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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Tobi 와 그의 친구 Achim. 누운 자세를 보면 누가 누군지 알 수 있다.
독일은 동성애에 대한 차별의식이 한국보다 현저하게 낮다. 유럽이 그렇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저녁시간의 공중파 드라마에 게이 커플이 침대에서 포옹하고 있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에는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선거 유세에서 자신의 동성 파트너를 소개한 후 오히려 지지율이 올라가기도 하는 곳이니 공적 영역에서는 차별이 많이 없어졌다고 할 수 있을테고, 사람들의 의식이나 문화 수준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를 걷다가 실제로 동성 커플을 마주친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는데, 아직은 사적 영역에서 당당히 드러내는 일이 쉽지는 않은가 보다. 한국에서는 윤리적 판단이 정치적 계산에 밀려, 어이없게도 법이 동성애 차별을 공공연히 인정하는 꼴같잖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제도적 차원에서 문제를 바로 잡는 것보다 일상에 뿌리 깊게 스며든 편견에 맞서는 게 더 어려운 일이며, 오히려 더 깊은 고민을 필요로 하는 법, 이런 독일의 상황을 아주 잘 반영하는 영화가 한 편 있어서 소개해 본다.
영화 <<여름폭풍Sommersturm>>의 미덕은 공적인 영역에서는 동성애가 어떤 식으로든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적 영역에서는 편견이 끈질기게 작동하는 양상을, 사춘기 소년의 경험을 통해 섬세하게 보여 준다는 데 있다. 유쾌하고 활달한 성격으로 남자 조정부 주장을 하던 남자 아이가, 여름 합숙 캠프에서 자기 단짝 친구의 여자친구를 질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기분이 대체 어떻겠는가? 한국에서라면 어쩐지 집단 린치 신이라도 들어가야 그림이 나올 것 같은 상황이지만, 독일 영화인지라 옆 캠프에는 베를린에서 온 퀴어 조정팀이 합숙을 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게이들이 다른 남자 캐릭터들 보다 훨씬 생동감있고 개성있게 그려지고 있는데,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전혀 주눅들지 않고 자신들의 섹슈얼리티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당당하다. 티셔츠에는 큼지막하게 Queer Team 이라고 박아 넣었고, 몸짱도 하나 있는 데다가, 자신들이 게이임을 알고 움찔거리는 '일반 남자' 들에게 윙크를 날려 주는 센스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소수자이자 약자의 것으로 순순히 받아 들이지 않을 때 오히려 주눅드는 것은 '일반 남자' 들인데, '나만 건드리지 않으면 네가 게이든 뭐든 상관 없어'라고 선심 쓰듯 말할 수 있는 비판적 거리가 완전히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여자 꼬시겠다는 생각에 희희낙락해 하며 온 놈들이 도리어 꼬심을 당하는 위치에 서게 됐으니 얼마나 무섭고 당혹스럽겠는가? 이 영화는 게이에 대한 편견과 오해로 가득찬 '일반 남자'들이 게이들에게 갖고 있는 편견과 공포를 역으로 이용해서 유쾌한 장면들을 만들어 낸다. 이를테면, 가장 호모 포비아가 심한 녀석이 심부름 하러 캠프에 찾아 올 때 일부러 그의 망상적인 공포에 맞춘 상황을 연출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패러디를 통해 편견을 전복적으로 조롱하는 한 편으로 게이들 사이의 다양한 차이를 보여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주인공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편견을 유감 없이 깨뜨리는 실제 게이들의 모습은 오히려 더 당혹스럽다. 편견과 다르기 때문에, 그 정체성을 부정하기가 더욱 어려워 지는 것이다.
