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7/11

<<여름폭풍Sommersturm>>, Marco Kreuzpaintner

                              주인공 Tobi 와 그의 친구 Achim. 누운 자세를 보면 누가 누군지 알 수 있다. 


 독일은 동성애에 대한 차별의식이 한국보다 현저하게 낮다. 유럽이 그렇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저녁시간의 공중파 드라마에 게이 커플이 침대에서 포옹하고 있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에는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선거 유세에서 자신의 동성 파트너를 소개한 후 오히려 지지율이 올라가기도 하는 곳이니 공적 영역에서는 차별이 많이 없어졌다고 할 수 있을테고, 사람들의 의식이나 문화 수준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를 걷다가 실제로 동성 커플을 마주친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는데, 아직은 사적 영역에서 당당히 드러내는 일이 쉽지는 않은가 보다. 한국에서는 윤리적 판단이 정치적 계산에 밀려, 어이없게도 법이 동성애 차별을 공공연히 인정하는 꼴같잖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제도적 차원에서 문제를 바로 잡는 것보다 일상에 뿌리 깊게 스며든 편견에 맞서는 게 더 어려운 일이며, 오히려 더 깊은 고민을 필요로 하는 법, 이런 독일의 상황을 아주 잘 반영하는 영화가 한 편 있어서 소개해 본다. 


 영화 <<여름폭풍Sommersturm>>의 미덕은 공적인 영역에서는 동성애가 어떤 식으로든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적 영역에서는 편견이 끈질기게 작동하는 양상을, 사춘기 소년의 경험을 통해 섬세하게 보여 준다는 데 있다. 유쾌하고 활달한 성격으로 남자 조정부 주장을 하던 남자 아이가, 여름 합숙 캠프에서 자기 단짝 친구의 여자친구를 질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기분이 대체 어떻겠는가? 한국에서라면 어쩐지 집단 린치 신이라도 들어가야 그림이 나올 것 같은 상황이지만, 독일 영화인지라 옆 캠프에는 베를린에서 온 퀴어 조정팀이 합숙을 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게이들이 다른 남자 캐릭터들 보다 훨씬 생동감있고 개성있게 그려지고 있는데,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전혀 주눅들지 않고 자신들의 섹슈얼리티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당당하다. 티셔츠에는 큼지막하게 Queer Team 이라고 박아 넣었고, 몸짱도 하나 있는 데다가, 자신들이 게이임을 알고 움찔거리는 '일반 남자' 들에게 윙크를 날려 주는 센스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소수자이자 약자의 것으로 순순히 받아 들이지 않을 때 오히려 주눅드는 것은 '일반 남자' 들인데, '나만 건드리지 않으면 네가 게이든 뭐든 상관 없어'라고 선심 쓰듯 말할 수 있는 비판적 거리가 완전히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여자 꼬시겠다는 생각에 희희낙락해 하며 온 놈들이 도리어 꼬심을 당하는 위치에 서게 됐으니 얼마나 무섭고 당혹스럽겠는가? 이 영화는 게이에 대한 편견과 오해로 가득찬 '일반 남자'들이 게이들에게 갖고 있는 편견과 공포를 역으로 이용해서 유쾌한 장면들을 만들어 낸다. 이를테면, 가장 호모 포비아가 심한 녀석이 심부름 하러 캠프에 찾아 올 때 일부러 그의 망상적인 공포에 맞춘 상황을 연출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패러디를 통해 편견을 전복적으로 조롱하는 한 편으로 게이들 사이의 다양한 차이를 보여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주인공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편견을 유감 없이 깨뜨리는 실제 게이들의 모습은 오히려 더 당혹스럽다. 편견과 다르기 때문에, 그 정체성을 부정하기가 더욱 어려워 지는 것이다.

