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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권론against human rights>, 슬라보예 지젝


 라캉 관련 논문들을 찾다가, New left review 에 기고되었고, <<창작과 비평>> 2006년 여름호에 번역 수록된 지젝의 <반인권론>을 찾아 읽었다. 민주주의와 이를 논할 때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인권은 내가 철학 텍스트의 언저리를 배회하는 것을 추동하고, 한 편으로는 (정치의 공간의 모색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내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일전에 포스팅했던, 맑스와 프랑스 혁명기의 시민권 개념의 관계에 대해 논한 발리바르의 글(요즘들어, 내가 이 글을 굉장히 오독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다, 당장은 글이 없으니 확인해 볼 수도 없고..)이나 민주주의와 인권을  '정치적인 것'으로 읽으려는 랑시에르의 글이 반가웠던 것은, 이 글들이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정치의 가능성을 더 이상 믿지 못하고, 그렇다고 다문화주의, 환원할 수 없는 개인의 내적 가치에 대한 존중과 같은 자유주의적인 관념에 자신을 내맡길 수도 없는 내게 다른 사유의 가능성을 제시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 논의의 공통점은 민주주의나 인권처럼, 그 동안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기능해 왔던 것을 좌파적 관점으로 재전유하려 한다는 것과 이를 통해 다시금 (거대) 정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젝 역시 <반인권론>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글의 말미에는 랑시에르의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이며, 인권의 참조를 통해 정치의 영역이 가능해짐을 주장하고 있다. 사실, 결말은 랑시에르를 거의 그대로 옮기다 시피 하고 있는데, 지젝이 '행위', '공제의 정치' 등과 같은 자신의 중심 개념과 랑시에르나 발리바르의 정치론을 어떻게 연결시켜 나갈지 무척 궁금해진다.  이하는 또 내맘대로 요점 정리. 기탄 없는 지적 부탁드린다.

 덧. 사실 난 지젝의 외모도, 말하는 스타일도, 심지어 글 쓰는 스타일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글을 찾아 읽게 되지만... 하여간 보라, 최대한 부드럽게 나온 사진을 골라 본 것인데도, 여전히 음험해 보이지 않는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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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유 자본주의 사회의 인권에 대한 호소가 전제하는 세 가지 가설.

(1) 인권은, 역사적으로 결정된 우연적 특질들을 자연 내지 본질로 여기는 다양한 근본주의에 반대하는 기능을 한다. 
 
 헤겔식으로 말하면, 악(惡)은, 악을 지각하는 시선 속에 자리한다. 근본주의는, 서구인들의 재귀적 규정(또는 자기-지시적 규정reflexive determination)인 바, 다문화적 합리성으로 표상되는 서구 문화의 이면에 다름 아니다. "발칸'의 타자성이라는 위장된 형태로 유럽은 '자기 속의 이방인', 자신의 억압된 부분을 인지하는 것이다."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던 발칸 반도에 근본주의적 갈등이 싹튼 것은 정확히 서구식의 근대화 프로젝트가 추진되기 시작했던 때라는 역사적 경험 역시, 이를 보여 준다.

 그렇다면, 우연적 특질의 '근본주의적' 본질화는 어떤 점에서 자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특징인가? 공공 매체가 발달하고, 개인의 사생활이 이에 전시되는 사회가 오면서, 내밀한 개인적 삶이 사라지고 있다는 불평은 문제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진짜로 사라지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속성과 특이성의 덩어리, 즉 사적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상징적 행위자가 되게 하는 공공 생활, 공공 영역이다. 정치의 공간이 갈 수록 전문가의 사회행정으로 대치되는 '탈정치'의 시대에서, 정치적 문제는 '개인적'이고, '자연적'인 특이성의 조율에 대한 태도로 번역된다. 탈자연화의 시대라는 통념과는 달리,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것은 유례없는 재(再) 자연화이며, 이런 까닭에 전 세계적으로, 준(準)자연화된, 종족적, 종교적 갈등이 지구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대두되는 것이다.

