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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관계는 없다

얼마 전에 이글루의 이오공감에 올라와서 꽤 많은 리플에 시달렸던 글이 하나 있었는데, 그 포스팅을 한 블로거는 '자신이 남자로 태어나서 누리고 있는 특권이 없는 것 같으니 제발 좀 알려달라'며 예의바르게 부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특권을 누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이 무감각은 곧 타인이 받는 억압에 대한 무감각을 의미할 것이란 생각에 얄밉기도 했지만, 어쨌든 나름 성실하게 리플을 달았었다. 그 글은 이오공감에서 내려갔고, 그 블로거의 아이디도 잊어버렸지만, 어쨌든 새로운 예를 하나 들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당신은 밤에 동네 슈퍼로 맥주사러 갈 때, 귀신 밖에 무서워할 게 없지 않습니까? 




최근에 알게 된 지인과 그녀의 친구는 인사동을 지나쳐 종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종각과 종로3가로 이어지는  가게가 많고 사람의 왕래가 많은 거리. 그런데 그들에게 나이트의 삐끼가 달라 붙었다. 메인스트리트와 직접 마주한 골목길 안 쪽에 있긴 하지만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는 나이트였으니, 당연히 삐끼의 출현은 무척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삐끼들은 팔을 잡아 끌며 그녀들을 골목 안으로 이끌었고, 안 간다고 말하고 버텼음에도 불구하고 완력으로 그들을 가게 안으로 끌고 들어가 부킹을 기다리는 방에 앉혀 놓았다. 그 와중에 그들은 사물함에 보관하겠다며 가방까지 가지고 가 버렸다. 그녀들은 너무나 황당한데다 겁이 덜컥 나서 가방을 돌려달란 말도 하지 못한 채 웨이터가 방에서 나간 틈을 타 도망쳐 나왔다고 한다.  

내가 이 황당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 사건이 있고 난 다음날 술자리에서였다. 가방을 찾으러 가야겠다고 마음은 먹고 있었지만, 너무 무서워서 아직 찾아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다른 사람이 지금 같이 가자고 나섰고, 그녀들과는 얼굴과 이름 정도만 아는 사이인 나도 끓어오르는 분노와 불타는 사명감에 같이 가겠다고 따라 나섰다. 먼저 나선 사람은 남자였고, 뒤따라 나선 나도 남자였다. 그렇게 겁에 질린 두 명의 여성과 불타오른 두 명의 남자가 함께 하는 가방원정대가 자연스럽게 결성되었다.   

택시가 종로에 가까워질 수록 어제 험한 꼴을 당한 두 명은 점점 겁에 질려 갔고, 나머지 둘은 '자연스레' 원정을 이끄는 지휘관처럼 그들을 독려했다. 겁에 질린 두 사람과 그들을 돕는 두 사람, 괴로워하는 두 명의 여자와 그들을 격려하는 두 남자. 그녀들이 겁에 질려 나이트 근처의 가게에 들어가 있고, 남자들만 나이트에 찾아가긴 했지만, 어쨌든 가방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정말로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내가 약간의 갈등을 겪은 것을 빼고는.

가방을 돌려달라고 웨이터에게 얘기를 하고 있는데, 바깥쪽 큰 길가에서 삐끼들이 호객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길을 가는 여자들을 막아 세우고는 팔을 잡아 끌기 시작했다. 그들이 싫다고 거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삐끼 하나가 여자를 들쳐 안더니 안으로 달려들어오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다른 여자의 손을 잡고는 질질 끌다시피 골목 안 쪽으로 끌고 들어왔다.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안겨 들어 오는 여자의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고, 또 다른 여자는 손을 빼내려고 애처롭게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내가 멍해 있는 사이 다행히 삐끼들은 그녀들을 가게 문 앞에서 내려 놓았고, 다시 팔을 잡아 끌며 안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나서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두려웠다. 나는 내 몸무게보다더 무거운 바벨을 들어올릴 것 같은 남자들에 둘러 쌓여서 그들이 순순히 가방을 돌려주기만을 바라는 운동부족인 약골일 뿐이었다. 뭐, 적었다시피 사건은 없었다. 나는 정말 똥줄이 탈만큼 긴장해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들은 무사히 가던 길을 갔고, 가방은 되돌려 받았고, 삐끼들은 힘들어 죽겠다며 흘러내리는 땀을 쓸었다. 이렇게 가방원정대는 무사히 임무를 수행했고, 안도하며 고마워하는 그녀들과 의기양양한 한 남자-나, 나보다 훨씬 의젓한 모습을 보였던 다른 한 남자는 어땠을까?- 다시 택시를 타고 왔던 길을 되밟아 돌아갔다. 