 이렇게 동성애자들이 비극적 피해자가 아니라 주체로써 당당히 그려진 덕분에 주인공의 고민은, 동성애 정체성을 억압하는 사회적 폭력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편견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란 맥락에서 다뤄진다. 동성애 배제적인 세계 속에서 살던 한 소년이 어떻게 소수자 정체성을 수용하고,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선택하는가? 표면적으로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개인적인 의식의 차원에서는 편견이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다. 말은 그럴 듯하게 해도 막상 동성애자를 실제로 만나면 재미있는 구경거리나 패션 소품처럼 여기는 태도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이성애 정체성에 대한 의심 없는 믿음도 그러한 편견의 소산일 것이다. 이는 차별이 아니라 배제라고 표현될 수 있을텐데, 법적, 제도적 접근으로는 해결되기는 커녕 포착될 수 조차 것이지만, 분명히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수용하는데 있어 장애로 작용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조정 코치는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혐오 발화를 억제하는 일이 전부일 뿐, 학생들의 고민에 어떤 식으로도 개입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여 주는데, 이와 동일한 무능함이 제도적 차원의 사고를 바탕으로 한 동성애 담론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동성애자들은 개별적으로 자신의 삶을 더듬어 나갈 수밖에 없다.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에 따라 그 선택의 과정은 다르게 나타날 것이고, 그에 따라 하나의 틀로 환원할 수 없는 수많은 차별과 심리적 압박을 경험할 것이다. <<여름폭풍>>은 무능한 교사와는 대조적으로, 편견에 휘둘리던 아이들이 조금씩-결코, 유토피아적인 하나됨을 보여 주지 않는다는 점이 이 영화의 또 다른 미덕이다- 변화하는 모습을 살피며, 미세한 차별들이 얽혀 있는 사적인 경험 영역을 섬세하게 형상화 해 내고 있다. 이렇게 제도 담론이 그 구조적 한계로 인해 포착해 내지 못하는 사적인 경험 영역을 의미화해 내는데 성공했다는 것, 동성애를 주제로, 그리고 소재로 하는 많은 영화들이 있지만 그런 영화들에 대해 <<여름폭풍>>이 갖는 한 가지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 한국에는 <<썸머스톰>>이란 이름으로 개봉했다. 끄응, 나는 <<타인의 삶>>보다 훨씬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그보다도 흥행에 실패했나 보다. 이런 영화가 전국 중고등학교에 배포되서 단체 관람되면 얼마나 좋을까. 성교육도 하려면 좀 제대로 해야지..

+ 사실 퀴어 영화를 그리 많이 보진 않았는데, 앞으로 찾아 보면서 어떤 식으로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 좀 살펴 보고 싶다. 난 그 유명한 <<브로크백 마운틴>>도 안 봤는데, 여전히 그다지 보고 싶단 생각은 안 들고... 괜찮은 거 추천 좀..

+ 3개월이나 전에 본 영화를 갑자기 포스팅한 이유는... 오늘 Tobi 와 꼭 닮았다고 생각되는 애를 봤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고 집에 와서 확인을 해 보니 역시 아니긴 했다. 그래, 어쨌든 연예인인데 그렇게 쉽게 만날리 없겠지. 하여간 내가 참 사람 보는 눈이 없긴 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반인권론against human rights>, 슬라보예 지젝


 라캉 관련 논문들을 찾다가, New left review 에 기고되었고, <<창작과 비평>> 2006년 여름호에 번역 수록된 지젝의 <반인권론>을 찾아 읽었다. 민주주의와 이를 논할 때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인권은 내가 철학 텍스트의 언저리를 배회하는 것을 추동하고, 한 편으로는 (정치의 공간의 모색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내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일전에 포스팅했던, 맑스와 프랑스 혁명기의 시민권 개념의 관계에 대해 논한 발리바르의 글(요즘들어, 내가 이 글을 굉장히 오독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다, 당장은 글이 없으니 확인해 볼 수도 없고..)이나 민주주의와 인권을  '정치적인 것'으로 읽으려는 랑시에르의 글이 반가웠던 것은, 이 글들이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정치의 가능성을 더 이상 믿지 못하고, 그렇다고 다문화주의, 환원할 수 없는 개인의 내적 가치에 대한 존중과 같은 자유주의적인 관념에 자신을 내맡길 수도 없는 내게 다른 사유의 가능성을 제시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 논의의 공통점은 민주주의나 인권처럼, 그 동안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기능해 왔던 것을 좌파적 관점으로 재전유하려 한다는 것과 이를 통해 다시금 (거대) 정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젝 역시 <반인권론>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글의 말미에는 랑시에르의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이며, 인권의 참조를 통해 정치의 영역이 가능해짐을 주장하고 있다. 사실, 결말은 랑시에르를 거의 그대로 옮기다 시피 하고 있는데, 지젝이 '행위', '공제의 정치' 등과 같은 자신의 중심 개념과 랑시에르나 발리바르의 정치론을 어떻게 연결시켜 나갈지 무척 궁금해진다.  이하는 또 내맘대로 요점 정리. 기탄 없는 지적 부탁드린다.

 덧. 사실 난 지젝의 외모도, 말하는 스타일도, 심지어 글 쓰는 스타일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글을 찾아 읽게 되지만... 하여간 보라, 최대한 부드럽게 나온 사진을 골라 본 것인데도, 여전히 음험해 보이지 않는가-_-
  
-------------------------------------------------------------------------------------------------------

1. 자유 자본주의 사회의 인권에 대한 호소가 전제하는 세 가지 가설.

(1) 인권은, 역사적으로 결정된 우연적 특질들을 자연 내지 본질로 여기는 다양한 근본주의에 반대하는 기능을 한다. 
 