(2) 선택의 자유와 (이념적 대의를 위해 인생을 희생하기보다) 즐거움의 추구에 인생을 바칠 권리가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다. 
 
1) 선택의 자유 

 자유주의가 말하는 선택이란 실은 사이비 선택이다. 형식적으로는 자유로운 선택이 주어지지만, 선택을 하는 정황 때문에 선택은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베일을 착용하는 무슬림 여성에 대한 자유주의적 태도를 예로 들어 보자. 자유주의는 남편이나 가족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라면 베일도 괜찮다고 한다. 하지만, 이 무슬림 여성은 베일을 벗고 쓸 지를 선택하기 전에, 우선 선택의 양식 그 자체를 선택해야 한다. 만약 이 여성이 남편이나 가족의 강요, 즉 사회적 관습에 복종하여 베일을 쓰기로 결정한다면 이는 참된 선택이 아니다. 참된 선택이란 개인적인 선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슬림 여성은 패션을 위해서 베일을 걸치던가, 베일을 걸치지 않던가를 선택할 수 있겠지만, 무슬림 공동체 소속의 표지로써 베일을 착용하는 선택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올바르지 않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관용적'인 다문화적 의미에서 '자유로운 선택의 주체'란 자신의 생활세계로부터 분리되는 지극히 폭력적인 과정의 결과로만 출현할 수 있다."

 선택의 자유에 대한 자유주의 논리는, "사람은 각기 특정한 성향을 지니며 그것을 실현하려 애쓰는 '심리학적' 주체라는(386)' 이데올로기에 의존해 있는데, 이런 지배 이데올로기는 복지 사회의 해체를 국가로부터 국민의 자유의 증대로 포장하는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2) 열락(悅樂)의 정치 
 
 "자유주의적이고 관용적인 서구와 근본주의적 이슬람의 대립은 대개, 자기 몸을 전시하거나 드러내고 남성을 자극하거나 교란할 자유를 포함하는 자유로운 성에 대한 여성의 권리와 다른 한편으로 이런 위협을 억누르거나 통제하려는 필사적인 남성적 시도 사이의 대립으로 압축된다......상반되는 두 입장은 엄격한 기율적 접근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며, 서로 방향이 다를 뿐이다. '근본주의자'는 성적 도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여성의 자기 표현을 통제하며,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식 페미니즘을 신봉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여러 형태의 침해(harassment)를 막는다는 목적에서 이들 못지않게 엄격한 행위규제를 가한다."

 타자에 대한 자유주의적 태도는, 타자가 자신을 침해하고, 성가시게 하지 않는 한, "즉, 진짜로 타자가 아닌 한, 타자는 환영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타자에 대한 관용은 그 대립물, 타자에 대한 철저한 불관용과 일치한다. 이런 태도는 갈 수록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인권으로 떠오르고 있다. 비슷한 역전이 이른바, 인도주의적 혹은 평화주의적 군사주의 논리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이를테면, "평화나 민주주의, 혹은 인도적 원조를 베풀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전쟁도 괜찮고.....고문과 영구 비상국가를 포함하도록 '재고'된다면 인권도 괜찮고......민주주의를 제대로 행할 만큼 성숙한 사람들에 국한한다면 민주주의도 괜찮다는 식이다."

 근본주의적 태도는 열락의 추구에 대한 '자연적인' 대립물로, 향락을 몰아 내려는 극단적인 몸짓이지만, 이런 노력은 잘못된 것이다. 향락을 몰아내려는 이런 몸짓 자체가 잉여적 향락을 낳기 때문이다. 정념을 배제한 채 의무만을 따르려는 행위는 의무 자체를 따르는 데서 오는 열락을 낳는다. 이는 즐거움의 추구라는 서구식 정언명령에도 적용된다. 즐거움의 추구는 즐거움의 추구에의 의무로 변화한다. 이 두 극단적 태도는 서로를 떠받치는 악순환의 구조를 형성하는데, 둘 모두 외설적이고 음란한 초자아와 연결되어 있다.