이렇게 동성애자들이 비극적 피해자가 아니라 주체로써 당당히 그려진 덕분에 주인공의 고민은, 동성애 정체성을 억압하는 사회적 폭력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편견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란 맥락에서 다뤄진다. 동성애 배제적인 세계 속에서 살던 한 소년이 어떻게 소수자 정체성을 수용하고,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선택하는가? 표면적으로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개인적인 의식의 차원에서는 편견이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다. 말은 그럴 듯하게 해도 막상 동성애자를 실제로 만나면 재미있는 구경거리나 패션 소품처럼 여기는 태도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이성애 정체성에 대한 의심 없는 믿음도 그러한 편견의 소산일 것이다. 이는 차별이 아니라 배제라고 표현될 수 있을텐데, 법적, 제도적 접근으로는 해결되기는 커녕 포착될 수 조차 것이지만, 분명히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수용하는데 있어 장애로 작용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조정 코치는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혐오 발화를 억제하는 일이 전부일 뿐, 학생들의 고민에 어떤 식으로도 개입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여 주는데, 이와 동일한 무능함이 제도적 차원의 사고를 바탕으로 한 동성애 담론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동성애자들은 개별적으로 자신의 삶을 더듬어 나갈 수밖에 없다.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에 따라 그 선택의 과정은 다르게 나타날 것이고, 그에 따라 하나의 틀로 환원할 수 없는 수많은 차별과 심리적 압박을 경험할 것이다. <<여름폭풍>>은 무능한 교사와는 대조적으로, 편견에 휘둘리던 아이들이 조금씩-결코, 유토피아적인 하나됨을 보여 주지 않는다는 점이 이 영화의 또 다른 미덕이다- 변화하는 모습을 살피며, 미세한 차별들이 얽혀 있는 사적인 경험 영역을 섬세하게 형상화 해 내고 있다. 이렇게 제도 담론이 그 구조적 한계로 인해 포착해 내지 못하는 사적인 경험 영역을 의미화해 내는데 성공했다는 것, 동성애를 주제로, 그리고 소재로 하는 많은 영화들이 있지만 그런 영화들에 대해 <<여름폭풍>>이 갖는 한 가지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 한국에는 <<썸머스톰>>이란 이름으로 개봉했다. 끄응, 나는 <<타인의 삶>>보다 훨씬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그보다도 흥행에 실패했나 보다. 이런 영화가 전국 중고등학교에 배포되서 단체 관람되면 얼마나 좋을까. 성교육도 하려면 좀 제대로 해야지..
+ 사실 퀴어 영화를 그리 많이 보진 않았는데, 앞으로 찾아 보면서 어떤 식으로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 좀 살펴 보고 싶다. 난 그 유명한 <<브로크백 마운틴>>도 안 봤는데, 여전히 그다지 보고 싶단 생각은 안 들고... 괜찮은 거 추천 좀..
+ 3개월이나 전에 본 영화를 갑자기 포스팅한 이유는... 오늘 Tobi 와 꼭 닮았다고 생각되는 애를 봤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고 집에 와서 확인을 해 보니 역시 아니긴 했다. 그래, 어쨌든 연예인인데 그렇게 쉽게 만날리 없겠지. 하여간 내가 참 사람 보는 눈이 없긴 하다.
2부. 변증법과 그 불만들
1부에서 지젝은, 보편성이란 자기 자신과의 모순에 다름 아니란 사실을 밝히고 이러한 보편성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세계(상징적 측면과 상상적 측면을 갖는)로부터 도출되는 과정을 해명하고 있다. 2부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헤겔과 비트겐슈타인을 경유한 보충적 설명을 통해 반복된다. 하지만, 1부가 여럿으로부터 하나를 도출시키는 이야기라면, 2부에서는 강조점이 하나에서 여럿으로 옮겨 간다. 1부를 정리하며 적었듯이 지젝의 라캉과 헤겔 독해는 보편성을 해체하는 것, 그리고 세계의 모순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으로서의 보편과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밝히는 것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자에서 세계로의 이런 무게중심의 이동은 보편에서 특수로의, 즉 타자로의 이동으로 볼 수 있을 텐데,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지젝의 타자 개념은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타자의 개념(보편에 외재하는 특수, 그를 위한 발화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주체, 성소주자들과 슬럼의 주민들 등)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4장의 제목은 <타자에 대해서>인데, 여기서 그는 라캉의 상징계 만을 다룬다. 상징계의 외부가 타자가 아니라 상징계 그 자체가 (대)타자인 것이다. 이렇게 지젝은 일반적인 타자 개념을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보편에 대립하는 것은 타자라는 통속적인 생각과는 달리 실제로 보편에 대립하는 것은 보편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1부 기표의 논리에서 등장한, 기표들의 장을 가능하게 하는 순수차이를 표지하는 기표, 즉 주인기표에 대립하는 것은 다른 여러 기표들이 아니라 주인기표 그 자신이다. 순수차이라는 공백無이 어떤 형식으로 표지된다는 이 모순이 보편(일자)에 대립하는 것이며, 타자의 타자는 다른 타자일 뿐이다. 이것이 라캉주의자들의 근본적인 논리적 에토스이며, 들뢰즈주의자들과 그토록 불화를 빚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라캉의, 지젝의 타자란 무엇인가?