 헤겔식으로 말하면, 악(惡)은, 악을 지각하는 시선 속에 자리한다. 근본주의는, 서구인들의 재귀적 규정(또는 자기-지시적 규정reflexive determination)인 바, 다문화적 합리성으로 표상되는 서구 문화의 이면에 다름 아니다. "발칸'의 타자성이라는 위장된 형태로 유럽은 '자기 속의 이방인', 자신의 억압된 부분을 인지하는 것이다."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던 발칸 반도에 근본주의적 갈등이 싹튼 것은 정확히 서구식의 근대화 프로젝트가 추진되기 시작했던 때라는 역사적 경험 역시, 이를 보여 준다.

 그렇다면, 우연적 특질의 '근본주의적' 본질화는 어떤 점에서 자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특징인가? 공공 매체가 발달하고, 개인의 사생활이 이에 전시되는 사회가 오면서, 내밀한 개인적 삶이 사라지고 있다는 불평은 문제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진짜로 사라지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속성과 특이성의 덩어리, 즉 사적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상징적 행위자가 되게 하는 공공 생활, 공공 영역이다. 정치의 공간이 갈 수록 전문가의 사회행정으로 대치되는 '탈정치'의 시대에서, 정치적 문제는 '개인적'이고, '자연적'인 특이성의 조율에 대한 태도로 번역된다. 탈자연화의 시대라는 통념과는 달리,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것은 유례없는 재(再) 자연화이며, 이런 까닭에 전 세계적으로, 준(準)자연화된, 종족적, 종교적 갈등이 지구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대두되는 것이다.

(2) 선택의 자유와 (이념적 대의를 위해 인생을 희생하기보다) 즐거움의 추구에 인생을 바칠 권리가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다. 
 
1) 선택의 자유 

 자유주의가 말하는 선택이란 실은 사이비 선택이다. 형식적으로는 자유로운 선택이 주어지지만, 선택을 하는 정황 때문에 선택은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베일을 착용하는 무슬림 여성에 대한 자유주의적 태도를 예로 들어 보자. 자유주의는 남편이나 가족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라면 베일도 괜찮다고 한다. 하지만, 이 무슬림 여성은 베일을 벗고 쓸 지를 선택하기 전에, 우선 선택의 양식 그 자체를 선택해야 한다. 만약 이 여성이 남편이나 가족의 강요, 즉 사회적 관습에 복종하여 베일을 쓰기로 결정한다면 이는 참된 선택이 아니다. 참된 선택이란 개인적인 선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슬림 여성은 패션을 위해서 베일을 걸치던가, 베일을 걸치지 않던가를 선택할 수 있겠지만, 무슬림 공동체 소속의 표지로써 베일을 착용하는 선택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올바르지 않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관용적'인 다문화적 의미에서 '자유로운 선택의 주체'란 자신의 생활세계로부터 분리되는 지극히 폭력적인 과정의 결과로만 출현할 수 있다."

 선택의 자유에 대한 자유주의 논리는, "사람은 각기 특정한 성향을 지니며 그것을 실현하려 애쓰는 '심리학적' 주체라는(386)' 이데올로기에 의존해 있는데, 이런 지배 이데올로기는 복지 사회의 해체를 국가로부터 국민의 자유의 증대로 포장하는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2) 열락(悅樂)의 정치 
 
 "자유주의적이고 관용적인 서구와 근본주의적 이슬람의 대립은 대개, 자기 몸을 전시하거나 드러내고 남성을 자극하거나 교란할 자유를 포함하는 자유로운 성에 대한 여성의 권리와 다른 한편으로 이런 위협을 억누르거나 통제하려는 필사적인 남성적 시도 사이의 대립으로 압축된다......상반되는 두 입장은 엄격한 기율적 접근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며, 서로 방향이 다를 뿐이다. '근본주의자'는 성적 도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여성의 자기 표현을 통제하며,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식 페미니즘을 신봉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여러 형태의 침해(harassment)를 막는다는 목적에서 이들 못지않게 엄격한 행위규제를 가한다."

 타자에 대한 자유주의적 태도는, 타자가 자신을 침해하고, 성가시게 하지 않는 한, "즉, 진짜로 타자가 아닌 한, 타자는 환영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타자에 대한 관용은 그 대립물, 타자에 대한 철저한 불관용과 일치한다. 이런 태도는 갈 수록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인권으로 떠오르고 있다. 비슷한 역전이 이른바, 인도주의적 혹은 평화주의적 군사주의 논리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이를테면, "평화나 민주주의, 혹은 인도적 원조를 베풀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전쟁도 괜찮고.....고문과 영구 비상국가를 포함하도록 '재고'된다면 인권도 괜찮고......민주주의를 제대로 행할 만큼 성숙한 사람들에 국한한다면 민주주의도 괜찮다는 식이다."