나는 의기양양해 하지는 않았다. 나는 출발할 때보다 더 침울해져서 그녀들의 고맙다는 말도 듣는둥 마는둥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이 싫었다. 왜 그녀들은 내게, 하필이면 가방을 뺏어간 그들과 같은 남자인 내게 고마워해야 하는가? 만약에 내가 여자였으면, 여자로서 그녀들을 따라나섰으면, 나는 그녀들과 함께 경찰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남자이건 여자이건 상관없이, 국가-아버지의 권위를 체현하는 경찰들에게. 그리고 내가 여자였다면, 아마도 그녀들과 나는 나란히 나이트 앞에 서서 두려워 하고 있지 않았을까? 지금처럼 내 뒤에 숨은 그녀들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린시절부터 무수히 주입 받아온 그 이미지, 칼이나 총을 들고, 용이나 갱들을 무찌르고 감금돼 있던 여자를 어깨에 들춰 없고 돌아오는 히어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딸들을 다른 남자들의 음험한 시선으로 보호하다가 다른 남자에게 건내주는 아버지, 자기의 부인들을 평생 지키겠다는 남편, 어머니-국가의 땅을 지키고, 우리의 누이들을 지키겠다는 군인과 너의 딸과 아내와 너희의 여자들을 강간하겠다는 그 모든 남성들 사이에 과연 얼마나 차이가 있는 것일까? 결국 그들은 같은 판 위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삭제된 채로 이루어지는 그들 사이의 게임을. 고마움은 결코 내가 한 일에 합당한 대가가 아니다.

내가 어쩐지 여자가 가면 가방을 쉽게 받아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들을 따라 나섰을 때 나는 내가 그 게임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긍정해 버린 셈이다. 모든 일은 사실 그렇게 이루어진다. 성폭행의 책임이 밤길에 밖에 있던 여성이나 그녀의 옷차림에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한 편으로 밤 늦게 아슬아슬한 차림으로 어두운 골목길을 걷는 여성을 불안한 눈초리로 쳐다보게 되고, 그녀의 부모님은 여자가 밤길에 싸돌아 다니지 말라고 훈계를 하고, 그녀의 친구는 밤길 조심해서 돌아가라고 걱정어린 인사를 하며, 그녀의 남자친구는 그녀를 집 앞 까지 바래다주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현실적으로 여성에게 밤길이 위험한 이 사회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하게되는 행위들이고, 사회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이 서로에게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들이다. 어쨌든 무서운 일을 당해 가방을 빼앗기고, 두려움에 떨고 있다면 누구든 나서서 도와주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나는 내가 사실은 진짜로 의기양양해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이트에는 가본 적도 없고, 여자들에게 멋진 모습 내세울 건덕지 하나 없는 내가 그 덩치들한테서 여자의 물건을 되찾아 오다니! 세상의 참상을 하나 더 목격한 사람으로서 우울해 하고 있었지만, 그 우울함도 자뻑의 효과를 고조시켰을 것이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우울과 자뻑 사이에서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우리가 밤길에 귀가하는 여자친구를 바래다 줄 때, 그 행동은 단순히 필요에 대한 판단에서 나오는 것일까? 사실은 그 행동의 상당부분이 여자친구를 배려하는 나의 자상함에 대한, 그리고 여자친구에게 자기의 애정을 과시했다는 사실에 대한 자긍심으로 채워지고 있지는 않을까? 과연 스스로를 여자를 품에 안고 말을 달리는 남성 구원자의 이미지와 완전히 분리할 수 있을까? 우리의 행동은 어느 정도까지는 이미지들의 작용과 효과에 의해 결정지어지는 것이다.

결국 사회의 특정한 권력 구조를 재/생산하는 장치는 도처에서 언제나 이미 작동중이다. 내 자신이 '자연스런' 관계맺음 이라고 생각하며 한 행위들이 그 장치들에 기름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이트 또한 마찬가지다. 이성이 만나서 춤을 추고, '자연스럽게' 섹슈얼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공간으로 상정되는 그 곳은 이 사례가 보여주듯이 사실은 여성의 주체성은 배제된 남성들의 공간이다. (동성애 클럽은 어떨까? 그곳에서의 관계는 성차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권력관계가 어떻게 나타날까?) 모든 관계맺음(특시 성적 관계)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상정하는 바로 그 사고가 억압적 권력이 그 모습을 숨긴 채로 꿈틀댈 공간을 마련해 준다. 나는 그 공모의 사슬, (성)관계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물론 이 모든 생각들에 우울해 한 것도 잠시, 여전히 도처에서 사랑과 관계는 진행중이다.  

(써 놓고 보니 맨 처음 생각했던 거랑 무척 다른 글이 되어버렸다. 제목과도 매치가  안 되고. 그래도 다른 마땅한 게 생각이 안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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