지젝은 칸트적 사유에서 헤겔적 사유로의 이행에서 이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오성이 구성해 낸 것 외부에, 우리의 오성이 결코 파악할 수 없는 초월적 실체인 ‘물자체’를 상정한다. 그리고 여기서 헤겔로의 이행은 아주 단순한 절차, 즉 이 ‘물자체’에 대한 믿음을 빼 버리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자체의 초월적 외관, 주체가 자신과 물자체를 가르는 넘을 수 없는 심연이라고 느꼈던 것은 사실은 주체의 시각적 환영이었을 따름이다. 이러한 환영은 그가 바라보는 화면 속에 주체의 응시(행위)가 반영되어 있음을 망각한 데서 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왕이 왕인 것은 신하들이 그들을 왕으로 대해 주고 있기 때문이지, 왕 자신의 카리스마 때문이 아니다. 신비하고 카리스마적인 왕의 모습은 이러한 관계를 망각할 때 발생한다. 역사의 발전을 이끄는 필연적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다. 프롤레타리아가 이렇게 보이는 것은 오직 주체가 프롤레타리아의 편에 서서 투쟁하고 있을 때뿐이다. 이러한 예들이 보여 주는 것은 객관적인 외적 대상은 필연적으로 어떤 환영 속에서만 등장한다는 것이다. 주체에게 그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사회 속에서 그의 위치를 결정짓는 것처럼 보이는 상징계, 대타자 역시 이러한 환영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러한 환영은 근본적으로 1부에서 전개된 보편자의 근본적인 모순에 대한 회피에 복무한다. 대타자의 진실은 이 보편자의 근본적인 모순에 다름 아니며, 따라서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실의 경험을 회피하기 위해 초월적 실체(의미의 보증자인 대타자)의 외관이 필요한 것이다. 라캉 정신분석학에는 이를 잘 설명해 주는 논리가 있다. 상징계에 의해 거세된 인간은 거세당하기 전 자신에게 완벽한 만족을 주었다고 상정된 대상을 찾아 헤매지만, 사실은 거세 자체가 이러한 대상을 만들어 낸 것이며, 이러한 상실의 경험은 상실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 자체를 감추기 위한 환영일 뿐이다. 내적 불가능성을 외적 한계로 전치하는 것을 통해 보편자의 내적 모순, 욕망의 불가능성을 은폐한다. 주인기표의 역할이 바로 이것이다. 주인기표가 기표의 불가능성을 떠맡음으로써, 다른 모든 기표들이 안정적으로 의미를 표현할 수 있게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환영은 소급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공백, 불가능성은 환영이 성립하는 순간, 소급적으로 사라진다(즉, 일관된 의미로 누벼진다). 이를테면, 러시아 혁명에 참여하는 주체들에게 혁명의 과정은 그때그때 주체들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우연성의 소용돌이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혁명이 성공하고 난 뒤에는 모든 사건들이 필연적이었던 것처럼, 일관된 의미 속에서 정립된다.
이와 같은 논리는 타자 개념과 관련하여 중요한 전도를 포함하고 있다. 데리다적인 타자는 보편성의 (불)가능성의 조건, 그 구성적 외부를 의미한다. 하지만 지젝에게는 보편성에 외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특수자는 보편성 내부의 자기모순을 감추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자는 “실재적”이다. [...] 특수자가 자기 동일성을 획득하는 것을 가로 막는 한계로서 말이다.”(287)
이러한 전도는 지젝의 정치적 지평을 특징 짓는다. 보편성의 자기 모순에 대한 이와 같은 치열한 강조는, 보편성에 대한 끝없는 해체의 몸짓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보편성의 수립을 향한 행위에의 요청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일말의 실천에 대한 이야기는 3부에서 다루어진다.
슬라보예 지젝, 박정수 역,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인간사랑,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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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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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계시니,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영화들을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의 모든 영화가 퀴어적 코드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작정을 하고 전작을 다 보아 둘만한 감독 중 한명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브로크백 마운틴]은 우리의 사유를 촉발시키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만, 파스빈더의 영화들은 꽤 많은 생각의 지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임님이 소개한 영화는 아직 보지를 못했는데, 한번 봐야겠네요(사실 [타인의 삶]은 썩 잘 만든 시트콤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부가 정보
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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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빈더의 영화는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 딱 하나를 봤는데, 이 동네 DVD 매장에는 그거 하나만 있더군요, 완전 찬밥 취급^^; 독일까지 왔으니 이베이에서라도 한 번 구해 볼 생각입니다. 추천 감사해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