 근본주의적 태도는 열락의 추구에 대한 '자연적인' 대립물로, 향락을 몰아 내려는 극단적인 몸짓이지만, 이런 노력은 잘못된 것이다. 향락을 몰아내려는 이런 몸짓 자체가 잉여적 향락을 낳기 때문이다. 정념을 배제한 채 의무만을 따르려는 행위는 의무 자체를 따르는 데서 오는 열락을 낳는다. 이는 즐거움의 추구라는 서구식 정언명령에도 적용된다. 즐거움의 추구는 즐거움의 추구에의 의무로 변화한다. 이 두 극단적 태도는 서로를 떠받치는 악순환의 구조를 형성하는데, 둘 모두 외설적이고 음란한 초자아와 연결되어 있다.


2. 권력의 과잉에 저항하는 방어 기제로서의 인권? 

 지젝은 맑스의 <<브뤼메르 18일>>과 <<프랑스의 계급투쟁>>을 독해를 통해, 속성상 언제나 과잉인 권력에 작동 양상에 대해서 논한다. 법의 차원에서 국가 권력은 그 신민의 이해를 대변하고, 여기에 책임을 지며 통제를 받지만, 그 초자아적 이면(裏面)의 차원에서, 이 공적 메씨지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 대립물, 즉 무조건적이고 폭력적인 권력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 이 외설적 과잉이 주권 개념의 필수 구성 성분이다. "신민들이 법에서 권력의 외설적이며 무조건적인 자기주장의 메아리를 들을 때에만 법은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치)권력과 (전-정치적이고 비-정치적인)폭력이 언제나 구조적으로 맞물려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인권 역시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것과 맞물려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따라서 폭력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응해야 하는데, 우선 "폭력을 어떤 정치 행위자도 도구화할 수 없는 것, 행위자 자체를 자기파괴적인 악순환에 말려들게 하는 위험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는 이론을 개진하는 한 편, "혁명 과정 자체를 어떻게 문명화의 힘으로 전환해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동시에 제기해야 한다." 그리고, 외견상 비정치적으로 보이는, 폭력이나 인권과 같은 관계들의 중립성을 깨고 그 안에서 윤리적, 정치적 투쟁의 과정을 식별해 내는 것이다. "인간사회에서 정치는 포괄적인 조직화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지젝을 20세기 거대 정치가 낳은 폭력을 성찰했던 몇몇 사상과들과 구분한다. 계몽은 그 자체로 '전체주의적' 잠재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하버마스적인 태도는 폭력과 권력의 구조에 대한 통찰을 결여하고 있으며, <<계몽의 변증법>>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오늘날의 아감벤으로 연결되는 "계몽의 전체주의적 성향은 내재적, 결정적이며...집단수용소와 종족학살은 전체 서구역사의 일종의 부정적, 목적론적 종점"이라는 견해는 정치적 실천의 가능성을 사유할 수 없게 한다. 지젝이 옹호하는 것은, 발리바르와 같은 이들이 표명하는 견해로, "근대성이 새로운 자유의 영역을 열지만, 동시에 새로운 위험의 영역도 열며, 그 귀결은 목적론적 보장 없이, 양자의 결합은 미결이며 미정"이라는 것이다. 


3. 인권과 정치의 관계 

 인권이라는 비 정치적 의제와 정치의 맞물림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인도적' 위기라고 칭해졌던 사라예보 사태이다. "군사적, 정치적 갈등을 인도주의적 용어로 바꿔 부르는 것의 배경에는 정치적 선택이 있다....이런 담화는 정치 담론을 밀어내고, 모든 논란을 미연에 무력화시킨다." 표면상 탈 정치화된 인권 정치란 특정 경제, 정치 목표에 봉사하는 군사 개입주의의 이데올로기라고 일반화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런 개입은, 이라크 민중에게 '자유'를 안겨줄 자유민주제 자본주의, 지구시장경제와 같은 조건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깔고 있는데, 이는 적극적, 집단적 사회 정치적 변혁 기획의 모색을 은영 중에 금지하는 것이며, 희생된 타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이들의 정치적 주체화의 가능성을 박탈하는 것이다.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인권과 정치의 맞물림은,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갖는 보편적인(전-정치적인) 인권과 시민 내지 특정 정치 공동체의 성원이 갖는 특정한 정치적 권리 사이의 대립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발리바르는 시민 신분이 인간을 만든다는 것을 설명하며, '인간'과 '시민' 사이의 역사적, 이론적 관계의 역전을 주장한다. 이런 생각은, 아감벤의 호모 싸케르(homo sacer) 개념으로 이어지는데, 어떤 사람이, 시민권, 종교, 민족 정체성 등 인간에게 비 본질적인 각종 정체성에서 벗어나 보편적 인권의 이상적인 담지자인, 진짜 인간,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으로 환원되는 순간, 역설적으로 인권을 빼앗긴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 시민에 우선하여 그 존재 근거가 된다고 여겨져 왔던 인권은 '호모 싸케르'의 권리, 아무 권리도 없고, 비인간으로 취급당하는 사람들의 권리이며 따라서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 된다. 이런 쓸모없는 권리는, 서구 사회에 의해 의약품이나 옷가지와 함께 해외로,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건네 진다. 하지만 "정치적 이름과 정치적 장소는 결코 단순히 빈껍데기가 되지는 않는 법"이라, 서구 사회는 자신들의 인권을 행사할 능력이 없는 이 희생자들을 대신해, 권리를 행사하겠다고 나선다. 즉, 서구 사회가 말하는 제3세계 희생자들의 인권이란, 사실 인권옹호를 명분으로 정치, 경제, 문화, 군사적으로 개입할 서구 열강 자신의 권리인 것이다.  

