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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state와 대중mass

0. 홉스의 사회 계약론은 교과서에서 배운 로크식 사회 계약론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무척 낯설다. 이기적인 개인에게서 출발하는 논의가 결국에는 군주의 절대 권력을 인정하는 것으로 끝을 맺기 때문이다. 홉스의 전제는 모든 인간은 자기의 존재를 보존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고, 그도 이 권리 만큼은 군주의 권력 앞에 내어 줄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시민들의 적극적인 저항권을 옹호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국민의 이 권리는,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전제에서 도출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갖는 최소한의 생물학적인 전제에 의존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홉스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은 이를 근대 인권 사상의 출발점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똑같은 사상에 근거해 홉스 정치론의 위험성을 공격하는 사람도 역시 많다. 고백하자면 나는 <<리바이어던>>은 일부만 읽었고, <<시민론>>은 손도 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원전에 근거해서 어느 쪽의 손을 들어 줄 주제는 안 된다. 그런데 홉스의 정치 사상이 일견 모순적으로까지 보이는 것은, 그의 사상을 로크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흐름으로 파악하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사회 계약론에 대한 통념과 분리시켜 독립적으로 읽으면, 오히려 현대 정치 질서에 엄존하는 한 경향을 대변하는 치열한 사상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홉스는 중세를 벗어난 유럽에서 처음으로 '국가'를 '대중'의 문제와 연결시켜 생각한 사람이고, 이 문제는 현대 정치에서도 여전히 화두가 되니까. 이에 대한 재밌는 논문들을 몇 편 읽어서 정리를 좀 해 보려고 한다. 



1. 고원과 진태원은, 에티엔 발리바르의 해석을 참조하며 스피노자와 홉스를 비교하고 있는데, 특히 홉스와 스피노자가 대중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다루고 있다. 홉스의 대중 개념에서 재밌는 것은 그가 대중multitudo/crowd과 인민populus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홉스의 대중은 대중mass에 대한 현대의 통념과 비슷하다. 일관성이 없고, 멍청하다. 현대에 인민 또는 민중people은,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자각한 대중을 가리키거나 또는 (결국엔 같은 말일 수도 있지만) 대중을 그런 정치적 자각으로 이끌기 위해 사용된다. 홉스도 마찬가지로 대중multitudo/crowd과 인민populus을 대립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개념화는 현재와는 많이 다르다.

 

   "모든 국가에서는 인민이 지배한다. 왜냐하면 군주정들에서도 인민이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민이 한 사람의 의지를 통해 의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민들, 도는 신민들은 대중들이다. 민주정과 귀족정에서도 시민들은 대중들이지만, 평의회는 인민이다. 군주정에서 신민들은 대중들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왕은 인민이다. 일반 사람들 및 이를 주목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은 항상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인민이라고, 곧 국가commonwealth라고 말한다. 그들은 국가가 왕에 대해 반역했다고(이는 불가능하다) [...]고 말한다. 그들은 인민이라는 호칭 아래 국가에 반대하는 시민들, 곧 인민에 반대하는 대중들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Hobbes, On the Citizen

 

 인용문에 홉스 자신이 적어 놓은 것처럼, 이런 관계는 역설적이다. 진태원은 이에 대해서 홉스가 대중과 인민을 구분하며, 대중으로부터 정치적 행위자의 자격을 박탈하려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대중이 너무나 영향력 있는 행위자이고, 홉스가 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배제가 가능한가? 이는 홉스의 의인疑人person 이론에 근거한다. 의인은, "그의 말이나 행동이 그 자신의 것으로 간주되거나,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 또는 -진실로이든 허구적으로이든 간에 그에게 귀속되는- 다른 어떤 사물의 말이나 행동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감각의 작용과 반-작용의 체계일 뿐, 인간의 동일성-정체성identity은  결국 타인들이 그를 어느 시간과 공간에서건 하나의 동일한 존재로 간주하는 것에 의해서만 보장되므로, 사회를 전제한다. 단순화시키면, 인간이 스스로, 그리고 서로 인간으로 존재하며 법적, 규범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사회 안에서 의인으로 존재하는 한에서라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 의인은 자연 상태가 아니라 계약의 과정에서 탄생하게 된다. 계약을 통해 개인들은 자신의 자연권을 하나의 의인에게 양도한다. 의인은 물론 다수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이들을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란 여럿이 아니라 하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의인이 국가를 대표한다. 즉, 하나의 의인이 국가의 주권자이며, 따라서 그들이야말로 '인민'인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라, 왕의 뜻을 따르지 않는 국민들은 인민이 아닌 것이다. 개인이 의인, 즉 사회 속에서 인간으로 간주되는 것은 계약을 통해 만들어진 국가에 참여하는 한에서인데, 국가란 권력을 양도 받은 하나의 의인으로 인해 성립가능한 것이므로, 주권자의 뜻을 받들지 않는 사람은 의인이 아니고, 따라서 주권도 없다. 이런 논리는 나아가 대중을 정치적 행위자가 아닌 것으로 만드는 근거가 된다. 행위란 행위자를 상정한다. 행위자는 하나이지 여럿일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대중을 "단일한 의지를 가진 단일한 실재single entity"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 그들의 생각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의인이 아니며, 따라서 그들은 행위할 수 없다. 왜냐하면 행위자가 있어야 행위를 하는 것인데, 그들은 행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중은 정치의 주체가 아니다.  



