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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3/02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에서
  2. 2008/03/01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에서

 

 

왜 임박함에 대하여, 긴급함과 명령에 대하여, 이것들 속에서 기다리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하여 강조하는가? 이는 오늘 우리가 말해 보려는 것을, 오늘날 마르크스의 저작에, 곧 또한 마르크스의 명령에 일어날 위험이 있는 것-우리는 이것에 대한 한 가지 이상의 징표를 가지고 있다-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다. 오늘날 일어날 위험이 있는 것을, 마르크스를 마르크스주의와 대립시킴으로써 정치적 명령을, 분류된 저작에 대한 차분한 주석으로 중립화하려는 시도, 어쨌든 약화하려는 시도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우리는 문하 속에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대학에서 어떤 유행 내지 멋 부리기가 도래하고 있음을 느낀다. [중략] 이러한 최근의 상투적 경향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준거/마르크스주의 문헌에 대한 참고를 근본적으로 탈정치화하는 것으로, 기껏해야 관용의 탈을 쓰고서 우선 [마르크스의-옮긴이] 저작/신체를 무력화하고, 여기에 깃든 반역성을 침묵하게 만듦으로써 잠재적인 힘을 무력화하는 것으로 귀착될 것이다(사람들은, 무엇보다 반란, 분개, 봉기, 혁명적 도약을 고취할지도 모를 반역성이 복귀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 가운데서야 비로소 귀환을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마르크스의 귀환 또는 마르크스로의 회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테지만, 단 이는 단지 해독할 뿐만 아니라 행위하도록, 또는 (해석에 대한) 해독을 "세계를 변화시키는" 변혁으로 실행하도록 요구하는 지령을 침묵으로 지나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중략] 귀를 기울이면 이미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보시오, 마르크스는 어쨌든 다른 이들처럼 한 사람의 철학자였고, 그 많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제 침묵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지만, 그는 너무 오랫동안 교수자격시험 목록에서 배제되어 왔는데 이제 그만한 자격을 갖춘 위대한 철학자로 이름을 올릴 때가 된 것 같소. 그는 공산주의자들, 마르크스주의자들, 당들에 속하지 않고, 우리 서양 정치철학의 위대한 고전 속에서모습을 드러내야 하오. 마르크스로 돌아갑시다. 이제 마침내 그를 위대한 철학자로 읽어 봅시다. 우리는 이미 이런 이야기를 들어왔고 또 앞으로도 듣게 될 것이다.
 내가 마르크스로 향하는 또는 돌아가는 이 순간 여기서 시도해 보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오늘날 새로운 이론주의가 중립화하는 마취술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르크스에 대한 철학적, 문헌학적 회귀가 군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체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라는 명령을 강조하게 될 만큼, 이는 "다른 어떤 것"이다. 