 이렇듯 인권이 탈정치화되어 사고되는 순간 인권을 다루는 담론도 바뀌어서, 선악의 전 정치적 대립이 새롭게 동원된다. 그리고 이런 자유주의적 인도주의와 푸코나 아감벤 식의 논의는 정치의 공간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맞닿아 있다. 이들의 '생체정치(biopolitics)' 개념은, "집단수용소가 존재론적 숙명처럼 되는 일종의 '존재론적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표준적인 반 본질주의', 이를테면 성(sex)이란 무수한 성애(sexuality) 실천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라는 생각의 정치적 번안에 다다른다. 인권은 거짓된 보편성, 서구 제국주의나 군새개입, 신식민주의의 구체적 정치를 은폐, 정당화하는 기제로 사고된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4. 보편성의 귀환 

 맑스주의적인 징후적 읽기는 인권이라는 보편적 형식 아래, 실은 백인 부르주아 남성이 시장에서 착취할 권리라는 특수한 내용을 식별해 낼 수 있다. 또한 권력과 관련하여 지적한 것처럼, 보편성은 애초의 유기적 평형을 깨뜨리는 초석적 폭력에 의해 성립하기 때문에 무결한 보편성의 외관이란 기만적인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어떻게 이러한 추상적 보편성이 어떻게 사회 속에서 효능을 가지며 기능하느냐를 파악해야 한다. 이데올로기적 수사를 벗어나는 생활 세계의 진정한 표현들에 대한 추구는 곧 권력자들에게 재전유될 따름이다. 페미니즘이나 노조운동의 정치적 요구를 추동한 것도, 부르주아적인 '형식적 자유'였던 것처럼,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피지배자들이 이 이데올로기들을 자신들의 불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는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지젝은 랑시에르를 경유하여, 인권의 보편성과 시민의 정치적 권리 사이의 간극을, "공동체 전체를 그 자체로부터 분리하는" 간극이라 설명한다. "인권이 결국 뜻하는 바는 보편성 자체에 대한 권리"이다. 이는 랑시에르가 말한 것처럼, 사회가 자신에게 할당한 자리가 자신이 근원적으로 불일치함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 사회에서 고유한 자리를 할당 받지 못한 열외자(supernumerary)의 권리로, 새로운 사회 정치적 보편성의 수립과 관련된 정치적 공간을 가리킨다. 이렇게, 보편적인 '메타정치'적 인권을 거론하지 않으면, 정치란 특수한 이해들의 협상인 '포스트정치'적인 놀이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11/16


 며칠 전 눈을 맞으며 걷고 있는데, 뜬금없이 <<러브레터>>가 생각났다. 추운 날씨에 볼이 얼얼한 느낌이, 왠지 눈을 맞고 있는 나카야마 미호의 발간 볼을 생각나게 했던 것 같다. 이 영화가 한국에 개봉되어 열풍을 불러 일으킨지 벌써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는 생각에 잠시 망연해 졌다가, 곧 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싶은 강렬한 열망에 사로 잡혀 정신없이 영화를 구하러 다녔다. 꼬꼬마 시절에는 그저 눈을 맞는 나카야마 미호의 모습과 눈 덮인 오타루의 풍광에 마음을 빼앗겼을 뿐이어서인지, 오랜만에 다시 보는 영화는 완전히 새로운 느낌이었다. 추억을 딛고 나아가려는 사람과 마들렌 과자처럼 갑자기 찾아 온 흘러가 버린 시간에 애잔함을 느끼는 사람 모두 무척 사랑스러웠다(그러니까, 같은 나카야마 미호지만). 영화의 마지막, 후배들이 가져다 준 옛 추억은, 사랑이나 슬픔, 증오 같은 것과는 커다란 감정과는 관계가 전혀 없는, 대단할 것 없는 과거의 조각일 뿐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추억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절실하게 느끼게 해 준다. 커다란 사건이 없더라도, 미화된 과거가 아니더라도, 흘러간 시간의 덩어리는 그 자체로 인간에게 큰 무게를 갖는 것이다. 아무런 과장도 없는 설득력 있는 감정과 그에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화면, 이와이 슌지의 감수성은 딱 이 영화까지만 좋았던 것 같다. 