2. 권력의 과잉에 저항하는 방어 기제로서의 인권? 

 지젝은 맑스의 <<브뤼메르 18일>>과 <<프랑스의 계급투쟁>>을 독해를 통해, 속성상 언제나 과잉인 권력에 작동 양상에 대해서 논한다. 법의 차원에서 국가 권력은 그 신민의 이해를 대변하고, 여기에 책임을 지며 통제를 받지만, 그 초자아적 이면(裏面)의 차원에서, 이 공적 메씨지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 대립물, 즉 무조건적이고 폭력적인 권력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 이 외설적 과잉이 주권 개념의 필수 구성 성분이다. "신민들이 법에서 권력의 외설적이며 무조건적인 자기주장의 메아리를 들을 때에만 법은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치)권력과 (전-정치적이고 비-정치적인)폭력이 언제나 구조적으로 맞물려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인권 역시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것과 맞물려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따라서 폭력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응해야 하는데, 우선 "폭력을 어떤 정치 행위자도 도구화할 수 없는 것, 행위자 자체를 자기파괴적인 악순환에 말려들게 하는 위험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는 이론을 개진하는 한 편, "혁명 과정 자체를 어떻게 문명화의 힘으로 전환해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동시에 제기해야 한다." 그리고, 외견상 비정치적으로 보이는, 폭력이나 인권과 같은 관계들의 중립성을 깨고 그 안에서 윤리적, 정치적 투쟁의 과정을 식별해 내는 것이다. "인간사회에서 정치는 포괄적인 조직화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지젝을 20세기 거대 정치가 낳은 폭력을 성찰했던 몇몇 사상과들과 구분한다. 계몽은 그 자체로 '전체주의적' 잠재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하버마스적인 태도는 폭력과 권력의 구조에 대한 통찰을 결여하고 있으며, <<계몽의 변증법>>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오늘날의 아감벤으로 연결되는 "계몽의 전체주의적 성향은 내재적, 결정적이며...집단수용소와 종족학살은 전체 서구역사의 일종의 부정적, 목적론적 종점"이라는 견해는 정치적 실천의 가능성을 사유할 수 없게 한다. 지젝이 옹호하는 것은, 발리바르와 같은 이들이 표명하는 견해로, "근대성이 새로운 자유의 영역을 열지만, 동시에 새로운 위험의 영역도 열며, 그 귀결은 목적론적 보장 없이, 양자의 결합은 미결이며 미정"이라는 것이다. 