                                           자크 데리다, 진태원 옮김, <<마르크스의 유령들>>, 이제이북스, 77-79쪽



 이 문장을 옮겨 적고 있으려니 얼마 전 은퇴한 맑스 경제학자 김수행 교수가 생각난다. 그의 은퇴 소식이 이런저런 언론에서 보도된 것을 보면, 서울대 경제학부의 유일한 맑스 경제학자라는 타이틀이 꽤 사회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긴 한가 보다. 그런데 정작 서울대 경제학부에선 후임 맑스 경제학자를 임용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하고 이에 경제학부 대학원생들이 임용을 촉구하는 연서를 쓰기도 했다는데, 결국 김수행 교수에 대한 조중동 같은 언론의 관심은(조선은 인터뷰도 했다) 이제 유령이 조용히 자기 무덤으로 돌아가는 것을 환영하는 자축 파티인 셈이다. 아직 맑스를 체제 내로 받아 들일 만큼 '세련'되지 못한 학계에 맞서 학문의 '다양성'이 지켜져야 한다면서 한 자리 만이라도 맑스를 위해 내어 달라고 호소해야 하는 상황에 웃어야 하는 건지 울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박사 과정에서 9 명이나 공부하고 있다니 한 자리가 아니라 그 몇 배쯤 늘어나 줬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여담인데 석사 과정의 전공자는 3명 뿐이라고 한다. 이런 급감에 세태 변화도 한 몫 했겠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는데 몇해 전인가 대학원 입학 학점이 높아져서 학부 때 운동하느라 학점 관리를 소홀히 할 수 밖에 없는 예비 맑스 경제학자들이 그 문턱을넘기가 만만치 않아졌기 때문이란다. 대학에서 맑스를 몰아내려는 고도의 음모는 이미 몇해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거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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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사정이 있어서 2부 2장까지만(3장도 조금;), 그것도 헐거운 독서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방대한 내용을 담은 저작인데다 지금의 나로서는 다시 정독한다고 해도 다루어지고 있는 논의를 충실히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해의 부족과는 별개로 내가 읽었던 고진의 다른 책, <<윤리21>>과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에서 품게된 의문들을 해소할 수는 없었기에 조금은 실망스러운 글이기도 했다. 고진의 칸트론과 그 칸트론의 필연적인 결론은 아닐까란 생각이 드는 실존주의에 대한 참조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들이 있지만 책임질 수 있는 말을 할 수는 있을 것 같지 않아 다음과 같은 소박한 의심들만을 피력하면서 넘어가야겠다. 고진은 '트랜스크리틱'이란 이름으로 끊임없는 시점의 이동을 말하고 있지만, 그의 글을 추동하는 진짜 모티브는 '종합'인 것이 아닐까? <<윤리21>>을 읽으면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괄호론'은 너무나 안일한 태도라 여겨진다. 실천적 영역과 이론적 영역의 '보편성'은 각각 다른 영역을 '괄호'쳐야지만-칸트에게서 미적 무관심성이 그러하듯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결론은 일반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해도, 정확히 '괄호'란 무엇인가, 주체는 괄호를 어떻게 닫고 열 수 있는가, 주체는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가, 등 궁금한 것이 무척 많은데도 고진이 이에 대해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것 같지는 않다. 대신 그가 자신의 철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철학사를 다시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라는 의심이 드는데, <<트랜스크리틱>>에서 그는 수많은 철학자들을 자신의 문제틀 속에 마치 사례를 수집하듯이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독해를 거슬러 고진이 칸트에게서 읽어낸 '타자론' 역시 미흡하게 느껴진다. <<트랜스크리틱>>에서 그는 타자를 고려함으로써만 구성되는 보편성에 대해서, 보편성에 대한 타자의 관계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지 타자성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말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칸트에게서 타자에 대한 관점을 읽어낸 시도는 찬반 여부를 떠나서 평가할 만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가 제기한 타자론이 타자에 대한 사고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 예컨대 고진은 자신의 칸트론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괄호론'과 그의 '타자론'의 관계-양자 모두 '보편성'의 구성에 핵심적인 요소들인데-에 대해 이렇다 할 조명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무책임한 의심을 피력하는 것을 넘어 약간 더 많은 말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은 부분은 고진의 <<자본>>해석이다. 여기서 고진 논의의 핵심은 노동이, 정확히 말하면 '추상노동'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의 해석을 비판하고 교환에서 가치의 원천을 본다는 데 있다. 가치에 대한 전통적 맑스주의 해석의 특징은 가치를 일종의 실체-동질적이고 수량화가능한 인간의 '추상노동'-로 보는 것과 가치가 노동과 같은 것이기에 가치의 원천을 생산과정에서 찾는 것이다. 고진은 '교환'에 대한 강조를 통해 이 쟁점을 새롭게 다루고 있는데, 우선 그는 노동가치설, 즉 가치를 실체로 보는 사고에 대해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치를 상품들이 교환되는 비율에 불과한 것, 따라서 가격으로 환원해 버리지도 않는다. 가치란 분명히 실체는 아니지만, 마치 실체와도 같은 가상성을 갖는 것이자 인간이 가상성을 인지한다고 해서 떨쳐버릴 수도 없는 것으로써, 고진은 이를 칸트의 '초월론적 가상'-칸트가 형이상학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이 그에 대해 사고하는 것을 그칠 수 없는 것이라고 설정한 신, 영혼 등의 개념들-에 비교하고 있다. 맑스주의 가치론이 철학적으로는 유명론과 실제론이라는 쟁점과 연결돼 있고,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의 사회, 경제정책과 운동에서의 노동자 중심성으로 연결되는 문제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고진의 재해석은 분명히 의의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진은 '소비자 운동'-그는 소비자 운동의 범주에 페미니즘이나 환경운동도 포함시키고 있다-의 중요성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는데, 이는 가치의 원천이 생산 과정에 있다는 사고, 자본가는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를 착취해서 잉여가치를 얻고 있으므로 자본주의의 지양은 이를 종결시키는 데 있다는 사고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 운동과 소비자 운동-또는 협동조합 운동-의 관계에서 고진이 더 비중을 두는 것은 후자이다. 이는 단지 정세적 이유, 즉 고진의 글이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전통적 맑스주의 운동이 여러 방향에서 위기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운동에 있어서 이를 충분히 극복해 내지 못한 시대를 향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는 고진의 논리에 따른 자연스런 결론인데, 그는 현대 사회 자체를 교환 원리에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삼항구조인데, 이 구조는 각각 세 가지 교환 양식, 네이션은 공동체의 호혜적 교환에, 스테이트는 폭력적 수탈의 형태를 갖는 교환에, 그리고 자본은 상품 교환에 근거한다. 