 눈 덮인 오타루의 모습과 나카야마 미호가 너무 아름다워, 영화를 보는 동안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머리를 맴돌았다. 이와이 슌지는 사춘기, 추억 같은 테마에 집착하고, 이것이 그의 아름다운 화면의 원동력이 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이 멤버로 추억을 되집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를 섬세하게 다루는 <<설국>>을 영화로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분명 굉장히 멋진 영화가 됐을 것이다. 아, 글을 쓰고 있자니 이번에는 <<설국>>이 무척 읽고 싶어진다. 나는 이와이 슌지보다도 훨씬 과거에 집착하며 사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이고, 영화고, 음악이고, 만화고,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것들만을 늘 되돌아 보고, 또 되돌아 보고는 한다. 



 사실 오늘은 영화를 두 편 연이어 보았는데, 다른 하나는 켄 로치의 <<달콤한 열여섯>>이었다. 스코틀랜드 빈민가에서 살아가는 소년의 삶 대신 아름다운 설국의 연인들의 이야기를 택한 것은, 순전히 공감의 문제였다. 일상의 말랑말랑한 감정들이 아니라, 타인의 삶의 고통에 공감하기란 정말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와이 슌지의 영화는 한 편으로 족해도, 켄 로치의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마음도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려나.
 
 <<달콤한 열여섯>>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영어라고 할 수도 없을 영어를 구사하는 스코틀랜드 하층계급의 모습이다. 이들은 영국England로 일하러 가기 위해 심지어 영어 학원에서 영어를 배워야 한다고 하는데, 이는 United Kingdom 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계급과 지역을 경계로 삶의 양상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영국 사회의 은폐된 진실이다. 이런 주제의식의 연장선에 셰인 메도우즈Shane Meadows감독의 <<이것이 영국이다This is England>>를 놓을 수 있을 듯 싶다. 이 영화는, 대처의 집권과 포클랜드 전쟁을 배경으로, 영국의 하층계급 속으로 스며드는 파시즘을 날카롭게 보여 준다. 여기서는 반대로, 하층계급들의 좌절감이 England라는 민족적 환상에 지배 당하는 스킨헤드들을 만들어 낸다. 켄 로치와 셰인 메도우즈 감독은 스타일이 많이 다른데, 똑같이 어두운 내용이지만 <<이것이 영국이다>>가 더 생기발랄한 연출을 보여 준다. 음악이나 영상이 더 감각적이기도 하지만, 80년대 영국 하위문화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나 유머가 많아서 꽤 잔재미가 있다(영화에 등장하는 귀여운 패션 스킨헤드족, Woody 는 루팡3세를 쏙 빼닮았다ㅎㅎ). 사실, 두 영화 중 한 편을 고르라면 주저하지 않고 <<이것이 영국이다>>를 고를 것이다^^

 사진은 존경하옵는 켄 로치 감독과 <<달콤한 열여섯>>의 주인공 Liam 역을 연기한 Martin Compston 군이다. 사진은 Kino 1997년 9월호에 수록되었던 것인듯. 다시금 추억 한 토막이 떠오르는데, 역시나 꼬꼬마 시절에, '뭐야 이건, 재미없어'하면서 들춰봤던 것들 중 하나다ㅎㅎ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대선에 대한 단상들

1. 이회창이 대선에 출마한단다. 한 동안 정신을 빼 놓고 살다가, 정신 좀 차려야겠다 싶어 들여다 본 뉴스에서는 이회창이 좌파 정권에게 잃어버린 십년 운운하고 있었다. 진짜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이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이번 대선을 어떻게 맞이하면 좋을까를 생각해 봤다. 이명박이 승승장구하는 꼴에 베알이 꼴려서라도 투표는 하러 가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회창의 출마 소식을 듣고나니, 선거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허망하게 느껴졌다. 그의 출마는 대선을 챔피언 벨트를 앞에 두고 벌이는 타이틀 매치로 바꿔 버렸다. 나름의 위치에서 이명박을 상대로 분투하고 있는 모든 정당들을 우습게 만들며, 이회창은 경쟁이라는 선거의 원초적 속성을 스펙터클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경기의 결과는 당사자들과 그들 각각에게 베팅한 사람들에게나 중요할 것이다. 유권자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흥을 돋궈 주는 들러리일 뿐이다.  

