반성폭력운동 10년, 여전한 조직논리
민주노총 김ㅇㅇ성폭력사건이 발생한지 9개월이 넘었다. 이 사건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민주노총은 성폭력 관련 규약·규정이 만들어진지 10년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핵심간부라는 자가 성폭행을 저지르고 조직은 이를 은폐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이 공개된 후 민주노총 지도부는 사퇴했고 새롭게 당선된 집행부는 ‘성폭력 사건의 올바른 해결과 조직문화 혁신’을 과제로 제출했다.
그러나 9개월이 지난 지금, 이 사건은 올바른 해결은커녕 몇 차례 걸친 피해자측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하겠다던 지도부는 민주노총과 전교조의 규약규정에 얽매어 형식적 처리로만 접근하고 있다.
민주노총 진상규명 특위는 진상조사 보고서를 통해 남성중심적 조직문화 속에서 성폭력에 대한 무감함과 조직보위 논리에 의한 ‘조직적 은폐 조장행위’를 제기한 바 있다. 그리고 특위 보고서는 민주노총의 공식 보고서로 채택됐다. 그러나 특위가 제기한 성폭력 사건의 성격과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에 제기한 문제는 전교조 집행부의 ‘조직의 명예회복’이라는 명분으로 실종될 위기에 처해 있다. 전교조 내에서는 2차 가해자들의 구명운동이 공개적으로 전개됐고 특위의 ‘조직적 은폐 조장행위’라는 판단은 전교조 징계재심위원회에 ‘혐의 없음’으로 뒤집어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또한 2차 가해자들의 징계양정은 ‘정권의 탄압과 조직에 대한 공적을 인정’해 ‘제명’이 ‘경고’로 경감됐다.
이에 분노한 전교조 내 여성활동가들, 피해자 지지모임은 전교조 대의원대회에서 ‘피해자의 상처 치유와 활동복귀, 성평등한 조직문화 건설을 위한 요구안’을 제출하고 대의원들과 7시간에 걸친 장시간 논쟁을 벌였지만 요구안은 부결되고 말았다. 전교조 다수 대의원들은 ‘피해자 상처 치유와 활동복귀’, ‘성평등한 조직혁신’보다는 조직보위와 조직논리에 따른 규약규정과 형식적 처리가 더 우선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왜 그 누구도 피해자의 치유와 복귀, 성평등한 조직혁신을 위한 안을 제출하지 않은 것일까? 역으로 말하면 그들은 조직의 형식적 처리와 조직 지키기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성폭력사건’의 해결, 공론화 없는 과정은 형식적 징계로 남아
성폭력 사건의 올바른 해결은 과연 뭘까? 결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성폭력 사건이 가해자 징계를 중심으로 한 처리’에 의문을 제기한다. 맞다. 성폭력 사건의 올바른 해결의 초점은 ‘징계’가 아니다. 그러나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대다수 조직들은 징계위주의 처리를 요구하게 만드는 조직문화와 논리를 갖고 있다. 그러다보니 완강한 조직보위 논리에 부딪혀 성폭력이 일어나게 되는 가부장적 조직구조와 문화에 대한 공론화와 성평등에 대한 인식의 전환 등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피해자에 대한 2차, 3차에 걸친 연속적인 피해와 상처를 방어하기 급급하며, 조직논리를 앞세워 사실상 제대로 된 반성을 거부하는 조직적 결정에 분노하고 이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에 힘을 소진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번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노총과 전교조는 성폭력사건 이후 대국민사과를 발표하며 피해자에 대한 위로와 복귀, 성평등한 조직문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사건 초기에 나타났던 긴박함과 조직문화 혁신에 대한 목소리와는 달리 정권과 자본의 탄압 속에 긴박한 투쟁을 이유로, 규약과 규정에 의한 절차를 따지느라 성폭력사건의 해결은 지체됐다. 해결의 원칙 또한 피해자 중심주의를 지키지 못한 채 피해자를 외면하는 꼴이 된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에 대한 지지와 연대, 그리고 성평등한 조직문화를 위한 공론화는 가시화되지 않았고 결과로서 형식적 처리, 즉 징계만이 남게 됐다.