3. 인권과 정치의 관계 

 인권이라는 비 정치적 의제와 정치의 맞물림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인도적' 위기라고 칭해졌던 사라예보 사태이다. "군사적, 정치적 갈등을 인도주의적 용어로 바꿔 부르는 것의 배경에는 정치적 선택이 있다....이런 담화는 정치 담론을 밀어내고, 모든 논란을 미연에 무력화시킨다." 표면상 탈 정치화된 인권 정치란 특정 경제, 정치 목표에 봉사하는 군사 개입주의의 이데올로기라고 일반화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런 개입은, 이라크 민중에게 '자유'를 안겨줄 자유민주제 자본주의, 지구시장경제와 같은 조건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깔고 있는데, 이는 적극적, 집단적 사회 정치적 변혁 기획의 모색을 은영 중에 금지하는 것이며, 희생된 타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이들의 정치적 주체화의 가능성을 박탈하는 것이다.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인권과 정치의 맞물림은,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갖는 보편적인(전-정치적인) 인권과 시민 내지 특정 정치 공동체의 성원이 갖는 특정한 정치적 권리 사이의 대립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발리바르는 시민 신분이 인간을 만든다는 것을 설명하며, '인간'과 '시민' 사이의 역사적, 이론적 관계의 역전을 주장한다. 이런 생각은, 아감벤의 호모 싸케르(homo sacer) 개념으로 이어지는데, 어떤 사람이, 시민권, 종교, 민족 정체성 등 인간에게 비 본질적인 각종 정체성에서 벗어나 보편적 인권의 이상적인 담지자인, 진짜 인간,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으로 환원되는 순간, 역설적으로 인권을 빼앗긴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 시민에 우선하여 그 존재 근거가 된다고 여겨져 왔던 인권은 '호모 싸케르'의 권리, 아무 권리도 없고, 비인간으로 취급당하는 사람들의 권리이며 따라서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 된다. 이런 쓸모없는 권리는, 서구 사회에 의해 의약품이나 옷가지와 함께 해외로,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건네 진다. 하지만 "정치적 이름과 정치적 장소는 결코 단순히 빈껍데기가 되지는 않는 법"이라, 서구 사회는 자신들의 인권을 행사할 능력이 없는 이 희생자들을 대신해, 권리를 행사하겠다고 나선다. 즉, 서구 사회가 말하는 제3세계 희생자들의 인권이란, 사실 인권옹호를 명분으로 정치, 경제, 문화, 군사적으로 개입할 서구 열강 자신의 권리인 것이다.  

 이렇듯 인권이 탈정치화되어 사고되는 순간 인권을 다루는 담론도 바뀌어서, 선악의 전 정치적 대립이 새롭게 동원된다. 그리고 이런 자유주의적 인도주의와 푸코나 아감벤 식의 논의는 정치의 공간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맞닿아 있다. 이들의 '생체정치(biopolitics)' 개념은, "집단수용소가 존재론적 숙명처럼 되는 일종의 '존재론적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표준적인 반 본질주의', 이를테면 성(sex)이란 무수한 성애(sexuality) 실천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라는 생각의 정치적 번안에 다다른다. 인권은 거짓된 보편성, 서구 제국주의나 군새개입, 신식민주의의 구체적 정치를 은폐, 정당화하는 기제로 사고된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4. 보편성의 귀환 

 맑스주의적인 징후적 읽기는 인권이라는 보편적 형식 아래, 실은 백인 부르주아 남성이 시장에서 착취할 권리라는 특수한 내용을 식별해 낼 수 있다. 또한 권력과 관련하여 지적한 것처럼, 보편성은 애초의 유기적 평형을 깨뜨리는 초석적 폭력에 의해 성립하기 때문에 무결한 보편성의 외관이란 기만적인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어떻게 이러한 추상적 보편성이 어떻게 사회 속에서 효능을 가지며 기능하느냐를 파악해야 한다. 이데올로기적 수사를 벗어나는 생활 세계의 진정한 표현들에 대한 추구는 곧 권력자들에게 재전유될 따름이다. 페미니즘이나 노조운동의 정치적 요구를 추동한 것도, 부르주아적인 '형식적 자유'였던 것처럼,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피지배자들이 이 이데올로기들을 자신들의 불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는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지젝은 랑시에르를 경유하여, 인권의 보편성과 시민의 정치적 권리 사이의 간극을, "공동체 전체를 그 자체로부터 분리하는" 간극이라 설명한다. "인권이 결국 뜻하는 바는 보편성 자체에 대한 권리"이다. 이는 랑시에르가 말한 것처럼, 사회가 자신에게 할당한 자리가 자신이 근원적으로 불일치함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 사회에서 고유한 자리를 할당 받지 못한 열외자(supernumerary)의 권리로, 새로운 사회 정치적 보편성의 수립과 관련된 정치적 공간을 가리킨다. 이렇게, 보편적인 '메타정치'적 인권을 거론하지 않으면, 정치란 특수한 이해들의 협상인 '포스트정치'적인 놀이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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