2. 이명박 독주 체제를 가능하게 한 대립구도는 경제 대 이데올로기였다. 이명박은 경제를 살리고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사람인 반면, 그 외의 모든 집단들은 공허한 소리만 되뇌는 쓸모없는 사람들이라는 널리 퍼진 인식이 이명박의 독주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각종 추문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와중에도 그의 지지율이 떨어질 줄을 몰랐던 것은, 사람들이 가치 판단에 냉소를 보내며 경제만을 맹목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어딘가에서 본 표현처럼 "섭생하는 존재가 밥하고 싸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는 언제나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관점 아래서 작동한다. 알튀세르가 말한 것처럼 이데올로기의 외부가 있다는 저런 생각이야말로 가장 전형적인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에 맞서 진보 정당들(물론 범여권은 제외)은 성장 대 분배를 내세우며, 경제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려고 하였지만 조금도 먹혀 들지 않았다. 여기에는 소위 범여권의 영향이 지대한데, 그들은 경제 정책에 있어서는 이명박과 조금도 다르지 않으면서 경제 영역 바깥에서의 차이를 통해 보수 대 진보의 대립을 설정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경제와 이데올로기를 외적인 관계에 맺는 것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실제로 이명박 지지자들과 똑같은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활동은 이명박이나 이회창에 대한 지지기반을 강화하고, 민노당이나 사회당 같이, 경제 대 이데올로기라는 강고한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하나의 경제에 다른 경제를 대립시키려는 노력을 무력하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김규향은 강준만 같은 사람이 조갑제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비판한 것이다. 나도 내심 이번에 범여권 일당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잘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사라지는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한국 사회에 더 긍정적으로 작용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3.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참혹하다. 20년 동안 민주화 운동을 우려 먹으며, 518 기념 묘역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고 진보라고 자처하는 이들도 짜증났는데, 이제는 한술 더떠 이명박과 이회창이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대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제 대 이데올로기라는 굳건한 믿음 속에서 꿈쩍도 않던 이명박의 지지율이 이회창의 등장 이후에야 요동을 치고 있다. 이회창은 도덕성과 대북 정책을 내세우며 이명박과 선을 가른다. 이것이 대선의 명분을 얻기 위한 수사에 지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이 유권자를 가르는 지표로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경제 대 이데올로기라는 구도 속에서 이명박에 대한 지지가 경제를 불가침의 대상으로 설정한 후 일종의 판단 없는 판단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면, 이회창의 등장으로 지지자들은 자신의 세계관과 자의식에 의거해 누가 진짜 보수인지를 판단할 것을 요구받는다. 둘의 지지율이 6할은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서글프게도 이 분열은 공히 한국 사회 최대의 이데올로기 대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 어디가 다른지, 실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분명하게 차이와 분열은 작동한다. 그래서 끔찍한 미래를 상상하게 됐다. 이회창과 이명박의 싸움이, 엘리트를 위한 엘리트 사이의 각축일 뿐인 그들 정치의 진실을 은폐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구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 말도 안 되는 구도에 따라 사고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지난 십여년 동안 작동했던 보수 대 진보라는 구도는 비록 허울 뿐이긴 했지만, 최소한의 규제적 성격은 있었다. 하지만 이회창과 이명박이 만들어 낼 그 무엇에도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4. 뉴스에서 이회창의 사진을 보면서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5년 전의 모습과 너무 똑같아 보여 마치 과거에서 미래로 시간 여행을 온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다. 사진을 볼 때 졸려서 비몽사몽이었던 탓이었겠지만, 마치 다른 시공간에 내던져진 듯한 기분이었다. 이 기묘한 느낌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회창이 기묘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한 채 무덤에서 걸어 나온 유령이기 때문이길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그가 이미 죽었음을 알려 주기만 하면 되도록. 물론 이회창에 맞서 이명박을 응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가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낳지 않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했다. 한 번은 비극으로, 그리고 한 번은 희극으로. 이회창은 보수 대 진보의 역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등장한 희극 배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것은 그의 손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다른 이들의 손에서 시작되기를.
 
5. 찾아 보니 해외 거주자는 부재자 투표가 안 되는 것 같다. 순식간에 쑈가 되어 버린 대선을 바라 보며, 무엇을 해야 하나 착잡해 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 생각하는데, 나는 아무 고민도 할 필요가 없으니 다행이지 싶다. 대선을 맞이하여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러니까 스포츠 중계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맛있는 맥주와 주전부리를 사다 놓는 것 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2)

2부. 변증법과 그 불만들

 