다시 맑스주의 전통과 비교를 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사회 구조의 근간을 자본에 두고 스테이트는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행기구로, 네이션은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즉 속임수로 파악했기 때문에 여전히 문제의 핵심은 노동자를 통한 자본주의의 폐기에 있었다. 하지만 맑스주의 역사에서 국가의 폐지인가, 국가 권력의 장악인가가 끊임없이 문제가 되어 왔고,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민족주의가 폐기되기는 커녕 오히려 통치의 도구로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자본을 중심에 둔 전통 맑스주의의 사회 구조 인식에 대한 고진의 비판은 수용할 만 하다. 현대 사회 구조는 이 세 가지 교환 양식이 얽혀 있는 구조이므로, 하나만을 어떻게 해서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키메이라적인 삼항 구조에 대한 제시가 절망적이기만은 한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세 가지 교환 원리 이외에 다른 교환 원리를 생각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협동조합의 모델이고, 따라서 고진에게서 운동의 중심은 자본주의를 침식해 들어갈 수 있는 이 외부적 교환 원리를 실천할 수 있는 '소비자 운동'에 놓여 있다.-물론 고진은 이를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그는 노동자 운동이 협동 조합에 의존하게 되는 상황을 제시하면서도 그 반대의 상황, 협동 조합이 노동자 운동과 맺을 수 밖에 없는 관계에 대해서는 고찰하지 않는다- 나는 위에서 자본주의의 '지양'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정확히 말해 고진의 논리에서 자본주의는 지양해야 할 것이 아니라 대체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내부'에서의 '지양'인가 자본주의의 '외부'에 의한 '대체'인가는 복잡한 문제일테고, 나는 전자에 공감하는 편이지만 이런 기본적인 입장의 차이를 근거로 고진의 주장을 물리쳐 버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자본>>의 "가치형태" 절에 대한 해석에는 의문이 드는데, 나는 자본주의 '대체'에 대한 고진의 입장이 "가치형태" 절에 대한 해석에 상당 부분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문은 아주 단순한 것이다. 가치형태절은 모두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왜 고진은 처음의 단 한 부분만을 다루고 있는가? 가치형태절은 단순한 가치형태, 전개된 가치형태, 일반적 등가형태, 화폐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여기서-2부 2장에서- 고진은 단순한 가치형태-X량의 상품 A가 Y량의 상품 B와 교환될 때 전자가 후자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상대적 가치형태에 놓이며 후자는 자신의 '사용가치'를 통해 전자의 '(교환)가치'를 표현하는 등가형태에 놓인다-만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고진이 이끌어 내는 결론은 '가치'라는 것은 추상 노동이 응집된 실체도 아니며 단순히 하나의 상품과 다른 하나의 상품 사이의 교환을 매개하는 것도 아닌, '상품 교환'이라는 행위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가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의 타당성과 결론을 도출하기까지의 논증의 적합성은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단순한 가치형태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와 화폐의 비밀을 보려 하고 있고, 단순한 가치형태가 드러내는 비밀이 그에게 너무나 명료해서 다른 가치형태를 검토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다는 점은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가치형태에 대한 고진의 분석을 읽으면서 그가 맑스의 가치형태를 마치 칸트의 오성 범주처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그가 책 어딘가에서 실제로 둘 사이에 유비를 설정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책을 갖고 있질 않아서 확인해 볼 수가 없다- 그가 상품이 교환되는 '위치'를 강조하면서 이 고정된 위치 관계를 통해 자본주의의 현상이 구성된다고, 따라서 설명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진에게 자본주의의 복잡한 현상들이 이 '고정된' 구조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가 말한 대로 이 구조가 여러 가지 구조들 중 하나에 불과한 이상-그에게 교환 자체는 전혀 신비로운 현상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교환은 신비로운 가상을 생산하지만, 그 꺼풀을 벗겨낸 기저에 놓인 교환에 신비는 없다-, 다른 구조에 의한 '대체'도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맑스는 <<자본>>에서 가치형태를 결코 정태적으로 서술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현란할 정도의 운동을 그리고 있다. 이 구절을 단순히 헤겔을 본 딴 수사학적 유희로 치부하지 않으려면-그리고 그것은 불가능할텐데, 맑스 자신이 가치형태 절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고, 또 엥엘스에게 그 난해성을 지적 받고 쉽게 고쳐쓰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기묘한 서술의 논리, 또는 운동의 논리에 대한 해석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가치형태 절을 읽다 보면 받게 되는 기묘한 느낌 중 하나는 네 단계로 운동하는 이 형태들이 무한한 순환의 논리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고진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화폐가 단순한 교환의 매개체가 아니라 그 성립으로 인해 시장 관계가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면, X량의 상품 A가 Y량의 상품 B와 교환되는 최초의 형태 자체가 이미 화폐의 논리를 전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맑스가 비유한 것처럼 화폐가 사자, 공, 여우 같은 여러 가지 동물들 옆에 서 있는 '동물'이라는 동물이라면, X량의 상품 '화폐'와 Y량의 상품 B의 교환은 단순한 가치 형태를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데리다가 사용 가치는 가치 이후에나 가능한 것이라고 또는 사용 가치는 가치 이후에 존재했던 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준다. 고진이 말하듯이 가치가 교환 과정 이후에 전미래 시제로 존재했던 게 될 것이라면, 이것은 또한 교환 자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사회 원리로써 교환을 바라 보는 고진의 시점 역시 가치라는 가상에 의해 오염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젝을 경유해서도 같은 비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에서 지젝은 화폐를 주인기표와 연결시키고 있으며, 주인기표에 의해 기표 체계는 소급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모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화폐형태의 기원으로 제시되는 단순한 가치형태는 오직 사후적으로, 상상적으로 가정된 것일 뿐 화폐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당연히 고진의 운동론에 대한 의문이 따라 나온다. 진정한 외재적 비판이란 결국 내부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할텐데, 고진의 운동론은 잘해야 자본과 병존하는 자본의 외부를 창설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닐까? 