2.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홉스에게서 국가가 국가에 포함되는 무차별적 인간 다수와 일치하는 집단이 아니라 특정한 절차를 거쳐 만들어진 권력의 구심점과 동일한 것이란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이미 현대의 국가관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국가를 구성 요소는 영토, 인민, 주권이라 말해진다. 주인 없는 땅에 동그라미 하나 그리고 열 사람 집어 넣는다고 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란 거다. 그 열 사람이 '우리는 열 명이지만 그래도 하나야, X 란 우리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야.'라고 말하면 그들은 X 라는 국가를 만드는 거다. 그런데 대체 이 '하나'는 뭔가? 열 명을 정체불명의 '하나'로 만드는 것은 팥으로 메주를 쑤는 것 보다 힘든 일이다. 홉스는 그래서 의인이란 인공적 인간 개념을 설정하고, 열 명을 하나의 인간으로 만든 뒤 그 인간이 국가라고 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근대 이전에는 그런 생각이 필요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폴리스적 인간'이란 말로 공동체를 구성하는 인간의 속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삶을 영유하는 공동체는 당연한 것이지 정체를 물어야 할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국가의 개념사를 고찰하는 김기봉에 따르면 서양에서 지금의 국가를 지칭하는 state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다소간의 시기차가 있지만 근대 이후의 현상이다. 물론 state는 라틴어 status 가 어원으로 일찍부터 사용되었지만 그것이 지금처럼 국가를 가리키는 의미가 되기까진 많은 변화를 거쳤다. 

 우선 status 는 인간의 지위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특수하게 주로 지배자로서의 위치, 지위라는 의미로 쓰였다. 이것이 나아가 지배자의 위엄과 권위를 강조하는 말로 이용됨으로써, 왕의 권력이라는 뉘앙스를 갖게 된다. 다음으로 status 는 단순히 상태(condition)나 형태(form)를 의미하는 말로, 이것이 나아가 왕국이나 공화국의 상황 또는 상황을 의미하는 말로 이어진다. 여기서 status 는 공공적인 것과 좋은 것이란 뉘앙스를 갖게 된다.  status 의 근대적 의미로의 전환의 분수령은 마키아벨리인데, 그에게서  status 는 "지배를 받는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과 그 영역을 총칭하는 것"이란 의미로도, "군주가 주체적으로 행사하는 명령권력"이란 의미로도 쓰인다. 국민과 영토란 근대적 국가 구성 요소가 등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status는 "명령권력이면서 동시에 그 권력의 지배를 받는 대상이라는 양면적 성격"을 갖는 것인데, 이는 국민 스스로 통치하고 통치 받는 근대 국가의 상황과 마찬가지이다. 이와 더불어 국가 개념과 관련한 그의 큰 기여는. 잘 알려져 있듯이 그가 정치에서 도덕을 분리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정치 권력을 정당화시키는 도덕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 처음으로 정치 권력의 문제를 도덕적 문제와 분리시켜 제시했고, 그에게 있어서 권력의 목적은 국가의 안정과 유지 그 자체였다. 이 문제가 국가 개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처음으로 고귀한 혈통을 가진 영주의 소유물이든, 신이 자신의 뜻을 실현시키는 곳이든 뭐든 간에 상관 없이 독립적으로 가치를 갖는, 지배자를 의미하는 것도 피지배자를 의미하는 것도 아닌 비인격적인 그 '무엇'이 되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국가 자체를 스스로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주체로 인식"했다. 자율적autonomous이란 말은 스스로에 대한 통치력을 갖는다는 것이고, 이는 근대 주권 개념이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김기봉은 근대 주권 개념에 대해서 "일정한 영토 내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에게 초월하여 최고의 정치적 권위를 이루는 공권력의 한 형식"이란 정의를 내린다. 하지만 이는 주권의 담지자인 국가란 대체 무엇인가, 국가의 본질은 무엇인가, 국가를 구성하는 인격적 실체들인 지배자와 피지배자들과 국가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뒤에 남겨 두는 것이다.   