 1부에서 지젝은, 보편성이란 자기 자신과의 모순에 다름 아니란 사실을 밝히고 이러한 보편성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세계(상징적 측면과 상상적 측면을 갖는)로부터 도출되는 과정을 해명하고 있다. 2부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헤겔과 비트겐슈타인을 경유한 보충적 설명을 통해 반복된다. 하지만, 1부가 여럿으로부터 하나를 도출시키는 이야기라면, 2부에서는 강조점이 하나에서 여럿으로 옮겨 간다. 1부를 정리하며 적었듯이 지젝의 라캉과 헤겔 독해는 보편성을 해체하는 것, 그리고 세계의 모순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으로서의 보편과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밝히는 것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자에서 세계로의 이런 무게중심의 이동은 보편에서 특수로의, 즉 타자로의 이동으로 볼 수 있을 텐데,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지젝의 타자 개념은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타자의 개념(보편에 외재하는 특수, 그를 위한 발화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주체, 성소주자들과 슬럼의 주민들 등)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4장의 제목은 <타자에 대해서>인데, 여기서 그는 라캉의 상징계 만을 다룬다. 상징계의 외부가 타자가 아니라 상징계 그 자체가 (대)타자인 것이다. 이렇게 지젝은 일반적인 타자 개념을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보편에 대립하는 것은 타자라는 통속적인 생각과는 달리 실제로 보편에 대립하는 것은 보편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1부 기표의 논리에서 등장한, 기표들의 장을 가능하게 하는 순수차이를 표지하는 기표, 즉 주인기표에 대립하는 것은 다른 여러 기표들이 아니라 주인기표 그 자신이다. 순수차이라는 공백無이 어떤 형식으로 표지된다는 이 모순이 보편(일자)에 대립하는 것이며, 타자의 타자는 다른 타자일 뿐이다. 이것이 라캉주의자들의 근본적인 논리적 에토스이며, 들뢰즈주의자들과 그토록 불화를 빚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라캉의, 지젝의 타자란 무엇인가?

 지젝은 칸트적 사유에서 헤겔적 사유로의 이행에서 이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오성이 구성해 낸 것 외부에, 우리의 오성이 결코 파악할 수 없는 초월적 실체인 ‘물자체’를 상정한다. 그리고 여기서 헤겔로의 이행은 아주 단순한 절차, 즉 이 ‘물자체’에 대한 믿음을 빼 버리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자체의 초월적 외관, 주체가 자신과 물자체를 가르는 넘을 수 없는 심연이라고 느꼈던 것은 사실은 주체의 시각적 환영이었을 따름이다. 이러한 환영은 그가 바라보는 화면 속에 주체의 응시(행위)가 반영되어 있음을 망각한 데서 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왕이 왕인 것은 신하들이 그들을 왕으로 대해 주고 있기 때문이지, 왕 자신의 카리스마 때문이 아니다. 신비하고 카리스마적인 왕의 모습은 이러한 관계를 망각할 때 발생한다. 역사의 발전을 이끄는 필연적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다. 프롤레타리아가 이렇게 보이는 것은 오직 주체가 프롤레타리아의 편에 서서 투쟁하고 있을 때뿐이다. 이러한 예들이 보여 주는 것은 객관적인 외적 대상은 필연적으로 어떤 환영 속에서만 등장한다는 것이다. 주체에게 그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사회 속에서 그의 위치를 결정짓는 것처럼 보이는 상징계, 대타자 역시 이러한 환영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러한 환영은 근본적으로 1부에서 전개된 보편자의 근본적인 모순에 대한 회피에 복무한다. 대타자의 진실은 이 보편자의 근본적인 모순에 다름 아니며, 따라서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실의 경험을 회피하기 위해 초월적 실체(의미의 보증자인 대타자)의 외관이 필요한 것이다. 라캉 정신분석학에는 이를 잘 설명해 주는 논리가 있다. 상징계에 의해 거세된 인간은 거세당하기 전 자신에게 완벽한 만족을 주었다고 상정된 대상을 찾아 헤매지만, 사실은 거세 자체가 이러한 대상을 만들어 낸 것이며, 이러한 상실의 경험은 상실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 자체를 감추기 위한 환영일 뿐이다. 내적 불가능성을 외적 한계로 전치하는 것을 통해 보편자의 내적 모순, 욕망의 불가능성을 은폐한다. 주인기표의 역할이 바로 이것이다. 주인기표가 기표의 불가능성을 떠맡음으로써, 다른 모든 기표들이 안정적으로 의미를 표현할 수 있게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환영은 소급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공백, 불가능성은 환영이 성립하는 순간, 소급적으로 사라진다(즉, 일관된 의미로 누벼진다). 이를테면, 러시아 혁명에 참여하는 주체들에게 혁명의 과정은 그때그때 주체들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우연성의 소용돌이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혁명이 성공하고 난 뒤에는 모든 사건들이 필연적이었던 것처럼, 일관된 의미 속에서 정립된다.

 

 이와 같은 논리는 타자 개념과 관련하여 중요한 전도를 포함하고 있다. 데리다적인 타자는 보편성의 (불)가능성의 조건, 그 구성적 외부를 의미한다. 하지만 지젝에게는 보편성에 외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특수자는 보편성 내부의 자기모순을 감추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자는 “실재적”이다. [...] 특수자가 자기 동일성을 획득하는 것을 가로 막는 한계로서 말이다.”(287)

 이러한 전도는 지젝의 정치적 지평을 특징 짓는다. 보편성의 자기 모순에 대한 이와 같은 치열한 강조는, 보편성에 대한 끝없는 해체의 몸짓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보편성의 수립을 향한 행위에의 요청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일말의 실천에 대한 이야기는 3부에서 다루어진다.


슬라보예 지젝, 박정수 역,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인간사랑, 2005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