 
 
 
  이해를 얼마나 했느냐에 관계 없이 별로 매력을 못 느끼는 사상들이 있다. 나는 고진을 <<근대 일본 문학의 기원>>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 때 그를 알게 된 기쁨은 사실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에서 많이 옅어 졌었다. 나는 실천하는 지식인이자 문학 평론가로써의 고진은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지만-여전히 <<근대 문학의 종언>>은 한국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 사 볼 책 중 하나다- 철학/운동 이론가로서의 고진과는 별로 맞지 않는 것 같다. 감히 그 이유를 "고진의 이론은 나이브하다"고 댈 수는 없을 것 같고-비록 내 글이 건방지긴 하지만, 이건 관용을 기대하는 초심자의 어리광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고-, 굳이 찾자면 지젝이 말하듯 고진이 '아나키스트'로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낡은 편가르기에 더 이상 연연하지는 않는다고 믿고 싶기는 하지만.... 




덧. <<트랜스크리틱>>에 대한 지젝의 비평이 올라와 있는 페이지를 링크해 둔다. 요약이 중심이고 마지막에 짤막하게 비판을 하고 있는데, 내게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맑스의 화폐론을 통해 현대 사회의 일반 개념을 설명한 사상가로 참조한 바 있는 알프레트 존 레텔Alfred Sohn-Rethel을 <<트랜스크리틱>> 비판을 위해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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