 홉스는 이에 대해서 국가=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의인(인민)의 것, 따라서 국가 주권=의인(인민) 주권이란 대답을 내린 것이지만, 이는 당연히 이런 국가 개념 안에 시민적 권리의 자리는 어디인가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홉스식 사고에선 시민적 권리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진태원이 지적하듯이 홉스 계약론의 특징은, 자연 상태를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인" 병리적 상태로 생각하고, 계약에 의해 시민 사회 또는 국가가 탄생한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회가 존재하려면 국가가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국가와 시민 사회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실 이런 생각은 요즘에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것이다. "나라가 있어야 국민이 있지."같은 일상적인 표현은 물론이고, "왜 우리가 불법체류자의 인권을 신경 써 줘야 하느냐?"라는 분노에는 인권은 천부적 가치가 아니라 국가가 법적으로 부여해 준 것이란 생각, 국가를 인간 관계를 규율하는 최고의 원리이자 가치 척도로 보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홉스 사상의 문제점은 도덕적 정당성이 취약하다는 데 있는 것만이 아니다. 그런 관점은 자칫하면 현실적, 합리적이지만 당위가 결여된 홉스와 이상적인 로크라는 이분법적 관점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으며, <<정의론>>에서 롤즈의 작업처럼 정치 철학의 관건을, 합리적 계약론과 도덕적 당위를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라는 협소한 지평으로 제한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홉스 정치 철학의 문제점은 그것이 도덕적이지 않다는 데 있기 보다 오히려 그것이 비현실적이라는 데 있다.



3.  홉스의 국가와 대중에 대한 생각은 논리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국가가 하나라면 국가 주권도 하나여야 하는 반면에 대중은 행위의 담지자인 하나의 실체가 아니고, 따라서 주권자가 될 수 없다. 즉 정치적 주체가 아니다. 홉스의 생각은 극단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정치적 주체의 자격을 논하고, 따라서 정치 주체를 하나의 특질 아래 묶일 수 있는 동질적인 무엇으로 설정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극단적인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선거권이 돈 많은 사람들한테 주어져 있던 시기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부자'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고, 얼마 뒤에는 '남자'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중세의 농민 봉기를 정치 행위가 아니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홉스 같은 이가 아무리 열외자들을 정치에서 몰아내려고 하든 말든 간에 실제 정치에서는 언제나  하나로 셈해 지지 않는, 무한한 대중이 존재한다. 자크 랑시에르가 말했듯이 "민주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의 주체 따위는 없다, 라는 것이다." 진태원과 고원의 논문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홉스의 개념을 많이 차용하였지만 홉스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스피노자는 인민과 대중을 정치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 상태와 사회/국가 상태를 단절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즉, 계약에 의해 국가가 만들어졌어도 그 안에 사고와 정념의 이질성으로 인한 충돌과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통치의 절대적 안정성이 보장된 홉스의 이상 국가와는 달리 스피노자의 이상 국가 속에선 사회에 적대 관계가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에 그는 국가의 성립을 설명하기 위해 계약을 정치적 계약과 종교적 계약으로 이중화하고, 종교적 계약은 홉스에게서처럼 주권자의 절대권력을 통해 국가 설립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권리와 역량을 양도할 수 있게 만드는 메커니즘"으로 설정된다. 이런 스피노자식 설정은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서 억압적 국가 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를 구분하고, 이데올로기의 호명呼名을 종교적 모티프로 설명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현대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어리석고, 이해할 수 없는, 그렇기에 조롱의 대상이자 공포의 대상인 '대중'을 정치적 주체성의 관점에서 사고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주기 때문이다. 







덧. 사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독어로 원전들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지만... 그러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진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라, 한국 글은 3월까지만 보겠다고 다짐하고-_-;; 여전히 찔끔찔끔 논문들을 찾아서 보고 있다. 외국어 공부를 멀리하는 나를 늘 다그치던 선배는, 내 근황을 묻는 동기에게 걔는 독일까지 가서도 한국 글만 본다며 흉을 봤다고 한다-_- 어쨌든 놀기만 하는 건 아니잖슈ㅠ 하여간 정리한베낀 논문은 아래와 같다. 

고원, <대중이란 무엇인가>, <<영국 연구>> 16호,
김기봉, <국가란 무엇인가 : 개념사적 고찰>, <<서양사론>> 82호,
진태원, <신학정치론에서 홉스 사회계약론의 수용과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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