그런데 징계마저도 형식적 처리에 그쳐 피해자의 일상/활동 복귀를 위한 조치들은 전혀 취해지지 않았다. 조직 내에서도 이 문제와 관련한 구성원들 간의 토론, 공론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조합원들은 그저 조직의 처리를 지켜보고만 있었을 뿐이고 조직 내 처리에 문제제기하는 조합원들은 ‘조직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무책임한 비판자’들로 취급됐다.
운동사회는 성폭력 사건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주체로 함께 서면서 운동사회에 만연한 (여)성억압적-차별적 조직구조와 문화를 혁신하는 운동에 동참하기 보다는 그저 민주노총과 전교조의 문제로 치부해버렸다. 결국 운동사회는 사건 초기와는 다르게 대부분 침묵하거나 사건 자체를 잊어버렸고 해결의 몫은 고스란히 피해자, 그리고 이를 지지하는 몇 명의 문제로 남았다.
그럼에도 피해자와 지지모임은 민주노총과 전교조 내에서 ‘혁신해야 해야 할 조직운동’을 제기하고 피해자의 상처치유와 일상/활동 복귀를 위해 발언을 중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번번이 ‘조직의 명예’를 중시하는 바로 그 조직보위 논리라는 벽에 부딪혔다. 이번 전교조 대의원대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해자의 요구안을 반대하는 대의원들 또한 피해자 치유와 복귀를 바란다고들 한다. 그러나 조직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성폭력, 조직논리 발생에 대한 진단이 필요
조직논리가 팽배한 운동사회 조직문화는 들여다보면 여성을 부차화하고 비가시화하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조직문화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조직보위 논리이다. 10년 전 운동사회 가부장적 조직문화를 단적으로 드러냈던 일이 바로 민주노총 포스터 였다. 이 포스터는 ‘가족 부양자로서 투쟁하는 남성노동자와 이를 격려하는 의존적 주부로서의 여성’을 보여줬고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여성을 종속적으로 위치 짓는 언어 및 슬로건들, 대중조직에서의 성별 대표성 문제, 남성성을 강조하는 노동조합활동 기풍과 전술, 조직내 여성 분리와 차별관행, 성폭력에 대한 무감함,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 등은 한국사회의 가부정적 인식으로부터 운동사회 역시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조직문화가 변화하지 않고서는 남성 혹은 조직권위에 기반한 성폭력 이슈는 사라질 수 없다.
또한 운동사회 성폭력 사건 해결에 임하는 태도 문제다. 물론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성폭력 문제는 조직이 처해질 수 있는 어려움 때문에 침묵을 강요하거나 왜곡하는 일은 허다하다. 특히 정권과 자본의 탄압이 거세지면 이런 행위는 더욱 정당화된다. 이번 사건 역시 조직보위를 앞세워 피해자를 압박하고 고통을 주는 2차 가해가 일어난바 있다. 여기에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몰성적 태도는 정세를 이유로 성폭력 문제 해결을 부차화시켜 버린다.

다시 일어나 이야기하자.
그리고 지지 연대를 만들자
여성의 권리를 인지하지 못하는 가부장적 조직문화는 필연적으로 조직보위론을 낳는다. 가부장적 조직문화는 여성의 문제를 부차화하고, 성별화된 권리를 인식할 수 없다. 이 속에서 가장 숨쉬기 어려운 자는 운동조직 내 여성들이며, 성폭력이라는 이름으로 조직에서 축출되었던 피해자들이었다. 민주노총 성폭력사건의 올바른 해결이란 이러한 조직문화를 아프게 반성적으로 되돌아보는 것을 통해 시작할 수 있다. 형식적·절차적 조직논리와 조직보위를 넘어 피해자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확산하고, 성평등한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한 공론화를 이제부터라도 시작하자. 아직 늦지 않았다.
유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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